10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한 시진 후, 멸마단주의 외부 거처로 지정된 장원.
무윤은 도착하자마자 단주 각운을 찾아가 알렸다. 이후 각운이 은밀히 셋을 불러왔다.
삼대의 대주 정원, 부대주 팽중호, 그리고 당가의 의원이자 무인인 당조광.
무윤은 다시 현장을 살피러 갔고 여기엔 다섯만 있다.
얼마 후, 응급처치를 끝낸 당조광은 큰 숨을 몰아쉬었다.
“휴! 급한 건 끝났소이다.”
“어떤 거 같소?”
“상처가 많고 깊은 데다 피를 많이 흘리긴 했는데, 근맥과 대혈은 큰 이상 없소이다. 잘 정양하면 후유증은 없겠습니다.”
“허! 그거 다행이구려. 한데 치료는 얼마나 걸리겠소?”
“한 달 정도 보시면 됩니다.”
“음! 한 달이라…….”
그제야 당조광의 의아한 시선이 각운을 향했다. 늦게 온 셋은 아직 정황을 듣지 못했다.
“알려 주실 수 없는 일입니까? 크흠! 조카가 있는지라.”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안에 멸마단주 계시오? 하후가 하후천욱이오. 날 찾으셨다 들었소.”
알려야 할 사람이 다 왔다.
단주 각운이 간략히 상황을 알리고 이후 당서하의 세세한 설명과 질문이 오고 갔다. 무윤을 감추기 위해 현장에는 다 끝난 후에 와서 도운 것으로, 염이규는 독에 중독돼 제 실력을 발휘 못 한 것으로 둘러댔다.
당조광과 하후천욱에겐 아직 감춰야 할 일. 하후천기에게도 입단속을 시켜 놨다. 물론 그 스스로 입도 뻥긋 안 하겠지만.
파악이 끝날 무렵 당조광의 시선은 조카 당서하를 향했다. 노파심에 다시 물어야 할 게 있다.
“저들끼리 싸운 걸로 하려면 현장 처리를 잘해야 하는데 문제없겠느냐? 나라도 다시 가 보는 게…….”
“걱정 마세요.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저 이런 일 한두 번 아닌 거 아시잖아요.”
당조광은 그 말에 다른 걱정이 떠올랐다.
“근데 살피러 간 친구는 괜찮겠느냐? 주변에 있다가 도리어 잡히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하후천욱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제가 그 친구는 좀 알지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크흠! 침주 흑도방주라 하지 않았소. 한데 어찌 장로께서 그리 말씀하시는지.”
그때 단주 각운이 나섰다. 아니면 말이 길어진다.
“제가 잠시 같이 있어 봤는데 믿을 만합니다.”
“……?”
그때 무윤이 막 안으로 들어왔다.
터억!
나중에 온 하후천욱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길옆에 따로 둔 시체를 개방도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후엔 봉천문하고 정, 사 여러 곳이 들이닥쳐서 갑론을박했는데 둘이 양패구상 한 걸로 의견이 모였습니다.”
“허! 그거 다행이구먼.”
단주 각운의 형형한 시선이 좌중을 둘렀다.
“다들 아실 게요. 이 일엔 보안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해서 여기 삼대 대주와 부대주에게 특수 임무를 준 것으로 하고 한 달 동안 여기 머물게 할까 하오.”
“그게 좋겠소이다. 그럼 찾아올 이들이 없을 테니.”
그때 하후천욱이 나섰다.
“우리 소가주는 제가 데려가는 게 어떨지. 같이 안 내려가면 이상한 말이 나올까 싶소이다. 마침 가문 의원도 있고 마차로 가면 문제없을 거 같은데.”
그럴 이유가 있다. 악양도 서문가의 영향력이 지대한 곳. 이곳이 언제 알려질지 모른다.
‘혼자 있는 걸 알면 분명 죽이려 들 게야.’
가주의 별도 지시를 받고 따라온 길이다. 둘째 가모 서문채령이 서문가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떠나는 게 상책이다.
하후진은 저들이 노릴 이유가 없으니 둬도 된다.
순간 하후천기는 갈등이 일었다.
‘남을까? 갈까?’
이들과 더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던진 고민.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여기까지가 좋다.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할 텐데……. 벽만 더 쌓인다.’
스스로의 한계와 자신을 알기에 내린 결정. 특히 무윤이 절대자인 걸 안 지금, 저들처럼 스스럼없이 대할 자신도 없다.
아쉬움은 있지만 떠날 때도 알아야 한다.
작별 인사가 끝나자, 하후가 두 사람이 은밀히 장원을 빠져나갔다.
* * *
잠시 후, 장원 내실.
연사구가 너스레 떨 일이 생겼다. 너무 가까이 딱 둘러붙어 있는 두 사람 하는 짓이 눈꼴시다.
“부대주님, 그러다 오해받아요.”
팽중호는 눈을 껌벅였다.
“오해라니?”
“당 조장 애인 있어요. 아무리 부하라도 너무 다정한 거 아녜요?”
진서연이 싱긋 미소 지었다. 팽중호가 직접 말하긴 그럴 테니까.
“그 애인이 부대주님이에요.”
“엥? 정말요?”
“예.”
연사구의 고개가 넙죽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아우! 그럼 진작 얘기할 것이지.”
당서하는 입을 삐죽였다.
“네가 알면? 아무 데나 떠들어 댈 거 아냐. 그래서 말 못 했다, 왜?”
“이거 왜이래요! 내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데. 내가 알고 있는 거 세상에 확 터트리면! 난리가 나요. 난리가.”
“거봐! 그렇게 입이 근질근질하니까 이번에 그런 거지.”
“이거 왜이래요. 나도 고민 엄청 했어요. 이 한 몸 바쳐서 우리 하오문을 강호에 우뚝 세울 결단, 그걸 내린 거라고요.”
팽중호는 흉중에 품었던 의문을 꺼내 들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한데 그 도인 얘기 때문에 지금 난리가 아닐세.”
그러라고 벌인 일이다.
“안 시끄러운 게 더 이상하죠.”
“그래. 자네에게 전한 청월은요검이 진짜인 이상, 그 도인께서 뭘 더 가지고 있을지 각자 상상하겠지. 근데 그분을 만난 건 자네밖에 없어. 몇 년 전 딱 한 번 뵀다고 했지만 안 믿는 자들도 많을 거고.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겠지?”
“오늘 같은 일이 몇 번은 더 생기겠죠. 아니 수십 번이려나.”
팽중호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실수로 그런 게 아니로군.”
“저 가벼운 놈 아닙니다.”
당서하는 그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너 아까 소수마공이라고 읊어 대던 건 뭐야?”
연사구의 곁눈질이 단주 각운과 따로 있는 무윤을 향했다. 못 들을 놈이 아니다.
“예? 그거야 엉터리죠. 제가 소수마공을 어떻게 알아요.”
“그건 당연하고. 근데 구결은 진짜 같던데 다른 무공 아냐? 뭐라 했더라. 아! 천이개합 오색령인……. 그다음에 뭐였지?”
“…….”
연사구는 제대로 등골이 시렸다.
‘아우! 그때 그게 왜 떠올라 가지고!’
잠시 연사구를 노려봤던 무윤은 다시 각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각운의 너털웃음이 흘렀다.
“저 친구 참 재밌어. 그 상황에 소수마공이라니. 허허!”
“가끔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게 저 친구 멋 아닌가. 우리 같은 사람은 매사 너무 진지해서 탈인데.”
“그나저나 어려운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그때 각운의 눈이 살짝 빛났다.
“아닐세.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네.”
“어떤?”
“저 친구가 터트린 거, 자네도 같은 생각이라 그런 거겠지?”
감출 상대가 아니다.
“은월청요검을 밝히는 거 빼고는 그렇습니다.”
“그건 곧 자넨 조작이라 확신한다는 얘기겠지. 이게 퍼지면 소문은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게 되니까, 저들 뜻대로 갈 수 없게 되니 말일세.”
“맞습니다.”
“궁금하군. 어찌 그리 확신하는지.”
이렇게 된 이상 더 털어놓을 때다. 소림을 더 빨리 끌어들일 기회이기도 하고. 연사구와 개방 섭고량에게 했던 말 그대로 하면 된다.
“말씀 못 드린 게 있습니다.”
“뭔가?”
“제 조사님이 여휘와 무륜과 친구셨습니다. 해서 그 두 사람의 기록 일부도 제게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어떤?”
“무륜의 회고록 전체도 있습니다.”
무윤은 상황 설명과 회고록 내용, 그리고 은월청요검을 자신이 전한 것까지 알렸다. 도인은 자신이 만든 가상 인물인 것도.
또 실제 절대무공 몇 개를 가지고 있는 것까지. 물론 이름은 감췄다. 각운을 끌어들이려면 이 정도는 풀어야 한다. 또 비밀이야 지켜 줄 사람이기도 하고.
충격에 휩싸인 단주 각운은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듣는 동안 이미 판단은 내렸다. 절대무공이 있는 것까지 털어놓은 이상 무윤의 말은 믿을 수 있다.
‘기록도 가장 사실에 근접한 거 같고.’
처음에 말 못 한 사정도 이해가 간다. 조사가 천마교 뿌리와 친하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고민은 하나다. 너무나 큰 사안이기에.
‘앞으로 어찌해야 할꼬?’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즈음, 당장의 결단을 내렸다.
‘한꺼번에 모든 답을 내릴 순 없지.’
우선 시급한 일부터 꺼냈다.
“내게 털어놓은 건 소림에 알리고 싶어서겠지?”
“물론입니다.”
“그러자면 기록이 있어야 하네. 증빙할 자료도 있으면 좋고.”
기록이야 만들면 되고, 근거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도 있다.
‘과거 불가 진경이 여러 개 있으니.’
그때 문득 여휘 놈이 춤을 연구하려고 가져온 영흥사 불무가 떠올랐다. 천 년 전 불무라 이 또한 신빙성을 더할 자료가 된다. 또 소림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가치이기도 하고.
“침주에 가는 대로 챙겨서 찾아뵙겠습니다. 참, 자료 중에 영흥사 불무도 있습니다. 그것도 증빙이 되겠네요.”
“허! 그러면 좋지. 어떤 것인가?”
“불광어기무(佛光於氣舞) 그리고 관음십팔무(觀音十八舞)라는 겁니다.”
순간 각운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뭐라? 그게 정말인가?”
“왜 그러시는지?”
“본사 신법 중에 불광어기류, 또 관음십팔족이란 각법이 있었네. 한데 안타깝게도 둘 다 절반가량이 소실됐지. 한데 이름이 같아서 말일세.”
이번엔 무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이유가 있다. 불무엔 원래 심법이 따로 없는 게 일반적이다. 다만 바라타나티암과 언급한 두 불무엔 심법이 있다.
‘두 심법 모두 여휘 놈이 연구하느라 만들었지.’
여인을 위한 바라타나티암 연구를 하다, 남자의 춤도 살펴보려고 만들어 봤다고 했다. 남녀의 차이를 알아야 도움이 되니까. 또 그 필사본을 영흥사 반각에게 선물로 준 것까지. 그게 소림에 전해진 거 같은데.
어째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는 기분.
확인할 방법이야 빤하다.
“혹시 구결을 아십니까?”
“대략은 아네만.”
“혹시 신환허, 양기화신, 고정연기, 운전기절∼∼. 이것과 비슷합니까?”
각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절반의 답은 이미 알려 준 셈. 잠시 생각을 정리한 말문이 열렸다.
“뿌리는 같아 보이네. 구결 상당수가 같아. 다만 서로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군.”
“어떤 부분인지?”
일부분을 알려 주는 건 문제없다.
“알려 줌세.”
서로 다른 구결을 비교하길 한참, 무윤은 기도 안 찬 실소가 올라왔다. 차이가 뭔지, 왜 그런 건지 거의 파악이 됐다.
‘그게 소림의 무공으로 전해지다니.’
여휘의 심법은 불무를 통해 내외공을 동시에 익힐 수 있도록 했다. 그 극의에 다다르면 중단전 무학의 길을 엿볼 수 있도록. 거기까지만 풀어놓았다. 단순히 연구를 위해 만든 것이라, 바라타나티암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지는 수준.
한데 각운이 알려 준 구결엔 외공 부분이 배제됐다.
‘내공심법의 가치만 알아보고 그것만 따서 만들었어.’
원래대로 내외공을 동시에 수련했다면 화경을 넘어 현경까지 바라볼 무공. 그걸 못 알아봤다는 뜻. 이유도 짐작이 간다. 춤의 무공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까지 끌어내 승화해야 극의에 다다른다. 색을 멀리하는 불가다 보니 그 과정을 거치지 못해서 변형된 게 틀림없다.
순간 실소가 가득 올라온다.
‘천마교의 뿌리인 놈이 불가무공을 만들어 버젓이 전한 꼴이 됐어.’
이 사실을 알면 각운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에 선하다.
어쨌든 잘된 일. 내공구결 중에 사라진 부분이 내겐 있으니 확실히 엮을 게 생겼다. 박장대소는 나중에 혼자 몰래 하면 되고.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결론을 냈다.
“제 것엔 심법 부분이 다 있는 거 같습니다.”
“정말인가?”
“지금 적어 드릴까요?”
“……!”
천천히 진행하려던 소림일이 더 앞서가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