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숨죽인 염이규의 시선이 세차게 떨려 왔다.
‘누구?’
당서하와 접전 중이라 보진 못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 땅은 벼락 친 듯 여기저기 커다랗게 움푹 파였다. 주변은 거북 등껍질처럼 쫙 갈라졌고. 순식간에 공터 한가운데가 폐허가 돼 버린 광경.
거기에 귓전을 울렸던 감각까지.
이제 막 초절정 끝자락에 들어선 자신도 강기를 얼마만큼은 다룬다. 하나 단 한 수에 이러는 건 차원이 다른 수준.
떠오르는 건 하나밖에 없다.
‘화경!
바로 짐작 가는 이가 있었다.
‘은월청요검을 전한 도인.’
한데 흙먼지가 가라앉고 내려선 자를 보는 순간, 놀람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젊어!’
처음엔 혹시나 도인이 반로환동(返老還童)했나 싶었다. 한데 연사구의 욕지거리부터 친구처럼 하는 대화까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
그 의문을 몰고 온 자가 뒤돌아섰다.
터덕!
염이규의 날카롭게 벼려진 안광이 상대의 전신을 훑었다. 바로 의아함이 올라온다.
‘느껴지는 게 없어.’
그게 더 불길함을 안겨 준다. 또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다섯 중 넷이 태연히 바닥에 퍼질러 앉은 것도. 힘이 빠졌을 뿐 자신이 건재한 걸 알 텐데.
심중의 불안과 걱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던 순간, 상대의 무심한 듯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네가 염이규지?”
“……누구?”
순간 환영처럼 흐른 잔상이 공간을 접었다.
사락!
빠름을 초월한 흐름이 바람을 헤치는 순간, 염이규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헉!”
찰나에 지척에 다다른 신형, 그 손끝이 목을 향하는 게 느껴진다. 무형의 기운이 몸을 옥죄는 걸 직감한 순간, 본능이 부른 몸의 비틀림이 바람을 제쳐 갔다.
휘릭!
알싸한 바람이 가슴 언저리를 휑하니 스쳤다 싶은 찰나, 목울대가 눌린 격통이 터져 나왔다.
“켁!”
몸이 절로 버둥거린다. 막힌 숨에 손이 절로 허우적거릴 때, 어느새 명치에 충격이 전해졌다.
푸욱! 부르르!
“흡!”
배를 지나 온몸을 파고드는 뼈저린 울림. 충격을 넘어 경악에 불신까지 더해진 눈만 부릅떠졌다.
‘단 한 번에!’
이미 내장은 다 터져 버린 상태. 목을 움켜쥔 손 탓에 고통을 내지를 수도 없다.
“켁! 케엑!”
염이규는 죽음을 예감했다. 무인인 이상 언제고 찾아오리라 여겼지만 이리 허망하게 맞을 줄이야. 설사 화경이라도 죽을힘 다해 싸워 보리라 했건만. 젊은 얼굴에 누군지 궁금해 잠시 머뭇거린, 그 찰나의 방심이 만든 허망함이다.
‘허! 이리 끝나는가!’
무윤은 시간 끌 여유가 없다. 치료가 급한 다섯인데. 다행히 상대가 순간 방심한 덕에 몇 수 단축했다.
탁! 타닥! 팟팟!
점혈이 끝나자마자 복면인 사이를 향했다. 바람 제친 신형이 단번에 공간을 뛰어넘었다.
사라락! 휘익!
도망칠 자들부터 처리하는 게 순서.
순간 당황한 외침이 사방에 비산했다.
“피, 피해! 컥!”
“도, 도망! 커헉!”
“살려……. 크흑!”
허공엔 마치 사람 없는 옷자락만 날아다니듯 보였다. 꽃 너울 속으로 나비가 넘나들듯 유려한 손이 몇 개의 잔영을 휘날렸다 싶을 즈음 상황은 종료됐다.
툭! 투욱! 털썩!
하후천기의 눈이 멍해졌다. 믿기지 않은 현실에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다섯이 죽을힘을 다해 싸웠던 상대들. 그 격전의 흔적이 온몸 여기저기에 아직도 선혈을 흘려 대는데.
눈 몇 번 깜짝했을 뿐이다. 초절정 상을 넘어선 자도 단 한 수, 나머지는 눈이 좇지도 못했다. 잔상의 흐림이 짐작게 할 뿐이지.
상대가 격전에 힘이 떨어졌다 한들 저렇게 끝낼 자는 세상에 몇뿐인데.
물어볼 자는 하나.
“어, 어떻게 된 거냐?”
하후진도 잠시 멍했던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저도 몰랐습니다. 저 정도까지는.”
초절정 중상인 건 알고 있었다. 물론 더 있다는 것도. 하지만 짐작되는 그 경지는 아니라 여겼는데.
하후진은 놀라지 않는 다른 이들을 보고 직감했다.
‘설마 벽을?’
바로 연사구에게 전음을 보내자 답이 왔다.
-얼마 전에 넘었다. 뭐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잖아.
-그, 그래도 이렇게 빠를 줄은…….
-저놈이 언제 우리 예상 안에 있었냐. 그러려니 해.
그래도 의아한 게 남았다. 전혀 놀라지 않는 두 여인.
-저쪽도 알고 있는 눈친데.
-그럴 일이 있었다.
짧은 설명 후, 이번엔 연사구가 노파심에 말을 꺼냈다. 위험이 사라진 이상 생각지 않은 변수를 고려할 때.
-그나저나 소가주도 봤으니 짐작은 할 테고.
-저걸 보고 모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입단속 잘 시키라고. 지금 알려지면 침주도 다른 일도 꼬일 게 많아.
하후진은 싱긋 웃어 보였다. 자신이 아는 하후천기는 절대 그러지 못한다.
-형님이 입 뻥긋할 사람입니까. 그랬다간 절대자한테 밉보이는데.
-하긴! 간이 조막만 한……. 어? 너 방금 형님이라 그랬냐? 웬일이래?
-그렇게 됐어요.
연사구는 싸움 중에 들었던 게 생각났다. 가벼운 실소가 흘렀다.
-큭큭! 역시 남자들은 치고받고 싸우면서 푸는 게 최고지. 몇 번 더하면 아주 우애 있는 형제가 되겠는데.
-됐습니다. 이 꼴을 더 겪으라고요?
-그냥 해 본 소리고. 어쨌든 이번에 잘 풀어 봐. 너나 우릴 위해서도 좋은 거잖아.
-알았어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하후진의 전음이 형을 향했다.
-형님.
-그래. 어떻게?
-벽을 넘었답니다. 얼마 전에요.
-……확실한 거냐?
-저 두 여인은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하후천기의 두 눈은 멍한 시선을 그대로 담아냈다. 절로 탄성이 흘렀다
“하!”
‘화경이라니!’
머리론 믿기지 않았지만, 눈으로 봤다. 푸름 가득 담은 선명한 권강을. 몸이 느꼈다. 전신에 둘러졌던 그 폭풍 같은 기세를. 무인의 본능은 전율했다.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고.
문득 침주에서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갔다. 처음 주루에서 만나 기절하던 그때부터 광동 하조문을 혼자 박살 내던 그 모습, 그리고 오늘까지.
처음 만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놀람, 아니 경악의 연속 그 자체.
스멀스멀 두려움이 몰고 온 떨림은 온몸을 휘감았다. 멍했던 두 눈도 어느새 세찬 떨림에 흔들거렸다.
옆에 있던 하후진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이 알린다.
‘말할 필요도 없겠어.’
한편 무윤은 다시 염이규의 목을 잡아 들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만 느슨하게 손에 힘을 줬다.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많이 안 물을 거야. 봉천문에 다녀왔거든.”
“컥, 커억, 누, 누구?”
“그래. 그 질문만 받아 주지. 담사운. 나도 목표였으니 알겠지?”
“저, 정말?”
“죽을 놈한테 거짓말을 왜 해. 이제 네 차례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으면 말해. 그럼 길게 가고.”
“……무, 물어라.”
“여긴 왜 왔지?”
“부련주와 강호 순찰 중에……. 마침 예관 일이 생겨서 악양에 잠시 머무른 거고.”
“다른 일도 있나?”
“어, 없다.”
“다른 일행은 어디 있지?”
“아, 악양엔 아무도 없다.”
무윤의 다른 한 손이 염이규의 팔을 움켜잡았다.
탁! 우드득! 두둑!
“크억!”
뒤틀린 어깨에서 팔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툭!
“쉽게 가자니까. 부련주란 자는 여기 없잖아.”
“크윽!”
“이번에 다른 팔, 아니 다리로 할까?”
“부, 부련주는 나머지 인원을 데리고 호북으로 갔다. 그래서 말 안 했을 뿐.”
“떠났다고?”
“쿨럭! 순찰 중이라 하지 않았나.”
“다시 올까?”
“모, 모른다. 우리가 없어지면 조사차 누가 오긴 하겠지만.”
“그거면 됐다.”
더 들을 게 없다. 말은 차후 확인하면 되고. 손아귀에 힘을 주는 순간.
우두둑! 두둑!
“컥!”
축 늘어진 몸뚱이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 당서하는 의아함에 물었다.
“저놈들 누구야?”
“야접입니다. 봉천문하고 같이 예관을 노렸어요. 거기다 야접은 저놈 무공을 뺏으려 한 거고.”
“우릴 공격한 건?”
“적운문, 봉천문 다 같이 모의했어요.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죠.”
“그래? 그럼 어떡한다?”
“우선 치료부터 해야죠. 의방부터.”
“그래야지. 근데 은밀히 움직여야 할 텐데…….”
“아는 데 있습니까?”
“가만…….”
그때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숲 저 너머에서 급속히 다가오는 기운, 무인의 경공이다.
“잠깐! 누가 옵니다. 대여섯인데 금방 오겠는데요.”
“……그럼?”
“우선 숨죠. 감당은 될 자들 같은데.”
“……!”
잠시 후.
두 문주와 호위대 셋이 날아들었다.
휘릭! 차착!
주변을 살피던 두 문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게……?”
“야접?”
이십여 구의 시체가 흥건한 핏물과 함께 바닥에 즐비한 모습. 생사의 격전이 벌어졌음을 여실히 알린다.
그때 한 곳을 보던 봉천문주 고주양은 뒷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이건?”
여기저기 움푹 파인 구덩이와 갈라진 대지.
적운문주 설도승의 눈에도 당혹감이 서렸다.
“이건 강기 흔적 같은데…….”
“그리 보이네. 그것도 아주 초고수가 만든 흔적이야. 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시체를 살피던 설도승은 의아함이 더해졌다.
“죽은 자는 전부 야접 같습니다. 다른 복장은 전혀…….”
그때 숲 한쪽에서 연사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윽!
“우린 다 살았지. 뭐 이 꼴이 되긴 했지만.”
설도승의 표정이 우뚝 굳어 버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연사구! 네놈이 어떻게!”
“궁금하지? 좀만 기다려. 이따 얘기해 줄게.”
“……?”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쏠린 순간, 뒤편에서 풀잎 스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잠겼다.
사사삭! 휘릭!
뒤쪽에 있던 세 호위 대원 중 하나의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커억!”
퍽! 빠각!
어스름한 달빛에 새하얀 광망이 잠시 번뜩인 순간, 얼굴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뿜어진 핏물이 허공을 수놓았다.
남은 두 호위의 시선이 한 곳에 꽂힘과 동시, 어둠을 질주한 몸이 몰아치는 거대한 풍압과 함께 둘을 향했다.
파파팟!
춤추듯 흔들린 잔영이 둘 사이를 파고들 때, 앞선 자에게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휘어져 쏘아진 속도에 신형을 놓쳐 버렸다.
“헉!”
직선이던 궤적이 용틀임하듯 길을 바꿨다.
슈우욱!
몸 주변이 이지러져 보이던 순간, 몸을 짓씹는 처절한 소리가 두 개의 단말마를 끌어냈다.
퍼억! 우득!
“컥!”
빠각! 우두둑!
“우욱!”
머리가 깨지고 가슴이 함몰된 두 몸이 볼품없이 나가떨어졌다.
무윤이 셋을 처리한 건 순식간. 도망을 막고 시간을 줄이려고 쓴 양동작전이 잘 먹혀들었다.
고주양의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양쪽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네 이놈!”
구름 낀 달빛에 보인 젊은 놈, 그리고 그 옆에 쓰러진 셋,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호위대다. 바닥에 쓰러진 그 셋의 마지막 꿈틀거림이 눈에 선하게 박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사지를 찢어발기려던 찰나, 대기를 뚫는 바람 소리와 함께 짓쳐 오는 놈이 눈 가득 들어왔다.
휘이익!
고주양은 매섭게 뜬 눈을 꿈틀거렸다.
‘미친놈!’
호위대 셋은 전부 절정 끝자락. 어둠에 급습이라 하나 젊은 놈이 대단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히 자신에게 정면 승부를 걸다니.
비릿한 웃음 하나가 입가에 걸렸다.
‘와 주는 건 고맙군.’
한데 짓쳐 드는 놈을 주시하던 어느 순간,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면 근육이 우뚝 굳어 버렸다.
‘강기?’
놈의 손에 은은한 기가 서리더니 대기를 진득하게 울리는 파동이 느껴진다. 겹겹이 쌓인 농밀한 기파. 자신이 검기를 중첩해 만들어 낼 때 그 느낌이다.
그게 상대에게서 비슷하게 흘러나왔다.
두 눈은 한 곳을 뚫어져라 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나와 비슷하다고?’
한데 넘실거리던 푸른 기운이 한층 빛을 발했다. 손끝에 맺힌 강기의 일렁임이 한층 거세졌다.
우우웅!
어느새 하얗게 변한 권강의 기파가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파도의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경파에 대기가 이지러졌다.
쿠쿠쿵! 사아아!
순간 고주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경악 담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헉!”
그제야 알았다. 착각임을. 비슷한 수준이 아니다. 자신이 언제나 꿈꿔 오던 그 모습을 보여 주는 자. 한 치가 넘는 권강의 이지러짐이 눈가에 아른거린다.
‘절대자!’
문득 떠올랐다. 연사구에게 절대무공을 전했다는 자.
‘도인!’
또 생각났다. 발아래 움푹 파인 구덩이를 누가 만들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왜 처음에 비슷한 강기를 보였는지.
‘도망 못 가게 하려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