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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04화 (104/161)

104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밤하늘 밝게 떠오른 별이 휘두르는 칼날에 빛을 더했다.

쾅! 콰앙! 쇄애액! 슈우욱!

전장은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하나둘 바닥에 널브러지던 복면인도 어느새 여덟. 남은 건 열둘.

다섯 또한 피투성이 몰골에 성한 곳을 찾아볼 수 없다.

당서하의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내뿜어졌다.

“헉헉! 하아!”

잠시 숨 돌린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안개같이 피어오른 전장의 열기와 숨결이 흐린 안개처럼 시야를 가린다.

상황은 분명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최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독도 이미 다 써 버렸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젠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다. 그래도 자신은 동료들의 수장. 먼저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이 상황에 힘을 줄 말은 다른 게 없다. 칼끝 핏물을 흩뿌려 내고는 강렬히 외쳐 댔다.

“놈이 곧 올 거야. 조금만 참아!”

은월청요검식이 휘둘러진 연사구의 검이 다시 한번 피를 적셨다. 동시에 입을 삐죽이고는 산 너머를 향해 바락 악을 썼다.

“이 새끼! 늦게 오면 가만두나 봐라!”

큰 숨을 몰아쉰 진서연도 거들었다.

“같이 혼내자고요. 저번에 죽도록 맞았거든요.”

“에이! 설마!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멍든 거 보여 줘요? 가릴 데 없이 다 그랬다니까.”

“보나 마나 빤하네. 비무 하자고 했구나.”

“비무는 무슨! 아예 작심하고 패 버리던데.”

“그럴 땐 칼 던지고 손톱으로 할퀴는 게 최곤데.”

“오면 그래 볼게요.”

“얼굴을 싹 그어 버려요. 그럼 속이 다 시원하겠다.”

“그거 괜찮네.”

잠시 칼을 내리고 주변을 살핀 염이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수했어. 처음부터 전력으로 갔어야 했는데.’

나이도 어려 얕잡아 본 오만이 부른 결과. 절반에 가까운 수하들이 죽어 나간 건 분명 자신의 착오다.

갈가리 찢긴 무복 자락은 흩날리는 바람에 자존감까지 실어 보냈다. 명색이 야접의 최고 고수인 자신이 함께했는데.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곱게 죽이지는 않으리라. 절대!’

용암처럼 들끓는 격정을 뿜어냈다.

“죽는 게 소원이게끔 만들어 주마. 내가 꼭! 그리한다!”

말이 끝나기도 전 이미 신형은 전장의 한복판을 향했다.

사아악!

전광석화 같은 빠름에 이어 허공 가득 울리는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목표는 수장인 년.

쇄애액!

당서하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일도양단의 검격에 담긴 초고수의 의지가 확연히 느껴진다.

‘작정했어.’

맞서기에는 늦었다. 몸을 비틀고 회전해 쏟아지는 검격을 흘려 내야 한다.

카아앙! 카앙!

빠름을 잃지 않은 참격이 그녀의 사방을 에워쌌다. 살벌한 바람 소리가 귓전과 옷자락을 스쳐 갔다. 전신에 휘몰아치는 무지막지한 압박감, 그래도 휘둘러지는 검은 파고드는 칼날을 가까스로 흘려 냈다.

카앙! 사악!

이제 염이규의 진각은 후퇴를 몰랐다. 이년부터 끝내야 다른 이들도 무너진다. 끊임없이 회전하며 폭우처럼 검기를 쏟아 냈다.

콰앙! 콰쾅!

계속해서 두들기는 파상 공세에도 당서하의 표정엔 한 점 흔들림도 없다. 하지만 몇 합이 지나지 않아 충격에 접해진 몸은 점점 그 한계를 알아 갔다.

‘크윽! 버티기 힘들어.’

당서하를 힐끗 보던 진서연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틈을 내야 하는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신을 둘러싼 이는 다섯, 그중 초절정이 섞였다. 서릿발 같은 검기가 전신을 갈가리 찢으려 휘몰아치는 상황. 막기에 급급한 자신이라 몸을 뺄 여유가 없다.

카앙! 채앵!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검을 꽉 쥔 손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가 도와야 하는데.’

남은 열두 명 중 다섯이 몰렸지만 가장 상처가 적은 게 자신이다. 그 이유도 안다. 해적과 격전 중에도 비슷한 상황은 여러 번 있었으니까.

‘사로잡으려고 그러는 거지.’

상처는 몰라도 죽일 생각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당서하에게 다가가려 했건만, 사방을 잠식한 매서운 검기는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쇄애액! 사라락!

아린 마음에 시선이 주변을 향했다. 여기저기 급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협공을 피하던 연사구의 허리춤이 베어졌다. 이어 허벅지에 부러진 칼날이 박혔다.

“크윽!”

가쁜 숨을 몰아쉬던 하후천기는 등 언저리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몸이 휘청거렸다.

“커억!”

입에서 왈칵 피가 솟구치던 순간, 내려치는 적의 도를 누군가 막아섰다. 마지막 검기를 짜낸 하후진의 칼날이 상대의 몸을 짓씹었다.

슈우욱! 서걱!

“커억!”

복면인 하나가 또 널브러졌다.

투욱!

대신 하후진에겐 맞선 상대를 도외시하고 날아든 대가가 따랐다.

“죽어라!”

쉬이익! 서걱!

“크윽!”

어깻죽지에 불로 데인 듯 화끈한 열기가 절로 비명을 불렀다. 뼈까지 다가간 칼날의 충격. 또다시 바람을 가르는 검풍이 머리를 향한 절체절명의 순간.

다급한 상황을 감지한 연사구의 비도가 허공을 갈랐다.

쇄애액!

“헉!”

끝장을 보려던 복면인이 황급히 몸을 숙인 사이, 가까스로 바닥을 구른 덕에 하후진이 다시 대형으로 복귀했다.

뒤도 안 돌아본 연사구의 고성이 하후진을 향했다. 확신과 희망을 동시에 담은 말.

“좀만 참아! 이 새끼 곧 올 거야!”

“그, 그래!”

다시 등을 맞댄 두 형제에게 잠시 틈이 주어졌다. 하후진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내뱉었다. 지금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

“……형님! 사셔야 합니다. 꼭!”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던, 보여 주지 못했던 미소, 그 은은함이 말의 깊이를 더했다.

형님, 처음으로 불러 본 단어. 예전이면 할 생각도,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오늘 보인 모습엔 더 늦기 전 한 번은 불러 주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하후천기는 나서서 돕지 못했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도 역력하고. 하지만 적어도 피해를 안 주려고 몸부림치고 절규한다. 악을 바락바락 쓰며 다가오는 이에겐 죽기 살기로 대든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한 모습. 그거면 됐다. 형님이라 불러도 마음이 꺼리지 않는다.

하후천기의 가슴이 턱 하니 막혀 왔다.

‘형님!’

이 급박한 상황에도 또렷이 뇌리에 각인되는 말. 순간 통렬한 후회 하나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격전이 벌어지기 전, 자신이 복면인에게 했던 말이 있다. 혼자라도 살아 볼 생각에 던졌던 그 말.

-난 소가주 하후천기, 이쪽은 ……하후진.

그때 잠시 머뭇거렸다. 동생이라고 하려다가. 하지만 하지 못했다. 그동안 불러 보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이유라면 이렇게 속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다. 전혀 다른 이유로 하지 않았다. 일부러.

‘나만이라도 살아 보려고.’

얄팍한 계산이 동생이란 말 대신 이름을 부르게 했다. 형제라 그러면.

‘둘은 살려 주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래서…….’

그 때문이다. 그 얄팍함이 이젠 비수가 되어 가슴속을 찌르고 후벼 댄다. 경각의 상황에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동생. 그런 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속에 있던 무언가가 둑이 터지듯 쏟아졌다. 아픔이다. 쓰라림이다. 후회다. 형으로서 창피함이다.

짧은 탄식이 안타까움을 감쌌다.

‘그때 먼저 동생이라 불렀다면.’

그랬다면 형님이란 말에 이렇게 속이 꽉 막히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지울 수 없다. 시간이 없다.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탓에 커다랗게 울부짖었다.

동생이란 말 대신 이름, 어릴 때 같이 놀던 그 시절 그대로 불러 주는 게 이 마음을 올곧이 전한다.

“너도 살아야 한다. 진아!”

“……예! 형님!”

응어리 찬 가슴 한쪽이나마 말갛게 씻어 내릴 그때, 잠시 틈이 생긴 하후천기의 눈에 당서하가 들어왔다.

쾅! 카앙! 휘익!

검기의 폭풍에 쌓여 뒷걸음치기 급급한 그녀. 베인 옷깃 위로 낭자한 선혈이 보인다. 어느새 허리를 타고 하의까지 번지는 선혈은 그녀의 위중함을 알린다. 그래도 바람을 베듯, 분노를 쏟아 내듯 칼은 움직인다. 공방은 계속된다.

몰아치는 거대한 광풍에도 체념 어린 표정은커녕 독기 가득한 입만 연신 허공에 이죽거린다.

“시팔! 초고수란 새끼가 이것밖에 안 돼? 다 늙어 빠졌네. 거시기도 축 늘어진 거 아냐!”

“이년이! 그 아가리 꼭 내 손으로 찢어 주마!”

분노를 토한 염이규의 검은 연신 허공을 갈랐다. 당서하의 혈흔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때 하후천기와 당서하의 시선이 우연히 마주쳤다.

하후천기의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웃었어!’

웃었다. 분명 자신을 보고서. 절체절명의 상황이 매 순간 다가옴에도 문득 마주친 자신에게 보인 미소.

순간 가슴 속 저 밑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저 미소의 의미. 무인의 의기도 투혼도 아니다. 그저 친한 친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보내는 그런 미소다.

갑자기 싸해진 가슴에 코가 시큰하고 목이 메어 왔다.

오늘 처음 만난 그녀다. 말이라고는 격전 중에 욕 들어 본 게 다다. 온갖 쌍욕까지 섞어 가며 투박하게 던진 말들.

그 말이 자신을 살린 게 몇 번이던가.

그런 그녀지만 친구라 여겼던 그 어떤 이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진한 아림을 가슴에 전한다.

눈가가 살짝 붉어진 하후천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돕는다.’

이 격전 중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 한데 기회가 생겼다. 다른 넷에 적들이 몰려 있다. 자신에겐 간혹 틈마다 공격할 뿐. 자신이 혼자 살아남겠다고 버둥거리는 걸 적들도 알아서 그런 것.

불끈 쥔 두 손에 힘이 생겼다. 한 서린 열기가 눈가에 빛을 토했다.

‘할 수 있어. 나도.’

그 마음 담은 진각이 대지를 박찼다.

타탓!

발로부터 올라온 혈류의 격정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어둠을 가른 검격이 그 의지와 기세 담아 바람을 가르는 찰나.

바로 뒤에서 공기를 날카롭게 찢는 소리와 함께 일진광풍이 허공을 울렸다.

파아앙! 쉬이익!

어둠을 가르는 뇌전처럼, 엄청난 경파로 대기를 울리는 파공성이 세상을 갈라놓듯 휘몰아쳤다.

쿠쿠쿠쿵! 쇄애애액!

무자비한 전율이 모두의 뇌리를 휘감을 찰나. 격전장 사이로 세찬 기의 파동이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시퍼런 빛의 궤적이 눈을 잠식한 순간, 땅으로 내리꽂힌 미증유의 힘이 대지를 찢어발겼다.

쾅! 콰쾅! 쾅! 쿠웅!

뇌성벽력과도 같은 폭발에 땅이 갈라지고 사방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대지에 떨어진 충격은 짙은 흙먼지를 사방에 토해 냈다.

촤아악! 파파팍! 화라락!

모두의 발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거대한 풍압에 머리카락만 휘날릴 뿐, 복면인들의 벌려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눈도 껌뻑이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결과를 이해도 설명도 할 수 없는 상황.

촌각이 흐른 후, 세찬 바람을 헤치던 신형이 땅에 충돌했다.

쿵! 쿠웅!

가속을 줄이지 못한 상황. 무릎까지 땅을 파고들었다. 저 멀리서 본 정황은 표홀한 신법 따위 구사할 여유가 없었다.

순간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연사구의 입이 쌍욕을 쏟아 냈다.

“야! 이 개뼈다귀 같은 놈! 우라질 새끼! 이제 오면 어떡해!”

무윤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흘렀다. 평소 목청 그대로 질러 대는 놈, 이만큼 반가운 인사가 없다.

“너무 늦진 않았네. 다행이다.”

냅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사구는 온몸을 가리켰다.

“뭐! 안 늦어? 이런 똥물에 빨아서 오줌에 튀길 놈을 봤나. 이거 안 보여? 황천길이 눈앞에 있었어. 이 새끼야!”

이런 연사구라면 됐다. 나머지 넷으로 시선이 돌려졌다.

중상이 확연하지만 눈빛은 그대로인 당서하, 피 칠갑을 둘러썼어도 오연히 서 있는 진서연, 늦은 아쉬움은 있지만 최악은 아니다.

나머지 둘을 보는 눈이 살짝 커졌다.

“진아, 너도 있었어? ……소가주도?”

하후진은 묵직한 숨을 토해 냈다.

“못 보고 가는 줄 알았다.”

“……미안하다.”

다음 시선은 마지막 자에게 향했다.

하후천기의 멍한 시선엔 오만 가지 의문이 가득 담겼다.

엉겁결에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어떻게?”

무윤은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정리부터 하겠습니다.”

“……?”

늦었지만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았다.

서서히 돌아선 입가엔 미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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