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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03화 (103/161)

103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장로 염이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멍청한 놈들!’

일격에 끝내려고 절정급 둘이 수장인 당서하를 노렸다. 한데 오히려 한 방에 당해 버렸으니.

기세가 꺾인 탓인지 산발적인 공격만 이뤄진다. 압도적인 숫자의 우세에도 치명적인 공격은 무위에 그치는 상황.

먼저 나서지 않은 건 당서하의 독 때문. 죽이려고 맘먹으면 오래 걸릴 것도 없다. 하지만.

‘자오독은 해독하려면 오래 걸려.’

호흡을 막아도 피부로 스며드는 독. 완전히 차단하기는 어렵다. 이깟 피라미들 처리하자고 야접 최고수인 자신이 다칠 수 없어 느긋하게 기다린 건데.

‘이러다간 양패구상이다.’

초절정 초반 셋이 있지만, 절정 둘이 죽은 지금 나머지는 일류급.

어쩔 수 없이 나서야 할 때. 원거리에서 도와주기만 해도 전세를 전환할 수 있다.

한걸음 내딛는 진각이 땅을 울려 댔다.

터덕! 투웅!

느린 발걸음, 하지만 엄청난 기파가 초고수의 위용을 알렸다.

당서하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 담겼다.

‘몇 놈만 더 정리해도 탈출 기회가 있었는데.’

품속의 독주머니에 다시 슬며시 손을 갖다 댔다. 언제든 뛰어들면 뿌릴 준비. 남은 용독 횟수는 네다섯 번 정도.

하지만 적은 모른다. 속여야 주저하게 만든다.

순간 바람 소리가 귓전을 매섭게 울렸다. 염이규의 신법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보이려는 뜻도 담긴 모습.

쉬익! 쇄애액!

당서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적이지만 감탄할 만한 신법.

‘역시!’

바람 탄 염이규의 신형이 반원 사이를 헤저었다.

휙! 휘릭!

빠른 진퇴와 함께 검신이 연신 시퍼런 빛을 흘렸다.

캉! 카앙! 콰쾅!

그렇게 수차례 오고 가며 혼란을 주던 즈음, 순간 빠름을 배가한 움직임이 허공을 갈랐다.

휘이익!

노린 상대는 가장 약하게 보인 하후천기. 처음부터 간격이 벌어질 틈을 노리고 있었다. 곧게 쳐든 염이규의 검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머리를 찍어 내렸다.

화라락!

뱀의 꿈틀거림 같은 요동이 실린 내력의 힘을 보여 줬다. 옆으로 두 개의 검이 따라 들었다. 사전에 지원을 차단하는 찌름.

다가서지 못한 당서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독도 쓰기 어려운 상황.

‘너무 근접했어.’

하후천기의 눈이 부릅떠졌다. 예상을 뛰어넘은 빠름.

“헉!”

무자비한 전율이 온몸을 타 내려갔다. 덮쳐 오는 찌릿함은 손발을 어지럽게 한다. 본능이 시킨 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휘익!

날카롭게 번득인 검날은 이미 반 장 안으로 파고든 상황, 커진 눈이 세차게 떨렸다.

‘늦었다.’

완전히 피하기 어렵다. 내력을 올린 검을 겨누고는 뒷걸음질 쳤다. 서릿발 같은 검기가 전신에 휘몰아치는 상황. 그 광풍에서 어떻게든 멀어지는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건 그것뿐.

타다닥! 휘리릭!

하지만 간격만 좁아질 뿐, 노도와 같은 내기의 파고는 여전히 전신을 휘감았다. 어느새 가슴팍 한 치 앞까지 다가선 칼날, 먹이를 집어삼키려 벌린 뱀 아가리처럼 지척에서 어른거렸다.

눈이 질끈 감겼다.

‘끝이구나!’

염이규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한 놈 잡았다.’

이미 그물 안에 뒤엉켜 퍼덕이는 물고기나 다름없다. 이제 걷어 올리면 될 그 순간.

쇄애액!

공기를 가르는 굉음이 무자비한 전율로 염이규의 뇌리를 휘감았다.

물 흐르듯 유려함 담긴 환이 나선의 쾌로 돌변해 뿜어낸 여인의 검영. 흘깃 봐도 세 치가 넘는 푸른빛의 검기가 요동친다. 거기에 빠름까지.

바로 직감했다.

‘위험해!’

물론 공격을 흘려 내면서 이놈의 목울대를 뚫을 순 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은 대기의 압박은 적지 않은 상처를 예고한다. 무리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피하는 회전 반경 내에서도 먹잇감은 중상을 입힐 수 있고. 생각과 동시에 몸을 비틀었다. 사선의 칼날이 먹잇감을 쓸어 갔다.

쇄애액!

용틀임하던 검 끝이 팔을 잘라 낼 찰나, 염이규에 뇌리에 다시 경종이 울렸다.

‘이런!’

자신을 찔러 오던 검에 실린 경력과 세기, 빠름의 신호가 알린다. 마지막에 더해진 가속 때문에 위험하다고. 예상을 벗어난 검격. 순간 중상이 가능했던 검로를 틀 수밖에 없었다.

찌이익! 서걱!

“크윽!”

하후천기의 피부 위로 기다란 혈선이 그어졌다. 베어진 옆구리와 허벅지에 선혈이 솟구쳤다.

푸웃!

급히 퇴보를 밟은 염이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늦었으면!’

그의 시선이 향한 곳. 거기엔 찢긴 옆구리 무복 자락이 바람에 나풀대고 있었다. 한순간 방심했다면 당할 뻔했다.

분노에 찬 시선이 한 여인을 향했다. 이 한 수로 알았다.

‘이년도 초절정!’

스물 초중반의 앳된 얼굴이라 잘해야 절정이라 여겼는데.

기가 찬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도 저 나이에 저런 경지의 여인은 듣지도 보지도 못 했다.

염이규는 전략을 바꿨다.

‘저년부터 잡아야겠어. 곱게 잡으려면 내가 나서야지.’

초절정이면 수하들이 성한 상태로 온전히 제압하긴 어렵다.

그 결심에 진각을 밟으려는 찰나, 당서하의 손이 허공에 뿌려졌다.

사라락!

염이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또 독을 뿌렸다.

‘이년이 또!’

어쩔 수 없는 상황. 멀찍이 물러나면서 말문을 열었다.

“넌 누구냐?”

대답 대신 진서연의 다급한 손길은 하후천기의 온몸을 쓸었다.

탁! 타닥! 파팍!

깊게 패인 상처라 지혈이 우선.

당서하의 용독이 간격을 벌려 준 사이, 둘 주변을 세 사람이 에워쌌다.

지혈을 끝낸 진서연의 시선이 하후천기를 향했다.

“다행히 근맥은 이상 없어요. 다른 덴?”

“헉헉! 괘, 괜찮습니다. 움직일 수 있어요.”

전방을 주시하던 당서하가 고개를 힐끔 돌렸다.

“소가주는 뒤로 빠지고 넷이 대형을 유지한다.”

“버틸 만합니다. 같이하겠습니다.”

“안 돼. 널 보호하다 우리가 위험해진다. 뒤에서 도와.”

순간 연사구의 놀란 시선이 진서연의 다리를 향했다. 검붉은 선혈이 허벅지부터 아래까지 흘러내려 무복을 검붉게 물들였다.

“진 조장! 다쳤잖아요?”

그제야 진서연은 다리를 지혈하고는 씩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움직이는 덴 지장 없어요.”

“언제 다쳤어요? 아까까지는……. 아!”

하후천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 때문에.’

자신을 구하러 달려들던 그때다. 정면으로 달려오던 그녀라 당시 상황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싸하게 아려 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부러 피하지 않았어. 날 구하려고.’

몸을 날리던 그녀의 우측으로 파고들던 칼날. 한데 측면으로 날아든 검이라 진서연이 못 봤을 리 없다. 또 이제야 알았지만, 초절정인 그녀인데.

진서연을 쳐다보는 눈에 애잔함이 가득해졌다. 뭐라 말할까 고민하다 속마음 그대로 던져 냈다.

“왜 그러셨습니까? 위험했는데.”

진서연은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담았다.

“동료 아닌가요? 우리.”

“……!”

소용돌이 휘말린 듯 하후천기의 가슴이 떨려 왔다. 몸에 그어진 혈선만큼 불에 덴 듯 얼굴이 화끈해졌다.

‘동료! 내가?’

무인이 동료라 함은 자신의 등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내 목의 칼보다 그 목의 칼이 더 마음 아려야 동료라 하는데.

그럴 자격이 없다 여겼다. 고작 세웠다는 투기가 도망치지 않는 것인데. 의지 자체로 격렬히 뿜어낼 용기조차 희미한 자신인데.

여기서 산다면 세상을 오시할 여협(女俠)이 될 여인이 동료라 칭해 줬다.

코가 시큰하고 목이 메어 옴은 벅찬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전했다. 불안은 이것이다.

“제가…….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달라진 걸 모르시나요?”

“예? 어떤?”

“처음엔 툭하면 뒤로 빠지려고 했는데, 아까부턴 한 발짝도 안 물러서려고 버텼잖아요. 안 그래요?”

“……아!”

하후천기의 몸이 벼락 맞은 듯 들썩였다.

‘내가 그랬구나.’

말을 듣기 전엔 몰랐다.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도망치지 말자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한데 그 마음이 발길을 잡아 줬다. 그녀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게.

초라하다고 생각한 결심 하나가 가져다준 기쁨.

찡해진 가슴이 싸하게 아려 왔다.

‘그래. 부족하지만, 모자라지만 이대로 최선을 다하자. 그러다 보면…….’

다시 힘을 찾은 눈빛엔 이제껏 없던 열기가 가득 서렸다.

당서하의 활기찬 목소리가 짧은 정적을 깨웠다.

“아! 시팔! 오늘따라 바람은 왜 이렇게 센 거야. 야! 준비해. 독 다 날아갔어.”

“용독술이 별론 거 아녜요?”

“이 새끼가 정말! 그럼 네가 해 볼래?”

“헉! 나 죽이고 싶어요?”

“자꾸 나불대면 그래 버릴까 싶다.”

“옙! 입 꾹 닫겠습니다.”

“빨리 자리나 잡아.”

변형된 대형이 갖춰졌다. 다시 이어진 공격진용 또한.

쇄도하는 쾌검, 어지러운 난검이 공간을 에워쌌다. 예기를 머금은 참격이 상대의 칼날을 탐했다.

쾅! 콰앙! 쇄애액! 카앙!

이젠 탐색전 없는 전장이 됐다.

금속성에 피어나던 하얀 불꽃이 어둠에 사그라지고, 거친 칼날이 살갗을 스친다. 쏟아지는 칼끝에 옷깃이 베이고 피륙이 선홍빛 붉음을 뿌려 댄다.

쉬이익! 사락! 찌이익!

전장에 뒤엉킨 이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상황을 조율하며 염이규를 견제하는 당서하의 입은 연신 고성을 터트린다.

“합진! 반보 뒤로! 우측 도와줘! 빨리!”

이마엔 지렁이 같은 핏줄이 꿈틀대도 사방을 둘러보는 눈엔 차디찬 한기만 담겼다.

눈 부릅뜨고 검을 내리치는 연사구에겐 광기 같은 살기가 풀어진다.

쇄애액! 콰쾅!

“개새끼들! 눈치만 보지 말고 오라니까! 부랄 찬 새끼들이 그렇게 쫄려 가지고서는!”

욕지거리 가득 담은 입은 닫힐 줄 몰라도, 예리한 칼날 담긴 시선은 한 점 흔들림이 없다.

꽉 다문 진서연의 입꼬리는 올라가 내려오질 않는다. 분노 담은 미소다.

포위망을 좁혀 오던 검격이 날카롭게 번득여도, 기의 비바람이 광풍처럼 몰아쳐도 오연히 짓쳐 낸다.

휘리릭! 카캉! 슈우욱!

생사의 기로에 선 무인의 것이라곤 절대 생각할 수 없는, 확신과 투지에 찬 미소. 굴하지 않는 의지를 동료에게 전하는 울림이다.

하후진의 굳은 표정은 한결같다. 머리 위로 기다란 칼날이 덮쳐 내려도, 가슴을 걷어차여 넘어져도, 사선으로 베어진 허리 잡고 뒹굴 때도, 어느새 등짝이 피 걸레가 됐어도, 꿈틀거리는 맹호의 눈동자는 적을 떠나지 않는다.

기의 파편이 무복을 찢어 내고 피부의 혈선은 늘어나지만, 쓰러질 듯 휘청거리다가도 어느새 간발의 차이로 검을 비껴 난다.

챙! 카앙! 슈우욱!

손아귀가 찢어질 듯 저릿한 하후천기의 혈흔은 점점 더 늘어났다.

여기저기 찢어진 무복 자락 사이로 핏물이 꾸역꾸역 새어 나온다. 얼굴은 검붉게 달아오르고 터진 입술엔 핏물이 흐른다. 온몸도 긴장과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린다.

“헉헉!”

하지만 피투성이 몰골이 돼 갈수록 마음은 조금씩 차가워진다. 불에 덴 듯 온몸이 화끈거리고, 숨은 헐떡거려지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얼굴 앞을 스치는 시릿한 가름에 전율이 와도, 이상하리만치 가슴은 비어짐에 고요해진다. 또 그 공간을 채워 오는 뭔가가 있다.

하후천기는 직감했다.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같이 만든 기운.

‘믿음!’

사선을 넘나드는 지금, 저 시린 칼에 맞서 등을 내준 이들, 그들이 전한 영혼의 울림이다. 이 어둠에 혼자가 아님을 알리는 빛이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동료야.’

끝없이 가슴을 물결치며 짙어지는 울림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다섯 모두가 만든 모두의 메아리. 그중 하나가 내 것이다.

꼬나 쥔 검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그 마음 담긴 검이 또 바람을 갈랐다.

휘이익!

피가 솟구치고 모가지가 부러져 바닥에 널브러지는 곳. 쥐어 짜내는 격한 신음이 하나둘 늘어나는 이곳. 고성과 살기가 넘실대는 이곳. 남의 목을 갈라야 내가 사는 이곳.

여긴 전장이다. 그 곳에 나와 동료가 있다.

서걱! 캉! 카캉!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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