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염이규의 시선이 당서하를 향했다.
“당가 여인이 왜 여기 있나?”
“멸마단이 악양에 온 거 몰라? 온 지 얼마 안 됐나 보네?”
염이규는 섬뜩한 미소를 그대로 피워냈다.
“이런! 껄끄러운 데군. 어떡하지? 그럼 우리 선택지도 자꾸 줄어드는데.”
“풋! 선택은 무슨! 복면 둘러쓴 새끼들이 잘도 살려 주겠다. 헛소리는 됐고. 너네 어디야? 이 판국에 떼거리로 이럴 곳이 도통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대답 대신 염이규의 시선이 목표를 향했다.
“네가 연사구지?”
“역시 나였나? 하! 시팔! 이놈의 인기를 어째! 몇 시진도 안됐는데.”
“쉽게 가 주면 나머진 편하게 보내 주지. 너 때문인데 미안할 거 아닌가.”
연사구도 시간을 끄는 게 최선임을 안다.
“원하는 게 은월청요검?”
“다른 게 있겠나.”
“근데 어쩌지? 지금 없는데.”
“걱정 말게. 자네 입만 있으면 되네. 나머진 알아서 하지.”
“내가 콱 뒈져 버리면 끝이네.”
“잡히기 전에 그러면 어쩔 수 없고. 한데 그러면 넷은 살아도 산 게 아니겠지.”
연사구의 비릿한 코웃음이 실소를 더했다.
“큭큭! 좀 쌈박한 협박 없어? 어째 흑도 나부랭이 씹어 대는 거랑 차이가 없어. 아! 그쪽이구나?”
염이규의 야릇한 시선이 진서연을 힐끔거렸다.
“쉽게 가 주면 하나는 약속하지. 저 계집은 살려 준다.”
“꼴에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근데 어쩌지? 저쪽도 멸마단인데.”
“저런 미모면 모험할 만하지. 약 좀 먹이고 골방에 가두면 쓸 만하겠어.”
진서연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해적들을 상대하면서 질리게 들은 말. 상대할수록 씹어 대던 말도 걸쭉해졌다.
“하여간 부실한 새끼들이 약 타령이지. 왜? 맨 정신엔 자신 없어? 아니면 꺼내 보든가.”
연사구의 입이 쫙 찢어졌다.
“큭큭! 야! 진 조장 다시 봐야겠어. 그 고운 입에 찰진 말이 딱 어울릴 줄 몰랐네.”
염이규의 차가운 미소가 하후가 두 사람을 향했다. 마지막 확인이 남았다.
“누가 담사운이지?”
순간 연사구의 눈이 불을 품었다. 그 이름을 안다는 건.
“어쩐지! 적운문, 아니 이 정도면 봉천문주 그 새끼가 보낸 거네. 하! 우라질 새끼들!”
하후천기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람을 잘못 봤다면 한 가닥 살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우린 침주 하후가다.”
“하후가?”
“난 소가주 하후천기, 이쪽은 ……하후진. 그자는 여기 없다.”
염이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거짓이 아닌 직감이 온다.
“어디 있지?”
연사구의 묵직한 시선이 진심을 담아냈다.
“몰라. 나도 알았으면 좋겠네. ……언제 올지도.”
우선 이 자리를 빨리 끝내고 찾으면 된다. 염이규는 광기 같은 살기를 풀어냈다.
“연사구! 검공을 내놓으면 너와 저 계집은 살려 주마. 물론 가두겠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다.”
“절반은 먼저 알려 주지. 대신 넷은 보내. 그럼 생각해 보고.”
“협상은 없다. 결정해.”
촌각이라도 더 지체시켜야 한다.
“다른 것도 있는데 그건 관심 없나?”
“말장난은 됐다. 시작하지.”
연사구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물론 먹히지 않겠지만 잠시 씨불이기엔 이만한 소재도 없다.
“소수마공은 어때? 은월청요검보다 낫지 않아?”
“크크! 시간 끌 거면 좀 그럴싸한 걸 꺼내지 그랬나. 도인이 소수마공을 가지고 있다니.”
당서하는 연사구를 향해 악을 바락 썼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네. 그딴 걸 협상거리라고 떠들어? 아우! 이런 새낄 믿고 뭘 하겠어!”
이미 상대는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상황. 그래도 자기편끼리라도 떠들면 조금이라도 지체될지 몰라 껴들었다.
연사구도 장단을 맞췄다. 사실이기도 하고.
“나 구결 싹 다 들었어요! 정말이라니까!”
“에라! 관둬라, 관둬. 빨리 싸울 준비나 해, 이 새끼야!”
“혈교 여인이 알려 준 건데 읊어 줘요? 천이개합, 오색령인, 은무위호∼∼.”
순간 염이규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쉽지 않겠어.’
같잖은 거짓 소수마공이야 관심도 없다. 하지만 이 급박한 상황에 부리는 저 여유, 진짜를 읊어 대듯 떨림 하나 없는 낭랑한 목소리, 그 담대함이 걱정이다.
‘죽인다고 불 놈이 아니다. 다른 자로 협박하는 수밖에.’
염이규의 전음이 수하들을 향했다.
-공격한다. 단! 목숨 줄은 끊지 마라. 알았나?
-옛!
전방을 사선으로 훑은 당서하의 시선에 섬광이 스쳤다. 검을 꼬나 잡는 움직임이 여럿 보인다.
‘시작.’
이미 넷에게 전음으로 계획을 알린 상황.
-무조건 대형을 유지하고 놈이 올 때까지 버틴다. 두목 새끼는 혼자 안 되니까 협공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독을 뿌릴게. 근데 얼마 안 남아서 정말 다급할 때만 쓴다. 알았어?
-걱정 마세요. 놈이 올 때 다 됐어요.
-그러면 좋고.
그때 의아한 하후천기가 나섰다.
-저쪽 수장은 초절정 상 이상이오. 청호방주가 온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더 늦으면 빠져나갈 힘도 없게 되오. 지금이라도 뚫는 게…….
동시에 여러 전음이 하후천기를 향했다.
-놈만 오면 됩니다.
-물론.
-너나 대형 잘 유지해. 겁먹지 말고.
-소가주. 진퇴는 나랑 보조 맞추는 거 잊지 말아요. 아까처럼 하면 둘 다 힘들어져요.
동문서답에 하후천기만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파팟! 처억! 타닥!
땅을 찍는 수많은 진각이 대지를 울렸다. 수많은 검영이 공간을 점하고 밀려들었다.
휘이익! 솨아악!
어둠에도 흙먼지가 시야를 흐린다. 거친 바람이 피부를 스치자 하후천기가 움찔했다. 절로 밟아지는 퇴보. 순간 옆에 있던 진서연의 고성이 날아들었다.
“정신 차려! 일 보 전진! 내 옆에 붙어!”
“흡!”
창피함과 모멸감에 놀란 몸이 절로 명령을 따랐다.
타닥!
팔방을 점하고 쇄도하던 도검이 어둠을 갈랐다. 달빛 어린 검날의 잔상이 공간을 일그러트릴 때, 당서하의 거친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일 보 퇴!”
사사삭! 사삭!
동시에 물러난 다섯의 반원이 폭풍 같은 검세를 일시 벗어나자, 근접한 칼날 몇 개가 질주에 가속을 더했다.
슈우욱! 슈욱!
순간 뛰쳐나갈 듯 앞으로 미끄러진 당서하의 몸, 그 손에 드리운 서릿발 같은 검기가 줄줄이 솟구쳤다.
쉬이익!
가슴을 찔러 온 검날을 피하지 않았다. 상대의 예봉을 꺾기 위한 정면 공격.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검 끝이 꿈틀거렸다.
사라락!
이미 작정한 상대도 피하지 않았다. 대기를 가르며 무서운 파공음을 토해 낸 검격이 부딪쳤다.
카아앙! 캉!
순간 복면인의 등골이 시릿해졌다.
‘충격이 약하다!’
분명 상대는 두 치가 넘는 검기, 자신 또한 같은 힘으로 부딪쳤다. 검격이 막힌 반동으로 둘 다 튕겨 나가야 하는데, 밀고 들어간 힘 그대로 몸이 빨려든다. 힘을 거뒀다는 소리. 의아함이 올라온다.
‘이럴 리가 없는데.’
검기로 부딪치는 그 순간 힘을 거두면 몸이 고스란히 충격을 떠안는다. 그 찰나에 몸을 뺀다는 건 초절정 중상이나 가능한 경지.
‘절대 충격에서 못 벗어난다.’
그 확신 담은 시선이 여인을 훑으려 할 때,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여인 대신 또 다른 여인이 쇄도했다.
휘릭!
검진 내에서 둘이 회전하듯 자리를 바꾼 형국.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두 여인이 손을 잡고 풍차처럼 회전하는 게.
부딪침과 동시에 다른 여인이 잡아당겨 충격을 상쇄한 셈.
순간 한 줄기 바람이 귓가를 치고 전율을 불렀다. 손을 맞잡은 원심력으로 나선의 검로를 타고 미친 듯 질주해 오는 칼날.
쇄애액!
숨이 덜컥 막히는 찰나, 전신을 후려치는 충격이 뇌리를 흔들었다.
푸욱! 우두둑!
“커억!”
옆구리를 쑤셔 박은 칼날, 뼈 부러지는 소리, 엄청난 격통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위치를 바꿔 나선으로 휘어진 당서하의 검 또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다른 상대의 목을 뚫어 냈다. 이자 또한 시야에 사라진 상대를 찾으려 허둥댄 탓이다.
쉬이익! 푸욱! 두둑!
“켁!”
벌어진 입에서 왈칵 피 분수가 뿜어졌다.
푸우! 최라락!
의식을 잃어 가던 몸이 두 팔을 허우적거려 허공을 부여잡았다.
휘릭!
점차 허물어져 가던 몸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투욱!
피를 뒤집어쓴 당서하가 악귀처럼 웃어 댔다.
“이 병신들! 아까 말했잖아! 우리 둘 멸마단이라고. 합공은 예상했어야지. 아! 미안. 그건 말 안 했네. 같은 대에 있다는 건.”
도망과 추격이 아닌 맞싸움. 그 시작에 기선 제압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제야 하후천기는 깨달았다. 방금 진서연이 커다란 목소리로 자신을 책망하듯 한 말.
-내 옆에 붙어!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다.
‘일부러 그랬구나.’
당서하를 정점으로 양쪽 둘이 공조하는 것처럼 속이려고 한 말.
문득 억누르기 어려운 가슴 떨림이 전신을 휘감았다. 뇌를 울리는 강렬한 외침으로 다가오는 한마디.
‘저들은 무인이다!’
이 급박한 상황에도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는 두 여인.
순간 가슴 저 밑에서 복받친 무언가가 가슴을 지나 목 줄기를 타고 뜨거운 숨결을 토해 냈다.
‘난……. 뭐지?’
울컥한 격정이, 요동치는 분노가, 무너진 자존심이 울부짖듯 가슴을 두들겨 댔다.
생사의 갈림길, 아니 거의 죽음이 기정사실처럼 된 아까부터, 두려움과 공포에 사시나무처럼 온몸이 떨렸다.
한데 당서하도, 연사구도, 심지어 진서연까지 걸쭉한 음담패설을 천연덕스럽게 입에 담았다. 그 고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심지어 동생 하후진도 꽉 다문 입가에 투기만 그득한 표정.
소리 죽인 넋두리만 허공을 향했다.
‘창피해.’
자신도 저러고 싶다. 두려움의 빗장을 확 열어젖히고 저들과 함께, 그 옆에 나란히 서고 싶다.
그 끓어오르는 욕망을 악 받친 절규에 담고 싶다.
하지만 깊은 회한이 담긴 씁쓸한 미소만 떠오른다.
‘난……. 그렇게 못 해!’
자신을 안다. 스스로 느낀다. 자각한다. 자신이 어떤 무인인지.
살아온 삶이, 그동안의 마음가짐이 그걸 깨닫게 한다.
아무리 용기 내도, 아무리 주먹을 불끈 쥐어 봐도.
‘죽는 게 겁나. 난 떨쳐 버릴 수 없어.’
방법은 안다. 수없이 시도해 봤으니까. 떨쳐 버리자면, 검을 든 그날부터 두려움의 기억을 하나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응시하면 된다. 그 부끄럽고 창피했던 순간들을 감내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수많은 좌절 후에 알았다.
‘내 무인의 그릇이 원래 그래.’
그 그릇을 인식한 후, 거기에 맞게 살아온 인생.
하지만 이 순간, 영혼의 바람소리와 같은 울림이 귀에 메아리쳤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처럼.
‘넌 저들과 같을 수 없다. 하나 지금과 달라질 순 있다.’
뇌를 울리는 강렬한 외침으로 다가온 그 말.
순간 다시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부릅뜬 눈에서 안광이 이글거렸다.
‘그래. 돕진 못해도, 나서진 못해도……. 도망치지는 말자.’
그게 최선이다. 내 그릇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용기.
못 할 걸 빤히 아는데 욕심낼 때가 아니다. 내 그릇이 담을 수 있는 몫.
‘그것만은 꼭!’
하후천기는 검을 다시 부여잡았다.
꾸욱!
그래도 떨린다. 두렵다. 겁이 난다. 저 서슬 퍼런 칼날에 몸도 움찔거린다. 귓전을 울리는 칼바람에 몸서리쳐진다.
우우웅!
내력을 아무리 올려도 두려움이 준 손 떨림 그 자체는 멈춰지지 않는다. 하지만 도약은 못 해도, 땅을 질질 끄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은 안 친다. 절대!’
저들에게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한 목표지만.
나만의 투기는 세웠다.
그 결심만큼은 꼭 지키리라. 그 마음 담은 칼날에 내력을 더 실어 냈다.
우우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