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반 시진 후, 악양예관 정원.
번져 가는 석양이 어슴푸레 어둠을 몰고 올 즈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당서하의 입이 연신 벌어졌다.
“야! 너흰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난 거냐? 한 놈도 아니고 둘 다 기연이라니.”
연사구의 입이 비틀어졌다.
“아니! 딴 사람도 아니고 당문 사람이 그런 말을 해요? 절대무공이 여러 개나 있으면서. 참내!”
“이 멍청아! 난 여자잖아!”
“……아! 맞다. 당문은 출가외인에겐 비전을 안 전하지.”
“내가 왜 검을 익혔겠어. 독하고 암기는 모든 게 불가. 대신 검공은 절대무공이 아니면 허용되거든.”
“뭐 그래도 당문 검이면 대단한 거죠.”
“너 지금 약 올리는 거지?”
“아우! 남 잘되는 게 그렇게 배 아파요?”
당서하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이 걱정에 부리나케 뛰어왔다.
“잘된 거 맞아? 어쩌자고 그걸 알렸어?”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녔잖아요.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대책은 있고?”
“별거 있나요. 누구한테 딱 달라붙어 있어야지.”
당서하는 사방을 휘휘 둘러봤다. 주변엔 진서연뿐.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나저나 얘는 어디 갔어?”
“뭐 좀 알아보러 갔어요.”
“뭘?”
“그런 게 있어요.”
그때 하후진이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연 형님! 여기 계셨군요?”
“어! 왔냐?”
“몸은 괜찮으십니까?”
연사구는 가볍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정도야 멀쩡……?”
그러다 눈을 멀뚱멀뚱 떴다. 정원 안으로 엉거주춤 들어오는 자.
‘저 인간이 왜?’
잠시 정적이 흐를 즈음, 하후진의 시선이 양쪽을 번 갈았다.
“소가주께서 형님 걱정된다고 같이 오셨어요.”
“어! 그래.”
한편 하후천기의 휘둥그레진 시선은 다른 쪽을 향했다. 여기서 보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여인.
“진 소저! ……왜 여기에?”
한데 의아함에 다가가다, 커다래졌던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이리 아름답다니!’
진서연의 미모야 이미 알고 있던 사실. 당시에도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절로 떨렸는데, 지금은 경악 그 자체가 돼 버렸다.
가녀린 바람결이 살랑거리는 정원 한쪽 편, 우수(憂愁)에 젖은 듯 허공을 가만히 향한 여인의 옆모습. 뇌리에 전율이 흘렀다.
‘달라졌어. 뭔가.’
날카로운 콧날과 굳게 다문 선홍빛 입술, 붓으로 그린 듯 상큼하게 휘어져 올라간 눈썹, 그 모든 이목구비가 제각기 그녀의 매력을 뿜어낸다.
하지만 수많은 여인 중에도 그녀를 빛나게 한 건 자연스레 빛을 발하는 독특한 향기였다. 한 번만 봐도 잊어버릴 수 없는 고결함,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할 거 같은 그런 신비함, 그것이 그녀의 내음이었는데.
하후천기는 그제야 깨달았다.
‘달라진 게 아니라 더해졌어.’
이제 그녀에겐 이전의 향기에 청포도 껍질 같은 상큼함, 싱그러운 청초함이 더해져 조화를 이룬다. 소녀가 된 듯한 느낌.
새벽이슬 머금은 듯 촉촉한 눈망울과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하후천기의 가슴은 두방망이질 쳤다.
약간 찡그린 그녀의 미간이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의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서시빈목(西施嚬目).’
심장병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많은 여인이 흉내 냈다는 그 이야기.
머릿속이 온통 텅 비어 버린 지금, 그저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때 진서연의 고개가 가볍게 숙여졌다.
“오랜만이네요.”
“……아! 예. 한데 여긴 어떻게?”
“상부 지시가 있어서 잠시 머물고 있어요.”
“그러시군요. 근데 무슨 일인지?”
진서연은 화두를 돌렸다.
“드릴 얘기는 아녜요. 그보다 절 보러 오신 건 아닌 거 같은데.”
“아! 예.”
그때 연사구가 다가왔다.
“하하! 소가주님. 거기 계시다간 얼굴이 불타겠습니다.”
“크흠! 오랜만일세. 걱정돼서 와 봤네.”
“이리 오시죠. 예까지 오셨는데 차라도 대접해야죠.”
“그, 그러지.”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한동안 흐를 즈음, 연사구의 입은 연신 떠벌려졌다. 어쨌든 찾아온 손님이라 분위기는 살려야 하니까.
“……그래서 예관 인수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다.”
하후천기는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그럼 청호방주도 여기 있단 말인가?”
“예. 일이 있어 나갔는데 좀 늦을 겁니다.”
“……!”
하후천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같이 보기엔 아직도 달갑지 않은 자. 다행히 늦게 온다니 적당한 시점에 일어나면 된다.
* * *
얼마 후, 봉천문 문주실.
적운문주 설도승의 눈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야접 부련주 행동이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둘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빛으로 마주쳤다.
“노리는 게 아마도 연사구의 무공 같습니다만.”
“죽이는 김에 빼 오려는 게 확실해.”
“하면 이대로 가만있으실 겁니까?”
봉천문주 고주양은 아쉬운 탄식이 절로 흘렀다.
“허! 그것참! 우리야 야접과 입장이 다르지. 은월청요검을 빼 온다 한들 대놓고 익힐 수도 없지 않나.”
“그거야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저들이 뺏은 증거를 우리가 가지면 얘긴 달라집니다.”
“아! 그걸 빌미로 더 요구하자?”
“예. 그러자면 저들 뒤를 쫓아야 하는데,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이미 예관에 거의 다 갔을…….”
순간 고주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쥐새끼가 있구나!”
지붕을 탁하고 밟는 소리가 확연히 들렸다.
“예? 어떤 놈이?”
파팟!
급히 밖으로 나와 표홀히 처마를 타 넘어 전각 한쪽에 올라섰다.
타닥!
주변을 둘러보던 고주양의 시선이 전각 바닥을 향했다. 거센 진각에 부서진 게 확실한 기와.
“분명히 여기 있었네.”
“누굴까요? 내기를 두르고 한 얘길 들었을 리는 없고.”
“그럴 리는 없겠지. 하나 이 정도 진각이면 들킬 걸 알고도 급히 떠난 게야.”
“그럼?”
“안 되겠네. 아이들에게 경계하라 이르고 우린 가 보세. 호위대를 데리고 가지.”
“알겠습니다.”
긴급한 타종이 봉천문 장원 안에 휘몰아쳤다.
뎅! 데엥!
한편, 장원 외곽을 벗어난 무윤의 신형은 바람을 타넘어 대기를 찢어발겼다.
쇄애액!
고요한 허공에 회오리친 바람이 머리칼을 풀어헤쳤다.
화라락!
온 내력을 끌어올린 얼굴엔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바보같이!’
스스로에 대한 분노다. 뼈아픈 자책이다.
개방의 부단주 섭고량이 했던 말이 뇌리를 울린다.
-야접(夜蝶)이 뭘 꾸미는 게 확실합니다. 총단 무인에다 최고수인 장로 염이규도 왔거든요. 그자는 아마 초절정 상을 넘었을 겁니다.
그 말을 스쳐 들은 게 후회막급이다. 뼈저린 후회가 입술을 짓씹게 만든다.
‘야접을 왜 간과했을까.’
물론 그것만으로 이 상황을 유추할 순 없다. 하지만 변수라 여겼다면 연사구를 절대 혼자 두지 않았다. 절대무공에 가장 목마른 곳 중 하나고, 워낙 은밀한 곳인데. 거기에 정사 무인들이 아직 있는데 설마 오늘 움직일 자가 있을까 하는 방심이 부른 화다.
빈 구석구석 파고드는 쓰라림은 과거의 친구 여단까지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상황이 비슷했다.
여단만 두고 갔다가 돌아와 보니 역습을 당했고, 그 와중에 여휘와 자신을 구한다고 달려들다 떠나간 친구.
그 아픔이 아직도 가슴 저 밑에 멍울져 남아 있는데.
하지만 지금은 후회를 곱씹을 때가 아니다. 달려야 한다. 땅을 박차야 한다. 바람을 타 넘어야 한다.
쉬이익! 휘릭!
허공을 관통하듯 바람을 꿰뚫었다. 들불처럼 일으킨 내력을 발바닥 용천혈에 때려 박았다.
파파팟!
미처 피하지 못한 바람이 거칠게 귓가를 쓸어 댔다.
휘이익! 휙!
질주에 배가된 가속이 울분에 서리서리 뻗쳐오른 기파를 바람에 흩날렸다.
파파팟! 파팟!
* * *
같은 시각, 예관 인근 산길.
캉! 카앙! 콰쾅! 콰지직!
얽히고설킨 무형의 불꽃이 어둠을 뚫고 제 몸을 불살랐다.
화라락! 파라락!
한쪽 구석에 몰려 반원을 그린 이는 다섯. 둘러싼 복면인은 이십여 명. 이미 널브러진 자들은 대여섯.
당서하를 중심으로 옆엔 연사구와 진서연, 맨 끝에 하후가 둘이 자리했다. 전장을 조율하던 당서하의 외침이 하후천기를 향했다.
“이 멍청아! 간격을 더 좁혀! 벌어지면 안 돼! 죽고 싶어?”
우측 끝에 있던 하후천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하지만 따라야 했다. 몸이 안다. 그녀 말대로 해서 위기를 넘긴 게 한두 번이 아님을. 생사의 갈림길에선 여인의 욕 따위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타닥!
앞에 선 복면인의 날 선 고함이 수하들을 향했다.
“당문의 독이다. 절대 다가서지 마라!”
죽은 까마귀에서 추출한 자오독(慈烏毒). 당문의 여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극독으로 호흡하는 즉시 절명한다. 당서하가 꽉 막힌 동굴에선 사용하지 못했지만 드넓은 산야에서 이만큼 유용한 게 없다.
집단전엔 누구보다 경험이 많은 그녀. 사각의 움직임까지 주시하던 그녀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누구지?’
돌아가는 하후진을 배웅한다고 나선 연사구. 그 바람에 두 여인도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그렇게 예관을 나와 후미진 산길 근처에서 갑자기 나타난 자들.
남은 이십여 명 중 초절정은 두셋, 이외엔 절정과 일류급. 이 정도면 맞서진 못해도 피할 순 있었다. 한데 복면 밖으로 흰 수염을 휘날리는 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이닥치는 검격, 자유자재로 휘몰아치며 요혈을 노리는 검로에 어쩔 수 없이 이 구석까지 몰린 상황.
자오독을 저자에게만 집중했기에 그나마 여기까진 안전하게 왔지만, 이제 남은 독은 몇 번 뿌릴 정도.
잠시 한숨을 돌린 당서하의 칼날 같은 시선이 주위를 둘렀다. 하후천기의 갈가리 찢긴 무복 자락엔 피가 흥건해졌다. 하후진의 앞섶은 검붉게 물들었다.
둘을 살피던 당서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실전 경험이 적어. 저렇게 몸이 굳어서야…….’
다행히 연사구와 진서연은 무사한 데다, 한순간 돌파를 대비한 자신의 지시 때문에 아직 전력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중과부적(衆寡不敵). 수도 많고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까지 있는 상황. 바랄 건 하나뿐. 연사구에게 무윤의 행방을 들었다. 정탐만 하고 돌아온다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올 시간이 다 됐어. 조금만 버티면 돼.’
잠시 독연이 허공을 휩쓴 사이 간격이 벌어졌다. 이때 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장난기 더한 비릿한 웃음으로 티 나게 입가를 비틀었다.
“하! 시팔! 내가 당문인 걸 알고도 이런단 말이지! 어디 새끼들이야? 뭐 쫄리면 아가리 닫아 버리든가.”
장로 염이규가 나섰다. 그 또한 이 다섯이 궁금한 건 매한가지.
연사구 외엔 바로 제압하리라 여겼는데. 급습 이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섯이 죽어 나갔다. 물론 무공을 찾는 게 최우선이라 몰아붙이는 데 주력한 탓이긴 하지만.
‘나이도 어린데 전부 절정 끝. 거기에 정파가 확실하고.’
이 정도면 분명 거대 가문 출신.
‘게다가 저 계집은 누굴까?’
야접 장로인 자신도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의 미모. 다 죽일 생각에서 저년만은 무조건 살리기로 이미 마음을 돌렸다.
포위망을 두른 이상 물을 때가 됐다.
‘실토하게 만드는 게 최선.’
잠시 검은 내려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