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연사구 발언의 의미.
우선 모인 무인들에겐 뜻하는 건.
천 년 전 중원의 절대무공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처럼 무공 또한 그 긴 세월 발전해 온 건 당연한 일. 그 다양성과 깊이, 안정성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한데 천 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변치 않는 것 또한 있다. 아니, 더해지는 경우도.
바로 절대무공이 그렇다. 극의에 다다르면 화경을 바라볼 무공, 그건 현 세상에도 소수만이 가졌으니까.
무공이란 인간의 몸을 다루는 공부. 그중에도 화경은 깨달음의 영역. 과거의 것이 현재보다 못하리란 법이 없다. 공자와 불타의 말씀처럼.
그간 무공의 발전이 집약된 건 주로 내공심법. 효율과 안정성 면에선 장족의 발전을 했다.
더 많은 자가 익히고, 더 빨리 경지에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절정과 초절정 고수가 현격히 많아진 이유가 그것.
하지만 절대자의 경지, 깨달음의 공부는 그 탓에 더 좁아지기도 했다.
남들이 간 길 따라만 가서 이룰 수 있다면 왜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절대자 수가 비슷할까.
열 배나 사람이 늘어도 남 따라 똑같은 길을 가는 이가 그만큼 많아졌기에 벌어진 일.
거기에 과거 지혜로도 깨달음의 무학이었다면, 현재의 지식을 더해서 그 이상을 만들 수도 있다.
과거의 절대무공 하나가 어쩌다 세상에 나오면, 혈전이 벌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고.
한데 그런 절대의 무공을, 하나도 아니고 몇 개를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
그런 존재를 연사구가 세상에 꺼냈다.
무윤은 연사구와 나눈 전음을 떠올렸다.
진실의 조작을 위해선 큰 틀에선 내용을 알려야 한다. 그래서 짜낸 대로 설명하던 중 연사구가 툭 꺼낸 말.
-그러니까 조사란 분이 여휘와 무륜과 친구다?
-그래.
-그 세 사람이 남긴 기록이 너한테 있고?
-그래서 기록이 진실이라 확신했지.
연사구는 정말 궁금한 걸 꺼냈다.
-이제 정말 다 깐 거냐?
-……남았다.
-다는 필요 없다. 그래도 다음 조작할 때 쓸 건 미리 얘기해. 그래야 나도 머리 싸맬 거 아냐.
-남긴 무공이 더 있는데 두 가지 용도로 쓰려고.
-어떻게?
-기록만 가지고 뒤집기 어려울 때.
-기록과 무공을 연관시켜 세상에 꺼낸다?
-글이야 의심해도 무공은 확실한 증거니까.
-그렇겠지. 물론 그만한 무공일 거고?
-그래.
-두 번째는?
-세력이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이건 나중 얘기지.
-지금 고민할 건 아니네.
-그렇지.
그때 연사구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가만! 기록과 연관시킬 무공이라 그랬지?
-왜? 좋은 생각 있어?
-도천 그분 기록이면 딱 떠오르는 거 없어?
-……뭐?
-은월청요검!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뭔 개소리야! 그걸 알리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알지. 조만간 내가 강호에서 가장 유명해지겠지.
-이 새끼가 정말! 장난칠 게 따로 있지.
-나 장난 아닌데.
-……왜 그러는데? 그게 알려지면 위험해지는 거 몰라?
-잘 알지. 나는 물론 우리 아버지, 어쩌면 장사와 침주 하오문까지 영향이 가겠지.
-근데 왜 그래?
-왜긴! 너도 봤잖아? 이게 하오문의 현실이야. 내가 초절정인 사실 가지고 잠깐 떠들어 대는 정도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앞으로 수십 년은 더.
-그런 푸대접은 너희만 받는 게 아니잖아. 다수가 그런데. 그걸 깨자고 이런 무리수를 두자고? 목숨까지 걸면서?
-죽을 수도 있겠지. 근데 그럴 가치가 있어.
-……하오문 구성원들?
-그래, 하오문에도 절대의 무공이 있다. 또 그 길을 가는 신성도 있다. 이게 어떤 반향을 불러올지 넌 상상이 안 될 거다.
-다 좋은데, 그러다 뒈지면? 말짱 꽝이잖아.
-세상에 적만 있는 법은 없어. 아군도 생기겠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그래도 너무 급한 결정이야. 지금 말고 나중에 하자.
-네 계획은 무리수 아니고?
-그거야 이만한 기회가 없으니까…….
-나도 마찬가지다.
연사구 또한 한번 결심하면 밀고 가는 놈이다. 그 의지에 담긴 분노와 열망 또한 잘 알고. 과거 척고련을 세웠을 때 자신도 그랬으니까.
위험은 무조건 따라온다. 하지만 그로 인한 기회도 물론.
한참을 고심하던 무윤은 결국 답을 내렸다. 스스로 판단할 때다.
-결정은 내가 해. 근데 심사숙고해라. 알았지?
-그래.
한데 결국 질러 버렸다.
부군사 독고윤극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분이 누군가?”
“모릅니다. 딱 한 번 뵀는데 도인이신 것만 압니다.”
“전혀 안 밝혔단 말인가?”
“세상과 연을 끊고 사신다 했습니다. 다만 출처를 알려 주실 때 들은 얘기가 이번 일과 일맥상통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서문가 군사 서문신유의 눈이 깊어졌다.
“은월청요검은 확실하다고 보는가?”
“지금은 확신합니다. 제 몸이 아니까요.”
부군사 제갈세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안 밝혀도 되는데 왜 그랬죠? 위험해질 수 있는데.”
“하오문도가 초절정에 올랐는데 다들 궁금하겠죠. 절 조사하고 뭐가 있는지 캘 사람이 많을 겁니다. 어차피 위험해집니다.”
“그럴 바에야 알리고 세상이 주시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네요.”
이후로도 수많은 질문이 쏟아진 후 자리는 정리됐다.
과거의 절대무공, 그 존재가 확인된 이상.
일파만파의 충격이 강호를 휩쓸 건 자명한 일.
그 폭풍의 중심에 연사구가 서게 됐다. 자신의 의지로.
* * *
예관으로 돌아가는 길.
격정과 환희를 토해 내던 예관주 조충량이 진정되자, 연사구의 전음이 무윤을 향했다.
당장 닥친 현안이 있다.
-적운문은 어떻게 할래?
-이번에 정리하자.
연사구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도승을 죽이잔 말이지?
-우린 침주에 계속 있기 어려울 거야. 지금이 적기다.
-그렇긴 한데, 언제 하려고? 우리가 의심받지 않으려면 당장은 그렇고, 전쟁이 끝나서 곧 돌아갈 테니까 악양을 벗어나면 그때?
-그게 좋긴 한데, 설도승이 바로 움직일 수도 있어.
-에이! 다들 주시하고 있는데 설마.
-봉천문이 예관을 살피고 있었어. 아까 한 놈 잡긴 했는데 몇 놈이 더 살폈대.
-……그럼 널?
-기녀들이 날 봤잖아. 내가 있는 걸 지금쯤 알았을 거야.
-그래? 그럼 설도승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겠지. 게다가 널 죽이면 오만 냥 안 갚아도 되고. 그럼 기다리다 잡자?
-뭐가 됐든 우린 줄 모르게 처리하는 게 최고지. 오늘 밤에 가서 상황부터 살펴볼게.
-혼자?
-너 안 들킬 자신 있어?
-……!
그때 저 멀리서 십여 명이 달려왔다.
타다닥!
약양 하오문 지부장 각추염은 오자마자 연사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눈가의 글썽거림이 흥분과 격정을 알렸다.
“사구야!”
“어! 아저씨! 여긴 어떻게?”
“이놈아! 왔으면 먼저 들렀어야지. 사고는 다 쳐 놓고 나중에 듣게 해!”
“헤헤! 죄송해요. 조용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어디 다친 덴 없고?”
“보세요. 멀쩡하잖아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각추염은 바로 물었다. 이미 보고를 받았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이 그리 만든다.
“사, 사실이냐?”
“뭐가요?”
“네가 초절정이고 은월청요검도 절대무공이란 게?”
“에이! 수백 명이 봤는데 지부장님이 그걸 안 믿으면 어떡해요.”
“허허! 들었지. 그래도 네놈 입으로 듣고 싶었다.”
“다 사실이에요.”
“그랬구나. 허허! 그게 정말이었어.”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다. 네놈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하여간 정말 장하구나, 장해. 허허!”
“이제 기 좀 펴고 사시겠죠?”
순간 각추염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이놈아, 그렇긴 한데 이리 크게 일을 벌이면 어떡해? 앞으로 얼마나 위험해질지 몰라?”
연사구는 지부장과 문도들을 바라보는 눈 가득 불꽃을 담았다.
“숨긴다고 좋을 것도 없어요. 이젠 대놓고 알려야 그딴 놈들이 달라붙지 못해요. 우리 편도 더 만들 수 있고.”
“그렇긴 하다만,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에이! 저 모르세요? 잔머리에 눈치 하나는 저 따라올 사람 없잖아요.”
“허! 그놈 참!”
무윤과 진서연은 연사구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지금은 저들만의 기쁨을 만끽할 때. 비켜 줘야 한다.
진서연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맺혔다. 일행에게 둘러싸인 연사구의 환한 표정, 또 희망과 격정 가득한 하오문도들.
그 모습이 문득 과거의 추억을 떠올려 준다. 절정을 넘었을 때 내 일같이 기뻐해 주던 사형제의 모습이.
순간 또 아련함이 가슴을 저며 온다.
보타문 최고의 기재, 처음 들을 때 온 가슴을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 채웠던 말.
한데 어느 순간 사숙들의 그 말이 더해질 때마다 사형제들은 한 걸음씩 멀어져 갔다.
소검후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눈에 띄게 커진 반목. 그때부턴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눈치 보며 감추기 급급했다.
이젠 너무도 잘 안다. 무리에서 혼자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되면 어찌 되는지.
소검후를 포기하고 멸마단으로 방향을 정한 것도, 같이 크고 자란 이들의 시기와 질투의 눈빛, 그걸 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지금 저들은 과거 자신이 절정에 오를 때, 환호해 주던 딱 그 모습.
문득 혼자만의 바람을 속마음으로 흘렸다.
‘그 마음 변치 않기를.’
경쟁이라 여기는 순간 자존심은 상대를 주목하게 만든다. 경외이건 질시건 인간인 이상 감정이 요동치게 된다.
저 하오문 내에도 누군가는 연사구를 쫓고 싶은 자가 있을 거고, 그런 자가 많아지면 언젠가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다 문득 진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연사구가 떠들어 대는 말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생각.
‘혹시 은월청요검을 전한 도인이 무윤의 사부?’
바라타나티암심법도 천 년 전의 것. 은월청요검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침주와 이곳에서의 모든 정황이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 간다.
‘그런 거 같아.’
하지만 호기심에 물을 일도 아니다. 남의 사문 일인데.
그렇게 생각을 접으려는 찰나, 문득 무윤이 심법을 전할 때 한 말이 생각났다.
-전한 스님께선 처음부터 이 춤에 무공이 담긴 걸 아셨습니다. 당연히 심법이 있을 거라 생각하시고 몇 년을 찾다가 구하신 겁니다.
-보타문에 진경이 있는 이상, 잃어버린 심법을 찾은 겁니다. 사문의 법도에 위배되는 게 아니죠.
순간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찾다가 구하신 거면 그 도인분께 받았다는 얘긴데.’
무윤은 사문에 전한 불경도, 바라타나티암진경도 어떤 스님이 전한 것이라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과거 무륜이란 자가 여러 무공을 돌려줬다고 했어. 혹 그중의 하나? 그럼 이 심법이 정말 불가의 것일까?’
스님이란 존재에 대한 의구심도 커져만 갔다.
‘정말 스님이란 분이 계셨을까? 그 도인이란 분이 불법에도 정통했을 수 있어. 그럼 심법이 사문의 것이 아닐 수도?’
이제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인 심법. 한데 불안한 이유는 단 하나. 심법의 가치와 그 깊이는 의심의 여지도 없다.
‘춤은 분명 불무가 맞아. 한데 이 심법을 다른 데서 가져온 거라면?’
사문의 법도에 위배된다. 그 어떤 사안보다 엄중한 규율. 사지 근맥을 자르고 문도의 자격도 박탈된다.
이러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아까 비무의 결과도 아직 못 들었다. 연사구의 일이 급했으니까.
진서연의 전음이 무윤을 향했다.
-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 아까 비무 궁금하셨겠네요. 이제 말씀드릴게요.
-그 전에 다른 것부터.
-어떤?
-이 심법, 정말 불가의 것이 맞나요?
-……그건 갑자기 왜?
-죄송해요. 의심하는 건 아닌데, 심법을 전했다는 스님하고 연 당주가 말한 도인, 그분이 전했다는 천 년 전 무공, 뭔가 꼬여 있는 거 같아서.
-……!
역시 급히 짠 계획은 허술하기 마련. 다행히 이건 진서연에게만 꼬인 문제다. 풀기도 쉽다. 다는 아니지만 더 많은 사실을 알리면 되니까.
그래도 고민되는 게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