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97화 (97/161)

9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사도련 부군사 독고윤극의 시선이 양쪽을 번갈았다.

“한쪽이 항복하지 않는 한 비무는 계속되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겠소.”

연사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드릴 말이 있습니다.”

“뭔가? 혹 비무를 거부하는가?”

“거부할 수나 있습니까?”

“하면?”

“여기 계신 분들께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그러게.”

연사구의 진중한 시선이 주변을 휘휘 둘렀다.

“전 이 비무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좌중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이제 와서 비무를 포기하겠다고?”

“아뇨, 비무는 해야죠. 감히 어떤 분들이 결정하신 건데 용빼는 재주가 있겠습니까?”

“크크! 말에 뼈가 있구먼. 어디 더 해 보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암수를 쓰지 않았습니다. 근데 왜 이 꼴이 됐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바보지 뭡니까.”

“허허! 어째서?”

“시비를 걸 때 그냥 제 성질대로 패 버렸으면 간단했을 걸, 괜히 여러분들이 있는 자리라 조심한다고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거든요.”

“크크! 그 친구 입은 살았군그래.”

“그래서 이젠 제 성질대로 해 볼까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제가 만약 정, 사 어느 한쪽 사람이었다면! 바로 비무란 결정이 내려졌겠습니까?”

그때 당시 상황을 정확히 본 초절정 낭인 섭유명이 나섰다. 빤한 수작이 눈앞에 펼쳐지자 심사가 뒤틀렸다. 그래도 평소 같으면 입 꾹 닫고 있겠는데, 이럴 땐 낭인이 좋은 게 있다.

‘어차피 전쟁도 끝났으니 떠나면 그만이지.’

그 생각에 작심하고 나섰다.

“아니겠지. 더 조사하고 나서 결정했을 게야. 사인(死因)도 살피고 증언도 더 들었을 거고, 또 최소한 저 비수의 출처가 어딘지 정도는 따졌겠지.”

연사구는 싱긋 웃고는 깊게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 말을 대신 해 주셨네요. 그럼 이유도 아시겠지요?”

섭유명은 가볍게 손사래 쳤다.

“이 사람아, 나도 홧김에 나서긴 했네만 더하면 내 낭인 생활은 끝일세. 좀 봐주시게.”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

“한데 여기서 그걸 따져 뭐 하겠나. 강호란 원래 그런 곳인데. 자네 또한 모르지 않았을 거고.”

“물론이죠. 저도 별거 없는 하오문도이지만 그것도 힘이라고 뻐기곤 했으니까요. 이 마당에 누굴 탓해서 뭐 하겠습니까.”

“하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겐가?”

“그래도 억울하니까 풀 방법을 생각해 봤습니다.”

“좋은 방안이 있는가?”

방금 무윤과 나눈 전음이 있다.

“딱히 없었는데 지랄 같은 어떤 놈이 이럴 땐 도움이 되네요.”

“놈?”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어쨌든 두 부군사님께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독고윤극은 눈을 껌벅였다.

“어떤?”

“최근 천마 소문을 아시겠죠? 여러 논란이 있는 것도.”

“갑자기 그 얘기는 왜?”

“도천이란 분이 있습니다. 천 년 전 하오문 초대 호법이셨죠.”

“……그런데?”

“최근 그분이 남긴 기록을 찾았는데, 거기 여휘와 척고련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순간 두 부군사는 물론 좌중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누구보다 급한 제갈세림이 나섰다. 최근 과거 기록을 살피다 도천이란 자를 알게 됐다.

“정말 그분인가요? 은야문 조사의 호위였던?”

“맞습니다.”

“그대가 가지고 있나요?”

“예.”

“그걸 어떻게 믿죠?”

“제 목을 걸죠. 또 아버님이신 장사 지부장께서 보증해 주실 겁니다. 그래도 못 믿겠다면 내용 일부는 말씀드리죠.”

검증은 나중에 하면 된다. 거짓일 경우 책임을 묻는 것도.

“……제안이 뭐죠?”

“이 비무에서 제가 살아남는다면! 재조사를 해 주세요. 자료는 답을 먼저 주시는 분께 드리겠습니다.”

두 부군사가 동시에 외쳤다.

“지금 당장 증명해 주지.”

“바로 증명할게요.”

이젠 느긋해진 연사구의 입이 비틀어졌다.

“비무부터 하지요.”

“그 전에 증명을 하면 안 해도…….”

“비무! 하겠습니다. 설사 제가 죽더라도 아버님께 가시면 됩니다. 아! 물론 증명은 해 주셔야죠.”

“……!”

좌중 뒤편에서 듣고 있던 진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잘된 거 같긴 한데……. 저거 진짜겠죠?”

“맞습니다.”

“아! 알고 계셨군요. 혹 내용도?”

“예, 봤습니다.”

지금 한 말은 다 거짓이다. 서연을 안심시키려고 둘러댔을 뿐.

월소려의 개인 호위이자 은야문 초대 호법인 도천, 그가 쓴 기록은 무윤에게 없다. 물론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한 이유.

‘이제 만들면 되지.’

연사구와 전음 중에 갑자기 생각나서 벌인 일이다.

논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도착한 무윤은 대략 사정을 파악하고는 물었다. 비무 자체야 걱정할 게 없다.

-어떡할 거야?

-뭐? 저놈들?

-아니, 그건 알아서 하고. 밝힐 방법이 있어?

-그게 좀 골치다. 저 부군사들이 작정하면 뭐라도 될 텐데 나서 줄 리 없잖아.

무윤은 연사구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안다. 또 그래서 물은 것이고. 그때 수백의 정, 사 무인들을 보다 문득 떠올랐다.

연사구도 돕고 조작도 퍼트릴 일석이조의 방안이.

‘어차피 세상에 알려야 하는데 이들이면!’

하오문이나 개방을 통한 소문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 그건 무인들 입으로 스스로 퍼트리는 거다.

더구나 여기 와 있는 정, 사 무인은 약 이천. 또 이들은 악양을 떠나 사방팔방 흩어져 본거지로 돌아갈 자들.

‘이 정도면 삽시간에 퍼진다.’

그렇게 머리를 굴리다 문득 도천이 떠올랐다.

‘기록이야 만들면 되고, 이걸 연사구가 협상 도구로 쓰면?’

생각을 정리하고 알리자마자 연사구의 반문이 돌아왔다.

-뭐? 정말 도천 그분 기록이 있어?

-그래.

-야, 이 새끼야! 그걸 왜 지금 얘기해!

무윤은 사실대로 말했다.

-지금 생각났다.

-돌대가리 새끼! 하여간 그걸로 협상하라 이거지?

-경쟁이면 오늘 안에도 밝혀 줄 거야.

-그건 그런데 한쪽에 넘기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밝혀지면 양쪽 다 보여 줘야지. 찍혀서 좋을 거 없잖아.

-알았다. 근데 너 진짜 있는 거지?

지금 머릿속에서 짜낼 수는 있다.

-읊어 주랴?

-……!

물론 급작스러운 계획이라 허점도 여럿 보인다. 하지만 조작의 큰 틀에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것도 분명하다. 가면서 보완할 수밖에.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 연사구의 마음을 안다.

‘하오문도 자존심, 그게 놈이 최고 지키고 싶은 건데.’

능력과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친구를 지켜 줄 수 있을 땐 나서야 한다. 또 이번 일의 원인 제공은 자신이기도 하고.

거기에 더해진 결심.

‘적운문, 설도승이 여기 있을 때 처리하는 게 깔끔해.’

이제껏 적운문 처리를 끌었던 이유는 단 하나.

‘침주는 내 꿈을 펼쳐야 할 터전, 가능한 잡음 없이 처리하려던 건데.’

천 리나 떨어진 이곳 악양이면 그 문제도 없어진다. 누군지 모르게 하면 그만이니까.

잠시 소란이 진정된 후, 비무 당사자들이 자리했다.

대주 주성곤은 눈 가득 터져 나오는 살기에 또 다른 색을 더했다.

‘죽일 때 비수를 놈 품에 넣어야 한다.’

놈을 죽여도 두 부군사가 조사할 상황. 그걸 무산시킬 방법, 부대주 하달평의 몸에 박힌 비수와 같은 게 나오면 된다.

주성곤의 전음이 세 수하를 향했다.

-마지막은 내게 맡겨라. 그 전까진 계획대로 몰아친다.

-예!

시선을 교환한 넷의 진각이 땅을 박찼다.

파팟! 슈욱! 사사삭!

짧게 울리는 칼바람 소리에 서늘한 예기가 다가올 순간, 연사구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이젠 끌 필요 없지.’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 결심은 오직 하나.

‘제대로 보인다. 나를!’

고향인 장사에서도, 침주에서도 언제나 감춰야 했다. 살아남고 주변이 다치지 않으려면.

하지만 이젠 정반대의 상황. 지금은 드러내야 한다. 가슴에 묻었던 울분을 다 꺼내 단 한 치의 검기라도 더 짜내야 한다.

이제껏 삶을 지탱해 온 이 끓어오르는 격정을 터트려 세상에 보여야 한다.

하오문에도 이런 자가 있음을. 버러지를 보듯 천하게 봤던 자 중에도 두렵게 봐야 할 자가 있음을. 오만함은 어느 한쪽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줘야 한다.

또 하오문 구성원에게 알려야 한다. 저 밑바닥을 전전하는 어떤 이라도 희망을 품을 자격이 있다는 걸. 시련의 날을 견뎌 내고 한 걸음씩 가다 보면 때론 절망 속에 희망이 싹튼다는 걸.

그걸 보이는 게 주어진 임무이자 염원이다.

그 마음 담은 칼날에 시퍼런 불꽃이 일렁였다.

위이잉!

땅을 박찬 둔중한 울림이 전신에 둘러진 기세를 알렸다. 검과 일체가 된 모습 그대로 공간을 접었다.

쉬이익! 화라락!

기다림 없는 공격이다.

주성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흘렀다.

‘미친놈, 공격이라니. 흥분했어.’

일 대 사의 상황, 압도적인 무력이 아니면 간격을 유지하며 기회를 노리는 게 정석인데.

이젠 거칠 게 없다. 오는 그대로 짓밟아 주면 된다.

-기회다. 전력으로 간다.

-예!

기세를 끌어올린 넷의 검이 동시에 쭉 내질러졌다.

슈욱!

섬전처럼 쏘아진 검이 연사구의 몸을 뚫으려는 찰나, 짧게 비틀린 몸의 회전이 네 칼날을 스치듯 쓸어 갔다.

사라락!

찔러 온 검이 바람만 타 넘는 순간, 초절정 내력이 배가된 몸의 뒤틀림이 검의 흐름을 제쳤다.

몸 따라 돌풍처럼 회전한 검격이 연달아 네 개의 검 면을 후려쳤다.

휘릭! 카앙! 캉! 카캉!

내력이 배가된 빠름, 그 힘에 비틀림을 더해 사선을 그린 검이 만든 흐름이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던 순간, 그 틈에 연사구의 검이 좌측 무인의 검 측면을 뚫어 냈다.

휘리릭! 쇄애액!

사락! 쉬이익!

“헉!”

상대의 눈이 부릅떠졌다. 맞서기에는 늦은 상황. 급히 몸을 틀어 쏟아지는 검격을 피하려던 순간, 환영처럼 흐른 검의 잔상이 눈가를 시리게 했다.

서걱! 푸욱!

“케엑!”

다른 셋의 탄성이 터지기도 전, 목을 꿰뚫은 검이 핏물을 뿜어냈다.

진형에 균열이 생기자 공격이 흐트러졌다. 연사구는 숨 돌릴 틈 없이 공간을 좁혀 들었다.

휘릭!

주성곤의 놀란 탄성이 다급함을 알렸다.

“이! 이놈이!”

마주쳐 갈 생각을 버리고 뒤로 몸을 날리려던 순간, 곧게 움직이던 신형이 버들가지처럼 휘어졌다. 상대를 바꿨다.

휘익!

휘돌아 다가선 빠름에 경악성 하나가 터져 나왔다.

“헉!”

정확히 복부를 노린 검이 공간을 헤집었다.

쉬익! 푸욱!

“커억!”

대주 주성곤의 눈이 부릅떠졌다. 순식간에 둘이 당한 것도 경악인데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

‘검기가 세 치!’

검 끝 따라 시퍼렇게 솟구쳐 오른 검기의 굵기, 그게 뜻하는 건.

‘초절정!’

자신과 비슷하리라 여겼던 상대였는데.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섬전처럼 자신을 향한 신형, 근거리에서 속도가 배가돼 눈이 좇지 못할 정도.

주성곤의 이마엔 땀이 송골하게 맺혔다. 피할 수도, 도와줄 이도 없는 상황. 답은 하나.

‘맞부딪친다.’

슈우욱!

바람 탄 연사구의 검에서 서릿발 같은 검기가 줄줄이 솟구쳤다. 무수한 검영이 공간을 죄여 주성곤을 압박해 들었다.

이 은월청요검 초식 마지막에는 환이 숨어 있다. 하지만 꺼낼 생각이 없다.

쇄애액!

보여 주려 함이다. 초절정임을.

깨닫게 함이다. 그깟 모략 따위 꾸밀 필요 없음을.

외침이다. 하오문도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그 마음 담은 올곧은 직선에 대기의 흐름이 요동쳤다.

화라락! 파팟!

두 개의 검기가 부딪칠 찰나, 주성곤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무인의 직감, 생의 본능이 알렸다.

‘안 된다.’

허공마저 일그러트리는 참격. 가히 폭풍 같은 검세. 부딪치면 벌어질 일이 눈앞에 선했다. 하지만 늦어 버렸다.

‘피했어야 했는데.’

대기를 가르며 거센 파공음을 토해 낸 검격이 부딪쳤다. 순간 무자비한 충격이 주성곤의 전신에 내리꽂혔다.

쾅! 콰앙! 카아앙!

검기를 뚫어 낸 불꽃이 주성곤의 어깨를 그대로 찍어 내렸다.

슈욱! 으드득! 빠각!

“커억!”

어깨를 지난 혈선이 몸통까지 쓸어내렸다. 의지의 칼날엔 주저함이 없다.

쫘아악! 두두둑!

하늘로 치솟는 핏물이 주인 잃은 몸뚱이를 주저앉혔다.

털썩!

순간 정적이 찾아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