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적운문 대주 주성곤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야! 천 리나 떨어진 여기서 자넬 볼 줄은 몰랐군.”
“우리가 인사할 정도로 친했나?”
“이거 왜 이래. 그래도 동향 사람인데 알은척은 좀 하지.”
“이 정도면 한 거지.”
“큭큭! 보는 눈도 많은데 그 인상 좀 풀지 그래.”
“보는 눈이 있으니 이래도 될 거 같은데.”
“뭐 그럼 어쩔 수 없고. 한데 여긴 왜 왔지?”
“왜 이럴까? 우리 그런 거 주고받을 사이 아닌데.”
“딱딱하게 굴 거 없잖아.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 말을 해야 빨리 끝난다.
“봉천문주 만나러 왔다. 이제 됐지?”
“네가 왜?”
“그럴 일이 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봉천문주에게 물어보든가.”
그때 적운문 부대주 하달평이 앞으로 나섰다. 짐짓 눈을 부라리고는 목청을 높였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하니까 정말! 야! 대주님이 네 친구로 보이냐? 후딱 불고 빨리 꺼지기나 해!”
순간 날 선 촉이 연사구의 등골을 시리게 했다. 격한 고성에 객잔 밖 모두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린다. 이놈도 모를 리 없다.
‘정사 무인이 다 있는데 이렇게 나온다? 거기다 용무가 봉천문주라고 밝혔는데도.’
불길한 촉은 재수 없게도 잘 맞는 편. 몸을 사려야 한다.
“봉천문주가 날 불렀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하달평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이제 작전을 실행할 때.
“큭큭! 그래, 진즉 그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앞으론 그러지 마. 하오문도 주제에 자꾸 눈깔에 힘주다간 골로 간다고. 알았어!”
“이제 가도 되겠지? 봉천문주가 기다릴 거야.”
그때 몸을 들이민 하달평의 손이 연사구의 옷깃을 털어 냈다.
탁! 탁!
“쯧쯧! 봉천문주님을 만나러 가는데 꼴이 이래서 되겠어?”
“치워라.”
“가만있어. 예의 갖출 복장은 하고 가야지.”
털어 내는 손의 강도가 조금씩 세지기 시작했다.
탁! 탁! 탁탁!
다가선 몸은 서로 옷깃이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지켜보던 좌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힐 즈음, 연사구의 눈이 번득였다. 촉은 확신이 됐다. 적운문과 봉천문은 한패나 마찬가지.
‘작정하고 나섰어. 예관 인수를 방해하려고.’
이러면 자릴 피하는 게 급선무. 급히 퇴보를 밟고는 신형을 돌렸다.
휘익!
순간 잡은 옷깃을 놓친 하달평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런! 눈치챘어.’
어쩐지 성깔 하나는 알아주는 놈이 꼬랑지를 내린다 했다. 먼저 손쓰게 할 계획이 물 건너간 이상 차선책을 꺼낼 때.
배 속에 숨긴 비수로 복부를 약간 찌르고는 격한 탄성과 함께 몸을 바닥에 꼬꾸라트렸다.
“우욱! 이놈이!”
털썩!
순간 대주 주성곤의 신형이 바람을 갈랐다.
“동생!”
“혀, 형님, 이놈이 암수를! 쿨럭!”
주성곤은 급히 하달평의 몸을 껴안고는 다급한 듯 입을 열었다.
“암수라니?”
“배, 배에 칼을…….”
주성곤은 주변의 시야를 몸으로 가리고는 은밀히 비수를 쭉 찔러 넣었다.
사락! 푸욱!
“커억!”
하달평의 눈이 부릅떠졌다.
‘……대주가?’
분명 피육에 상처만 내기로 했는데, 평생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 몸을 전율케 한다.
그래도 직감된다. 칼날이 내장을 뚫었다는 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는 게.
부들부들 경련이 이는 눈이 찌른 자를 향했다.
“쿨럭! ……왜?”
순간 주성곤의 전음이 귓전을 울렸다.
-미안하네. 문주님 지시였네.
하달평의 입가에 허망한 실소가 맺혔다.
‘병신 머저리 새끼!’
스스로에게 하는 욕이다.
미끼가 되란 말을 들었을 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도 몇 번 수하들에게 해 봤으니까.
그래도 설마 했다. 나름 대주와는 가깝다고 여겼으니까. 한데 같은 꼴을 당할 줄이야. 멀어지는 의식 속에 욕지기만 입가를 맴돌았다.
‘시팔!’
툭 떨어진 고개가 절명을 알리자 주성곤의 성난 고함이 사방에 울렸다.
“놈이 암수를 썼다! 죽여라!”
“옛!”
동시에 넷이 짓쳐 드는 순간, 뒤돌아보던 연사구의 미간이 뒤틀렸다.
‘시팔! 이거 진퇴양난이네.’
선택은 두 가지. 냅다 튈지, 남아서 싸울지 둘 중 하나.
한데 둘 다 문제다.
죽이지 않았다면 이대로 튀는 게 상책. 하지만 증인이 될 오십의 무인의 앞에서 그러는 건 살인을 시인하는 꼴.
당장은 모면할지 몰라도 차후 판정을 뒤집기 어렵다.
하지만 남아서 저들을 제압해도 꼬이는 건 마찬가지.
자신은 하오문도, 저들은 사파.
싸움이 본격화되면 양 진영 부군사와 문주들이 나온다. 이번 회담의 대표들.
사파야 적운문 편을 들 것이고, 정파가 하오문을 위해 나설 리도 없다. 그저 한다면 중립 표명 정도.
저 넷을 쓰러트려도 살인이 공론이 되면 적운문이나 사파가 계속 나서도 막을 명분이 없다.
짧은 고민 후에 연사구는 이를 악물었다. 결단을 내렸다.
‘튀면 나중엔 못 뒤집는다. 어떻게든 여기서 풀어야 해.’
또 그 결정의 이면엔 중요한 게 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하오문도로서의 자존심, 그게 거부한다. 여기서 도망치면 또 그 소리를 듣는다.
-역시 하오문도 답네.
비굴함과 비겁함이 몸에 밴 족속들, 강자엔 약하고 약자는 찍어 누르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 그게 하오문을 바라보는 강호의 시선.
물론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구성원 자체가 세상의 가장 밑바닥, 가장 어두운 곳에 존재하고, 또 살기 위해 손가락질 받을 짓도 수없이 했으니까.
한데 연사구가 도망가지 못하는 건 그런 세상의 멸시와 냉대가 겁나서가 아니다
‘세상에 인정받는 거,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오직 하나. 고향 장사(長沙)의 하오문을 이루는 구성원, 그들이 실망하는 게 너무나 싫다. 그 이유다.
하오문은 밑바닥 인생들의 대변자이자 자존심 그 자체. 특히 자신은 그런 장사 하오문의 꿈이나 마찬가지.
단 한 명이라도 어떤 무인과 권력 앞에서 당당해 주길 바라는 열망, 그게 자신에게 쏠려 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그런 꿈이 키워 낸 게 자신인데.
‘또 도망갈 순 없지. 절대!’
과거 그렇게 한번 실망을 줬다. 더 이상은 싫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연사구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다행히 저들의 계략엔 허점이 있다.
‘날 모른다.’
침주에서 보인 자신의 실력은 잘 쳐줘도 절정 중반.
또 저들의 경지는 이미 침주에서 파악해 뒀다.
‘대주는 절정 중반, 나머지는 절정 하나에 일류 둘.’
최선은 결정됐다. 최단기간에 저 넷을 제압하는 게 급선무. 그래야 양 진영 대표들이 나오기 전에 증인 오십 명을 설득할 시간이 생긴다.
우선 항변부터 할 때.
연사구는 신형을 뒤로 물리고는 사방에 외쳐 댔다.
파팟!
“난 아무 짓도 안 했소! 저들의 술수요!”
앞서 달려오던 주성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말 같지도 않는 소리! 네놈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연사구의 시선은 계속 주변을 둘렀다.
“미치지 않고서야 다들 보는 데서 누가 이런 짓을 합니까! 안 그래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대주 주성곤이 앞서고 셋이 방위를 점한 채 달려들었다.
파팟! 타다닥!
연사구는 주춤주춤 허둥대는 걸음에 당황한 표정도 과하게 꺼냈다.
‘끌어들여야 한다.’
자신의 은월청요검은 수비에 있어선 최강의 검식. 그 검격 안으로 들어와야 단번에 승부를 낸다.
대주 주성곤에게서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당황했겠지. 빨리 끝내 주마.’
넷의 짜임새 있는 연환검이 합을 이뤘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동시에 짓쳐 들려는 순간.
“그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객잔 밖으로 나온 봉천문주 고주양의 내력 실린 고성. 그 한마디에 달려들던 적운문 넷이 멈춰 섰다.
타악! 척!
이미 짜여진 각본이니까.
봉천문주 고주양 뒤로 정, 사 대표와 주요 문주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무림맹 부군사 제갈세림과 사도련 부군사 독고윤극은 이 회담의 대표. 또 정파 서문세가, 장사의 사파 비천문 등 수많은 무인이 주변을 에워쌌다.
봉천문주 고주양의 날 선 시선이 양쪽을 번갈았다.
“그대들은 누군데 여기서 이런 짓을 벌이는가?”
주성곤의 항변이 먼저 튀어나왔다.
“전 침주 적운문 대주 주성곤이라 합니다.”
“적운문? 한데?”
“저놈이 가벼운 실랑이 중에 암수를 써서 제 수하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나섰습니다.”
고주양의 시선이 연사구를 향했다.
“저 말이 사실인가?”
“하오문도, 연사구라 합니다. 전 암수를 쓴 적도 없고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증인입니다.”
이후 양쪽의 주장과 설전이 한동안 계속됐다. 지켜보던 좌중의 의견 또한 반반으로 갈린 상황.
-시비는 적운문이 먼저 걸었소.
-그래도 가벼운 실랑이였는데 암수로 죽이다니, 말도 안 되지.
-저 하오문도가 암수를 쓴 걸 봤소?
-아니면? 그럴 자가 여기 누가 있나? 설마 적운문이 자기편을 죽이고 생떼라도 쓴단 말인가?
-그건 아니지만, 저자가 먼저 물러났소.
-그거야 먼저 손썼으니 그런 거지.
-저자가 바보요? 이 많은 무인 앞에서 그런 짓을 하게?
-열이 엄청 받았나 보지.
-허! 그것참!
처음 지켜보던 자 중엔 정황을 꿰뚫어 볼 무인도 몇 있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국인지도 잘 안다. 침묵이 최선.
잠시 후, 양 진영 부군사 둘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갈세림과 독고윤극 모두 전쟁을 종식시키는 게 최우선. 정황상 짐작도 가고 세세히 훑으면 사실을 밝힐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는 상황.
제갈세림의 전음이 사도련 부군사 독고윤극을 향했다.
-사파와 하오문 분쟁인데 어쩌시겠어요?
-그대 생각은?
-저야 낄 일이 아니죠. 회담이 우선이고.
-나보고 결정하라?
-예. 다만 다들 우릴 주시하고 있는데 나중에 말썽은 없었으면 해요.
-하면 물증이 없으니 방법은 하나뿐이겠구려.
-그렇겠죠.
-알겠소. 그리하리다.
독고윤극의 엄중한 시선이 양쪽을 번갈았다.
“양쪽 주장이 팽팽하니 달리 방법이 없구려. 강호의 법도대로 비무로 결정할 수밖에.”
좌중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옳소! 붙는 게 최고지.”
독고윤극의 시선이 좌중을 둘렀다.
“사도련과 무림맹 이름으로 천명하겠소. 이 다섯 외에 그 누구도 나서선 안 되오. 만약 이를 어길 시! 양 진영으로 이름으로 단죄하겠소.”
“당연한 소리! 빨리 시작이나 합시다!”
“그래, 심심했는데 잘됐어. 크크!”
“우리 내기나 할까?”
“그러자고. 자, 판을 벌여 봅시다.”
“근데 한쪽에 다 몰릴 텐데 판이 짜질까?”
“이 사람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는 어디든 있네.”
“하긴!”
한편 서문가주의 차남 서문진성의 입은 쫙 찢어졌다. 연사구와의 오랜 악연이 만든 웃음.
‘크크, 이럴 수도 있구나!’
과거 친구들이 다 있는 앞에서 오뉴월 개 잡듯 두들겨 맞은 기억,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창피했지만 그 복수로 가문에 알리고 놈을 병신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결국 장사를 떠나는 걸로 마무리됐을 때 얼마나 천불이 나던지.
그 풀리지 않는 분에 언제고 손볼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그것도 손도 안 대고 코 풀 상황.
‘앓던 이가 쏙 빠지는 게 이런 기분이겠어.’
입가에 흥건한 즐거움을 감출 수가 없다.
한편 침주 하후가 셋째 하후진은 놀란 눈을 거두지 못했다.
‘연 형님이 왜 여기에?’
아버지를 만나러 장사에 간다는 얘긴 들었다. 한데 이 상황에 보게 되다니.
그나마 안심되는 것.
‘저 넷이야 형님에겐 문제가 아닌데.’
하지만 적운문의 계략인 건 빤한 일. 이후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불안한 마음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