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초식은 된 거 같습니다.”
“그래요. 혹 짚이는 거라도?”
“끝나고 말씀드리죠.”
“알겠어요.”
서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 무윤의 말투를 대략 안다.
‘뭔가 찾아냈어.’
궁금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가르침의 자리. 받는 자로서 집중할 때다.
서연이 무윤에게 가릴 공격은 없다.
‘모든 걸 꺼낸다. 또 그래야 그때 상황이 오고.’
가녀린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달라졌다. 배우는 자리라 하나 언제든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게 무인.
절대자 앞이라도 당당하고 싶은 의지와 투기는 꺼내야 한다.
그 마음 담아 검을 모아 쥔 순간, 모든 초점이 한곳을 겨냥한다. 다른 흐릿함이 더 선명하게 상대를 부각한다.
‘절대자!’
짜릿한 전율, 두려움과 설렘, 부푼 희열이 동시에 밀어닥쳤다.
환희와 불안이 공존하고 기쁨과 걱정은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형언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마음은 또한 알린다. 이게 무인의 투기라고, 이게 승부욕이라고, 원대로 풀어 내라고.
그 마음 전해진 발길이 대지를 박찼다.
파팟!
검기 가득 두른 검이 채찍처럼 휘어진 채 허공을 휩쓸어 갔다.
쇄애액!
무윤의 손끝도 휘날렸다. 흘러가는 물결처럼 검기의 폭풍 속을 너울거렸다.
휘릭! 화락!
동시에 신기심의공 은밀한 기운이 서연의 전신을 휘감았다.
우우웅!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우선 혼전 상황부터.’
반 장 이내, 그 안이면 서연의 내력 흐름을 정확히 파악한다. 때론 더 가까이 가야 그 안에 담긴 함의도 잡아낸다.
때론 흘리지 않고 부딪쳐야 한다. 그래야 답을 찾아낼 수 있다.
무윤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떨칠 수가 없다.
‘정말 여휘만큼 천재일까?’
여휘는 세상 그 어떤 무인보다 천재였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단순히 자질과 노력, 그것으로 고금제일인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니다.
여휘가 극의에 오른 이후 숙적이라 할 자는 없었다. 현경의 경지도 단숨에 찍어 눌렀으니까.
다만 그 전에 생사를 건 치열한 싸움은 셀 수도 없었다.
위험한 상황, 불리한 상황, 상대가 우위에 있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특히 자신을 들쳐 업고 신강까지 수천의 무인을 혼자 상대할 때는 갓 초절정이었는데.
그래도 여휘는 모든 걸 이겨 냈다.
철혈의 무인, 그 의지와 투혼을 불살라 그 험난함을 스스로 깨부쉈다.
그래서 설사 서연의 자질이 여휘와 비견된다 해도, 그 끝이 같을 순 없다.
그래도 궁금했다. 또 그런 무인을 볼 수 있을지.
여휘를 매번 떠올릴 그럴 무인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이제 알아본다.’
채찍처럼 휘어진 검이 요혈을 노리는 순간, 무윤의 손끝이 허공을 휘저었다.
사라락! 사악!
무윤은 피하는 대신 파고들어 손과 팔등으로 검을 흘려 냈다.
근거리에서 파고드는 서연의 검을 살필 때.
캉! 카앙!
좁은 공간에서 서연의 연환 공격이 계속됐다. 어깨를 향했던 검이 어느새 옆구리를 쓸고, 이어 머리 위에서 떨어지듯 허공을 갈랐다.
사라락! 샤악! 슈욱!
그렇게 천수비화검 검식이 허공을 흩날릴 무렵.
내지르던 그녀의 검이 묘하게 흔들거렸다. 검날이 허공을 헤집고는 종과 횡으로 수십 개의 잔영이 흩뿌려졌다. 쾌에 흐름의 부드러움을 더한 결과.
스르륵! 사사삭!
검이 춤추듯 너울거리며 무윤의 몸 주변을 휩쓸었다. 그때마다 무윤은 손과 팔등으로 맞부딪쳤다.
탁! 파팍!
무윤은 조금씩 간격을 좁혔다. 급소에 들이닥치는 검에 오히려 몸을 미는 형국. 그 좁은 간격에서 팔이 허공을 유영하듯 허공을 메웠다.
사라락! 휘릭!
서연을 직접 노리는 공격은 아직. 하지만 공격이라 느낄 만큼 압박해 들어갔다. 연신 검을 튕겨 내거나 흘리면서도 전진은 계속됐다.
이제 간격은 두 자. 손만 쭉 뻗어도 옷자락이 잡힐 정도다.
입술을 악다문 서연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아무리 절대자라지만 이건!’
무윤은 권기도 강기도, 그 어떤 내기의 막도 두르지 않았다. 오직 몸의 움직임, 그것만으로 피하고 부딪치고 흘려 낸다.
허탈함과 분노는 이럴 때 동시에 올라온다.
‘이런 차이였나.’
또 불안과 위기감도 스멀스멀 따라온다. 아직 상대는 공격 한 번 하지도 않았는데, 온몸을 죄어 오는 이 공포감.
숱한 전장의 피비린내가 이젠 살갗을 넘어 몸속 곳곳에 배었다 여겼다. 그 처절한 경험에 두려움은 이제 남의 것이라 확신했는데.
물론 옥죄어 오는 근원이 다름은 안다.
‘무력감과 경외감, 그 한계가 주는 절망.’
순간 서연의 미간이 매섭게 꿈틀댔다. 스스로를 책망했다.
‘서연아,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정신 차려.’
그렇게 마음을 다잡자 소용돌이 휘말린 듯 떠는 가슴은 그저 하나만 알린다.
무인의 투기를 담아 그냥 짓쳐 달리라고. 모든 걸 꺼내서 부딪쳐 보라고. 그러다 깨져도 속은 후련할 거라고. 바닥에 널브러져도 환하게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온몸을 휘도는 열기는 그러라고 종용한다.
그 의지가 전해진 마음이 투혼을 불살랐다.
파팟!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찾아냈다.
‘그거였어.’
공방 내내 신기심의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서연의 몸을 살폈다.
그리고 방금 답을 찾았다. 그때 왜 그랬는지.
이제 마지막 확인만 남았다.
바람을 탄 몸에서 주먹이 휘둘러졌다.
슈우욱!
이전과 달리 빠름이 가속됐다. 몇 배나 더.
대기를 가른 파공음이 서연을 전율케 했다. 바로 직감했다.
‘시작이다.’
환을 섞어 돌진하려다 급히 퇴보를 밟았다. 의지가 아닌 몸이 전한 경고를 따라야 할 때.
파팟!
순간 옅은 바람 하나가 옆구리를 쓸었다. 눈가의 흐릿함이 뇌리에 경종을 울리기도 전.
슈우욱! 푸욱!
“헉!”
늑골이 부서진 듯 격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한 무력감이 밀려든다. 그 짧은 순간 절감했다. 인지를 넘어선 빠름, 거기에 대항할 방법은 자신에게 없음을.
하지만 움직여야 한다. 짜르르하게 머리를 감싼 뇌전이 그리 시킨다.
급히 뒷걸음질 치는 순간, 본능은 빠름을 줬지만, 균형을 앗아 갔다.
타닥!
손발이 어지럽다. 할 수 있는 건 본능적으로 검을 쳐올리는 것.
그때 무윤의 손이 팔목을 잡아챘다.
타악!
경악성이 절로 터졌다.
“흡!”
한쪽 팔이 잡힌 상태, 몸통 반이 적에게 드러났다.
급히 몸을 숙이는 찰나, 털을 바짝 세운 소름이 무자비한 전율로 등골을 타 내려갔다.
무윤의 비틀린 몸 회전에 교차한 발길질이 향한 곳.
‘등!’
빠각!
“욱!”
고통에 찬 비명과 동시에 몸이 휘청거렸다.
휘릭!
놀람과 고통을 인식하기도 전 바람 탄 주먹이 전신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퍼억! 팍! 빠각! 두둑!
연이은 권과 발길이 온몸을 짓밟길 수십 차례.
서연의 생각은 사라졌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허우적거리는 몸만 느껴질 뿐. 이성도 그 어떤 감정도 지금은 떠올릴 수 없다.
‘살아야 한다.’
오직 그것뿐.
위험한 상황은 이미 예고된 일. 한데 정말 몰랐다. 죽음을 떠올릴 정도의 무자비한 폭력까지는.
지금은 그저 몸부림칠 뿐이다. 살고 싶은 본능만이 남았으니까.
그저 도망갈 뿐이다. 아픔과 고통을 덜기 위해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렇게 몰아치는 소나기를 피하기 급급했다.
그러다 또다시 오싹한 등골에 몸을 비트는 순간, 바람 탄 기운이 몸 안을 파고드는 게 느껴진다.
바로 직감했다. 저 주먹이 명치에 틀어박힌다면.
‘죽는다!’
이 순간 바랄 건 하나뿐. 지난번 같은 움직임. 살자면 그것뿐이다.
‘제발!’
그렇게 구원의 울부짖음으로 몸의 감각을 일깨울 때, 기이한 감각 하나가 등골을 타고 뇌리를 때렸다. 순간 깨달았다.
‘이거다!’
생소한 감각이되 내 것 같은 흐름. 이건 믿어야 한다. 그 본능에 몸을 맡길 때다.
그렇게 움직이려는 찰나.
사라락!
무윤의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밀었다. 아무 힘도 없이 그저 밀어 내는 손길.
투욱!
상체가 밀려 나자 경직됐던 무릎에 순간 힘이 빠져 버렸다. 그대로 튕기듯이 밀려 나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터덕!
그때 이 순간만큼은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자의 목소리가 흘렀다.
“괜찮습니까? 이제 끝났습니다.”
서연은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하아! 후우!”
동시에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살았다는 안도감은 금세 사라졌다. 대신 창피함에 굴욕감, 울분이 더해진 얼굴색만 본심을 드러냈다.
서연은 뺨에 주름이 지게 어금니를 악물었다.
맘 같아서는 욕이라도 왕창 쏟아붓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청한 일인데.
그렇게 찾아든 이성은 말렸지만 절로 삐죽여지는 입술만큼은 감추고 싶지 않다. 그래야 치민 부아가 조금은 가라앉는다.
그렇게 톡 쏘아 대려는 찰나.
무윤의 말문이 먼저 열렸다.
“잠시 계세요. 금방 오겠습니다.”
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딜 간다는 거예요? 아직 얘기도 안…….”
“저쪽에 보이죠? 저놈부터 잡고 봅시다.”
“……!”
그제야 서연의 시선이 담벼락 쪽을 향했다. 눈만 빼꼼 내밀고는 이곳을 주시하는 자.
파팟!
무윤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 * *
잠시 후.
슈욱! 퍽,
“커억!”
우둑! 빠각!
“허억! 크윽!”
마른 장작 패는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퍽! 파악! 퍼퍽!
“케엑! 쿨럭! 저, 저기 그러니……. 컥!”
거친 기침과 함께 울혈을 토한 몸뚱이가 꼬꾸라졌다.
털썩!
진서연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흘렀다.
‘날 보는 거 같네.’
담벼락에 달라붙었다가 무윤에게 정신없이 처맞고는 땅바닥에 들러붙은 자. 분명 타인인데 사정없이 휘둘러 대는 주먹엔 자신의 몸도 움찔거린다.
아직 몸은 아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반증. 그만큼 살 떨리는 몸부림을 쳤었으니까. 지금 저자처럼.
한순간이지만 그 연민 아닌 연민이 축 늘어진 자에게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잡생각을 털어 내자 바로 의문이 떠올랐다.
‘누군데 우릴 살폈지?’
무윤의 손이 쓰러진 자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정신은 말짱하게 팼다.
처억!
“소속과 이름!”
봉천문 조장 양태봉의 눈이 번쩍 뜨였다.
‘초고수! 여차하면 황천행이다.’
이미 훔쳐볼 때 실력이야 눈으로 확인했고, 지금은 몸이 절절히 안다. 살 방법은 오히려 부는 게 최고다. 악양 최고 사파 소속이니까.
“봉천문, 정보각 조장 양태봉!”
“왜 왔지?”
“예관을 살피라는 지시를 받았소.”
“한 번에 털어. 더 묻게 하면!”
“하, 하오문 연사구란 자와 같이 왔거나 만나는 자, 그걸 조사하라고 했소이다. 이게 다요. 정말이오.”
“왜?”
“나, 난 일개 조장이오. 저, 정말 그것밖에 모르오.”
“……?”
진서연의 전음이 무윤을 향했다. 저런 자를 심문한 경험이야 부지기수. 삶을 갈구하는 눈빛이 확실하다.
-더 아는 건 없어 보여요.
-그런 거 같습니다.
-짐작 가는 거라도?
-봉천문이 예관을 인수하려고 했죠. 우리 때문에 무산됐고.
-근데 아까 연 조장이 한 말은……. 가 봐야지 않을까요?
-그래야죠.
바로 회담 장소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악양 동정호 인근 소회루.
수많은 정, 사 무인들로 사방이 북적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예관주 조충량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휴! 정말 끝나는 모양이야. 한동안 살벌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는데 다행일세.”
“어차피 이렇게 끝날 거였어요.”
“다들 그러긴 해도 조마조마했었다.”
“문주가 회의 전에 보자고 했다면서요. 빨리 가죠.”
“그래, 들어가자.”
그때 날 선 목소리가 연사구의 귓전을 때렸다.
“오! 이게 누구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
다가오는 이를 보던 연사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운문 대주 주성곤!’
또 같이 다가오는 넷도 모두 낯익은 인물들.
어째 기분이 찜찜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