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다음 날.
악양 예관.
투우우! 투우웅!
장단은 어색하지만 맑고 깨끗한 피리(笛子, 적자) 소리 두 개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별다른 꾸밈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곡조는 벽천소망(碧天笑望), 동굴에서 연주했던 소려의 곡이다.
무윤이 배우려고 만든 이 자리엔 진서연도 같이했다. 따로 물을 게 있어 쫓아다니다 얼떨결에.
두 연주자를 지켜보던 예교 류해랑의 눈이 반짝였다.
‘보통 무인이 아니야!’
류해랑은 음(音)과 노래에 있어선 예관 최고라 불린다.
그런 그녀라 가끔 음으로 무인의 경지를 가늠하곤 했다.
특히 피리나 퉁소 같은 관악기는 파악이 쉽다. 운기를 하는 무인에게 호흡이 중요하듯 이 악기 또한 그러니까.
그 세밀함을 파악하면 얼추 짐작이 된다.
한데 오전 내내 살펴본 두 남녀의 기교는 초보지만 그 호흡에 담긴 색은 내밀한 깊이를 알려 준다.
거기에 특히 남자에게 눈이 가는 이유.
‘소리에 울림이 가득 실렸어.’
호흡이 준 색과는 또 다른 차원, 소리에 연주자의 마음을 담는 건 쉽게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연주 경험도 몇 번 없는데 어떻게 저럴까?’
그 호기심 가득한 눈이 무윤을 떠나지 않았다.
한동안 이어지던 연주가 끝날 무렵, 연사구가 들어왔다.
타악!
류해랑을 향해 너스레부터 떨어 댔다.
“예교님, 힘드시죠? 이런 초보들 가르치느라.”
“호호! 아녜요. 두 분 다 소질 있으세요. 가르치는 재미가 있답니다.”
“에이! 진 조장은 몰라도 저 새끼는 안 봐도 빤해요.”
“친구분도 잘하시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저놈 기 살려 줘 봤자 예교님만 피곤해져요.”
무윤도 바로 이죽거렸다.
“잡소리 할 거면 꺼져라.”
“안 그래도 꺼질 거다. 뭐 들을 거 있다고 여기 있겠어.”
“그럼 가.”
“할 말은 하고 가야지. 안 그럼 왜 왔겠어.”
“빨리해.”
“봉천문주가 날 보잔다. 예관주님이랑 갔다 올게.”
“……왜?”
“사실 확인하겠다는 거지. 그러면 바로 손 뗀다고 했어.”
무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자. 혹 모르니까.”
“그럴 거 없어. 안전한 데서 보는 거니까.”
“어딘데?”
“이따가 소회루에서 이번 싸움 정리하는 정, 사 회의가 있어. 양 진영 부군사까지 다 오는 자리지. 거기서 뭔 짓을 하겠어. 걱정 마.”
그런 자리면 굳이 따라갈 필요 없다.
“이제 끝나는 거냐?”
“그렇게 될 거야. 양쪽 다 그러고 싶어 하니까.”
연사구가 하오문 지부에 다녀오느라 조작에 대해선 아직 말하지 못했다.
“끝나면 바로 와. 할 얘기 있으니까.”
“뭔데?”
“다녀와서.”
“알았다. 참! 하후진 그놈이 여기 와 있더라.”
“응? 하후천기만 왔다더니?”
“가주가 나중에 보냈대. 큰 싸움 없을 거 같으니까 경험이나 쌓으라고.”
“그래? 만나면 데리고 오든가.”
“그래야지. 갔다 오마.”
* * *
잠시 후, 예관의 별실 정원.
연주 연습이 끝나자마자 진서연은 이곳으로 무윤을 이끌었다. 이틀 전부터 꾹 참고 있던 의문을 꺼낼 때다.
“저, 여쭤볼 게 있는데.”
“어떤?”
“동굴에서 싸울 때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진서연은 위기의 순간 급작스레 튀어나온 춤 동작을 상세히 설명했다.
듣고 있던 무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상한데.’
다급함에 본능이 꺼낸 춤 동작.
다른 무공 없이 바라타나티암심법만 익히고 춤을 배웠다면 그럴 수 있다. 한데 진서연은 본신 무공을 오래 수련한 무인.
수십 년 수련으로 체득된 초식은 곧 몸의 본능이나 마찬가지. 위기 상황에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다. 더욱이 모든 움직임에 막대한 내력이 수반된 초절정 무인은 두말할 나위 없고.
‘바라타나티암심법이 아무리 훌륭해도 채 일 년도 안 됐어. 수십 년 수련한 초절정 고수 내력과 초식을 앞설 수 없다.’
그래도 춤이 앞섰다는 건.
‘우연이겠지. 초극의 감각이 지금 생겼을 리도 없고.’
신기심의공은 이 단계부터 초감각과 초극의 동작이 가능해진다.
바라타나티암심법만 익혔다면 몸의 체화 단계를 넘어서 중단전을 열었을 때 초감각이 생긴다. 하단전 심법에서 출발한 진서연이 벌써 그 단계일 리도 없고.
무윤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우연 아닐까요? 아니면 그때 동작이 초식과 유사해서 약간 변형이 섞였다거나.”
진서연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그런 거면 얘기도 안 꺼냈죠. 주요 부위인 어깨 공격인데 막는 수비 초식이 한두 개겠어요? 게다가 수없이 수련한 동작인데.”
“그럼?”
서연은 두 눈에 확신을 가득 담았다.
“전 심법밖에 안 떠올라요.”
무윤도 이젠 안다. 직접 살펴본 적은 없지만 왜 서연이 보타문 최고의 기재라 불리는지.
바라타나티암심법의 이해력와 습득 과정, 그간 나눈 대화, 또 동굴에서의 실전 모습에서 여실히 느꼈다.
‘한마디로 천재지.’
그런 그녀가 확신을 담아 건넨 의문.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게다가 자신이 전한 것인데.
한데 이미 유선의 경지를 넘어선 그녀. 유선을 가르칠 때 얻은 경험은 도움이 안 된다. 방법은 하나뿐.
‘초식도 봐야 하고 몸도 살펴야지.’
또 비슷하게 재현하자면 죽음 직전까지 상황을 몰고 가야 한다. 한 수 알려 주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탓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진서연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흘렀다.
“방법은 하나뿐이죠?”
바로 실소가 흘렀다. 그녀가 어떤 무인인지 잠시 잊었다.
“처음부터 작정하셨군요.”
“또 그 상황이 오면 전 불안해서 흔들릴 거예요. 아시잖아요. 그게 무인에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백번 맞는 말. 자기 검과 초식에 확신이 없어지면 무인은 제 실력을 발휘 못 한다. 몸이 알아서 주저하니까. 그건 곧 죽음과도 직결된다. 또 발전도 더뎌지고.
더 뺄 상황이 아니다.
“알아보자면 초식부터 봐야 합니다만.”
“당연하겠죠. 문제없어요.”
“몸 안의 내력 흐름도 살펴야 하고.”
진서연도 이젠 무윤을 잘 안다. 가장 환한 웃음을 더해 말을 잘랐다.
“게다가 상황을 재현하자면 극한 상황까지 절 몰고 가아겠죠.”
“괜찮겠습니까?”
“절 모르세요?”
“……!”
두 사람은 예관 뒤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서로 자리를 잡고 얼마 후.
가볍지 않은 흥분이 여인의 입가를 떨게 만든다.
‘화경! 어느 정도일까?’
무윤과는 물론 화경의 무인과도 첫 자리.
이 두 가지 이유로 가슴을 휘저은 격정이 흥분과 설렘을 안긴다.
진서연은 격한 숨을 그대로 입에 실었다.
“부탁드려요.”
“초식부터 보여 주시죠.”
“알겠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이 하늘로 향했다.
휘릭!
시작부터 전력으로 뽑아낸 검기, 뿜어진 채 하늘거리던 기운이 울음을 토했다.
위이잉!
지금은 거칠 것 없이 보일 때다. 검로의 궤적과 흐름을 알아야 무윤이 원인을 찾아내니까.
한번 흐름 탄 초식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팔과 몸 따라 검은 사방으로 너울거렸다. 우직하게 맥을 끊는 쾌와 물 흐르듯 유려함 담긴 환이 곡선을 그려 냈다.
휘리릭! 사라락!
무윤은 초식 흐름과 내력 변화를 심상에 담아냈다.
‘천수비화검! 빠른 신법에 변검의 환이 더해진 검로가 일절이라 했지.’
한데 초식 전부를 풀어 낼 즈음 검이 달라졌다. 유려함에 더해진 대기의 압이 묵직한 파공음을 울렸다.
파팡! 쇄액! 휘릭!
무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중(重)이 실렸어. 천수비화검에 그 또한 담겨 있었나?’
빠름과 변화, 그리고 무거움. 검이 가질 묘리 중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이 외에도 폭(爆), 흡(吸), 곡(曲), 만(灣), 탄(彈) 등 폭발과 분산, 당김과 튕겨 냄, 휘어짐 등 여러 묘리가 있다.
하지만 쾌중환, 이 셋의 조합과 응용이 곧 모든 묘리를 포용한다. 그만큼 근간이 되기에.
한데 무윤이 의아한 것.
‘쾌중환(快重幻) 셋을 같은 비중으로 담았을 리 없는데.’
셋을 그렇게 담는 검은 거의 없다. 모든 걸 담으려다 하나도 제대로 못 담으니까.
하나에 중점을 두고 나머지를 조화롭게 섞는 게 당연지사.
그 어떤 절대의 검공도 그 원칙을 깨지 않는다.
한데 보이는 여러 초식엔 그 셋이 골고루 담겼다.
의문을 담아 한참을 지켜볼 즈음, 무윤의 입가에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제야 알았다.
‘스스로 담아냈어. 원래 검의에 있던 게 아니다.’
신기심의공 흐름으로 몸 내력을 살피다 알았다. 모든 내력의 흐름은 쾌와 환을 좇는다. 한데 흐름 중간중간 탄, 튕겨 냄의 묘리를 담아 무거움을 끌어낸다.
그럼에도 무리가 없다.
검에 실린 묵직함을 알려 주듯 대기를 가르는 진동이 사방을 울리는데도, 사방팔방 뻗어 나가는 검은 마치 뱀이 춤을 추듯 현란했다.
변칙의 범위 내에선 셋을 제대로 담아냈다.
무윤은 과거 척고련 시절, 여휘를 비롯한 수많은 무의 기재들, 그 몸속을 구석구석 들여다봤다.
신기심의공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
‘그래서 알지. 진짜 천재가 어떤지.’
무의 자질을 논할 때, 가장 객관적 기준은 심법의 이해와 몸의 습득 두 가지. 이 차이에 따라 둔재와 범재, 기재, 천재가 갈린다.
한데 무의 천재 중에서도 천재를 고르는 방법.
‘별거 없어. 진짜 천재는 어디로 가야 할지 그냥 알아.’
신기심의공을 만들어 나갈 때 여휘와 수도 없인 했던 대화. 그때마다 얼마나 열이 받던지 씩씩거리던 날이 셀 수도 없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몰라.
-몰라? 근데 어떻게 했어?
-그냥.
-이 새끼가 정말! 야! 똑바로 말 안 해! 그래야 구결에 반영할 거 아냐!
-모른다고 했잖아. 그냥 됐는데 뭘 설명하라는 거야!
-해 볼 의지는 있었을 거 아냐?
-그런 거 없었어.
-그럼?
-아우! 그냥 보여서 갔다니까! 그러다 됐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
서연이 보여 주는 모습도 그랬다. 물론 여휘에 견줄 정도는 아니지만, 떠올리게 하는 그 자체가 대단함을 알린다.
‘저런 천재는 그냥 알지. 몸이 갈 길을.’
무윤이야 연구와 오랜 노력을 통해 하나하나 길을 찾아간 노력파. 지금 경지 또한 과거의 경험에다 갔던 길이 절반이라 여기까지 왔던 거고.
그런 입장에서 가장 부러운 게 눈앞의 여인 같은 부류다.
문득 허탈한 실소가 올랐다.
서연이 얼마나 치열하게 무공을 익혀 왔는지 당서하에게 들었다.
‘천재가 노력까지.’
향후 서연의 미래가 눈앞에 훤하게 그려진다.
‘거기에 저 무공까지 얻었으니.’
중단전 무공을 찾아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고, 그 이후엔 강호에 그 명성을 떨칠 게 분명한 여인.
문득 흐뭇한 미소가 만면에 흘렀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그러다 무윤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지금은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니다. 원인을 찾아야 한다.
다시 신기심의공을 극한으로 올려 서연의 몸 이곳저곳을 세세히 훑어 갔다.
서연의 검은 갈수록 달라졌다.
물 흐르듯 유려함에서 비틀림과 회전에 더해져 버들가지처럼 흩날리고, 느림과 빠름을 교차해 이전보다 더 빠른 쾌를 순식간에 검로에 섞어 낸다.
분명 처음 보였던 초식을 제멋대로 변형하는 시전자의 의지가 가득 담겼다. 가능한 많을 걸 보여 주려는 서연의 의도가 만든 변형.
한데 그럼에도 어색함이 없다. 변환된 초식임에도 물 흐르듯 끊임이 없다. 팔과 몸 따라 사방으로 너울거리는 검이 유려하다.
그러길 한참, 같은 초식이 세 번째 반복될 즈음, 무윤은 전혀 생각도 상상도 못 했던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의아함에서 설마, 그리고 추측을 거쳐 확신이 된 사실.
‘몸에 쌓인 바라타나티암 기운이 하단전 내력과 교류한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 속에도 안정됐던 흐름은 두 내력의 조합이 만들어 낸 결과다. 몸이 받쳐 주기에 가능했던 것.
이럴 때 경악이란 말을 쓴다.
‘중단전을 열지 않고도 해냈어.’
바라타나티암 심법을 운용하면 서서히 근육, 신경, 장기 모든 신체 기관에 내기를 담는다.
하지만 중단전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체기발경(體氣發勁), 그 전까지는 하단적 내력과 별도로 운용된다. 이땐 그냥 몸이 탄탄해져 내력 운용에 도움 될 정도다.
물론 무윤 또한 그랬고.
한데 진서연은 그 단계 이전에 스스로 몸이 그 길을 찾았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올라온다.
‘설마, 여휘와 비견될 만큼 천재란 말인가?’
여휘 또한 체기발경 전에 그걸 알아냈다. 그 이후 무륜과 논의해서 이론을 정립한 것이고.
이젠 궁금함에 가만있을 수 없다.
알자면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