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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92화 (92/161)

9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짙어 가는 어둠에 별빛만 반짝거릴 즈음.

무림맹 지부를 나오던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지부 밖으로 홀로 나가는 개방 거지 한 명. 매듭이 오결이다.

이곳에 있는 개방도 중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자.

배웅해 주러 옆에 있던 대주 정원에게 물었다.

“저 개방분은 좀 아십니까?”

“아! 섭 부단주 말인가? 친한 편이지.”

“어떤 분입니까?”

“딱 세상이 아는 개방 사람일세. 술 좋아하고 화끈하고 뒤끝 없고, 그러면서도 속은 따스한 그런 친구지. 아! 단주님도 맘에 들어 하신다네.”

“……!”

얼마 전 단주 각운도 보증한 자. 바로 감이 왔다.

‘그런 자라면 조작의 배후들이 포섭할 리 없지.’

동굴에서 본 자들로 유추해 보면 조작의 실체를 아는 건 극소수. 설사 개방에 있더라도 장로급 정도라 봐야 한다.

게다가 명분 있는 주장이니 저자가 의심할 가능성도 적다.

‘알아낼 게 많진 않겠어.’

대신 무윤이 할 조작에는 가담시킬 수 있다.

‘만약 상관없는 자라면, 끌어들인다.’

더 살피고 고르면 좋겠지만 시간도 중요한 승부 요소.

개방의 정보 담당 부단주만큼 지금 적임자도 없다.

무윤 신분이야 감추면 되는 것이고.

더 머뭇거릴 게 없다.

개방도의 빠른 걸음이 어둠이 깃든 저잣거리에 들어갈 즈음.

사사삭!

미세한 기척에 순의단 부단주 섭고량의 시선이 획 돌아갔다.

“누구냐?”

눈빛이 번득이기도 전, 허공을 일그러트린 손날이 어둠을 갈랐다.

투둑! 팟! 팟!

“흡!”

뒤통수의 둔탁한 충격과 함께 부릅떠진 눈꺼풀이 금세 사르르 내려앉았다.

‘고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두 눈이 멍하게 풀려 가며 의식을 잃어 갔다.

얼마 후, 동정호 인근 강가.

섭고량은 찰랑이는 물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급히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복면인의 날 선 눈빛이 눈 가득 들어왔다.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누구?”

“몇 개만 묻지. 오래 안 걸릴 거야.”

급히 마음을 추스른 섭고량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혈 외에는 다 점해진 상태.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은 이럴 때 빛을 발한다.

어느새 놀람 대신 능글맞은 미소가 입가에 흘렀다.

“그다음엔 저 물속?”

“대답에 따라서.”

“내가 누군지는 알 것이고.”

“순의단 부단주.”

“……나 없어지면 찾을 놈 많은데.”

“잡소리 계속하면 그래 주고.”

“……물어라.”

지금은 핵심을 찔러 반응을 살필 때.

“천마 소문, 개방에선 왜 그랬지?”

섭고량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눈빛.

“……뭘? 알아먹게 말해 주면 안 될까?”

무윤의 손이 둔중한 울림을 알렸다.

우우웅!

손끝에 넘실거린 기운이 푸른 빛을 발했다. 강기의 일렁임이 인다 싶더니 바로 하얗게 변한 권강의 기파가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위이잉! 우우웅!

초절정 중상 정도로 볼 경지. 지금은 다 보일 때가 아니다.

“쉽게 갔으면 좋겠는데.”

섭고량의 비린 웃음이 입가를 비틀었다.

“크크! 힘자랑할 필요 없어. 찍소리 한 번 못 하고 잡혀 왔는데 딴생각하겠어? 그리고 나 순의단 부단주야. 주워들은 정보가 한두 개가 아니지. 그렇게 물으면 몇 시진은 떠들어야 해. 그럴까?”

역시 대주 정원 말대로다. 그래도 아직은 차분히 캘 때.

“개방이 왜 소문을 퍼트리지?”

“……그것도 질문인가?”

“답부터.”

“내 거지 생활 중에 이만큼 마인 새끼들 똥줄 타게 하는 소문은 못 봤다. 답이 됐나?”

“물론 다른 속셈도 있겠지.”

“이봐, 첫 시작은 우리지만 그 후론 정파, 사파 모두 알아서 퍼트리고 있어. 그만큼 마인끼리 싸우게 만들 대단한 건수란 말이지. 그 광풍에 실속 안 챙기는 놈 있겠어? 우리도 그렇고.”

“너흰 뭔데?”

“전 강호를 뒤흔든 소문인데 그걸 개방이 주도해. 그뿐이야? 새로 뭔가 터지면 돈벌이도 짭짤하지. 한마디로 대박이라고.”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신기심의공으로 살핀 심장은 물론 표정 어디에도 떨림이 없다.

‘이자는 모른다.’

이러면 생각한 대로 가야 한다.

미끼를 던져서 이자 스스로 조사하게, 또 자신의 조작을 퍼트리도록.

무윤은 슬며시 운을 뗐다.

“이 소문에 조작은 없을까?”

섭고량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없긴 왜 없어. 정, 사 가릴 것 없이 자료 가진 데는 다 조작하는데. 안 좋은 건 쏙 빼고 좋은 건 부풀리고.”

“그런 거 말고.”

“그럼?”

“천 년 동안 잠자던 죽간이 갑자기 튀어나왔어. 거기다 진짜 천마신공이 따로 있고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말도. 뭔가 이상하지 않나? 처음부터 계략이란 생각은 안 해 봤나?”

섭고량은 복면인의 신분이 더 궁금해졌다. 대하는 태도나 말투에서 느껴진다.

‘날 죽일 자 같진 않은데.’

어쨌든 지금 묻는 건 원론적인 수준, 가릴 답변은 없다.

“정보 조직이 그런 의심을 안 하겠나? 이번 일도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피지. 한데 이상한 낌새는 못 찾았다. 최초 나온 죽간도 그렇고.”

이제 미끼를 던져야 할 때.

“천마신공은 지금 전해 오는 게 진짜다. 여휘라는 자가 지녔던 무공은 전해지지 않았고.”

섭고량은 눈을 껌벅였다.

“뭔 근거로 그딴 소릴 하지? 나오는 기록마다 다 다른데.”

“난 확실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섭고량은 티 나게 코웃음 쳤다.

“이봐, 백 년도 아니고 천 년이야 천 년! 그걸 어떻게 확신해? 아! 천 년 전에 살다가 막 왔으면 또 모르겠네.”

“무륜이라고 알겠지?”

“……마뇌?”

“내겐 그자가 남긴 기록이 있다. 아주 자세한 회고록이지.”

“……?”

어안이 벙벙한 자의 눈이 매서워졌다. 이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질문. 사실 확인은 나중이다.

“그대는 누군가? 또 그런 말을 왜 하지?”

“세상에 수십 년 만에 우연히 나왔다가 이번 일을 알았지. 한데 무륜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그런 의심을 하게 되더란 말이지. 해서 개방의 생각도 궁금했지.”

섭고량은 침이 절로 꿀꺽 삼켜졌다. 의심부터 들긴 하지만.

‘정말 무륜의 기록이라면.’

이제껏 떠들어 대던 모든 걸 싹 정리할 수 있다. 그런 자료를 개방이 확보할 수 있다면.

‘대박이지.’

밑져야 본전인 상황. 더 물어야 한다.

“그 기록, 어떻게 확신하지?”

“들어 보면 그쪽도 믿게 될 거야. 듣고 싶나?”

“……물론!”

“오래 걸릴 게야.”

“죽는 거보다야 백번 낫지.”

무윤의 기억이 곧 기록. 회고록이라 했으니 신강에서 최초 척고련을 설립한 것부터 강호를 통일한 것까지, 수십 년간의 일을 찬찬히 풀어 냈다.

근 반 시진 가까이 이어진 설명이 끝나자, 섭고량은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어 댔다.

그것도 거의 끝나 갈 무렵.

섭고량은 경악으로 벌어졌던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강호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다루는 부서의 부단주가 자신이다.

경험이 주는 확신.

‘어떤 기록보다 논리적이고 자세해. 그 양 또한. 알아볼 가치가 있다.’

그 확신에 따른 의문을 풀어야 할 때. 말을 에둘렀다.

“날 죽이러 온 건 아니군. 뭘 캐려는 것도.”

“이제 알았다면 다른 개방 사람을 찾아야겠지.”

“목숨이 달린 건데 확인했을 뿐이야. 그보다 좀 더 깊은 대화를 나누려면 대충이라도 알려 주지 그래, 누군지?”

이제 노년의 말투로 바꿔야 할 때.

“일인전승으로 내려온 도문의 계승자일세.”

“도문?”

“그러네. 천 년 전 조사께서 여휘와 무륜, 두 분과 친하셨네. 해서 우연히 무륜의 기록을 얻으신 거고, 조사님이 남긴 기록 또한 내용이 같았지.”

순간 부드러운 산들바람 탄 청량함이 섭고량의 몸을 휘감았다.

사라락!

너무나 편안한 느낌, 가슴을 살포시 어루만지는 포근함이 한가득 몸 안을 휘저었다.

그러다 서서히 전신에 전해지는 무형의 진기파동, 살기나 위협은 전혀 없음에도 사방을 겹겹이 두른 바람과 기의 압박은 방주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위이잉!

경악과 탄성이 절로 흘렀다.

‘이런 기운이라니!’

이제껏 만났던 어떤 도인에게도 접하지 못했던 청아함, 거기에 더해진 거대한 기운, 더 의심할 이유가 없다. 점혈도 어느새 풀렸다.

‘말씀대로 은거 기인!’

한데 급히 예를 갖추려던 섭고량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도인의 몸 주변에 어른거리는 기운. 살갗 위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모여 회오리친다.

우우우! 우우웅!

경악을 넘어선 벅찬 광휘의 탄성이 입을 헤쳐 나왔다.

“호, 호신강기!”

“역시 보는 눈은 있구먼.”

“……!”

몸 주위를 강기로 장벽을 치는 방어막, 검강보다 더 내력 소모가 많기로 알려진 그것. 또한 절대자임을 알리는 표시.

섭고량의 몸이 벼락 맞은 듯 들썩였다.

‘절대자! 그것도 화경을 한참 넘어섰어.’

무윤의 몸에 둘러진 강기는 두세 치가 훨씬 넘었다. 거기에 일렁이며 모인 기운은 언제든 하늘로 치솟을 듯 그 웅혼한 위세를 감추지 않는다.

자신이 본 최고수, 무림맹주 화선악이 선보인 것과 차이 없을 정도로.

‘맹주께선 화경 중반이라 알려지셨는데.’

더 재고 자시고 할 게 없다. 섭고량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담아 허리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처 몰라뵙고 무례를…….”

“이리 겁박한 건 나일세. 내가 미안하지.”

사실 보인 건 순수한 호신강기가 아니다. 신기심의공 호위막과 호신강기를 슬쩍 섞어 부풀린 것.

‘세상을 오시할 절대의 도인으로 보이는 게 최고지.’

다행히 잘 먹혀들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섭고량은 조심스레 물었다.

“한데 절 이리 찾으신 이유가?”

“나야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 의심은 들지만 잊으려 했네. 한데 얼마 전 우연히 조작한 자를 만났지.”

“예? 조작한 자를요? 어떻게?”

무윤은 동굴 일은 일절 감추고 다른 곳에서 만난 후 죽인 것으로 둘러댔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 확인했으니 알리긴 해야겠는데 강호에 연이 없어 찾던 중에 자네를 골랐네. 다만 개방 또한 의심할 수밖에 없어 이리한 것이고.”

“제가 어찌했으면 하시는지?”

“다른 게 있겠나. 잘 살펴서 혼란을 막으면 되지. 그러다 아는 게 있으면 전해 주면 고맙고.”

“이런 정보를 주셨는데 당연히 그래야지요. 한데 제가 기록을 볼 수 있을지?”

“가지고 다닐 것이 아니라 지금은 없네. 하나 필요하다면 생각해 보겠네.”

“꼭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전하는 건 어떻게?”

“당분간 호남 형주에 있을 것이네. 거기 개방 분타로 연락하세나.”

“하면 혹시 도호가?”

“청우라 하네. 자네만 알고 있으시게.”

“알겠습니다.”

이후로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물론 이번엔 무윤이 주로 물었다. 최근 상황에 대해서.

그러다 이곳 악양 얘기가 한참 흐를 즈음.

섭고량은 문득 생각난 걸 꺼내 들었다. 이런 대단한 분에겐 하나라도 더 알려서 점수를 따야 한다.

“참! 여기 악양에 야접(夜蝶)이 와 있습니다.”

“야접? 그자들이 왜?”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워낙 은밀한 자들이라. 한데 뭘 꾸미는 건 확실합니다. 총단 무인에다 최고수인 장로 염이규도 왔거든요. 그자는 아마 초절정 상을 넘었을 겁니다.”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다른 걸 몇 가지 더 묻고서는 자리를 마무리했다.

잠시 후, 예관으로 향하던 무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괜히 순의단 부단주가 아니야. 큰 도움이 됐어. 앞으로도 그렇고.’

소문은 물론 최근 강호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생겼다. 조작할 계획의 큰 윤곽을 그릴 정도로.

게다가 몇 번을 허리 굽히며 다짐 또 다짐한 얘기.

-저희 개방부터 확실히 조사하겠습니다.

-부디 그래 주시게. 그래야 맘 편히 자네에게 전할 수 있으니.

-믿어 주십시오.

의심과 의지를 가진 이상 철저히 조사할 건 당연지사.

무윤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만든 이름, 청우.

‘아예 이 신분을 제대로 만들자.’

천마교도 둘과 만날 때 우연히 만든 노년의 도인 신분.

한데 너무나 편하다. 위장이 아닌 실제 자신처럼.

거기에 앞으로 강호를 살피려면 다른 신분도 필요했는데.

또 그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형산에 전할 때도 지금 무윤보단 그게 낫겠지.’

어린 무윤이 모든 걸 전하면 실력에 앞서 의심부터 한다.

건허에게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될 일.

물론 이땐 다른 도호를 써야 한다. 두 개의 도인 신분을 만드는 셈.

바로 생각이 굳어졌다.

‘도인만큼 내게 어울리는 게 없지.’

또 도인 신분으로 바로 갈 곳이 있다.

세 번째 조작을 하러.

천마교도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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