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침주 동굴에 여휘가 남긴 것들.
그중 세상에 내놓으려던 건, 불경과 도경 일부, 그리고 형산에 줄 도백파 유진.
꺼내지 않으려던 건 두 부류다.
하나는 추억으로 혼자 간직할 것들.
이 생각의 핵심인 여백의 겸백도 포함된다.
다음은 세상에 꺼내면 평지풍파가 불 보듯 빤한 것들.
여휘가 심심풀이로 보라고 모아 놓은 정, 사 거대 문파의 절대무공같이.
둘 다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데 그걸 꺼내서 잘 이용하면 이 난국을 돌파할 묘수가 나온다.
여휘가 남긴 흑철 덕분에 떠오른 발상.
순간 세상 떠나갈 듯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큭큭! 조작은 나도 할 수 있지. 누구보다 더 완벽하고 은밀하게!”
과거를 덮으려던 흑철 또한 달리 보면 조작을 위한 도구.
그 생각이 이어지다 침주 동굴에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여분의 겸백이 생각났다.
여휘가 필사본을 쓰다 남겨 둔 수천여 장의 겸백.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여백의 겸백은 없다. 뭔가 기록돼 전해진 겸백도 극소수인데.
누가 봐도 천 년 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그것이면.
‘빈 겸백에 글을 조작해 진실을 담아 뿌리면!’
이제껏 고민의 초점은 조작을 어떻게 밝힐까, 거기에 매몰됐다.
그러자면 조작 세력을 찾고, 잡아 족쳐야 하고, 거짓된 부분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까지, 모든 게 난제 아닌 게 없었다.
또 설사 그 모든 걸 해결한다 치더라도.
지금 세상엔 천 년 전 진실을 판별할 잣대가 없다. 기록도 기억도 기준점도.
그런 이들에게 아무리 떠들어 댄들, 탁상공론만 주야장천 벌어지다 유야무야될 게 빤한 일.
하지만 천 년 전 겸백에 누구보다 정확한 근거와 신빙성을 담은 내용을 뿌린다면. 무륜의 기억은 곧 기록이고 진실. 그걸 담아 조작 아닌 조작으로 진실을 담아낸다면.
‘진실의 잣대로 만들 수 있다.’
잊힌 역사를 기억시킬 수 있다.
천 년을 이어 온 과거의 흔적이 현재를 규정할 수 있다.
‘강호의 핵심 세력이 하나둘 동조하면, 놈들 의도대로 안 굴러가지.’
물론 잣대만 있다고 끝이 아니다. 이 또한 해결해야 할 난제는 많다. 쉬운 싸움도 아니고.
세상에 알리고 같은 목소리를 내 줄 세력도 있어야 한다.
무윤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도 내가 판을 만들고 주도할 수 있지.’
유리한 전장으로 적을 끌어들이는 건 병법의 기본.
그 칼이 이제 손에 들렸다.
문득 흑철을 바라보는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친구의 정이 담뿍 담긴 선물, 거기에 해법 또한 담겼을 줄이야.
‘큰 선물 하나를 더 받았어. 고맙구나.’
방향을 정했지만 강호 전체를 놓고 짜야 할 계획.
신속히 추진하되 숲을 조망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피리와 하얀 줄, 흑철을 번갈아 매만지는 이의 눈빛은 더욱 깊어져 갔다.
호수를 덮어 가는 잔잔한 어둠도 짙게 깔려 갔다.
* * *
같은 시각, 악양 봉천문 문주실.
탁자를 마주한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봉천문주 고주양은 침중한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호남 하오문에서 그리 나오다니. 정말 예상 못 했네.”
침주 적운문주 설도승의 눈이 불을 품었다. 오랫동안 공들인 일을 무참히 깨 버린 놈.
‘연사구, 그놈이라니!’
침주와 천 리나 떨어진 이곳 악양에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침주에서도 모자라 여기에서도 훼방꾼으로.
우선 물을 게 있다.
“정말 그놈이 돈을 댔다 했습니까?”
“예관주에게 겁을 줬더니 그리 말했네. 이미 삼만 냥은 전장에 갚은 것까지.”
“그럴 리가. 그놈이 돈을 좀 벌긴 했어도 그런 거금은 절대 없습니다. 침주 하오문도 마찬가지고.”
“더 알아보고 있네. 다른 지부에서도 돈을 댔는지. 아니면 어디서 빌렸는지.”
설도승은 바로 떠오르는 놈이 있다.
“혹 같이 온 놈이 없었습니까?”
“누구 말인가? 지금도 놈을 살피고 있는데 혼자라 했네만.”
설도승은 바로 말을 돌렸다.
“혹시 돈을 빌려준 자가 같이 왔나 해서 여쭸습니다.”
봉천문주 고주양은 아내 고혜경의 오빠, 혈연으로 묶인 관계지만 이번 일은 문파 간의 이권이 걸린 거래. 세세히 알려 봤자 체면이 깎이는 건 물론 협상에도 좋을 게 없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상황.
‘여기까지 같이 왔을 리가 없지. 이 일에 돈을 대는 것도 그렇고.’
봉천문주 고주양 눈이 가늘어졌다. 이번 일로 설도승과 가릴 말은 없다. 거기다 넌지시 떠넘길 것도 있고.
“어쨌든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릴 순 없지.”
“하면?”
“방법이야 잔금 넣기 전에 손을 쓰는 것인데, 정사 대전 탓에 우릴 보는 눈이 많지 않나.”
“그래도 형님 수하들이 하오문도 한 놈을 조용히 처리 못 하겠습니까?”
“이 사람아, 그 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네.”
“예? 어떤?”
“인수한 후에 야접이 기녀들을 몰래 빼내는 걸 도와야지 않나. 한데 은밀히 처리해도 다들 우릴 의심할 것이고 하오문은 물론 개방과 여러 곳에서 뒤를 캐겠지. 그럼 어찌 되겠나?”
설도승의 눈에 찰나의 섬광이 번득였다. 의도를 모를 수 없다.
‘우리에게 떠맡기려는 수작!’
중원 전체 매음굴 대부분을 관리하는 흑도 조직, 야접(夜蝶).
매음굴은 각 지역별로 대부분 독자 운영된다. 그럼에도 강호 전체를 관장하는 무인 세력 야접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매음굴엔 당연히 자체 패거리가 있지만 흑도 파락호나 기둥서방이 대부분. 이곳을 욕심내는 사파나 흑도 무인 세력을 혼자 막아 낼 곳은 거의 없다.
그런 위협에서 지켜 주는 곳이 야접이다. 그 대신 일정 수고비를 정기적으로 상납받고.
그 공생 관계가 만들어 낸 매음굴의 직속 낭인 부대인 셈.
이번 예관 인수는 그 후 야접에게 매음굴로 보낼 기녀를 몰래 빼내 주는 대신, 악양과 침주의 매음굴 일부를 인수받기로 한 이면 계약이 있다.
또 일 년 후 예관을 양도하는 것까지.
그래도 지금은 더 들어야 할 때. 아직 방안이 안 나왔다.
“무슨 생각이신지?”
“그자는 침주 출신 아닌가. 자네 사람들과 우연한 싸움으로 죽으면 아주 깔끔하지 않겠나?”
“……어떻게?”
“마침 내일 정, 사 간에 이번 싸움을 마무리하자는 회의가 있네. 나도 참석하니까 예관 일을 묻는다는 핑계로 놈을 불러낼 수 있지.”
“거기서 놈을?”
“죽일 명분만 제대로 만들면, 회담이 중요한데 하오문도 일에 누가 나서겠나. 게다가 무림맹과 사도련이 증인이 되는 셈이고. 이 정도면 자네도 부담 없을 텐데. 안 그런가?”
꺼림칙하게 듣던 설도승의 표정이 달라졌다. 묘수가 따로 없어 보인다. 게다가 무윤을 처리하자면.
‘어차피 같이 죽일 놈인데.’
뺄 이유가 없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리하시죠.”
“역시! 자네는 시원시원해서 좋다니까. 참! 명분은?”
“알아서 하겠습니다.”
명분도 아주 쉽다. 사파에 그런 방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 * *
같은 시각, 악양 무림맹 지부.
멸마단주의 임시 집무실.
무윤은 동굴 일을 간략히 알렸다.
각운은 한참을 상념에 잠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조사한 게 있어서다.
“먼저 묻고 싶구먼. 정말 그 내용이 조작이라 생각하는가?”
“확언할 순 없지요. 제 자료도 기록 중 일부니까요.”
“한데 그자들이 조작한 자라고 어찌 확신하는가?”
“심중은 그런데 물증을 대라 하시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각운은 잠시 망설이다 말문을 열었다. 우선 다짐받을 게 있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자네만 알아야 하네. 그럴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번 일은 무림맹 서고부터 시작했지. 한데 그 죽간이 알려지기 전에 이미 군사부에서 살폈더군.”
“……그 말씀은?”
“먼저 발견하고 맹주와 군사부가 논의 끝에 퍼트린 거 같네. 이런 일은 비공식적이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맹의 장로인 내 사형이 전한 것이니 맞을 걸세.”
“천마교와 혈교에 분란이 될 일이라 그런 모양이군요.”
“그럴 것이네. 한데 그 죽간엔 최근 고쳐진 흔적이 없다 했네. 소문이 난 후 다시 여럿이 살폈으니 거짓은 아니라고 봐야지. 해서 난 조작인지 정말 헷갈린다네. 물론 앞으로 소문을 이용할 자들은 많아지겠지만.”
다른 계획이 선 이상 말을 돌려야 할 때.
“더 알아보겠습니다. 괜한 억측만 가지고 들쑤시다간 혼란만 오겠네요.”
최초 여휘와 척고련이 언급된 무림맹 서고 죽간은 조작이 없을 수 있다.
‘여휘가 천마라 불린 것과 무공이 천마신공이란 것만 틀렸지. 그건 야율겸이 천마라 불린 이후 죽간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무윤의 눈에 찰나의 섬광이 스쳐 갔다. 이제 조작이라 확신하기에 찾아낸 실마리.
‘처음 나온 것이라 살필 걸 예상했겠지. 그래서 문제없는 걸 골랐을 거고. 그럼 그걸 군사부 눈에 띄게 한 자, 그자를 찾으면 일이 쉬워지는데.’
세상에 처음 알린 역할을 했다면 핵심 인물로 봐도 된다.
한데 지금은 무림맹에 가서 살필 방법도 도와줄 이도 없는 상황.
‘이건 나중에 살핀다. 지금은 겸백을 조작해 알리는 게 급선무니까.’
단주 각운을 보던 무윤의 눈가에 아쉬움이 스쳐 갔다.
‘소림만 바로 끌어들여도 정말 쉬워지는데.’
명분과 실력 모든 면에서 정파의 구심점이자 핵심인 곳. 또 백성들의 절대적인 성원과 신망까지 더해진 사찰.
그 어떤 곳보다 힘이 된다.
하지만 일엔 순서가 있는 법. 소림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은 계획대로 연이 닿은 곳부터 차근차근 풀어 나가야 한다.
‘소문이 하나둘씩 무르익어 가면 그때.’
그래도 밑밥을 깔아 놓으면 더 빨리 낚아챈다.
“참! 저번에 말씀드렸던 불경 말인데요.”
“오! 그래,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사실 전에 말씀드린 거 말고 지금 세상에 없는 불경이 더 있습니다.”
각운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더 있다? 하면 그때는 왜? 혹 본사에 전하기 꺼려지는가?”
“그럴 리가요. 다만 천 년 전 귀한 것들이라 이 시기에 내놓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소문 때문에 괜한 오해를 받겠군. 하면 어찌했으면 하는가?”
“조용히 처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 그 귀한 걸 받고서 예의가 아니거늘.”
“조용해지면 그때 뭐라도 주시죠. 아! 저 욕심 많은 장사꾼인 건 아시죠?”
“허! 그 사람 참! 알았네. 그럼 장로급 이상에게만 알리지. 어떤가?”
“그러시죠. 우선 머릿속에 있는 건 필사해서 수일 내 드리겠습니다. 나머진 침주에 있으니 차후 전해 드리고.”
“그래 주면 고맙지.”
“참! 이참에 부탁 하나 더 드려도 될지.”
“말해 보게.”
밑밥은 여러 곳에 깔아 두는 게 좋다. 특히 소림과 함께 정파의 양대 축인 무당은 특히.
“지금 없는 도경도 여럿 있습니다. 그것도 적어 드릴 테니 무당에 전해 줄 수 있으신지.”
각운은 지난번 형산 얘기가 떠올랐다.
“형산을 살피더니, 아니라고 본 겐가?”
“거기 전할 건 따로 있습니다. 스승님이 남겨 놓은 게 좀 많아서 나누려고요.”
“허허! 보물 창고를 넘겨주셨군그래.”
“과한 짐이기도 합니다.”
“알았네. 좋은 일인데 그리해야지. 아! 물론 조용히 처리하겠네.”
“감사합니다.”
각운은 화두를 돌렸다.
“참! 천마교도 상태는 좀 어떤가?”
“중상이라 며칠은 걸릴 겁니다.”
“야율혁은 어찌 보이던가? 사실 걱정은 된다네. 천년 기재라 불리는 친구라.”
“잠깐 만났는데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대화는 통하는 자입니다.”
“노파심에 당부하겠네. 혹 아니다 싶으면 꼭 말해 주게. 이번이 아니더라도 준비는 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각운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참! 자네에게 이 향패(鄕牌)를 줄까 하네만.”
“이게 뭡니까?”
“마인이 출몰하면 해당 지역 무인들 도움을 받곤 하지. 그때 임시로 부여하는 멸마단 대원 패일세.”
무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멸마단에 들어오란 말씀입니까?”
“나야 좋지만 자넨 그럴 생각이 없지 않나? 말 그대로 임시 패라 권한 없이 신분만 증명할 뿐이고 반납하면 그만이지.”
“근데 이걸 왜?”
“두 가지 이유네. 하나는 자네가 정, 사 양쪽에 발을 걸친 터라 괜한 싸움이 생길까 그런 것이고.”
“저 싸움꾼 아닙니다만.”
“크흠! 내가 본 게 그러니 어쩌겠나. 두 번째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마인 말씀입니까?”
“자네 스승님 뜻이 그러하니 자주 부닥치겠지. 그때 유용하게 쓰시게.”
“솔직히 족쇄 같은 기분인데요.”
“허허! 내 사심도 많이 들어갔네. 가끔 생각해 보시게.”
그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이게 있으면 무림맹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멸마단은 맹 내에서 나름 입지가 세다네. 게다가 그 패는 대주급 향패지. 간부 식당 밥은 언제든 공짜일세. 거기 맛이 아주 좋다네.”
“……!”
있어서 나쁠 건 없다. 차후 무림맹에 가 볼 수도 있고.
엮이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그렇게 조작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