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무윤은 옥에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 글을 남겨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처음엔 네가 강기 무공을 익혀야만 볼 수 있도록 안배했었다. 이 글을 쓴 옥은 아주 여린 옥이고 글도 일부러 얇게 새겼지. 함은 흑철로 둘러쌌고. 만약 흑철을 강기로 끊지 않았다면 충격에 부서지게 말이다. 그 정도 무공을 이루지 않았다면 강호에 뜻이 없는 것일 터. 그러면 이 글을 못 보게 한 게지. 한데 결국 마음을 바꿨다. 흑철을 잘라 내서 네가 어떤 상황이건 이 글을 볼 수 있게.]
처음엔 흑철로 함을 둘러쌌다가 여휘 스스로 잘라 냈다는 얘기.
‘강호에 뜻이 없으면 못 보게 했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의아함이 가득 밀려든다.
[내가 후손 놈들에게 한 게 있는데 그걸 침주 동굴에 함께 적자니 네게 과거의 짐을 씌울까 싶어 그러지 못했다. 처음 흑철의 안배를 생각했던 것도 그 이유였고.]
‘후손? 천마교에게?’
[동굴에도 남겼다만 후손 놈들이 마공을 만든 건 나도 잊어버리기로 했지. 가끔 나갔다가 정말 못 봐줄 놈들만 손보고는 말았다. 한데 얼마 전에 교주란 놈 무공을 보고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어. 천마신공이라는 건데, 네가 만든 무상여의공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놨더구나.]
혹시나 했던 것이 들어맞았다.
‘역시 그거였구나. 한데 엉망으로 만들다니?’
[후손 놈들이 연구한 마공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극천련이라는 걸 만든 선우진 그놈이 했던 약을 통한 연구, 천마교는 너도 알겠지만 역혈기공이고.]
역혈기공(逆血氣功), 혈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내기를 일주천하는 내가공부를 통틀어 말한다.
역혈은 일반 사람도 순간 강한 힘을 낼 때 본능적으로 일으키는 현상. 그렇기에 정종 무공에도 그 활용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무륜 또한 소려에게 준 빙옥섬수를 제외하고 만든 무공 대부분에 활용했으니까.
문제가 되는 건 역혈의 시간과 그 범위다.
혈이 흐르는 방향을 뒤집는 건 곧 순리를 거스르는 것. 그걸 오래 하거나 몸 전체에 퍼트리는 게 나쁘다는 건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가장 큰 위험은 주화입마와 산공, 그리고 광기, 그 이외에도 온갖 부작용이 난무한다.
그럼에도 과하게 써 대는 이유는 단 하나.
‘인간의 본능이 혈에서 꺼낼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이지.’
위험한 건 누구나 안다. 한데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그러다 골로 가는 게 역혈이다.
[가면 갈수록 후손 놈들은 힘도 약해지고 변질돼 가더구나. 아린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젠 저들의 삶이거늘 껴들 생각은 없었다. 설사 망한다 해도 말이다. 한데 수십 년 만에 나가 보니 안 망하고 가는 놈들 꼬락서니가 정말 가관이었어. 그냥 망했으면 싹 잊어버렸을 텐데.]
무윤의 의아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정말 궁금한 게 있긴 했다. 잊어버릴 일이라 덮어 두려 했던 것.
여휘와 자신이 없는 척고련의 앞날을 당연히 걱정했었다. 그래서 두 가지 안배를 남겼다.
하나는 해오를 비롯한 군사부에 인재를 확충한 것.
다음 수많은 무공을 만들고 대주급 이상의 무인들에겐 일일이 몸에 맞춰서 전수까지 했다. 근 이백에 가까운 인원에게.
그 힘이라면 그리 무기력하게 질 리가 없는데.
‘도대체 갑자기 약해진 이유가 뭐란 말이냐?’
[성미 급한 야율겸 놈이 내가 사라지자마자 얼마 안 돼 중원 대전을 일으켰다. 그때 해오 말을 듣지 않고 나대다가 유인책에 말려 대주급 이상 놈들이 거의 몰살당했다. 그러니 이후 네 무공은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지.]
무윤은 절로 탄성이 올라왔다.
‘아! 그래서!’
무윤이 만든 무공 대부분은 각자 몸에 맞춘 것들, 그만큼 강했지만 후대에 전하려면 무공서만으론 안 된다. 사부 된 자가 최소 십여 년간은 제자의 몸을 살펴 줘야 한다.
일인 전승의 무공이나 마찬가지.
척고련은 소수의 강한 무인이 주도하는 집단이라 그 특성을 고려해 무공도 그리 만든 것인데.
‘그렇게 한꺼번에 죽었으니 정수를 전하지 못한 거구나.’
[더구나 네가 만든 심법 대부분은 도가의 것, 스승 없이 서책만으로 극의까지 갈 놈이 신강에 몇이나 있을까. 야율겸 그놈이 급히 역혈기공을 연구한 것도 다 그런 이유니라. 한데 네 심법만큼 안정된 게 없다 보니 그걸 역혈마공에 맞게 변형해 갔더구나.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 절대마공의 심법 대부분은 네 것이 근간이더라.]
무윤은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속 깊은 탄식이 연이어 흘렀다.
‘허! 이 못난 놈들! 내 걸 계속 팠다면 백여 년이면 충분히 복구했을 것을.’
물론 상황은 이해 갔다. 당장 쳐들어오는 놈들을 막아야 했을 테니.
하지만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갔어도 됐는데, 그 아쉬움만은 어쩔 수 없다.
[한데 내 살펴보니 그리 길을 못 찾고 헤매다 보니 점점 더 사악한 마공 쪽으로 흘렀다. 흡혈은 물론 시체의 사기를 흡수하는 것에서부터 온갖 흡성대법과 채음보양 수법이 난무하더구나.]
‘허! 그리 망조가 들어 버리다니!’
[해서 내 손으로 천마교를 없애 버릴까 고심도 많이 했다. 하나 선우진 그놈 말대로 내가 없앤다고 사라질 게 아니지. 해서 다른 방법을 찾았느니라.]
‘어떤?’
[여기 모인 놈들이야 진정으로 강한 자가 나타나면 추앙하고 따르지 않느냐. 무공 또한 그의 길을 좇을 것이고. 해서 엉터리 천마신공을 고쳐 줬느니라. 모든 사악함을 배제하고 역천행공과 분노의 의지를 넣어 그 어떤 마공과도 견줄 수 없게 만들었지. 단 심법은 네가 가장 아끼는 무상여의공이 근간이라 손볼 게 없었어. 놈들이 흐트러트린 것만 바로잡아 놓았다.]
무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라? 그럼 지금 천마신공이?’
여휘와 자신의 합작품이란 뜻.
[그리 만들어 교주 놈에게 전했는데 영 자질이 엉망이라 직접 손봐 줬더니 말년엔 극마를 넘어 탈마 지경까지 가더구나. 그 후 사악한 마공이 많이 사라져 명맥을 이어 갈 정도는 되지 싶었다.]
손은 안으로 굽는 법, 무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잘했다. 그런 거라면 명맥은 이어야지.’
[한데 전하긴 했다만 구결과 주해로 남긴 것만으론 이후엔 극마 이후 탈마의 벽을 넘기 힘들 게야. 내 깨달음 또한 신기심의공이라 그 진체를 체득해야 극의로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 그 전부를 풀어내는 놈은 천 년 안에 몇 놈 없었을 게다. 아예 없을 수도 있고. 그래서 또 걱정이 됐다. 이룬 놈이 없으면 또 지금 같은 상황이 돼 있는 건 아닌지.]
그 경지에 이른 천마가 있었다고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극의라면 현경을 넘어 생사경을 말하는 것인데.
무윤은 천 년 후까지 걱정하는 여휘의 마음이 안쓰러웠다.
‘이젠 잊어버려라. 거기까지 했으면 됐어.’
여휘는 글을 새로 쓴 이유를 풀어 냈다.
[이제 왜 내가 고민했는지 알 게다. 이 사실을 알리면 넌 과거에 발목이 잡힐 테니까. 처음엔 그 걱정에 동굴에도 적지 않고 흑철의 안배도 생각했지. 한데 고민하면 할수록 덮는 게 능사가 아니다 싶었다. 또 네게 감추는 것도 정말 싫었고. 해서 모든 걸 알리고 맡기는 게 최선이라 여겼다.]
가슴 한쪽이 싸하게 저며 왔다. 만약 침주 동굴에 이 글을 적었더라면.
‘과거 내 삶과 혼이 담긴 무공들인데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했겠지. 그땐 이 세상에 어떤 인연도 없을 때니까. 그럼 과거에 얽매인 삶이 됐을 테고.’
그걸 우려해 수많은 밤을 고민하고 이 글을 써 내려갔을 놈의 모습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그저 떠오르는 한마디.
‘고맙구나. 심사숙고해 잘 결정하마.’
[혹시 몰라 춤추는 청옥 조각 아래 천마신공 전부를 넣어 두었다. 지금 교주란 놈은 돌대가리라 무심(無心)으로 만든 내 천라무(天羅舞) 안에 그 길을 넣어 가르쳤지.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남긴 것과 천라무로 저들의 길을 인도할 수 있다는 소리다. 너라면 잘 결정하겠지. 그냥 묻어 둘지, 꺼내서 전하든지, 그럴 가치도 없어 밟아 죽이건 말이다.]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천라무에 그 길을 담았단 말이냐?’
여휘의 천라무는 살피기만 했을 뿐 해 보지 않았다. 유심(有心)의 천라칠상무로 다른 길을 선택했으니까.
다음 글엔 흑철을 남긴 이유를 알렸다.
[흑철은 잘라 내고 나서 버리려 했었다. 한데 내가 널 생각하면서 고민하고 매만지던 것이라 차마 버릴 수 없더구나. 다른 뜻은 없으니 알아서 해라.]
어느새 무윤의 손 또한 흑철 여기저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스슥! 사사삭!
무윤에겐 이보다 큰 선물도 없다. 친구의 손때가 묻은 데다 자신에게 미칠 여파를 수없이 고민한 흔적이 담뿍 담긴 것인데.
금세 촉촉한 물기가 올라왔다.
‘항상 옆에 두마. 그리고 잊지 않으마.’
이어 마지막 당부가 적혀 있었다.
[요즘은 나도 늙은 모양이다. 네놈 잔소리가 이해되고 이것저것 돌아보는 게 많아지는 걸 보니.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 또한 많아지더구나. 노파심에 당부한다만 너도 지금은 젊어졌겠지만 부디 나이 들었을 때 그 마음을 잊지 말거라. 그럼 후회 없는 삶이 되겠지, 허허! 쓰다 보니 이젠 내가 잔소리를 하게 되는구나. 친구야, 부디 널 위한 결정을 하려무나. 그래야 후회가 없음이다. 너도 나도.]
온갖 고민을 던져 준 글임에도 입가엔 흐뭇한 미소부터 흘렀다.
‘이놈한테 잔소리를 들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이 생소함이 너무 반갑게 다가온다.
매번 온갖 구박에 잔소리만 해 댄다고 투덜거리던 놈인데. 그런 놈이 노파심이랍시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거기다 노년 때의 마음을 잊지 말란 당부까지.
격세지감(隔世之感), 역지사지(易地思之)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한동안 가벼운 웃음을 흘리던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이제 소려와 친구를 다시 만난 즐거움은 잠시 내려놓을 때.
우연히 건너온 천 년 후 세상.
과거를 잊기로 하고 살아온 지 사 년쯤.
그러다 느닷없이 천 년 전 과거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엄청난 분노와 함께.
그 탓에 최근 모든 계획이 흔들리고 혼란한 상태였는데, 오늘 소려와 여휘가 전한 선물이 마음을 차분케 한다.
‘그래, 과거도 지금도 모두 내 삶인 걸, 굳이 밀어낼 필요도, 당길 필요도 없지. 온전히 날 위한 결정, 그거면 되는 것을.’
이제 과거의 미련, 궁금증, 불안은 다 털어 낼 수 있다.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에 묶일 게 없어졌다. 쓰린 기억은 쓰린 대로, 아련한 추억은 따스함으로 간직하면 된다.
천 년 전 과거도 어제처럼 오늘을 살 밑거름일 뿐이다.
그 마음 담아 앞만 바라보면 된다.
문득 황톳빛 물살 헤치는 죽엽선에 시선이 절로 갔다.
언젠가 들었던 시 구절이 떠올랐다.
[강물은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네.
먼저 가려 하지도, 늦춰 가지도 않지.
그저 꼬박꼬박 천천히 흘러간다네.
굽어 도는 강줄기 굽이굽이 인생길 그리 간다네.
그저 너울 치는 파도 만나 소리 높여 울 뿐이라네.]
‘그래, 포구도 들렀다가 구불구불 계곡 길도 지났다가 격랑을 만나면 소리 높여 울면서 그리 가는 게지. 나만 흔들리지 않으면 되는 것을.’
그렇게 동정호 물가에 앉아 두 사람이 남긴 선물을 하염없이 매만지길 한참.
문득 흑철을 어루만지다 가벼운 실소가 흘렀다.
‘허허! 날 생각해서 감추려 했었다고, 이놈아! 그건 지금 놈들처럼 조작이나 마찬가지……?’
순간 무윤의 눈이 멍해졌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생각.
‘가만! ……조작!’
뇌리가 전율했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나도 조작하면 되는 것을!’
매만지던 흑철이 알려 줬다. 발상을 전환하라고.
조작엔 조작으로 맞대응하라고. 그렇게 깨부수라고.
‘난 그게 가능하지.’
여휘가 남긴 게 있다. 그것도 완벽하게 조작할 수 있는.
그중 핵심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여분의 겸백(縑帛, 기록용 비단)! 그리고 자료들!’
천 년의 과거를 증명할 수 있는 그것들이라면.
몽롱하게 홀린 듯했던 눈빛이 금세 이글이글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