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악양 예관 관주 집무실.
관주 조충량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 사구야,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인수?”
“예, 돈은 제가 대고 인수 명의는 호남 하오문 전부로, 운영은 지금처럼 숙부님이 하시면 됩니다.”
“……너 칠만 냥 있어?”
연사구의 턱짓이 무윤을 가리켰다.
“이놈한테 빌리기로 했어요. 삼만 냥은 지금 있고요.”
“……?”
연사구와 무윤의 설명에 이어 대화가 한참 이어지고 난 후, 조충량은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 이럴 것이다.
“후! 조상님 뵐 면목이 없었는데 정말 고맙구나.”
“그러면 문제없는 거죠?”
잠시 생각하던 조충량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렇기는 한데 봉천문한테는 잘 말해야지. 계약은 안 했지만 거긴 인수를 기정사실로 알고 준비하고 있었거든.”
“다른 데 넘기는 것도 아니고 하오문에 돈 빌린 건데 문제 있겠어요?”
“어쨌든 악양 최고 사파 아니냐. 꼬투리 안 잡히려면 신중하게 대응해야지.”
“뭐 투덜대면 몇 푼 찔러주면 되죠.”
“알아서 하마. 아무튼 조카 잘 둔 덕에 이리 해결되는구나, 허허!”
그때 무윤이 슬며시 나섰다. 같이 있는 하유빈이나 연사구가 꺼내기 어려운 말이 있다.
“관주님, 거래 표국 말인데.”
“그래, 말해 보게나.”
“금월 표국에 더 할당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응? 그건 왜?”
“사구 이놈이 친 사고 때문에 장사에서 금월 표국 입장이 곤란한 거 아시잖습니까. 악양 쪽에 더 집중하는 건 어떨까 하는 데 여지가 있으신지?”
화들짝 놀란 하유빈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녜요. 예관이 유지되는 것만 해도 저흰 다행인데…….”
조충량의 웃음이 짙어졌다. 마침 그럴 일이 생겼다.
“봉천문에 넘기면 표국도 다른 거래선을 찾아야 해서 미리 알렸더니 마침 다른 쪽으로 인원을 다 돌렸더구나. 우린 새로 구해야 할 상황이지.”
“……!”
약간은 민감했던 사안도 쉽게 풀렸다.
* * *
잠시 후, 악양 예관 별실.
무윤 일행과 연사구, 하유빈이 따로 자리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에고! 그걸 네 생각이라고 떠벌렸어? 하여간!”
“야! 나도 같이 의논했잖아!”
“맞장구만 친 놈이 무슨!”
“……!”
사실 확인은 끝났다.
이젠 내용을 들어 볼 때.
무윤의 시선이 하유빈을 향했다.
“그 생각을 왜 했는지부터 듣고 싶은데.”
유빈이 세 살 위지만 말은 놓기로 했다. 연사구와 친구라 유빈이 먼저 그러자고 했다.
“아인(牙人)들은 대부분 개인 행상이라 표행 따라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그렇게 같이 다니다 얘길 듣고 생각한 거야.”
“사업성은 있어 보이던데.”
유빈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본다 이거지?’
무윤에 대해선 익히 안다. 물론 그녀의 관심은 무공이 아닌 사업. 침주에서 벌인 일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업 중 하나가 빈민 구제와 동시에 돈을 버는 일.
‘어떻게 해냈을까?’
상계에선 양립할 수 없는 사안으로 통한다. 자신 또한 뜻은 좋으나 지속은 어렵다고 봤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한데 시전 전반에 쫙 깔아 놓은 그런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것도 우려와 달리 몇 년 동안 성장하고 있고.
‘무력과 돈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런 이에게 사업 설명을 해야 할 지금. 마른침이 꿀꺽 삼켜졌다.
‘이런 기회가 없어.’
자신은 자본도 세력도 없는 작은 표국의 소국주. 하지만 상인의 꿈은 언제나 원대한 법.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더해 짜낸 생각이다. 거기에 연사구가 있는 하오문까지 같이 커 갈 방법으로.
초롱초롱한 시선에 설렘이 가득 담겼다.
이런 자에게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다. 오직 핵심만.
“중개 거래가 커지는 건 설명할 필요 없겠지?”
“그건 됐고. 이것부터 짚어 보자. 다른 덴 왜 아인들 묶을 생각을 안 할까?”
“지금은 그럴 돈으로 직접 매매하는 게 훨씬 이익이니까.”
“나중에는?”
“앞으로도 중개 자체에선 큰 이익을 보기 어렵지.”
“역시 답은 정보란 건가? 중개하려면 여러 지역 시세나 상품 상황을 모을 것이고 그걸 이용한 다른 사업?”
유빈은 연사구를 힐끗거리고는 싱긋 미소 지었다.
“누구처럼 설명 안 해도 되니까 좋네.”
“답답했겠다.”
“말해 뭐 해.”
연사구가 불끈하려는 순간, 당서하의 손이 어깨에 올라갔다.
“잡소리 할 거면 입 닫아라.”
“아니! 대놓고 저러는데 그럼…….”
“잡소리 맞네.”
“…….”
유빈의 설명이 이어졌다.
“거대 상단이야 자체 정보력이 있으니 지역 시세나 거래 품목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문제 없지. 하지만 개인 행상은 그저 인맥으로 주워듣는 게 다야. 아는 상단이나 표국 사람들한테 빌붙어서.”
“하오문이나 개방에 알아보기엔 비싸고, 또 전문가들도 아닌데 정확하지도 않고 시기상으로 안 맞을 때도 많을 것이고.”
“그 틈새를 노린 거야. 아인을 직접 고용해서 정보를 대량으로 모은 다음에 싸게 푸는 거지.”
사업 내용은 더 들을 게 없다. 무윤도 생각하고 있던 거니까.
“경쟁이나 위협이 될 건 뭐가 있지?”
“그게 이 사업의 핵심이야. 큰 세력이 들어오기 어려운 진입 장벽이 존재하는 거. 우선 거대 상단이 나서기 어려운 건 말 안 해도 알지?”
“다른 상단이 그 정보를 쓸 리 없지. 오래 그러다간 종속돼 버릴 텐데. 수익성도 없는 사업 때문에 적을 만들 바보 상단도 없을 테고.”
“중소형 상단은 생각해 볼 만해. 근데 거점에다 인력을 새로 확보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지.”
“여긴 하오문 지점에다 그 인력을 이용하면 되니까 가격 경쟁력이 있는 거고.”
“그런 면에서 표국도 관심 있어 해. 근데 여긴 지역 거점은 있지만 인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표국이야 무인들인데 그 자존심에 할 리가 없겠지. 쟁자수는 잘 알지도 못하고.”
“틈새시장이라고 한 말 이제 이해 가지?”
“그러네.”
순간 유빈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이제 구체화할 때다.
“사업을 다 짰는데 진행 못 한 이유는 두 가지야.”
“하나는 돈일 것이고 다른 건?”
“사구나 나나 장사가 기반인데 거기서 시작하면 서문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잖아. 하오문이 커지는 걸 싫어하니까. 근데 네가 참여하면 걱정이 없어지지.”
“……침주부터 시작한다?”
유빈은 눈을 찡긋거렸다.
“그렇게 시장을 선점하면 그 정보로 뭘 할 수 있는지 알지?”
먹고사는 거래는 곧 사람 사는 모든 것. 그렇게 모은 정보를 가공하면 소규모 상거래에만 쓰일 리 없다. 그것도 독점이나 마찬가지인 정보인데.
장사꾼의 기본은 남을 설득하는 것. 거기에 제 발로 달려들게 하면 더할 나위 없고.
그럼 면에서 유빈은.
‘타고난 장사꾼이네.’
모두에게 이익인 거래다. 물론 무윤 또한 여러 면에서.
친구를 돕기 위해 나선 걸음인데 얻을 게 많아졌다.
결론을 냈다.
“구체적으로 논의해 보자.”
“좋아, 그럼 바로?”
“아니, 오늘은 일이 있다. 내일.”
연사구가 껴들었다.
“멸마단주 만나러?”
“말씀드려야지.”
“그래. 다녀와라.”
한데 그 전에 갈 데가 있다.
소려가 남긴 걸 찾아야 하니까.
* * *
두 시진 후, 동정호(洞庭湖) 인근 숲속 동굴.
사사삭!
좁은 통로를 빠져나온 무윤의 손에 옥빛 나는 함과 잘린 철 조각 여러 개가 들렸다.
소려가 표시한 위치는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그 주변에 무질서하게 나열된 것처럼 보이던 거석들.
‘동굴 안 벽화 위치와 같게 만들었어.’
그 돌 사이 비밀 공간 위치에 있던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여휘가 침주에 만든 것과 똑같은 벽이 존재했다. 그 후 함과 옆에 놓인 철 조각을 찾기까지는 일사천리.
좁은 공간이라 다른 걸 찾을 필요는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무윤의 시선은 우선 철 조각으로 향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그 모양새를 보고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함을 감쌌던 흑철(黑鐵)인데 왜 잘린 채 여기에?’
옥빛 함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흑철 조각.
그 형태는 분명 옥함을 감쌀 용도로 제작된 게 맞다. 한데 잘린 채로 함 옆에 있는 이유가 마음을 불안케 한다.
‘혹시 누가 열어 봤나?’
하지만 막혀 있던 비밀 통로는 물론 함을 둘러싼 밀봉은 전혀 손댄 흔적이 없다. 지금으로선 판단 자체가 불가한 상황.
열어 보는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게 밀봉을 뜯어냈다.
투욱!
천 년을 버텨 온 함, 다행히 그 안엔 뭔가 있다.
우선 얼음같이 투명한 줄 여러 가닥이 천 년 만에 보는 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다.
보자마자 알았다. 무슨 용도인지.
‘소려 손에 있던 그 줄!’
춤추는 벽화 모두 소려의 손엔 여러 줄이 흩날렸었다.
자신처럼 이걸 손에 들고 춤추라는 뜻. 역시 여휘처럼 옆에 두고 떠올릴 수 있는 걸 골랐다.
또 다른 건 천설청옥으로 만든 피리 두 개. 그 크기가 다른 이유도 바로 감이 왔다. 하나는 아이의 것.
소려가 어릴 때 못 들어준 청이 있다.
-숙부, 저랑 이거 같이 불면 안 돼요?
-소려야. 난 피리 불 줄 모른단다.
-배우면 되잖아요?
-소질이 없어. 그냥 우리 소려 부는 거 듣기만 할게.
-에이! 같이하면 좋은데.
그 아쉬움에 넣은 것이리라. 이번 생에선 소중한 아이와 같이 불어 보라고.
작은 피리를 보는 눈에 애잔함이 더해져만 갔다.
‘그러마. 이번엔 꼭 배워서 같이하마.’
춤출 때 쓸 줄과 피리, 그 모두 이전과는 다른 삶을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선물.
다행히 다른 이가 손을 댄 건 아니다.
‘한데 흑철은 뭐지?’
일반 철보다 강하고 그중에도 최상으로 보이지만 여기 남길 정도로 귀한 건 절대 아닌데.
그때 두 선물을 완전히 꺼내자마자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글씨!’
함 바닥에 천설청옥과 일반 옥 두 개를 깐 다음 깨알같이 적어 놓은 글씨가 눈 가득 들어왔다.
소려는 이미 벽화로 뜻을 전했기에 글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급히 천설청옥에 적힌 글 첫머리에 안력을 높이는 순간, 아연한 입이 쩍 벌어져 버렸다.
‘여휘 놈이 왜 여기에?’
소려가 남긴 게 아니다. 이전 생이나 지금이나 수없이 본 그 글씨체.
[미안하다, 이놈아. 소려가 남긴 줄 알고 봤을 텐데.]
의아했다. 여휘는 침주 동굴에 여한 없이 글을 남긴지라 전혀 생각도 못 한 일.
시점상으로도 소려가 죽고 한참이나 더 살았던 놈인데, 굳이 여기다 글을 남기다니.
급한 마음에 바로 읽어 내려갔다.
[처음엔 소려 얘기도 동굴에 남기려 했었다. 한데 악양 벽화를 보고 나니 이게 낫지 싶었다. 네놈도 봤을 테니 까닭은 알 것이고.]
첫 줄을 읽자마자 바로 답이 나왔다. 애잔함 더해진 실소가 입가에 흘렀다.
‘에고, 이놈아! 그게 뭐 창피하다고. ……하긴 나 때문에 그런 것을 뭐라 할까.’
여휘도 평생 여인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 놈이라 소려를 마음에 담았던 일을 구구절절이 글로 적는 게 그 어떤 것보다 불편했으리라. 거기에 더해 자신이 신경 쓰였을 건 자명한 일.
한데 벽화를 본 이상 이 글이 없어도 되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알린 건.
‘내게 감추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었던 게지.’
평생 서로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살았는데 유일한 비밀 아닌 비밀, 그것 또한 멀리 떠난 친구에게 감추고 싶지 않았으리라.
속이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어쨌든 여기에 돌려서나마 시인한 것도 그놈 성격을 감안하면 용기 낸 일이다.
[이 함을 여기 두기 전에 소려에게 물었다. 혹 남길 말이 있냐고. 한데 됐다고 하더구나. 글보다 벽화와 노래가 더 자기 마음을 전할 거라고. 그러니 아쉬워하지 말거라.]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래, 그거면 됐다. 다 알았으니 됐어.’
천설청옥에 적힌 내용은 그게 다였다.
다음 글이 적힌 일반 옥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여기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글은 소려가 떠날 때가 아니라 침주 동굴에 마지막 글을 남기고 몇 년 후 다시 와서 썼느니라. 한참을 고심하다 동굴에 못 남긴 말이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뭔 소리야? 한꺼번에 못 적었던 글이라니?’
급한 마음에 다음 글로 시선이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