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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88화 (88/161)

88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파도처럼 다가오는 아련한 감정의 해일이 마음을 쓸어내리길 한참. 마음을 가다듬은 무윤은 노랫말과 벽화 모든 그림을 찬찬히 눈과 가슴에 담아냈다.

잔잔한 노랫말이 알렸다.

빙옥섬수 손끝 가득한 천설청옥 푸름이 무륜의 마음을 전했음을.

아련한 곡조가 알렸다.

무륜이 떠나기 전 오지 못한 한이 소려의 여린 속에 멍울로 가득 찼지만 이겨 냈음을.

영혼 담은 운율이 전했다.

남긴 것들이 전해진다면 소려는 저 하늘 위에서 웃을 수 있노라고. 피고름 된 아픔을 말갛게 씻어 낼 수 있다고.

어느덧 남몰래 훔친 눈에 물기가 잦아들었다.

‘그리 살았구나.’

벽화를 봤을 때부터 내용엔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소려는 천 년의 시공을 넘어 전한 마음에 거짓을 담을 아이가 아니다. 감출지언정 속일 아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올곧이 심상에 받아들였다.

자신이 떠난 후 괴로워하는 모습, 그 후 고민 끝에 찾아낸 자신의 삶과 또 무윤에게 바라는 것들을 거짓 없이 풀어 냈음이다.

노랫말과 벽화로 전한 수많은 것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우선 더할 수 없이 반가운 것.

‘웃으려고 노력했으면 됐다.’

행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노력한 진정은 담겨 있다. 그거면 됐다.

또한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는 사실 하나. 노래와 연주 내내 가슴이 따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저 하늘 위에 알려 주고 싶다.

‘네 가사가 천 년을 이어 왔단다. 저 여인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말이다.’

소려의 육신은 사라졌으나 마음 담긴 가사는 그 장구한 세월을 묵묵히 헤쳐 나왔다. 그것도 기록이 아닌 여인들의 진정으로 전해져서.

그보다 보람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무윤은 감히 단언했다.

‘네 삶은 누구보다 가치 있었단다. 대견하구나.’

굴곡진 인생을 누구보다 잘 헤쳐 낸 증명이다.

이제 떨리던 눈도 따스하게 다가온 새벽 햇살 속살거림에 조금씩 가라앉았다.

죽을 때까지 평생을 떨쳐 버리지 못하리라 여겼던 회한.

이 순간 그것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기쁜 마음으로 간직할 추억이 들어앉았다.

이제 자신에게 전한 걸 살펴야 할 때.

서너 개의 그림 속, 하늘거리는 소려의 춤사위가 눈 가득 들어왔다. 심상을 가득 채운 그리운 이의 손짓.

춤추는 벽화 모두 쳐든 손엔 매인 줄 여러 가닥이 허공에 넘실거렸다.

무륜과 있을 때 소려는 음(音)만 알았을 뿐 춤은 몰랐다. 그렇다는 건.

‘너도 춤을 췄구나. 그리 즐겁게.’

소려도 여휘처럼 직접 추고 권했다. 그 이유야 말할 것도 없고.

무윤은 그리운 이에게 꼭 전할 말을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고 있단다. 내가 좋아서 한단다.’

소려가 남긴 것도 뭔지 모르지만 그 쓰임새는 짐작이 갔다.

‘저리 춤을 권했으니 그에 맞는 것이겠지.’

또한 언제고 옆에 두고 떠올릴 그런 것이리라. 여휘가 남긴 서책처럼.

한참 후 온갖 소회가 정리될 즈음, 문득 시선이 동굴 입구를 향했다.

어느새 동굴 여기저기 흩어진 아침 햇살이 짙은 어둠 뚫고 뿌려진다.

무윤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가득 담겼다.

‘이제 다 털어 낼 수 있겠구나.’

이젠 그래도 된다.

소나기에 말갛게 씻긴 하늘처럼, 이제야 훌훌 털어 버리게 됐다는 후련함이 가슴 가득 밀려들었다.

키 작은 나무의 여린 가지 하나 꺾고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가 좁다란 동굴을 스쳐 갔다.

이젠 훌훌 털고 새로운 세상만 보라는 듯 파드득 날갯짓엔 생기가 가득 담겼다.

후드득!

얼마 후, 예관으로 내려가는 길.

무윤에게 무엇보다 급한 일이 생겼다. 소려의 마음이 담긴 동굴을 지켜야 한다.

‘예관을 인수하면 여기도 손본다고 했지.’

그러자면 상황부터 알아야 한다.

“참! 예관은 좀 어때?”

“뭐?”

“봉천문이 인수한다는 거. 그 정도로 안 좋아?”

“여기 동정호에 유명한 차가 군산은침(君山银针)이잖아. 거기 차밭에 투자했다가 홍수 때문에 한 방에 폭삭 망했어. 차밭은 다 정리했는데 빚이 칠만 냥 정도래. 예관을 팔지 않고는 방법이 없더라고.”

“매각은 확정된 거야?”

“아니, 논의 중에 정사 대전이 벌어졌잖아. 근데 거의 끝났으니 곧 진행하겠지.”

“가면 예관주부터 보자.”

“당연히 그래야지. 나랑 친한 숙부님인데.”

“어느 정도?”

“어릴 때부터 친해. 친숙부처럼.”

이러면 연사구와 엮을 수 있다. 연인의 가문인 금월표국도.

끌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가 인수할래?”

“……뭘?”

“예관! 너 돈 많잖아.”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당서하의 휘둥그레진 눈이 연사구를 향했다. 빚이 얼마인지는 들었다.

“와! 인수하려면 은자 칠만 냥이라며? 너 그 정도로 부자였어?”

“내가 그런 돈이 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당서하의 시선은 절로 무윤을 향했다.

“너 뭔 소리야? 얘는 돈 없다는데?”

“침주 여곽 상단 지분 이 할이 하오문 건데, 이놈이 그 절반 가지고 있습니다. 즉 상단 지분 일 할이 이 놈 거죠.”

당서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 무윤을 조사한 적이 있다.

“거기 은광에다 사업도 잘돼서 돈 많이 버는 건 알아. 그래도 일 할 지분인데 당장 칠만 냥이 돼?”

“하오문이 지금 가져가는 돈의 반이 월 이백 냥, 년이면 이천사백. 가만 그러니까……. 아! 삼십 년 치만 저당 잡히면 딱 되네.”

“그걸 담보로 네가 돈 빌려준다고?”

“예.”

연사구는 버럭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야, 이 개새끼야! 나는 계획 없냐? 나도 꿈이란 게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고!”

“예관 사업 잘해서 더 벌면 되잖아.”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야! 예관은 운영비나 수익이 빤해! 적자는 안 보지만 이익도 얼마 안 난다고.”

“그건 내가 도와줄게. 내 능력 알잖아.”

“야 인마! 그럼 네가 인수해. 그럼 깔끔하잖아!”

“너 바보냐?”

“……왜?”

“하오문 소속이라 유지된다며? 내가 인수하면?”

“……그렇긴 한데. 그럼 네 돈 빌려줘. 이자는 아주 싸게. 그럼 생각해 보고.”

“삼십 년 치 이익은 내가 가져간다.”

“그럼 안 해! 그거 건드리면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알았어?”

당서하가 또 껴들었다.

“너 그거 가지고 뭐 하려고? 이런 예관 하나 소유하면 자식들한테 평생 물려줄 수 있잖아. 난 그게 더 나은 거 같은데.”

“몰라도 돼요! 하여간 그건 절대 안 돼! 불가!”

무윤도 의아했다. 그 돈으로 뭘 할지는 전혀 듣지 못했다.

‘뭔데 저러지?’

예관은 하오문이 주인이라야 지금 모습대로 오래간다. 연사구 지분은 그걸 쉽게 풀기 위해 꺼낸 계획.

정 안 되면 그냥 빌려줄 생각도 있다. 소려의 흔적을 지키는 게 우선이니까.

한데 장난 반 꺼낸 얘기에 저런 반응이라니.

궁금함에 넌지시 운을 뗐다. 타당한 사업이면 빌려주는 건 물론 같이할 수도 있으니까.

“들어 보고 괜찮으면 내가 빌려줄게. 뭔데 그래?”

잠시 망설이던 연사구는 눈알부터 부라렸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이냐? 호남 대도시 일곱 개를 직할로 거느린 호남 지부장이시지. 중원 하오문 중에 우리만 한 데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렇지.”

“근데도 다들 우습게 봐. 거대 무가나 관이야 그렇다 쳐도 상단이나 지주 할 거 없이 힘 좀 쓴다는 놈들은 다. 툭하면 불러다 으름장이나 놓고 거들먹거리고, 하여간 난 그 꼴 정말 보기 싫어.”

“거기다 넌 더 굽히시게 만든 놈이고.”

“하여간 이 새끼는 초 치는 덴 뭐 있다니까.”

“사실이잖아. 어쨌든 그래서?”

“잘 알지? 하오문 삼 대 불가 사항.”

“강호 전체를 관할해선 안 되고, 특정 무가와 결탁해서도 안 되고, 거대 무가 정보를 집중 분석해도 안 되고. 이거지?”

“거기다 요즘은 중형 무가들도 합심해서 같은 요구를 해. 요즘은 그쪽에 치중했는데 압박이 장난 아니야.”

이쯤 되면 장난삼아 들을 얘기가 아니다. 하오문도로서 아들로서 고민이 가득 담겼는데.

우선 사과부터 해야 한다. 말은 삐딱하게 나오지만.

“야, 이 새끼야! 그런 얘기면 표정 좀 잡고 해야지. 장난인 줄 알았잖아!”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네가 왜 지랄이야!”

이번엔 당서하가 버럭 했다.

“둘 다 똑같은 놈들이 무슨! 야! 얘기를 해 얘길! 쓸데없는 잡소리 그만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저놈이…….”

“그만! 빨리 불기나 해.”

“……하여간 그게 불만인데 뾰족한 방법이 없더라고요. 근데 요즘 상거래가 장난 아니게 커지니까 그쪽을 파 보려고요.”

“어떻게?”

“아인(牙人)이라고 들어 봤어요?”

무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던 사업 중 하나다.

“사고파는 사람 사이를 중개하는 상인이잖아.”

점포를 가지고 판매하는 좌가(坐賈)와 타 지역에 상품을 이송하는 객상(客商)이 이전까진 상인의 대부분이었다.

한데 거래가 늘어나자 상품의 평가와 중개를 담당하고 수수료를 받는 일종의 중매인(仲買人)인 아인이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래. 그치들만큼 상거래 정보에 민감하고 빠른 자들이 없지. 그래서 아예 고용해서 해 보려고. 앞으로 무가보다 상거래 정보가 더 돈이 될 거 같거든.”

무윤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러 면에서 좋은 생각이네. 그 자체도 유망한 사업이고 하오문 외연을 넓히기에도 그만한 게 없지. 게다가 무가도 상단이 있는데 그 정보를 장악하면 지금처럼 우습게도 못 볼 거고.”

“그렇지? 또 그건 커져도 불가 사항으로 넣을 명분도 없잖아.”

듣고만 있던 진서연도 말을 덧붙였다. 절강 해안에서 듣고 본 게 있다.

“해상 거래에도 그런 중매인이 있어요. 오래 항해하다 보면 물품이 상하고 또 속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항구마다 물품별로 감정해 주고 중개하는 상인이 있거든요.”

당서하는 연사구를 향해 탄성을 감추지 않았다.

“야! 너 보기보다 대단하다. 그건 상거래 이면을 헤아려야 나올 생각인데. 다시 봐야겠어.”

“크흠!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조장님만 모르셨지.”

“남자 새끼가 그거 가지고 우쭐하기는. 하여간 이번 건 인정!”

잠시 생각하던 무윤은 일단 결정을 내렸다.

“그런 거라면 내가 투자할 수도 있어. 바로 논의하자.”

“너, 진짜지?”

“그래, 그럼 예관 인수는 네가 하는 거다.”

“뭐 그 조건이라면 좋지. 아! 그럼 모양새는 호남 하오문 지부 전체가 참여하는 걸로 하자. 돈은 내가 내더라도.”

“그러자고.”

잠시 후, 예관 입구.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교예(敎藝) 류해랑은 눈을 껌벅였다.

“동굴에서 부른 노래 말인가요?”

교육생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언제부턴가 따라온 이들.

한데 젊은 남자가 대뜸 한다는 질문이 곡명이다.

“구경하다 우연히 들었는데 곡이 좋아서요. 혹시 누가 만든 건지 아십니까?”

“벽천소망(碧天笑望)이라는 곡인데 그건 몰라요. 다만 동굴 벽화 옆에 예전부터 있던 글이라고 했어요.”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살펴본 어디에서도 글은 못 봤는데.

“동굴에 글이 있나요?”

“지금은 없어요. 오래전에 허물어졌다는데 곡으로 전해져 왔죠.”

무너진 건 아쉽지만 역시 예상대로다. 이제 고마움을 표할 차례. 진정을 다한 말문을 열었다.

“노래 정말 좋았습니다.”

“아! 그러셨나요? 부족한 솜씬데 다행이네요.”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소려의 곡임을 떠나서 이제껏 들었던 어떤 가녀(歌女)보다도 뛰어났다. 노래에 있어선 유선보다도 훨씬.

“아닙니다. 정말 훌륭했어요. 혹시 다음에 청할 수 있을까요?”

“저 근데 누구신지?”

그때 화사한 웃음과 함께 한 여인이 뛰어왔다.

타다닥!

“해랑 언니, 제 손님이에요!”

“아! 이분이 그분?”

“그 속 썩이는 인간은 저 옆에 있고요.”

연사구가 입을 삐죽였다.

“야, 내가 언제! 보는 사람마다 그러면 진짠 줄 안다고!”

“그럼 아니야? 오 년 만에 나타나 가지고선 또 기다리라니! 너 같으면 좋은 말 나오겠어?”

“…….”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는 쌍심지를 확 돋우는 여인.

더 볼 것도 없다.

당서하의 전음이 무윤의 귓전을 때렸다.

-크크! 당찬 여장부네. 연사구 저놈 확 휘어잡았겠어.

-그러게요.

여인의 고성이 이어졌다.

“게다가 또 뭐? 아인(牙人) 사업 딴 데랑 하지 말고 있으라고? 야! 이번엔 또 몇 년 기다려야 하는데, 엉! 그러다 시작도 못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자 하나 책임 못 지면서. 아우!”

“유, 유빈아, 그 얘긴…….”

투자 대상이 바뀌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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