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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87화 (87/161)

8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두 시진 후, 어느새 여명이 찾아들었다.

동굴 여기저기엔 여릿여릿 흐린 햇살이 어둠을 이지러트렸다.

은신처를 확인하고 돌아온 무윤은 우선 동굴 주변을 둘러보았다. 격전의 흔적이 남아선 안 된다.

꼼꼼하게 확인하길 한참.

“이 정도면 완벽하네.”

연사구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두 시진 동안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어떤 놈이 얼마나 어질러 놨어야 말이지!”

“시체는?”

“태워서 숲에 묻었어. 거기도 말끔히 처리했다.”

급한 일이 끝나자 무윤의 아련한 시선은 다시 벽화로 향했다.

이미 소려의 뜻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당장 그 여운을 심상에 담고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다.

급하게 응급처치 한 두 여인의 상처도 작지 않은 데다 아직 안심하기엔 이른 상황. 세 사람만 따로 보낼 순 없다.

마음을 다독였다.

‘이젠 급할 게 없다. 내일 천천히.’

그때 무윤의 눈빛이 번득였다. 동굴로 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누가 온다.”

“응? 그놈들 잔당이 남았나? 아니면 척마단?”

하지만 이내 모두의 날카로운 눈빛이 사라졌다. 발걸음이 알려 준 답에 연사구의 말문이 열렸다.

“열 명 정도에 여인들이면, 기녀겠네.”

“기녀가 여길 왜 오지?”

“여기서 자주 연주한다고 했어.”

“이 새벽에?”

“낮에는 사람들이 구경 오잖아. 조용히 연주할 사람들은 그런다고 하던데.”

그때 당서하가 나섰다.

“혹시 모르니까 숨어서 보자. 오래 안 걸리겠지.”

“……!”

잠시 후, 재잘거리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기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에고! 이제 오늘부터 진짜 기녀가 되는 거네.”

“이것아, 그런 생각 하면 속만 쓰려. 잊어버려.”

“휴! 알죠. 아는데…….”

“예후님한테 소원이나 열심히 빌어.”

“에고, 그런다고 이뤄지겠어요?”

“그냥 그러려니 해. 기녀 교육 끝나면 여기 와서 그러는 게 전통인데 안 하고 가면 찜찜하잖아.”

“뭐, 하긴!”

기녀 석상 옆에서 모두의 성심 다한 절이 끝날 무렵, 훈육 교예(敎藝) 류해랑의 시선이 교육생들에게 향했다.

“다들 그동안 고생했어.”

“교예님도 고마웠어요.”

교예 류해랑은 매번 교육생에게 마지막으로 하던 말을 담담히 풀어 냈다.

“나도 너희처럼 교육생일 때 훈육 선배가 해 준 말이 있어.”

“뭔데요?”

“과거에 머물지 말고…… 내일도 꿈꾸지 말라고.”

짧지만 묵직하게 다가오는 말.

모두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짧은 정적 후에 류해랑의 진중한 말이 이어졌다.

“기녀는 오늘을 살 뿐인 걸 잊지 말아야 버틴다고 하셨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온다고.”

“……그 말 꼭 기억할게요.”

류해랑의 반짝이는 시선이 벽화 쪽을 향했다.

“저 벽화의 예후님도 우리처럼 아픈 삶을 사셨지만, 봐. 마지막엔 그리운 연인을 만나셨잖아. 너희도 꼭 그렇게 될 거야.”

“저도 그렇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들어주실 거야. 그럼 예관에서 마지막 연주를 해 볼까?”

“예!”

금(琴)과 비파(琵琶), 적(笛, 피리) 등 각자 악기를 가지런히 놓고는 모두의 시선이 류해랑을 향했다.

그녀의 손이 사르르 올라가는 순간, 현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염원 담긴 운율이 동굴 안 한가득 퍼져 나갔다.

땅! 따당! 띵! 띠잉! 투우웅!

이제 막 기녀가 된 이들의 합주. 악기마다 다른 소리와 장단이 썩 매끄럽지 않다. 다만 연주에 몰입한 이들의 진정 어린 손끝 때문인지 조금씩 색깔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숨어서 바라보던 당서하의 말문이 열렸다. 무윤이 내기 막을 친 상태라 저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예관 기녀들이 맞네.”

“그렇다니까요. 그나저나 듣고 있자니 짠하네요.”

“어렵게 사는 게 쟤네뿐이야? 그러려니 해야지.”

“하긴! 우린 이제 가죠. 더 알아볼 것도 없는데.”

“급할 거 뭐 있어. 오랜만에 연주나 감상하지 뭐.”

“솜씨도 별론데.”

“그래도 분위기는 그윽하잖아. 좀만 듣다 가자고.”

“뭐 그러든가.”

그때 읊조리듯 나지막이 교예 류해랑의 목소리가 흘렀다.

[자그마한 제 방 안엔 언제나 푸름이 가득하답니다.

눈뜬 아침에도, 비 온 궂은 날에도, 가슴이 답답할 때도.

그저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전 하늘을 보고 산답니다.

사방에 푸름 드리운 그분이 그리해 주셨답니다.]

잔잔한 울림,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시작한 그녀의 노랫말이 은은하게 동굴에 메아리쳤다.

띵! 띠딩! 채애앵!

여리고 가냘픈 목소리가 이어졌다.

[밖을 나가도 그런답니다. 하늘 위 널린 푸름에, 눈 아래 호수의 옥빛이 또 저를 반기니까요.

돌아본 옆에도 그런답니다.

아장아장 걷다 넘어져 무릎에 빨갛게 피가 맺혀도,

돌부리 걸려 넘어져 엉엉 울어 댈 때도,

전 그저 바라만 보면 된답니다.

절 향한 그분의 눈가엔 항상 푸름이 있으니까요.

언제나 만년 청옥빛 가득 담았다가 제게 흘려 주니까요.]

청아함에 마음 가득 실린 목소리는 가녀(歌女)로서 그 수준을 단번에 알게 해 준다.

그때 벽화를 쳐다보던 당서하의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저 노래, 벽화 그림을 풀어낸 거네.”

“어! 그러고 보니 가사가 그림 순서하고 맞네요.”

“그래서 여기서 연주하는구나.”

“야! 이거 운치 있는데요. 연주에다 노랫말에 저 그림까지.”

“거봐, 안 가길 잘했지?”

커 가는 아이와 그녀를 바라보는 이의 다정한 모습이 순차적으로 나열된 벽화.

아장아장 걷던 아기부터, 미간에 어리는 장난기가 온갖 말썽을 자아내던 그때를 거쳐, 무릎 까져 엉엉 울어 대다가도 파란 하늘 가득 손 올려 싱긋거리는 소녀에서, 딸깃빛 수줍음 머금고 화사하게 웃는 성숙한 여인까지.

그 옆엔 항상 누군가가 있다.

잠든 아이의 머릿결을 가만히 쓰다듬는 이, 활짝 벌린 팔 사이로 살포시 아이를 감싸 안은 이, 언제나 그 옆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바라봐 주며 변하지 않는 미소를 그윽하게 담은 이.

아이가 웃으면 그 가슴이 웃고, 아이가 신나면 그 입꼬리가 올라가고, 아이가 행복해 보이면 그 가슴이 따스해지는 이.

그런 이가 옆에 있다. 언제나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

그 소소한 일상이 가슴 가득 따스함으로 하나씩 풀어헤쳐졌다.

벽화 따라 펼쳐진 아련한 영상이 가슴을 울렁이고 어루만져 주기를 수차례.

가슴 저미는 가사와 운율 속에 그녀의 읊조림은 모두의 추억을 끌어내고 어느덧 고독한 선율이 됐다. 푸르던 바다가 서서히 노을에 물들듯 애절함이 더해졌다.

진서연의 눈가에 잔물결이 일었다. 떨림의 선율과 벽화가 이끌어낸 심연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유선 언니!’

저들과 같은 기녀의 삶을 살았던 그녀. 문득 벽화 속의 춤추는 이와 유선이 겹쳐졌다.

따스한 온기가 가슴을 감싸더니 어느새 울렁임을 더했다.

이 자리에 있게 된 모든 인연의 시발점이 됐던 그녀.

벽화가 떠올려 준 그녀와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지금은 쓰라린 아픔 대신 그저 가슴 가득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언니, 소중한 선물을 주셨어요. 너무도 귀한 걸.’

그 선물은 오늘 위기에서 구해 준 심법이 아니다. 초절정을 넘게 해 준 무공서가 아니다.

유선의 마지막 춤에 담겼던 믿음과 희망, 염원 그 모든 울림이 깃들어 꽃 너울같이 흐르던 그녀의 미소, 그게 선물이다.

그 웃음에 눈물은 씻기는 빗물이 되고, 웃음은 메아리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 준 그 내음이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어스름 그리운 얼굴이 바뀌어 갔다.

‘소려야!’

또 다른 가족이 된 작은 아이. 그 화사한 미소가 여린 곡조 따라 가슴에 온기를 전한다.

보고픈 마음이 심연에 떠오른 아이에게 활짝 팔 벌리게 한다.

문득 어깨가 들썩거린다. 춤추고 싶어진다.

이제 자신을 이모라 부르는 그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다.

사뿐사뿐 발걸음에, 하늘 높이 출렁이는 손 가득 유선의 염원을 담아 흩뿌리고 싶다. 바람 받아먹은 꽃잎처럼 사방에 흩날려 주고 싶다.

진서연의 눈이 몽롱해졌다. 정원 가득 꽃 너울 넘나들며 뿌렸던 유선의 미소.

‘전해 주고 싶어.’

류해랑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애절함이 더해졌다. 봄바람 살랑이던 곡조가 무겁게 바뀌어 갔다.

[커서는 그러지 못했답니다.

힘들어 주저앉아도,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릴 때도.

보고 싶고, 그립고, 생각이 나지만.

함박눈 꽃송이 떨어지던 그날, 스스로 떠난 제 발길에 푸름이 사라졌답니다.

그러다 알았습니다.

내 손끝 여린 시림이 빛을 발하던 날.

푸르스름한 벽옥이 찬란한 광채로 품에 안기던 날.

눈이 부시게 너울대는 푸름은 제 안에 있었다는 걸.

말갛게 씻어 내린 하늘은 언제나 제 곁에 있었다는 걸.

몰랐기에 목 놓아 웁니다.

언제나 푸름을 드리워 주었던 그분의 선물인 걸.

알았기에 울먹입니다.

저는 떠났지만 그분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는 걸.]

노랫말은 방망이질 치듯 무윤의 가슴을 세차게 흔들었다. 파도에 너울거리듯 가슴으로 전해진 떨림은 점차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벽화로 이미 알았다. 소려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그럼에도 류해랑의 애절한 목소리는 고요하게 물들어 가던 노을이 폭풍과 비바람에 휘말리듯 가슴을 격랑으로 요동치게 했다.

아직 저 가사의 출처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전해져 왔건.

‘소려가 만든 가사야.’

가사에 담긴 속뜻은 그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게 만든다.

뽀얀 얼굴로 방긋 웃던 그 미소가 다가온다. 앵두처럼 붉게 상기된 볼이 따스함을 안긴다.

언제나 내겐 눈이 부시던 하얗고 동그란 그 얼굴, 그저 다가가 가만히 손 내밀면 잡힐 것 같은 그 얼굴.

그 얼굴이 다가온다.

‘소려야!’

순간 그림 하나가 억장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처음 볼 때부터 차마 눈길을 머물지 못하게 했던 그것.

척고련 성벽에서 발길을 돌리는 여인의 모습.

저도 모르게 또르르 굴러 내리는 눈물 한 방울이 가슴을 휘저었다.

절로 떠오르는 그리운 이의 영상은 다시 심장을 뜨겁게 달군다.

‘찾아왔는데.’

신강까지 칠천 리 먼 길을 왔다가 그냥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게 만든 건 자신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누군가는 그 모습을 봤을 텐데, 떠날 때 냉정히 뿌리치던 자신의 모습에 그 누구도 알리지 못했으리라.

‘내 탓이로구나. 널 못 본 게.’

어느새 뚫어지게 바라보던 벽화가 서서히 보이지 않는다.

눈 가득 눈물이 흐릿함을 불러와서다.

이어진 노랫말은 그리움을 더 복받치게 만든다.

지핀 불쏘시개에 타오르는 가슴은 부풀어 올라 저 속에 꼭꼭 숨겨 놓은 멍울을 콕 끄집어낸다.

아무도 없다면 한 서린 이 눈물을 다 토해 낼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아직 소려가 전할 말은 끝나지 않았다. 노래는 계속돼야 한다.

이어진 노랫가락이 벽화의 후반부 얘기를 풀어 냈다.

[늦어 버렸습니다.

그리움에 돌린 발길 끝엔 푸름이 사라졌습니다.

홀로 주저앉아 바라본 동정호 물빛엔 그 푸름이 없답니다.

그래도 바닷빛 청광(靑光)을 떠올릴 곳은 여기뿐.

깊어진 그리움은 응어리져 풀릴 길이 없는데.

주책없는 눈물방울만 입 막아 낸 흐느낌을 감싸는데.

다시 못 볼 그분을 가슴에 담으려면 이럴 수밖에 없답니다.

발길 닫지 않는 머나먼 곳은 하늘만이 아십니다.

이젠 그 마음 고이 담아 현을 울려야 합니다.

영혼의 바람 소리에 선율 담아 들려드려야 합니다.

그럼 아시겠지요.

그대가 전해 준 푸름은 언제나 내 마음 가득하다는 걸.

그거면 된답니다.

아린 가슴 모두 잊고 웃었음을 아신다면.

그거면 족하답니다.

이 마음 담은 푸름이 그곳에 닿아 너울너울 춤추신다면.

그거면 더 바랄 게 없답니다.]

물결치던 노래와 연주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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