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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86화 (86/161)

86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쌍방의 간격이 좁혀 들던 찰나.

입구에서 홀로 치달은 이의 고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어째 안 온다 했지!”

당서하의 입꼬리가 쫙 올라갔다.

“야! 넌 이쪽이야!”

순간 연사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반갑지 않은 두 얼굴이 눈 가득 들어왔다.

‘어! 저 마인들이 왜?’

한데 그것도 두 여인과 같이 있다. 바로 반문이 터져 나왔다.

“왜 그쪽에?”

“빨리 오기나 해!”

“……?”

무윤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연사구까지 가세하면 다섯. 저들만으로 승산이 있다. 중상이지만 나유양이라는 초고수가 있기에 가진 확신.

이제 빨리 끝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수장인 자에게 말할 여지를 주는 것까지.

두 손 가득 시퍼런 빛이 올라왔다. 세차게 요동치는 떨림이 주먹을 휘감았다.

위이잉!

너울거리듯 동굴 안을 울리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휘이잉!

동시에 날아든 두 형제의 검날, 시퍼런 기운이 솟구쳤다.

무윤의 양쪽 방향을 차단하고 세상을 갈라놓듯이 쏘아졌다.

슈우욱! 쇄애액!

와야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굴 천장 가득 창천같이 뿌려진 짙푸른 권강이 살을 떨리게 한다.

‘끌면 당한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지금은 스스로를 믿는 방법밖에는.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기가 다시 검강에 힘을 더했다.

위이잉!

미증유의 두 힘이 부딪치는 순간, 대기를 찢어발긴 폭풍은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푸르고 새하얀 빛을 동굴 안에 토해 냈다.

쾅! 콰쾅! 카아앙!

바닥은 거미줄처럼 갈라지고 거대한 풍압은 셋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수십 줄기로 화한 빛의 파편은 다른 이들의 시야를 현혹했다.

투로가 만들어 낸 무수한 그림자가 빛 사이를 오가고, 뇌성을 닮은 소리와 함께 허공을 터트리는 폭음이 한동안 이어질 즈음.

이미 승부를 끝낸 다섯의 시선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방금 나유양이 염왕귀랑도의 절초를 꺼내 혼전 속에 파루타를 쓰러트린 덕분이다. 물론 그 때문에 내상은 더 심해졌지만.

당서하의 의아한 시선이 연사구를 향했다. 욕지거리가 몇 번은 튀어나왔어야 할 놈이 강기의 불꽃에만 집중한다.

천마교도들이 있으니 전음으로 물었다.

-넌 알고 있었어, 화경인 거?

-화경인지는 모르겠고, 저 정도란 건 알았죠.

-엥! 그건 또 뭔 소리야? 저게 화경이 아니면 뭔데?

-일반적인 화경하곤 다르대요. 내, 외공을 동시에 쓰는 놈이라 그런가 보다 해야죠 뭐.

-……?

야율혁의 빛나던 눈이 점점 더 깊은 색을 더했다.

‘어떻게 될까?’

보는 내내 무윤과 누군가를 심상에 올려놓고 저울질했다.

교의 가장 강자인 할아버지, 태상장로는 이미 현경을 바라보는 이라 비교 대상이 아니다.

떠올린 이는 천마교의 교주이자 아버지인 야율한천.

답을 내리긴 어렵지만 본 것만으론 아버지가 우위다. 물론 눈앞에 있는 자가 모든 걸 꺼냈다면.

그때 문득 다른 자가 떠올랐다. 의아함도 같이.

‘제자라는 그 친구, 정말 그 실력일까?’

절정 중상도 그 나이엔 가볍지 않은 경지. 하지만 뭔가 더 있을 거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다.

‘만날 기회가 있겠지.’

각자의 상념이 깊어 갈 즈음, 대기를 찢어발기던 폭풍이 잦아들었다. 어둠과 함께 시야를 어지럽히던 짙은 먼지도.

싸움은 끝났다.

“쿨럭!”

와야타는 무릎을 꿇은 채 거친 기침과 함께 울혈을 토해 냈다.

갈라진 피부에선 마르지 않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부서진 늑골 하나가 살 밖으로 삐져나왔다.

이미 동생 와호야는 절명한 상태.

입가엔 씁쓰레한 실소가 절로 흘렀다.

“하아! 쓸데없는 짓을 했구먼.”

자신이 잠시 살아 있는 이유. 무윤이 마지막에 기운을 거둬서다.

“남길 말이 있을까 했네.”

“크나큰 은혜를 입은 곳이지. 해 줄 말은 없다네.”

“……!”

단호히 심맥을 끊어 버린 이의 몸이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투욱!

무윤의 눈가에 아쉬움이 스쳐 갔다.

‘이러면…….’

간신히 잡았던 꼬리가 잘려 나간 상황.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든 초고수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윤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죽는 순간까지 부인하지 않았다는 건 실체가 있다는 반증.

확인한 것만도 큰 성과다.

‘이제 찾으면 된다.’

한데 수장인 자의 마지막 표정이 말해 주는 게 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뇌리를 때리는 직감으로.

과거 여휘와 함께 한 수많은 격전, 그 치열함이 뼈에 새긴 소중한 교훈이 있다.

‘신념으로 똘똘 뭉친 곳만큼 무서운 적이 없지.’

한데 죽음 직전 저자의 표정엔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어 보인다.

그런 자들이 모인 집단이 오랜 준비 끝에 벌인 일.

거기에 강호 전체를 도모할 이런 일이면 혼자가 아니란 뜻.

어디까지 엮여 있을지 모른다. 야율혁의 의심대로 천마교는 물론 정, 사 모두를 포함해서.

이런 상황이면 역시 단기간에 파헤치고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한데 고민이 쌓여 가는 이성과 달리 가슴은 불타올랐다. 입가엔 섬뜩한 미소까지 감돌았다.

‘악마로 만들었으니 악마가 돼 주지. 네놈들에겐.’

이 세상에 온 이후 처음으로 올라온 승부욕이다. 그저 편안히 생을 즐길 생각이라 잊어버리려 했던 과거의 그것.

무사가 아닌 전사(戰士)의 끓어오르는 투기.

나이 들어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웅혼한 떨림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과거 그 수많은 전장에서의 전율이 뇌를 울리는 강렬한 외침으로 다가온다.

‘보여 주마. 척고련의 군사 무륜(霧輪)이 어떤 놈인지.’

새로운 몸에도 그 영혼의 불꽃같은 투혼이 용틀임 쳤다.

그러길 한참, 무윤은 어둠 속에 남몰래 타올랐던 불꽃을 서서히 가슴에 묻어 갔다.

반 시진 후.

긴급한 치료가 얼추 마무리될 즈음.

야율혁은 빙정과 천잠사를 빼고는 해오가 남긴 말을 대략 전했다.

“마후에 대해 남긴 말씀은 그게 답니다.”

무윤은 속으로 실소를 흘려 냈다.

‘나한테 남긴 게 전부였어.’

야율겸이 뭔가 다른 걸 알 거라는 추측은 빗나갔다. 이제 죽은 여덟으로 화두를 옮겨야 할 때.

“혹 짐작 가는 데라도?”

“지금은 없습니다. 서북쪽인 건 알았으니 돌아가서 조사해 봐야죠. 교내의 간자 또한.”

“파악되면 알려 줄 수 있겠나?”

“큰 빚을 졌는데 그래야죠. 대신 교의 일은 빼겠습니다.”

“당연하네. 한데 난 은거 중에 잠시 나온 터라 내 제자에게 연락하게.”

“어디로?”

“내일 온다네. 난 가 봐야 하고.”

“우린 지금 떠나야 합니다만.”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겐가? 척마단에 멸마단까지 여기 있는데. 이 숲 근처에 며칠 은신했다가 치료 후에 떠나는 게 상책이네.”

두 천마교도를 위한 최선의 방안. 하지만 이 결정엔 무윤의 속내도 더해졌다. 나유양의 염왕귀랑도를 보고 확신했다.

‘내가 만든 만하적운도법(晩霞積雲刀)의 변형이야.’

무륜이 척고련에 남긴 무공 중 하나. 그걸 마공으로 탈바꿈시켰다. 심혈을 다해 만든 다른 무공 또한 그랬을 테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거기에 또 하나 궁금한 것.

‘천마신공이란 게 무상여의공의 변형일지 몰라.’

초대 천마라 불린 야율겸에게 전한 무상여의공(無想如意功)은 과거 침주에 있을 때 도가의 스승 목우(沐雨)가 전한 여의진결을 근간으로 만든 무공이다.

신기심의공은 여휘와의 합작품. 하지만 무상여의공은 온전히 무륜이 만들었다.

평생의 깨달음과 모든 무공 지식을 총동원해 만든 그만의 작품.

스스로 자부한다. 초인을 지향하는 신기심의공을 제외하면.

‘지금도 그 이상의 무공을 만들 자신은 없어.’

그 어떤 것보다 애착이 가는 무공이라 지금의 실체를 확인하고픈 건 당연지사. 그러자면 이들과 더 얘길 나눠 봐야 한다.

한편 야율혁의 난처한 시선이 두 여인을 힐끔거렸다. 이제 소속이 어딘지 안다.

“저쪽이 있는데…….”

“잘 일러두겠네.”

그때 당서하의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동굴에 깔렸다.

“어르신, 저희끼리 얘기 좀 하시죠.”

“크흠! 그러세.”

잠시 후, 멀찍이 떨어진 동굴 구석.

당서하는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상황은 이해하지만 가슴이 그리 만든다.

“아우!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구명단까지 마인에게 준 걸 생각하면!”

“말씀드렸듯이 단주님 생각도 살리는 쪽입니다. 거기다 정보도 알려면…….”

당서하의 푸념 섞인 말이 읊조려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 잡아가면 벌어질 일도 빤하게 보이고.”

야율격은 마교 교주의 둘째 아들. 아무도 모르게 죽이면 모를까, 잡아 가두면 강호에 어떤 폭풍을 불러올지 모른다.

또한 사로잡은 당사자들이 알려지면, 반드시 복수하는 천마교의 후환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그 가족들까지.

그걸 잘 알지만 내키지 않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당서하의 사연을 아는 진서연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언니, 우리가 잡은 게 아니잖아요. 천 공자 결정에 맡기는 게 맞아요.”

“안다고! 다 알아! 근데 아우! 정말!”

당서하가 분을 삭이지 못할 때 진서연의 전음이 무윤과 연사구를 향했다.

-언니의 오라버니가 멸마단이었는데, 천마교 마인한테 그만…….

-……!

이럴 땐 시간을 주는 방법밖에 없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마음을 굳힌 당서하의 말문이 열렸다.

“좋아, 그렇게 해. 대신 나중에 단주님한테는 알려. 입 닫을 수는 없어.”

“제가 말씀드리죠.”

당서하는 화두를 돌렸다. 눈으로 봤지만 귀로 들어야 하는 그것.

“근데 너…… 화경 맞지?”

보인 이상 어느 정도 알려야 한다.

“경지는 유사합니다. 다만 하단전 무공과 결이 달라서 화경이라 규정하긴 어렵습니다.”

“어쨌든 실력은 화경급이란 거잖아?”

“그리 보면 될 겁니다.”

당서하는 진담 반 농 반을 섞었다.

“너 사람이냐?”

단주 각운에게 말했던 대로 풀어낼 때다.

“저 스스로 이룬 게 아닙니다. 스승님이 물려주신 내력을 최근에 제 걸로 만들어서 그런 거지.”

잠시 멍했던 당서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복잡한 심사가 단숨에 정리될 리 없다.

“아우! 하여간 알았어.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고.”

진서연은 뜨겁게 달궈진 숨만 뿜어냈다. 자신이 궁금한 건 여기서 꺼낼 게 아니다.

하지만 바라보는 눈 가득 담긴 불꽃은 어쩔 수 없다.

‘춤이 어디까지 무공일까?’

그 질문을 하고 싶어 떨리는 입가를 꼭 악다물었다. 조용히 물어야 하니까.

잠시 후, 다시 야율혁 쪽으로 돌아온 무윤은 상황을 알렸다.

“은신처부터 찾아보세.”

“알겠습니다.”

그때 야율혁은 연사구와 두 여인에게 다가갔다. 정중히 예를 갖추고는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날 다시 보고 싶지 않겠지만…… 빚을 갚을 날이 있길 바라겠소.”

당서하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휙 내저었다.

“다시 안 보는 게 빚 갚는 거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

야율혁은 묵묵히 발걸음을 돌렸다. 지금은 그래야 한다. 저 말 속에 담긴 또 다른 걸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눈빛!’

생사의 갈림길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여인, 한데 칼을 겨눈 자보다 자신들을 향한 적의가 더 불타올랐다. 멸마단이라면 당연한 일.

그럼에도 팔이 잘릴 위기에 주저 없이 동료처럼 다가온 여인.

칼을 막아 낸 후 혼란에 떨던 그녀의 눈빛. 그 격정의 떨림을 잊을 수가 없다.

싸움이 끝난 후에도 허망함을 지우지 못했던 그녀.

무인이라면 목숨 빚은 목숨으로 갚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을 구함으로 생긴 그 마음의 멍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도울 수 없다.

그녀 스스로 푸는 수밖에. 또한 자신을 다시 본다면 그 멍에를 또 떠올리게 된다.

그 마음 빚이 남긴 애잔함이 발길을 무겁게 한다.

그저 속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이겨 내길 바라겠소.’

이제 해 줄 건 그녀 눈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뿐.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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