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당서하를 향하던 진서연의 뇌리에 경고음이 울렸다
‘위험해.’
몸을 휘청이는 당서하의 모습이 눈 가득 들어왔다. 온몸 가득 흘러내리는 선혈과 찢겨져 나풀대는 무복 자락까지.
거기에 번득이는 도기가 몸을 절단 낼 듯 쏟아진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순간 중천에 뜬 초승달이 예리한 비수가 되어 진서연의 가슴을 찔러 댔다.
‘조금만 일찍 정신을 차렸어도.’
지금 거리는 석 장, 깨달음에 연연하지만 않았어도 벌써 같이 싸울 시간인데.
그 아린 마음이 온몸에 힘을 더했다.
파팟!
한편.
도격 안으로 들어간 당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야 한다.’
마음 따라 몸이 움직였다. 살벌한 바람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찢어졌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선홍색 피가 튀어 올랐다.
쇄애액! 찌이익!
회심의 미소가 주철홍의 입가에 맺힐 찰나, 당서하의 눈이 이글거렸다.
‘지금!’
수직으로 떨어진 도격이 몸을 쪼개 버릴 듯 날아드는 지금, 오싹한 등골의 시림은 잊어야 한다.
웅크렸던 몸을 쭉 내밀고는 온 내력 실은 검으로 도격 안을 찔러 갔다.
슈우욱!
순간 주철홍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년이!’
이제껏 보지 못한 빠름. 승부수임을 직감했다.
두 몸이 한 몸인 듯 겹쳐지려는 상황. 검기가 번득이는 도격 안으로 몸을 들이민다는 건, 불꽃에 몸을 태우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다.
성패와 상관없이 어깨가 부서질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년. 이런 독심을 간파 못 한 실책이다.
바로 이를 악다물었다. 이미 몸 안으로 파고든 상황. 물러날 곳이 없다.
‘어쩔 수 없다.’
내려치는 도를 가속해 저 빠름을 줄여야 한다. 아니면 가슴이 뚫린다.
그 찰나의 간극이 승부를 결정 낸다.
단숨에 끌어올린 내력을 더하려던 그 순간.
슈우욱!
등 뒤의 대기를 가른 굉음이 주철홍의 뒷골을 시리게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년을 도울 자가 왔다는 건.
‘홍기가 당했다.’
위기감이 온 뇌리를 휘저었다. 살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
‘피하고 본다.’
신형을 뒤로 빼고 몸을 움츠려야 한다.
급히 퇴보를 밟던 그 순간, 당서하의 신형이 짓쳐 들었다. 잠시 움찔거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결단.
자신이 죽거나 양패구상, 설사 죽이더라도 무인의 삶이 끝날 정도의 부상이 올 수도 있다. 저자가 같이 죽기로 작심한다면.
하지만 무인의 감은 알린다.
‘고민하는 자가 진다.’
그 판단이 승부를 갈랐다.
슈우욱!
“헉!”
가속을 더해 정확히 가슴을 노린 칼날이 피육을 꿰뚫었다.
푸욱!
“커억!”
가슴 퍼덕거림이 심장에 박힌 칼날을 알렸다.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주철홍의 무릎이 무너져 내렸다.
순간 낭인 사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강호 무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철칙.
-칼을 들 땐 삶을 고민하되 휘두름엔 삶이 없어야 한다.
그 삶에 대한 찰나의 고민이 결국 승부를 갈랐다.
또 간과한 게 있다. 부지불식간에 더해진 생각.
‘계집이란 생각을 버렸어야 했는데.’
여인의 약점을 캐서 이겨 온 그간의 경험. 오늘도 그리했다.
한데 그 수많은 여인 중에 저런 독심은 본 적이 없다. 그 경험이 독이 돼 버렸다.
‘무인으로만 봤다면.’
그럼 결과는 달라졌으리라. 하지만 때늦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일 뿐.
터억! 투욱!
축 늘어진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또 한 승부가 끝났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당서하의 격한 숨이 허공에 뿜어졌다.
털썩!
“헉헉! 하악!”
“언니! 괜찮아요?”
당서하는 입을 삐죽였다.
“하아! 이게 괜찮아 보이냐? 죽다 살았는데.”
하지만 그 이죽임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담는 건 잊지 않았다. 그래야 내상이 심하지 않음을 알릴 수 있다.
진서연은 불안에 떨던 가슴을 말갛게 씻어 내렸다. 자칫하면 평생의 후회를 남길 뻔했다.
“휴! 다행이에요.”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골로 갈 뻔했어. 못해도 어깨뼈는 박살 났을 텐데.”
“아뇨, 제가 미안해요.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당서하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얘가 언제 벽을 넘었지?’
곁눈질로 서연의 싸움을 얼핏 봤다. 세 치가 넘는 검기를 뿌려 대는 걸.
“너, 벽 넘었지?”
“얼마 안 됐어요. 그거 아니면 저도 위험했어요.”
솔직한 한숨에 더해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연사구에 더해 이젠 진서연까지. 무윤이라는 놈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음에도.
“하! 사방에 어린것들이 다 초절정이네. 이거 창피해서 원!”
“언니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당서하는 문득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거도 선물인가 뭔가 덕분이냐?”
이럴 땐 둘러대야 한다.
“조금요.”
“에고! 난 그런 선물 줄 사람 없나?”
“잘 찾아보세요. 혹시 알아요, 가까운 데 있을지?”
“관둬라. 눈 씻고 찾아도 없던데 뭘.”
이럴 때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잠시 숨을 돌린 여인의 시선이 두 전장을 살폈다.
한 곳은 안심이 된다. 오히려 여길 걱정하느라 싸움에 여지를 두는 게 느껴질 정도니까.
한데 다른 곳이 당서하의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아, 시팔! 저긴 왜 저 모양이야!”
진서연의 당혹스러운 시선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래도 저긴…….”
“어떡할래?”
평생 이런 고민을 해 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일.
잠시 후.
두 여인의 쾌속한 신형은 갈 곳을 정했다.
파팟!
전력을 다한 움직임과 달리 떨떠름한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한편 와야타 형제를 상대하던 무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제든 두 여인의 상황이 좋지 않으면 발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데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위기라 쳐다볼 수밖에 없던 상황.
그 위기를 둘 다 스스로 극복해 냈다.
‘다행이야.’
거기에 약간은 황당한 일.
두 여인이 천마교도를 도우러 나섰다. 당연히 이쪽으로 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
어쨌든 저 넷이면 여기에 집중해도 된다.
한편 천마교 둘을 상대하던 파루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달려오는 여인 둘이 보인다.
‘여기로 오다니.’
이미 중상인 천마교도들이라 승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나유양 때문에 빨리 끝내지 못하던 상황.
‘사형과 비슷한 자.’
상처가 아무리 위중해도 한 번은 포효할 수 있는 맹수다. 순간순간 그 의지를 담은 기세에 끝을 못 내고 있었는데.
그때 다가온 당서하의 입이 실룩거렸다. 진심 반이 섞인 짜증이 튀어나왔다.
“빨리 좀 끝내지. 그랬으면 고민도 안 했잖아.”
파루타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마인을 돕지?”
“너 바보야? 널 잡아야 저쪽이 빨리 끝나지.”
“저쪽으로 가도 도움이 된다.”
“아, 그만! 나도 머리 아파. 우선 해결부터 하자고.”
“……!”
한편 와야타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동생과 함께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한 점 흔들림이 없는 자.
무인의 직감이 알린다. 이젠 사제 파루타가 와도 어렵다는 걸.
‘역시 절대자!’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다. 상도련의 련주에게서 느꼈던 무력감, 그와 다르지 않음을.
이런 자라면 무인의 투기보다 삶이 먼저다.
‘여기서 죽는 건 개죽음이다.’
그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서로를 모르기에 들었던 검이다. 거기다 느껴지는 기운은 정심하고.
‘정파가 분명해. 그럼 여지가 있다. 거기다 저년들로 압박한다면!’
죽기를 각오하면 이자가 막아도 두 계집은 어찌 될지 모른다.
밑져야 본전인 상황.
와야타는 뒤로 멀찍이 신형을 물렸다.
타닥!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이 판국에 말이 필요할까? 그럴 거면 아까 하지 그랬나.”
“저자들은 마인이고 먼저 공격했네. 우리 행동이 문제라 보는가?”
“우리도 공격했네.”
“인정하네. 비밀을 요하는 임무라 그랬지. 하나 그대 실력을 미리 알았다면 물러섰네. 엮인 게 없는데 쓸데없는 피를 왜 보겠나?”
스스로 입을 열어 준다면 마다할 이유 없다.
“그래서?”
“우선 묻게나. 답할 수 있는 걸 가려 보지.”
“이 먼 곳까지 왜 왔는가? 말투가 서북쪽인데.”
협상하려면 적당히 풀어야 한다.
“마후가 남긴 유진이 있나 살피러 왔네.”
“어떤?”
“뭔지 모르네. 다만 있다면 이 동굴 어디라 짐작했을 뿐이지.”
“어째서?”
“과거 기록에 마후가 죽기 전 여기서 여휘라는 자와 있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뭔가를 남기려 했고. 그래서 온 것이네.”
무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역시 그런 것인가!’
마지막 말은 사실이라 짐작되는 이유가 있다. 소려가 남긴 벽화. 그 마지막 그림엔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과 지켜보는 젊은 남자가 있다.
선이 지워지고 흐릿했지만 보자마자 확신했다. 남들은 모르지만 무윤이면 여휘라 알아볼 특징 몇 가지가 있다.
‘뒤로 묶은 머리, 사선이 그어진 상의. 여휘가 맞다.’
벽화는 여인의 인생 전체를 시간 흐름으로 나열했다. 마지막 그림의 침상은 결국 죽기 전 모습이리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 닥쳤다.
여휘의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무윤이지만, 불확실한 하나를 남겨 둔 게 있다. 일부러.
‘여휘 그놈은 소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무윤은 그걸 묻지 못했다. 성격도 그렇고 뭐든 자신에겐 감추지 않는 놈이라 털어놓았을 텐데.
‘두려움, 그 탓이었지. 그렇다고 할까 봐.’
좋아한다고 하면? 그 순간 가장 가까운 둘을 잃는 것 같아 차마 묻지 못했다.
여휘 또한 소려에 대해선 그 어떤 얘기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그놈도 자신을 너무 잘 아니까.
지금 밀어닥치는 온갖 회한은 다 그 때문이다. 불확실 속에서도 확신처럼 느껴지는 건.
‘그놈도 같았겠지.’
여휘는 무륜처럼 늙은 노인이 아니었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그런 놈의 평소 행동을 보면 짐작이 됐다. 자신이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그 천 년 전 속 좁은 마음 탓에 지금 가슴이 너무 아려 온다.
이십여 개의 그림 중 여휘의 모습은 마지막에만 있다. 그렇다는 건.
‘마지막만 같이했어. ……나 때문에.’
평생의 반려자로 같이한 게 아니다.
소려 또한 저 마지막 벽화에 여휘를 넣을지 고민 또 고민했으리라.
그리고 내린 결정이다. 그 천 년 전 소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후! 저걸 알려야 내 마음이 편해진다고 생각했겠지.’
오히려 여휘가 벽화에 없었다면 무륜이 더 자책하고 고통스러워할 걸 소려는 알았을 테니까.
두 사람에 대한 통렬한 후회가 끝없이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 댔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이 아린 가슴을 회한의 눈물로 쏟아 내는 건 나중이다.
그때 야율혁의 다급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굳어지는 무윤의 표정에서 뭔가 불길함을 느껴서다.
“저들이 소문을 조작했습니다. 강호 전체를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 확실합니다.”
꾹 참고 있던 동생 와호야가 버럭 했다.
“주인 없는 전대의 보물을 찾는 게 무슨 음모란 말인가? 가당치도 않은 소리!”
“그 사실은 우리 교의 옛 기록밖에 없다. 한데 어찌 알았지?”
“우린 지시를 받고 왔을 뿐, 출처는 모른다. 하나 기록이 거기만 있으라는 법 있나?”
“마후께서 뭔가 남기셨다는 건 척고련 군사이시던 해오 님만 안다. 천마서고에 있는 그 기록은 일 년 전까지 나만 알았고. 그걸 보지 않았다면 절대 여기 올 수가 없어. 그래서 네놈들을 조사하려고 했던 거고.”
“당최 말이 안 통해. 하긴 마인하고 무슨 대화를 할까.”
그때 무윤이 껴들었다. 해오는 자신이 군사 자리를 물려준 제자.
“해오라는 자가 무슨 말을 남겼나?”
감출 상황이 아니지만 다 꺼낼 순 없다.
“회고록 안에 마후께서 몇 가지 귀한 걸 부탁하셨고 그걸로 뭘 만든다고 하셨답니다. 그건 자신만이 안다고 하셨죠. 저도 그게 있다면 이 동굴이라 생각했고, 만약 다른 누가 여기 있다면 교와 내통해서 소문을 조작하는 이라 생각한 겁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무윤은 저 말의 신빙성을 확신한다. 꼼꼼했던 제자 해오는 그때도 일기처럼 기록을 남기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소려가 자신에게 남길 걸 여러 곳에 알렸을 리도 만무하다.
더 좌고우면(左顧右眄)할 게 없다.
무윤의 차디찬 시선이 와야타를 향했다.
“이제 그만 털어놓지. 아니면…….”
와야타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 담겼다. 상대의 표정이 알려 준다.
‘협상은 없다.’
다른 전략도 이젠 없다. 거대한 벽이지만 부딪치는 수밖에.
그게 무인된 자의 숙명이니까.
대지를 박찬 걸음에 시린 칼빛이 어둠에 반짝였다.
파파팟! 샤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