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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84화 (84/161)

84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크크! 저런 미인이란 말이지!’

낭인 주철홍은 지금처럼 눈이 희번덕거리는 걸 처음 느꼈다. 화경의 강기에 쿵쾅거렸던 가슴만큼 그 미모로 살을 떨리게 하는 여인.

그런 여인이 가져다준 희열이 있다. 노리갯감이라서가 아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화경의 무인 탓에 목숨을 걱정하던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 줘서다.

화경의 무인과 같이 나타난 건 친분이 있다는 뜻.

‘이런 년을 인질로 잡으면 저자도 함부로 못 움직인다.’

여인의 미모는 그런 확신을 주고도 남는다.

급히 친구 곽홍기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년 죽이면 안 돼. 인질인 거 알지?

-크크! 당연하지. 거기다 주물럭거릴 수 있으면 더 좋고.

-얼굴은 절대 건드리지 마.

-몸도 그래야 될 거 같은데.

순간 주철홍의 눈빛에 강렬한 안광이 쏘아졌다. 오랜 친구라 잘 알지만 노파심에 한 번 더 거론해서 나쁠 게 없다.

-그래도 정신은 바짝! 알지?

-말해 뭐 해. 저런 미녀일수록 더 신중해야지.

한편 두 낭인을 훑던 당서하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스쳐 갔다. 저런 표정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하여간 남자 새끼들이란.’

하지만 실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냉정함이 그녀의 뇌리를 차갑게 식혔다.

‘만만한 자들이 아니야.’

진서연을 향한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빛,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표정과 달리 다가서는 몸놀림은 신속하고 흐트러짐이 없다.

이런 자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낭인들, 위험한 자다.

마음이야 어쨌든 일부러 티를 낸다.

희롱하는 눈빛, 음탕하게 몸을 훑어 대며 날름거리는 혀, 이미 제 몸 아래에 깔린 듯 상상하는 저 표정은 의도된 바다.

모멸감에 치 떨리게 하는 술수. 그게 여인과 싸우는 최적의 방법인 걸 너무나 잘 아는 자들.

한데 당서하 또한 잘 안다.

‘저만한 방법이 없지.’

생사가 오가는 절박한 상황에 오히려 저 방법만큼 여인을 흔드는 게 없다. 피육이 갈라지는 격전의 어느 순간 저 표정을 보면, 저 밑에서 나도 모르게 끓어오른 분노가 이성을 흔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동생 서연이 걱정된다. 저들의 그 시선은 그녀에게 집중될 테니까.

노파심이 부른 전음이 서연을 향했다. 물론 긴말은 필요 없다.

-알지?

-저 늘었어요. 걱정 마세요.

-……!

간격이 좁혀 들었다.

입가를 히죽이던 곽홍기의 신형이 바람을 갈랐다.

파팟!

여인을 주시하던 얼굴에 갑자기 큼지막한 미소가 걸렸다. 어스름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 때문이다. 눈빛이 타올랐다.

‘정말 죽이는 년이다! 잡기만 하면.’

화경 무인을 옭맬 확실한 인질인 걸 다시금 절감했다.

들뜬 마음과 달리 강력하게 맥을 끊는 일격은 정확히 진서연의 가슴을 향했다.

슈우욱!

차디찬 한기를 더한 진서연도 대지를 박찼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내달렸다.

사삭!

곽홍기의 검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짧게 울리는 칼바람 소리에 서늘한 예기가 뿜어졌다.

샤아악!

낭인의 검은 단호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인질도 잡고 나서의 얘기다. 실전 감각이 그대로 묻어난 검이 공간을 헤집었다.

바람 머금은 여인의 검도 상대의 검 끝을 마주했다.

진서연의 날카로워진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정면 승부!’

이전이라면 전략이 달랐다. 사문의 절기 천수비화검은 일정 간격을 두고 물 흐르듯 천변만화의 화려함 속에 변검의 묘리를 담은 환검.

여인의 체형에 가장 맞는 사문의 검법 중 하나로 사방을 종횡하는 경쾌한 신법과 함께해야 그 빛을 발한다.

하지만 얼마 전 벽을 넘고는 달라졌다. 바라타나티암심법이 더해진 천수비화검은 또 다른 묘리를 일깨웠다.

‘변화에 더해진 중검(重劍).’

초절정이 가져다준 내기의 흐름은 허와 실을 섞던 환에 무거움을 더했다. 인연이 가져다준 그 선물을 이제 풀어 헤칠 때다.

그래야 빨리 끝내고 무윤을 도울 수 있다. 적어도 초고수에 오른 지금은 저 싸움에 난입해도 방해꾼은 안 된다.

그 마음 담은 일격에 더해진 살의가 검 끝을 요동치게 했다.

순간 곽홍기의 두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불현듯 뇌리를 때리는 불안감.

‘설마!’

모욕감에 치 떨려 달려오는 분노의 눈빛이 아닌 건 진즉 알았다. 한데 급속히 다가오는 기운이 뇌리에 경종을 울린다. 아직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압박감.

본능이 알린 경고는 검로를 변경하는 것. 한데 자존심이 거부한다. 한낱 여인의 기세에 물러나다니.

‘그럴 수 없지.’

지금은 온 힘 다한 내력을 뿜어내 압도해야 한다. 만용만이 아니다. 기세에 눌린 무인의 자존심은 회복되기 어렵다. 그럼 인질도 물 건너간다.

대기를 가르며 무서운 파공음을 토해 낸 두 검격이 부딪쳤다.

카아앙! 캉!

검격이 막힌 반동으로 둘 다 일 보씩 튕겨 나갔다.

타닥! 파박!

곽홍기의 표정이 우뚝 굳어 버렸다.

서로의 힘을 가늠하기 위해 부딪친 일 합. 그런데 검신을 타고 내려오는 충격에 무릎이 흔들렸다.

같이 물러났지만 충격에 밀린 자신과 달리 여인은 분명 재도약을 위한 준비가 섞였다. 절정 상인 자신이 이럴 정도면.

‘초절정!’

검을 다시 부여잡았다. 이 한 수에 여인이란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내력에선 자신보다 강한 자.

경험이 알렸다.

‘정면 승부는 어렵다. 우선 흔든다.’

파파팍!

자신의 장기는 눈을 현혹할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 그것으로 내력의 차이를 극복하면 된다.

꼬나든 검을 말아 올리고는 앞으로 짓쳐 들었다.

파팟!

서로 달려드는 두 개의 검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허공을 가른 예리한 기운이 부딪치자 사방에 불꽃이 일었다.

챙! 채앵! 캉! 카앙!

점점 더 빠르게 치열한 공방이 펼쳐졌다. 그렇게 격렬한 뒤엉킴이 한참을 흐를 즈음.

곽홍기의 눈에 초조함이 더해 갔다. 오판이 부른 불안함이다.

빠름을 잃지 않은 검로로 여인의 사방을 에워쌌다. 살벌한 바람 소리가 귓전과 옷자락을 스칠 정도로. 한데 유려하게 휘둘러지는 여인의 검은 갈수록 더 검격을 흘려 낸다.

계속해서 두들기는 파상 공세에도 표정엔 한 점 흔들림 없다.

게다가 중검인 줄 알았던 여인의 검이 오히려 더 많은 변화를 선보인다. 절로 아랫입술이 짓씹어졌다.

‘이러다 당한다.’

인질로 잡으려던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갔다. 우선 살고 봐야 한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마지막 절초인 비도와 동시 공격을 늦출 수 없다. 뼈를 취하기 위해 살을 내줄 각오도 다졌다.

몸을 움츠려 요혈은 피하되 날아간 기세 그대로 그녀를 휩쓸어 갔다.

휘익!

반 장 안으로 간극이 좁아졌다.

‘이때다.’

소맷자락이 흔들리자 서슬 시퍼런 빛이 허공을 갈랐다. 비도의 날이 살기로 아른거렸다.

쉬이익!

진서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막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던 시점이라 너무 지근거리. 이 좁은 간격에서 비도는 생각지 못했다.

비도는 빠름이 없으면 무용지물. 한데 낭인의 비도는 감춰 둔 비기인 듯 쾌속하다.

‘피하기 어려워.’

이미 몸에 실린 빠름이라 물러설 수도 없다. 그녀 또한 살을 내줄 각오를 해야 할 상황. 급히 중심을 흔들어 몸을 비틀었다.

휘익!

그때 열린 그녀의 어깨로 서슬 퍼런 칼날이 광망을 번뜩였다. 찰나의 시간이면 살점을 뚫어 낼 상황.

샤악!

순간 몸이 그녀의 자각을 일깨웠다. 거기에 더해진 무인의 직감도.

‘바라타나티암 춤!’

온몸 곳곳에 새겨진 춤의 감각, 그 유려한 흐름이 최선의 타개책임을 알렸다.

순간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의지의 판단에 앞선 몸의 결정.

바람 탄 몸의 곡선이 비도를 흘리는 동시에 호선을 그린 검날이 찔러 오는 검 측면을 들이받았다.

카앙!

연이어 허공을 가른 다른 소맷자락이 나풀거렸다. 사선으로 휘둘러진 주먹이 짓쳐 들던 곽홍기의 옆구리를 쓸었다.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둔중한 타격 음이 터져 나왔다.

휘익! 퍼억! 두둑!

“우욱!”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검붉은 울혈이 토해졌다. 몸이 굳어 버린 그때, 허릴 잡고 숙인 등 뒤로 시린 칼날이 피 분수를 뿜어냈다.

서걱! 슈욱!

등짝에 솟구친 뜨거운 피가 채 멈추기도 전.

슈욱! 우둑!

그대로 목을 쑤셔 박은 칼날이 목 뒤로 날을 드러냈다.

“케엑!”

곽홍기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 문득 부질없던 기억이 떠올렸다.

‘인질은 무슨!’

허망함과 함께 꼬꾸라진 몸이 대지를 덮쳤다.

투욱!

급한 숨을 몰아쉰 진서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승부를 결정지은 안도감 때문이 아니다. 몰아닥친 전율과 쾌감은 다른 이유다.

‘춤사위가 초식을 앞섰어.’

그 찰나의 순간 이형환위(移形換位) 같은 움직임.

무인은 오랜 수련으로 초식을 몸에 배게 한다. 그래야 이런 위기 상황에 본능적으로 움직이니까.

한데 수십 년을 익힌 초식보다 채 일 년이 안 된 춤의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의지에 앞서 몸의 감각이 내린 결정.

그 살 떨리는 놀라움이 이 격정의 본질이다.

그만큼 심법과 춤이 대단하다는 반증.

황당함 더해진 심장이 쿵쾅거렸다.

‘도대체 이 심법이 뭐기에?’

잠시 몽롱함에 잠겼던 진서연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바로 시선이 당서하를 향했다. 잠시의 상념이 또 다른 깨달음을 줄 때이지만.

지금은 대지를 박차야 한다. 동료를 돕는 게 먼저다.

파팟!

한편 검을 꽉 쥔 당서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쉽지 않아.’

내력은 비슷해 보이지만 경험이 준 격차가 확연히 느껴지는 자. 몇 번 위험한 상황에서 간신히 몸을 빼냈을 정도다.

급히 몸을 살폈다. 점점 늘어 가는 혈흔, 여기저기 찢어진 무복 자락 사이로 핏물이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끌 상황이 아니라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려 했지만, 사방을 잠식한 매서운 검기는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뿐. 더구나 상대는 자신을 인질로 삼을 속셈이 확연하다.

결단이 필요한 시점임을 직감이 알렸다.

‘이러다간 둘한테 짐만 돼. ……목숨을 건다.’

온몸을 휘감은 무인의 투기가 심중의 불안을 억눌렀다

‘유인한다.’

다시 검을 꼬나들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짧은 기합이 터졌다.

“타핫!”

대지를 박찬 신형에서 당문의 호연십팔검(浩然十八劍)이 현란한 궤적을 뿜어냈다. 아직도 검 끝에는 희미하나마 푸른빛의 검기가 어른거렸다.

쉬이익! 사라락!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간 검이 상대를 덮쳐 갔다.

슈우욱!

하지만 승기를 잡은 주철홍은 접근을 불허했다. 끊임없이 회전하며 폭우처럼 도기를 쏟아 냈다.

콰앙! 콰쾅!

그렇게 삼십여 초가 더 지나갈 무렵.

주철홍의 계속된 연환 공격이 점점 더 당서하의 운신 폭을 좁혀 들어갔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도를 막아 내느라 손발이 어지러워지던 그때 당서하의 균형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휘릭!

순간 주철홍의 눈이 번득였다.

‘끝낸다.’

짧게 울리는 칼바람 소리에 이전과 다른 예기가 뿜어졌다. 도신이 시퍼런 빛을 흘렸다.

샤아악!

초절정에 근접한 고수임을 알려 주는 선명한 검기.

순간 당서하의 눈에 찰나의 섬광이 스쳤다.

‘승부다.’

마지막 기회를 노리기 위해 일부러 보인 틈. 편법(鞭法)에 검의를 담은 호연십팔검의 유일한 쾌검 초식. 암향사영에 모든 걸 걸 때다.

한순간 판단에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

무인의 숙명이 건네준 갈림길엔 주저함이 있어선 안 된다.

자신은 위해서도.

동생 서연과 이제 동료가 확실한 저놈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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