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당서하는 이 엄중한 상황에서도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게 연기야, 진짜야?’
너무나 완벽한 노년의 말투와 표정, 거기에 몸짓까지. 몰랐다면 자신도 백번 속을 수밖에 없을 정도다.
진서연은 약간 다른 웃음이 흘렀다.
‘저게 더 어울려.’
침주에서 함께했던 내내 본 게 저런 모습이다. 유선의 물음에 답하던 그때 말투와 다를 게 없다.
매번 유선이 무윤에게 장난치던 말이 떠올랐다.
-아우! 제발 그 말투 좀 고치라니까요!
-이게 어때서? 난 편하고 좋은데.
-그래 가지고 젊은 여인들이 다가오기나 하겠어요?
-……별로야?
-오십 대 여인에겐 먹히겠네요.
-…….
그래도 무윤은 잘 변하지 않았다. 어릴 적 스승이란 분과 오랜 대화에 쌓인 습관이라 했다.
그랬던 것이라 이 상황에서 멋들어지게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정도다.
나유양은 급히 상황을 알렸다.
“우린 뭘 알아보러 여기 왔다가 저들을 만났소.”
동굴 안을 살피다 우연히 발견한 무리. 그들 또한 동굴 여기저기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은밀히 따르다 한 명을 사로잡으려 한 것이 판단 착오다.
서로 신호를 주고받던 입속의 피리가 문제였다. 아혈을 점하기 바로 직전 희미한 소리가 울려 버렸다.
그 소리에 달려든 자들과 격전 후 수세에 몰려 탈출했지만 결론은 지금 이 형국임을 알렸다.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불확실성이 가져온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소려가 나한테 남긴 게 알려졌나? 아니면 다른 거? 그것도 아니면?’
어쨌든 이 벽화가 소려가 만든 게 확실한 이상, 자신에게 남긴 건 걱정할 필요 없다.
저 공간이 뭘 뜻하는지 알 자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천 년 전에도 소려와 여휘, 자신 셋만 알던 것인데.
우선 급한 것부터 물어야 한다.
“저들이 누군지 짐작 가오?”
나유양은 적당히 알리기로 했다. 그래야 같은 편으로 만든다.
“모르겠소이다. 다만 우릴 쫓은 게 아니고 여길 며칠 살핀 걸 보면 최근 소문과 관련 있지 싶소.”
“소문이라면?”
“우린 천마와 관련된 내용이 조작이라 의심하고 있었소. 한데 저들이 그자들 같아 추적한 거라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무윤의 전신을 휘감았다. 남몰래 가슴에 쌓아 놓던 그 울분의 용광로가 확 끓어넘쳤다.
‘저놈들이!’
아직 확신할 그 무엇도 없다. 하지만 천마교 고위층인 저들의 의심이라면.
‘가능성 있어.’
여휘와 자신을 악마로 만들어 가는 원흉.
과거는 잊고 살기로 했던 자신을 송두리째 뒤흔든 개새끼들.
이제껏 추측과 의심뿐이라 확신하지 못했던 실체.
그걸 찾을지도 모른다. 이러면 출구로 향하려던 계획은 바꿔야 한다.
‘만나 봐야지.’
또 상황도 벌써 그렇게 돌아갔다.
양쪽에서 달려온 무리가 바로 주변을 에워쌌다.
사사삭!
야율혁의 눈매가 한차례 꿈틀거렸다.
‘갚아 준다.’
개죽음을 피해 도망치던 아까와 상황이 다르다. 진정한 마인이 작심해 빼 든 칼은 죽음 전에는 거두지 않는 법.
이젠 천마교 마인의 본모습을 보일 때다. 물론 협력하되 저 셋에게 기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인의 의지를 짐작한 듯 검날이 부르르 떨려 왔다.
입 가득 고인 핏물을 뱉어 냈다.
“카악!”
지금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만 얼굴에 남겨야 한다.
나유양의 칼날 같은 두 눈도 같은 뜻을 담아냈다. 뱉어 낸 큰 숨에 뼈를 아리는 고통을 털어 냈다.
“푸흡!”
사방에 흩어진 핏방울이 전신에 풀어낸 의지를 전했다.
한편 복면인 수장 와야타의 의아한 시선이 셋을 훑었다. 갑자기 나타나 마인 둘과 진형을 함께한 자들.
‘누구지? 마인 같지는 않은데.’
우선 천마교 무인에게 물을 게 있다. 궁금한 게 있으니 시작은 부드럽게.
“이제야 말할 분위기가 됐군.”
야율혁의 입이 비틀어졌다.
“복면이나 좀 벗지. 몇 사람 더해졌다고 쫄리면 관두고.”
“벗으나 마나 모를 걸세. 어딜 돌아다녔어야지.”
“크크! 여기 동굴에서만 살았나? 제집 드나들듯이 잘 알던데.”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네. 아! 그대들은 방금 왔군그래.”
“그게 좀 아쉬워. 안 그러면 그 입의 피리를 알았을 텐데.”
“깜깜한 데선 유용하다네. 그보다 이제 말해 주겠나? 왜 우릴 공격했지?”
“크크! 공격이라. 안 그랬으면? 우릴 보고 그냥 놔줬을까? 말 같은 소릴 해야지.”
“어쨌든 그대들이 먼저 공격한 건 사실이지.”
“말장난은 그만하지. 그보다 안에서 뭘 좀 찾았나?”
와야타의 눈에 찰나의 섬광이 스쳐 갔다.
“호! 이 마당에 그게 왜 궁금할까?”
야율혁은 어둠 속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뭔가 찾고 있었어. 그게 마후 유진이라면!’
자신은 마후가 뭔가 남겼다는 것만 알 뿐 다른 어떤 정보도 없다. 더 알아내려면 확신에 찬 눈빛을 티 나게 보일 때.
“나도 찾을 게 있었거든.”
“오! 여기 뭐가 있다는 거지?”
“그쪽이 관심 가질 만한 건 아니야.”
“어째서?”
“여인이 남긴 거라서.”
“허허! 남녀가 무슨 상관인가. 쓸 만하면 그만이지.”
“아주 오래된 건데? 그것도 천 년이나.”
와야타는 가벼운 실소와 함께 눈빛에 칼날을 담았다. 역시 뭔가 알고 있는 놈이 확실하다.
“그 정도는 협상거리가 안 되지. 더 꺼내 보게.”
“꺼내면? 달라지는 게 있나?”
“편하게 가겠지.”
야율혁은 어둠을 밀어내듯 검을 바람에 휘저었다. 말로선 더 알아낼 게 없다.
휘릭!
“말이 필요 없군. 그만 끝내지.”
“…….”
그때 무윤이 말을 이었다.
“아니! 조금만 더 하지.”
무심한 듯 낮은 목소리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 발 앞으로 나선 걸음은 장중했다. 올곧이 상대를 향한 걸음 속, 무형의 기세가 한 곳을 향해 그 뜻을 전했다.
위이잉!
순간 와야타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이런!’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셋. 가까이 와서 처음 살필 땐 어떤 강렬함도 느끼지 못했다.
한데 길을 걷듯 가벼운 발걸음, 하나 그 뒤 공간의 흐름엔 묵직함이 있다. 살이 아린 어떤 기파도 없지만 무인의 본능이 알린다.
찰나의 순간 무리의 이치를 담을 그릇임을.
자신을 향해 직접 쏘아 낸 기운이 아님에도 온몸의 털이 바짝 서 버렸다. 찌릿하게 몸을 울리는 직감은 뇌리에 전율까지 불렀다.
묵묵히 내디딘 걸음으로 경지를 드러낸 자.
그의 기준에서도 통하는 말.
‘강자!’
복면인 수장 와야타의 눈이 무윤의 전신을 훑었다. 직감이 맞았다.
‘경거망동은 금물!’
한편 살랑거리는 바람 따라 흐른 신기심의공 기운 또한 여덟 복면인의 전신을 유유히 훑었다.
‘다섯은 절정급에 둘은 초절정 상, 나선 자는 끝자락쯤.’
나유양과 야율혁이 저런 상황에 처할 만한 상대.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누굴까?’
처음엔 모든 것이 불확실해 지켜볼 생각이었다.
복면인이 더 있을지 몰라 주변도 살펴야 했고. 자신은 몰라도 두 여인이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야율혁과 나유양은 잠시 스친 인연. 도울 수 있되 우선순위가 아니다.
다행히 달리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한데 몇 마디 안 되는 둘의 대화, 그것도 중단될 상황이 껴들게 만들었다.
가장 궁금한 건 화두에 오르지도 않았으니까.
나유양이 말한 내용. 왜 그런 의심을 했는지 아직 모르지만.
‘소문을 조작한 개새끼들.’
만약 그들이 있다면 연관성이 짙어 보인다.
방법은 두 가지.
잡아서 족치거나, 이후 뒤를 캐는 것.
후자를 바랐지만 지금 상황에선 여의치 않다.
또 하나 궁금한 것도 생겼다.
야율혁이 한 말.
천 년 전 여인이 남긴 것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려가 뭔가 남긴 걸 야율혁이 안다는 건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남긴 걸 확인했다면 판단이 쉬우련만.’
불확실성이 문제다.
자신에게 남긴 건 걱정할 게 없지만 또 다른 걸 수도 있다. 소려에게 소중했던 그 어떤 것.
그 모든 상황이 더해져 내린 답. 최선과 최악이 구분되지 않을 때는.
‘부딪쳐야 더 얻는다.’
한편 당서하는 이 기도 안 찬 상황에 헛웃음도 안 나왔다. 저 여덟의 살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들에게도 향했다.
‘이러면 마인과 한편 되는 거야? 내참!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네.’
마인을 척살하는 멸마단원인 자신인데.
한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렇다.
황당하긴 진서연도 마찬가지.
-언니! 전 도무지 판단이 안 서는데.
-난들 아냐. 지금은 지켜보는 수밖에.
-……!
복면인 와야타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일행인가?”
무윤은 말을 돌렸다. 의표를 찔러 표정과 기운을 살펴야 한다.
“여휘를 왜 세상에 꺼냈지?”
“……?”
“하나는 알겠어. 제대로 알릴 생각이 없다는 거.”
와야타의 솟구친 의문이 섬뜩한 광망에 불꽃을 더했다.
핵심을 찌른 짧은 질문에 담긴 함의.
‘이자! 뭔가 안다.’
저 북풍한설 몰아칠 듯 차가운 눈빛에 담긴 건 의심이 아니다. 일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 담을 수 있는 확신이다.
또 그걸 감추지도 않는다.
와야타의 의문이 깊어졌다.
‘뭘 아는 걸까?’
상대의 질문에 담긴 함의.
자신이 속한 련(聯)이 하는 일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물론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수면 아래에서 움직이는 일들을.
대외적으로 알려진 자신들 소속은 청해의 사류막(沙流漠).
사막을 오고 가는 상인과 물품을 보호하는 무력 집단으로 청해에선 가장 크다.
여덟 중 자신을 포함한 셋은 그곳 소속이고 나머지 다섯은 청해에서 고용한 낭인들.
한데 같은 소속인 둘도 사류막 뒤에 감춰진 련의 실체와 이름은 전혀 모른다. 당연히 련이 진행하는 일도.
사류막 내에도 련의 실체를 아는 이는 손가락에 꼽는다.
다른 이들은 이번 잠행의 목적만 안다. 마후의 유진이 있을지 몰라 찾으러 왔다는 것만.
그만큼 은밀한 곳에서 진행하는 일인데.
‘상도련(常道聯)을 알 리는 없어.’
상도(常道)란 영원불멸의 도(道)를 뜻한다.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에서 따온 이름.
향후 세상에 나올 때 쓸 이름이라 했다.
그럼에도 핵심을 짚어 내는 자.
순간 청해의 거친 풍파가 알려 준 직감이 뇌리를 때렸다.
‘이자는 발톱을 드러낸 맹수다. 승부를 봐야 할 자.’
협상도 회유도 의미 없다. 제압 후 심문하고 죽이는 방법밖에는.
무윤의 고민도 깊어졌다.
수장인 자는 눈빛은 물론 심장의 떨림까지 확실히 반응했다. 한데 나머지 일곱은 전혀 무반응.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만 더 짙어진다.
‘저들은 모른다는 건가?’
또 수장인 자의 기운 또한 묘했다. 사기나 마기는 일절 없고 오히려 청량한 기운이 미세하게 느껴진다. 한데.
‘뭔가 어색해. 도기(道氣) 같으면서도 이질감이 있어.’
이제껏 파악한 어떤 상단전 약과도 달랐다. 의아했지만 워낙 미세해 더 알 수 있는 게 없다.
게다가 지금은 한마디라도 더 물어야 할 때.
“답할 생각이 없나? 아니면 무언의 긍정으로 알아들으라는 건가?”
“그만하지.”
짧은 답에 의지가 담겼다.
무윤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물 건너간 대화야 이미 짐작한 것이고.
문제는 두 가지.
우선 싸움의 승패야 최선을 다하면 된다.
한데 뭔가 알고 있는 자는 초절정 끝자락, 자기 죽음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경지. 거기에 의지 또한 굳건해 보이고.
‘죽일 순 있어도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한 들을 게 없다.’
이긴다 해도 간신히 잡은 꼬리가 사라지는 게 문제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 부딪치는 수밖에.
남은 건 두 여인에게 전할 전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