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무윤 일행이 악양 예관 인근에 다다를 즈음.
하늘 높이 흩어진 별빛이 깊어 가는 밤을 알렸다.
무윤의 시선이 연사구를 향했다.
“넌 예관으로 먼저 가라.”
“응? 같이 가지 왜?”
“동굴에 들렀다가 갈게. 둘이 오붓하게 보낼 시간은 있어야지.”
“에이, 상관없어. 너 있다고 내가 못 그럴 사람이냐.”
“너 때문에 이러겠어?”
“유빈이도 그런 애 아닌데.”
“하여간 처음부터 찍히기 싫다. 늦지 않게 갈게.”
왠지 모르지만 연사구도 무윤의 마음이 급한 건 안다. 궁금하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다. 때가 되면 알려 줄 놈이기도 하고.
“저쪽 길로 쭉 가면 돼. 동굴 입구가 여러 개인데 가장 큰 곳으로 들어가.”
“알았다. 좀 있다 보자.”
고민할 것도 없이 당서하의 걸음도 동굴 쪽을 향했다.
“나도 이쪽!”
오 년 만의 만남이면 둘만의 시간을 주는 게 예의다.
진서연도 생각이 다를 수 없다.
“저도.”
무윤은 잠시 망설이다 말문을 열지 않았다. 혼자 가고 싶지만 보낼 핑계가 없다. 스스로 속을 다스렸다.
‘보는 거야 같이 있어도 상관없지.’
둘로 갈라진 일행은 각자의 길로 향했다.
* * *
잠시 후, 악양예관 벽화가 있는 동굴의 산 건너편.
여기 동굴은 곳곳으로 통로가 뚫려 있다.
삼십여 장 높이의 깎아진 절벽 아래, 어둠 속에도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동굴 입구가 희미하게 투영됐다.
그때 거친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이 급히 동굴을 빠져나왔다.
파팟! 타닥!
그 동굴 깊은 저 멀리에서 어둠을 가른 여덟의 신형이 그 뒤를 따랐다. 땅을 박찬 도약이 단번에 두세 장을 한 줄기 바람으로 헤치는 자들.
휘릭!
벌어진 간격은 이백여 장.
“놓쳐선 안 돼!”
“이를 말이오!”
야율혁은 핏물 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론 힘들다.’
이미 온몸은 피범벅에다 찢겨 나간 옷 사이 보이는 혈흔은 그 수를 세기 어렵다. 불에 지져진 듯 화끈거리는 상처만도 서너 곳.
하지만 옆에 있는 숙부 귀랑도 나유양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온몸을 난도질한 듯 피 칠갑이 된 몸 여기저기엔 검붉은 선혈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특히 깊게 파인 허벅지 상처는 뼈까지 속을 드러냈다.
대부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상처들.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나유양은 심중의 결정을 알렸다.
“쿨럭! 이공자 먼저 가시게.”
“그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건 개죽음이네. 내가 그걸 바랄 거 같나?”
주변을 살피던 야율혁의 눈이 순간 번득였다. 방금 나온 동굴 옆에 인접한 작은 동굴로 눈이 갔다.
‘숲 같은 개활지는 따돌릴 수 없다.’
“다른 동굴로 들어가죠. 그게 최선 같습니다.”
“……!”
방향을 튼 두 신형이 절벽 다른 동굴로 향했다.
파팟!
둘이 다시 어둠 속의 동굴로 사라진 직후, 쫓는 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타탓! 탁!
흔적을 살피던 복면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시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저긴 외길입니다. 동굴 벽화가 있는 쪽.”
복면인 수장 와야타의 눈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운이 없는 자들이군. 하필이면 저기라니.”
“어떡할까요?”
“난 산 넘어 동굴 입구로 가겠다. 나머진 동굴로 쫓아라. 그럼 벽화 있는 곳쯤에서 잡을 수 있을 게야.”
“알겠습니다.”
와야타는 노파심에 말을 덧붙였다.
“그 정도 마공이면 분명 천마교나 혈교 장로급이야. 부상을 입었다 해도 무시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예!”
복면인 일곱은 동굴로, 수장 와야타는 산을 넘어 반대편 동굴 입구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악양 예관 쪽 동굴 입구.
절벽 아래 가장 커다란 동굴 입구를 보던 당서하의 입이 쫙 벌어졌다.
“와! 듣긴 했지만 이렇게 클 줄은 몰랐네.”
진서연의 고개도 연신 끄덕여졌다. 자연이 준 선물이라는 말이 절로 실감 나는 풍광.
“오는 길 협곡도 그렇고 주변 풍경도 너무 멋지네요.”
이미 깊어진 밤이지만 달무리에 별빛이 더해진 산야의 풍광은 또 다른 감흥을 전했다.
깎아 내리는 절벽 여기저기 피어난 꽃잎, 도랑 따라 흐르는 물소리, 나뭇가지와 바람 사이로 풀잎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무윤의 눈엔 그 어느 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급한 발걸음만 동굴 안으로 향할 뿐.
당서하는 눈을 껌벅였다.
“벌써 들어가게? 저거 진짜 풍류를 모르는 놈이네.”
잠시 후.
온갖 기형 괴석들이 즐비한 동굴 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넓은 공간이 있는 긴 통로와 땅 끝으로 이어진 수직 통로, 석순, 종유석, 다양한 형상의 석고 결정체들.
살랑이며 스쳐 지나간 바람이 그 각자의 향기를 담아 사방에 넘실거렸다.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진서연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절강 해안의 수많은 동굴을 봤던 그녀지만 또 다른 지형이 전한 색다름엔 그럴 수밖에 없다.
“아!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게. 연 당주 그놈이 떠들어 댈 만했네.”
“낮에도 와 보고 싶네요. 또 다른 느낌일 텐데.”
당서하는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그러자고. 저 그림하고 석상은 낮에 봐야지.”
그때 진서연의 의아한 시선은 한 사람을 향했다. 여길 보고 싶어 오자고 한 사람인데 이 풍광에도 말 한마디 없다.
들어오자마자 멍한 시선만 벽화 쪽을 향하고 있을 뿐.
문득 침주 청호방에서 봤던 것들이 떠올랐다. 친구 석려옥이 보통이 아니라고 놀랐던 무윤의 그림.
그 생각에 지레짐작했다.
‘보는 눈이 달라서 그런가? 저게 대단한 모양이네.’
두 여인은 그림에 푹 빠져 있는 이를 위해 말은 물론 발걸음도 죽였다.
한편 지금 무윤에게 벽화 하나하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거대한 벽면 전체에 가로세로 나열되어 그려진 벽화는 이십여 개. 그 벽화 전체를 둘러싼 둥그런 원형의 선은 이곳 악양에 있는 동정호(洞庭湖) 모양을 나타냈다.
호남(湖南)과 호북(湖北)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쓰일 만큼 거대한 호수. 중원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
그 호수 모양 안에 나열된 벽화들. 무윤의 눈은 그 벽화의 위치를 하나하나 기억 속의 어떤 것과 맞춰 가고 있었다.
보는 순간 확신했지만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떨리는 가슴은 그 모두를 다시 확인하라 부추겼다. 그래야 격랑으로 마구마구 요동치는 이 가슴이 진정된다고.
한동안 사방을 맴돌던 눈동자가 멈출 즈음, 떨림을 멈추지 못하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속으로 외쳐 보는 이름.
‘소려야!’
두 여인 몰래 흘린 작은 눈물 한 방울이 벅찬 환희를 알렸다.
이제야 만났다. 천 년 하고도 십오 년을 보지 못했던 내 딸을.
‘자기 방을 옮겨 놨어.’
과거 척고련 시절, 딸 월소려의 방 한쪽에도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호남의 동정호가 아닌 청해의 청해호(青海湖)가.
푸름을 좋아하던 소려라 벽면 한쪽에 청해호를 큼지막이 그려 놓고 그 안에 온갖 그림과 장신구 들을 배치했었다.
지금 눈앞의 벽화 위치와 똑같이.
더 이상 고민도 의심도 필요 없다. 소려의 방 구조를 아는 건 시녀 몇과 여휘, 그리고 자신뿐.
또한 벽화와 석상 외에 뭔가 남겼다면 그 또한 어디 있을지 확신했다.
무윤의 시선이 한 곳에 틀어박혔다.
‘저기다.’
벽화 사이 빈 공간, 아무 그림도 표시도 없는 벽 어디쯤.
외유를 자주 나간 탓에 소려에게 전할 게 있으면 그 벽 뒤 몰래 만든 공간에 넣어 두곤 했었다. 몇 달씩 걸릴 때도 있고 귀한 것들도 있었으니까.
물론 아무 표시도 없게 하고 자그만 장신구만 걸어 놓았다. 소려만 열 수 있게 간단한 장치만 해 놓고.
물론 저 벽 뒤에 뭔가 있을 리 없다. 저긴 누군가 세심히 살피면 알아낸다. 안력을 높여 살핀 것도 그렇고.
답은 동정호에 있다.
‘그림 속의 저 위치, 거기에 있거나 다른 단서를 남겼겠지.’
그건 지금 찾을 게 아니다. 이제 소려가 그린 벽화를 세세히 살펴야 할 때.
연사구 말대로 벽화는 기녀의 한평생을 세월대로 나열했다. 얼핏 본 것만으로 소려의 뜻은 짐작됐지만 그 하나하나를 심상에 새겨야 한다.
그 첫 번째 벽화로 눈이 향하던 순간, 무윤의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누구?’
바깥쪽이 아니다. 동굴 저 안쪽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여러 명!’
급격히 좁혀 오는 거리는 무인임을 알린다. 또한 가벼이 볼 자들이 아님도.
우선 알려야 한다.
“누가 옵니다. 대략 열 명 정도. 적이면 만만치 않겠어요.”
이젠 두 여인의 기감에도 느껴질 정도다.
당서하는 급히 주변을 둘렀다. 무윤이 저런 표현을 쓸 정도면 안전이 최우선.
“숨을 만한 데가?”
“여긴 없습니다. 밖으로 나가시죠.”
“그래, 숲이 좋겠지.”
그때 밖을 향하려던 무윤의 발이 멈춰 버렸다.
탁!
동굴 입구로 막 진입한 자,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입구로도 옵니다. 한 명인데 위험한 자네요.”
당서하의 얼굴이 우뚝 굳어졌다. 한 명인데 아까보다 더한 표현.
“……그 정도야?”
정말 심각한 상황. 정확히 알려야 한다.
“전부 적이면 제 전력을 다해도 어려운 싸움입니다.”
당서하는 목을 세게 휘저었다.
우둑!
위기일수록 침착해야 하는 건 무인의 기본.
싱긋 짓는 미소까지 더했다.
“까짓거! 그럼 한판 하는 거지, 별거 있어?”
진서연도 너스레를 떨었다.
“어쩜 언니는 이럴 때 웃음이 나와요? 정말 부럽다.”
두 여인 또한 생사를 건 혈투를 수없이 거치며 커 온 무인들. 온실의 화초가 아니다.
그때 동굴 안쪽에서 두 신형이 윤곽을 드러내자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저들이 왜?’
의문은 잠시 접고 두 여인에게 전음부터 날렸다. 알아야 스스로 대처한다. 또한 번득 머리를 스친 계획도.
-천마교 무인입니다. 귀랑도 나유양, 그리고 야율혁.
당서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유양은 마교 서열 이십 위 안에 들어가는 절대 강자 중 하나. 거기에 야율혁은 천고의 기재라 불리는 이.
우선 확인이 먼저다.
-정말 그자들이야? 어떻게 알아?
-잠시 만났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하시죠.
-……?
전음이 끝남과 동시에 무윤은 오십 대로 얼굴을 바꿨다.
한편 세 사람을 확인한 야율혁의 표정이 우뚝 굳었다.
‘이런!’
한데 곧바로 의아함이 더해졌다. 복면도 없고 못 보던 여인까지 있는 일행. 거기다 칼을 내려 잡았다. 강호에서 적의가 없음을 보일 때 하는 행동.
이러면 물어야 한다.
“누구지?”
무윤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았다.
“중원 한복판에서 마기라! 혹 천마교?”
이미 마기를 드러낸 이상 감출 때가 아니다.
“보인 그대로. 그대는?”
“혹 귀랑도와 야율혁인가?”
야율혁은 광기 같은 살기를 풀어 냈다. 정체를 알고 쫓아온 곳은 한 군데.
“척마단인가?”
“아니, 거기와는 인연이 없네.”
“그럼?”
“내 제자가 그대들을 만났더군.”
“제자?”
“엉터리 이름을 뭐라고 했다더라. 아! 염사우라고 기억하나? 낭인 행세를 했다던데.”
며칠 전 만나 천마교에 대해 묻던 자 이름이다. 이러면 먼저 물을 게 있다.
“복면인과 무슨 관계지?”
“복면인? 저 뒤에 오는 자들 말인가? 우린 모르네. 여기 벽화를 구경하러 왔을 뿐.”
“어떻게 믿지?”
무윤은 내력을 거의 풀어 냈다. 지금은 그래야 한다.
“내가 이 자릴 모면하려고 그럴 사람 같나?”
그 어떤 몸짓 하나 없음에도 동굴 가득 엄청난 경파가 어둠을 뚫고 몰아닥쳤다.
우우웅!
그러다 한순간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나유양은 숨죽인 경탄성이 절로 흘렀다.
‘내 위인 자.’
허공을 가득 메운 기의 파동이 묵직하게 몸을 죄어 올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다. 한데 연이어 들불처럼 일으킨 경력을 한순간에 다시 거둬들였다. 그럼에도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는 자.
펼치는 것 이상의 경지가 있어야 가능한 수법.
나유양은 당당하되 정중히 예를 갖췄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실례했소이다. 한데 정말 그 친구 사부 되시오?”
어떤 편견도 없이 자신들을 살피겠다고 공언한 자. 그런 이의 사부라면 이 상황에선 천군만마나 다름없다.
물론 그게 확실하다면.
무윤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시퍼런 빛이 나는 작은 구슬.
“내 제자 놈이 이걸 줬다 들었는데.”
“……!”
더 의심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