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건허의 부릅뜬 두 눈은 한 곳을 뚫어져라 향했다.
우우웅!
강기의 기운이 전한 느낌은 초절정 끝자락인 자신을 확실히 넘어섰음을 다시 한번 알린다.
촌각도 되기 전, 손끝에 넘실거리던 푸른 기운이 한층 빛을 발했다. 손끝에 맺힌 강기의 일렁임이 급속하게 거세졌다. 하얗게 변한 권강의 기파가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파도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경파에 대기가 이지러졌다.
위이잉! 우우웅!
순간 건허의 격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헉!”
두 손에 빛나는 것이 뭔지 모를 수 없다. 한데 경악을 부른 건 그 크기와 농밀함이다.
주변에 흐르는 소용돌이 폭풍 같은 기세는 단순히 권기를 중첩한 수준이 아님을 알렸다. 그럼에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권강의 크기는 반 자를 넘어선 선명한 빛이다.
눈으로 봤지만 이성은 머리에 지울 수 없는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농밀함이 극에 달한 강기가 반 자를 넘어선다는 건 어떤 자인지를 규정하는 기준이니까.
‘설마?’
절대자라 불리는 화경의 가시적인 기준, 강호에선 통상 반 자 이상의 진정한 강기를 뿌리는 자를 그리 부른다.
한데 서른도 안 된 무인이 그 너머까지도 너울거리는 강기를 보여 주다니.
절대의 도가 무공을 보고자 했다. 하나 지금 이 자리에선 가능성을 알아보려던 것인데 그 실체를 직접 눈앞에 펼쳐 냈다.
그 망연자실한 시선이 한 곳을 떠나지 못할 즈음, 하늘로 치솟을 듯 강대했던 기운은 서서히 어둠에 제 몸을 묻어 갔다.
사라라!
깊어 가는 어둠 속에 한참의 정적이 건허의 흩어졌던 정신을 부여잡게 할 즈음, 무윤의 담담한 말문이 열렸다.
“보셨습니까?”
“……!”
건허는 그 어떤 말도, 고개도 눈동자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절대자라니!’
무인의 길을 걷는 모든 이의 꿈이자 열망.
하나 갓 무공에 입문한 이를 제외하고는 그게 얼마나 허황된 꿈인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행운인지 시나브로 절감하게 된다.
더욱이 거기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 거대한 벽은 냉혹한 현실을 더 뼈저리게 알려 준다. 초절정 끝자락 가까이 왔음에도 수년째 한 걸음 앞도 못 나가고 있는 자신은 물론.
하지만 버릴 수가 없다. 그 꿈을 꾸지 않으면 강호인이 아니니까.
한데 그 흐릿함만 가득했던 앞길을 서른도 안 돼 훌쩍 뛰어넘은 이가 눈앞에 있다.
시기와 질투 같은 치졸한 감정 따위가 아니다.
그저 가슴 떨릴 뿐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보고 싶을 뿐이다. 그 길을 걸어간 자의 모습을.
설사 내가 아니더라도 그걸 봄으로써 사라져 가는 꿈을 다시 부여잡을 수 있으니까. 형산의 제자들도 꿈꿀 수 있으니까.
지금은 그저 그 열망을 가슴 가득 새기고 싶을 뿐이다.
무윤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은 그래야 할 때다.
어둠을 뚫고 올라온 별 무리가 어둠에 제빛을 더해 갈 즈음, 건허의 속 깊은 한숨이 입가에 흘렀다.
이제 마음을 추스른 이상 물어야 했다. 꿈을 현실로 내리려면 그래야 한다.
그 오랜 시간에도 진정되지 않는 눈가의 잔떨림은 이젠 어쩔 수 없다.
“잘 봤네. 이제 듣고 싶구먼.”
“제 스승님 또한 같은 도문의 분이십니다.”
“그리 보였네. 대단한 분이시겠어. 자네 같은 제자를 거두고 이리 키우셨으니.”
“그런 분이십니다. 다만 제가 부족해 남기신 일부만 간신히 따랐을 뿐이라 송구할 따름이지요.”
실소란 이럴 때 흘린다.
“허허! 자네 마음은 알지만 어디 가서 그런 말은 마시게. 절대자가 부족하다니. 솔직히 방금 나도 욱할 뻔했네.”
“그런 뜻에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부족한 건 실력만이 아니거든요. 제 길이 도인이 아닌 탓에 심려가 크셨습니다.”
“허! 그만큼 이룬 자네이거늘 스승께선 어찌 그러셨을까?”
“제겐 다른 길이 있다고 사제지연도 마다하시고 그저 할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지요.”
순간 건허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제야 감이 왔다.
“아! 그럼 스승께서 남기신 도가의 연을 이을 생각으로 날 찾은 겐가?”
이젠 몸을 달게 할 때다.
“그럴 생각으로 형산을 살폈는데 솔직히 지금까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뵙고 결정을 내려고 했지요.”
“허! 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만 이젠 달라지려고 하네. 아니, 꼭 그럴 걸세. 조금만 더 지켜봐 주면 안 되겠나?”
“말이 나온 김에 솔직히 말씀드리죠. 전 앞으로 강호 일에 몸을 담아야 할지 모릅니다. 한데 제 본가인 천가장은 뇌양에 있죠. 뭘 걱정하는지 아실 겁니다.”
“자네라면 능히 그런 일을 해야겠지. 걱정도 뭔지 알겠네. 한데 그 전에 어떤 일인지 물어도 되겠나?”
“스승께선 마인의 확산을 우려하셨습니다.”
무윤이 에둘러 마인이 확산될 조짐을 전하자, 건허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허! 그게 사실이면 보통 일이 아니구먼.”
“해서 시간이 많지 않아 돌리지 않고 묻겠습니다. 아! 그 전에 전할 게 뭔지 말씀드려야겠군요. 물론 일이 성사되기 전까진 장로께서만 아셔야 합니다.”
“이를 말인가.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겠네.”
“도백파를 아시겠죠?”
건허는 저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지, 지금 도백이라 했나?”
모를 수가 없다. 사라진 도가 문파 중 곤륜과 함께 도가의 뿌리처럼 불리는 곳인데. 더욱이 청해에 위치한 곤륜은 사상은 물론 무공 또한 중원과 조금 결을 달리한다.
하지만 호북 무당산에 있던 도백파는 중원의 것을 온전히 담은, 그야말로 뿌리란 말이 딱 들어맞는 곳.
“도백의 무공 중 약 절반가량이 제게 전해졌습니다. 천 년 전 사라진 진경 또한 오십여 개 됩니다. 물론 보통 진경이 아니지요. 도백심법의 근간이 되는 심결의 근원이 담긴 것이니까요.”
“……허!”
건허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찢어질 듯 커진 두 눈은 멍한 시선을 그대로 담았다.
‘그 정도라니!’
도백파의 유진인 것도 그렇지만, 예측과 상상이란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자료량이 가져다준 혼란은 생각이란 자체를 막아 버렸다.
말 그대로면 도백파를 재건해도 된다.
물론 아무리 수준이 높다 해도 천 년 전 무공이라 지금에 비해 부족하리라. 하지만 정통성에 있어선 비할 수 없는 가치다.
거기에 심결이 온전히 남았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이 달라진다.
‘무당이 저리 굳건해진 건 탄탄한 심결에 오랜 세월 노력이 더해진 것이거늘.’
거기에 무윤이 보여 준 절대의 도가 무공까지.
잠시 후 어쩔 수 없는 반문이 튀어나왔다.
“미안하네만 물을 수밖에 없군. 사실이겠지?”
“일부는 머릿속에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조, 조금만 부탁하네.”
“도백파권 중 으뜸은 현청운형권인데 들어 보셨는지?”
“그, 그것도 전해졌단 말인가?”
“주해까지 다 있습니다.”
“……!”
반 시진가량 계속된 낭독과 문답이 오고 간 후.
건허는 연신 도호만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무량수불!”
이미 욕심으로 불타오르는 가슴의 뜨거운 열기는 감출 단계를 지나 버렸다. 그러려니 하는 상대의 표정에 이미 숨기는 것도 포기해 버렸다.
하지만 도호를 멈출 수가 없다. 도인으로서 창피함은 나중 문제다. 이 가슴 가득 담긴 열망을 다스리지 않고는 상대의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게다가 대화를 통해 자료의 신빙성만 확인한 게 아니다. 이어진 진경의 문답에서 막힘없는 설명과 해석이 알린 깊이는 자신이 비할 바가 아님을 절감했다.
명색이 형산 최고의 도학자라 불리는 자신인데도.
‘이런 이를 더 의심할 이유가 없다.’
건허는 이 시점에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과분한 선물에 혹해 스스로 할 일을 망각해선 안 된다. 그럼 그 선물 또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그나마 열기를 가라앉힌 건허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렀다.
“평생 갚지 못할 은혜일세. 한데 그걸 받기 전에 우리 스스로 자격을 증명해야겠지.”
무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백파 유진 없이 먼저 정리하겠단 말씀입니까?”
“그래야 자네 또한 우릴 믿겠지.”
“……가능하시겠습니까?”
“해 보겠네. 아니, 그리해야지. 물론 상황에 따라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시작은 그리하겠네.”
무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건허에 대한 마지막 점검이 끝나서다.
‘능력은 몰라도 도인으로선 부족하지 않아.’
물론 적묘예의 일이 있긴 하다. 하지만 확실치도 않은 일로 가지는 선입견만큼 무서운 편견이 없다. 지금은 내 눈과 귀를 믿어야 한다.
한참 후, 앞으로 일정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될 즈음.
“오늘은 다른 눈도 있으니 이 정도 하시죠.”
“아, 이런! 내가 정신이 없었네. 그러세.”
“스승님 뜻이 잘 이어지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내 모든 걸 다하겠다는 약속밖에 보일 게 없어 아쉬울 뿐이네.”
“시작은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리 알아주니 고맙네. 연락하세나.”
“알겠습니다.”
“그럼.”
갑작스럽게 벌인 일치고 시작은 잘된 편이다.
우선 알아서 해 보겠다니 지켜보면 될 일.
갈 길은 많이 남았지만 첫 단추가 잘 꿰이면 마음은 가벼워진다.
* * *
얼마 후, 멸마단이 있는 야영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각운의 전음이 갓 돌아온 무윤을 향했다.
-일은 잘 끝난 겐가?
-그럭저럭 정리된 거 같습니다.
-다행이군. 형산도 논의가 끝난 모양이니 난 저들과 바로 가야 하네. 다시 볼 수 있겠나?
-악양에 며칠 있을 겁니다. 혹 계시면 찾아뵙겠습니다.
-이 늙은이를 찾는 곳이 많아 일정을 장담 못 하겠네. 삼대 친구들과 안다 했으니 몇을 붙여 주지. 그리 연락하세나.
-알겠습니다.
-가 보겠네.
멸마단과 형산이 떠나고 당서하와 진서연이 따로 남았다.
성미 급한 당서하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연사구한테 형산 일은 대충 들었어. 그건 잘 끝났으니 다행이고, 단주님은 왜 그러신 거야?”
“말씀 안 하셨습니까?”
“널 따라다니다 연락하라고 하셨지. 근데 왜? 바쁘신 우리 단주님이 널 다시 볼 이유가 뭘까?”
“뭐가 궁금하신 건지.”
“야! 먼저 털어놓으면 안 돼? 남자가 그럼 못 쓰는 법이야.”
적당히 털어놓아야 멈출 여자다.
“제 경지를 대략 아셨습니다. 궁금한 게 많으시겠죠. 저 또한 여쭐 게 남았고. 그겁니다.”
당서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맞는 말 같긴 한데, 능구렁이같이 빠져나가는 거 같기도 하고. 어째 말이 좀 걸쩍지근하다.”
그때 마음이 급한 연사구가 나섰다.
“우리 가면서 얘기하죠.”
“어디?”
“악양예관, 거기 가려고 온 거예요.”
“응? 거기 기녀 교육하는 데잖아? 뭐 하러?”
연사구의 입꼬리가 확 올라갔다. 잠시 후면 몇 달 전 설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저번에 그랬죠?”
“뭐?”
“오 년이나 안 봤는데 기다리는 여인이 있겠냐고. 기억나죠?”
“……네 애인?”
이럴 땐 가슴을 쭉 내밀어도 된다.
“가서 보여 드리죠. 유빈이가 어떤 애인지.”
“……거기 기녀였어?”
“아우! 저번에 말했잖아요! 표국 일을 한다고. 장사 쪽 거래 담당자라 거기 간 거예요! 도대체 사람 말을 듣는 거야 뭐야!”
“이게 왜 성질내고 지랄이야! 기녀면 또 어때서!”
“어쨌든! 가서 사과할 준비나 해요.”
“별 웃긴 놈 다 보겠네. 농 좀 한 걸 가지고 무슨!”
“와! 그땐 입에 게거품 물었던 거 기억 안 나요?”
당서하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말 돌리는 덴 이게 최고다.
“얘 웃기지 않냐? 난 기억도 없는데. 참 어이가 없어서.”
경험이 알려 준다. 둘 사이 설전에 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이번엔 다행히 빠져나갈 틈이 있다.
잽싸게 시선을 진서연에게 돌렸다.
“참! 소려가 많이 보고 싶어 하는데.”
“잘 있죠? 많이 컸을 텐데.”
“몰라보실 겁니다. 숙녀가 따로 없어요.”
“그래요? 아! 빨리 가서 보고 싶은데.”
둘로 나뉜 대화 속에 발걸음은 점점 악양으로 향했다.
마음속에 있는 그녀를 만나려는 남자 둘의 걸음은 갈수록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