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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79화 (79/161)

7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제자 선운의 서신을 빼앗듯 낚아챈 건천은 긴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단 말인가?’

선운에게 건허의 딸에 대해 은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었다. 그 결과라면 당연히 자신에게 남겨야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

가만히 서신으로 시선이 향했다.

[사숙, 남은 생이 얼마 없어 급히 적습니다. 사도련에서 의원 장동백을 이용해 사문에 마단을 뿌렸습니다. …… 그리하여 간신히 이 글이나마 남기게 됐습니다.

이 글을 사부님이 아닌 사숙께 전하는 이유를 적자니 억장이 무너집니다만 알려 드려야겠지요.

제가 아는 사부님이라면 사문의 치욕을 덮기 위해 글을 전하는 이를 죽이고자 하실 겁니다. 겉보기엔 평범한 일개 무인이니까요.

하나 그는 감췄을 뿐 아주 강한 무인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사부님이 도리어 그리될 수 있을 만큼.

제가 사숙께 글을 전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전하는 이의 안전은 물론 사부님도 위험해지실까 두렵기 때문에.

노파심에 다시 적지만 사숙께서도 그런 생각은 절대 버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사부님께 죽음만은 알려 주십시오. 돌아오지 못할 기다림은 차마 제자가 못 할 짓이라.

마지막으로 제발 이 서신은 사부님께 보이지 말아 주시길.

못난 사질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서신 마지막 줄을 읽던 건천의 눈이 질끈 감겼다. 콱 막히는 가슴에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세차게 떨렸다.

허망함 담은 속 깊은 한숨이 절로 입가에 흘렀다.

‘허! 내가 그리 살았나? 죽어 가는 제자가 서신 하나 못 남길 정도로?’

어느새 그 자리에 초절정 무인은 사라졌다. 어깨가 축 늘어진 노인의 고개는 푹 숙여진 채 들릴 줄 몰랐다.

“…….”

하지만 건천은 몰랐다.

밀물처럼 몰아닥친 허탈함 탓에, 철옹성처럼 지켜 왔던 신념과 자부심이 무너지는 처절한 아픔 탓에, 그 어떤 변명도 치졸함에 지나지 않게 된 앞날 탓에.

제자 선운을 잊어버렸다.

도인으로서, 스승으로서 지금 떠올려야 할 건 자신이 아닌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사문과 스승을 걱정했던 제자를 먼저 떠올려야 했음을.

마단의 약기는 분명 사라졌다. 하지만 광기의 씨앗은 사라졌으되, 언제부터인지 모를 내면의 성찰 또한 한쪽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치켜든 눈에 들어온 초승달이 예리한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러 대고 후벼 파도, 느껴지는 건 그저 자신뿐이다.

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자가 돼 버렸다.

장문인 건수는 건천의 손에 들린 서신을 가만히 빼내 들었다.

스윽!

역시 사형 건허와 비슷한 표정 여러 개가 한참 동안 오고 갔다. 그 복잡한 시선이 이번엔 건천을 향했다. 깊고 장중한 숨이 나직이 흘렀다.

‘사형, 달라지셔야 할 거외다! 물론 나와 우리 모두도.’

적어도 어떤 이는 주변과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 차이가 만들 형산은 이전과는 분명 달라지리라.

한편 마음을 추스른 건허의 전음이 사질 선청을 향했다.

-이 서신은 누가 준 것이냐?

-우릴 제압했던 자가 준 겁니다. 선운 사제의 마지막을 지켜봤다고 하더군요.

-뭐라? 그자가 어찌? 사실 같더냐?

-전 그리 보았습니다. 한데 그자가 사숙을 조용히 뵙기를 청했습니다.

-날? 어째서?

-그리 물으면 이 말을 하라 했습니다. 정통성이 있으면 형산은 바로 설 수 있냐고? 그 답을 줄 수 있냐고 말입니다.

-허! 그 질문이 이 상황에 왜 나올꼬? 그자는 어디 있느냐?

-만날 생각이시면 제가 조용히 전하겠습니다.

-저 건너편에서 보자고 하거라.

장문인 건수와 한참 동안 전음을 나눈 건허의 발걸음은 조용히 다른 숲속을 향했다.

같은 시각, 숲 밖.

연사구는 궁금함에 참을 수가 없었다. 나직이 들리는 소리는 숲속의 사정을 얼추 짐작하게 한다.

-일은 잘 풀린 거 같은데 무슨 내용이기에 저러지?

-알려 줘?

-응? 그자 앞에서 봉인했는데 몰래 뜯어봤냐?

-아니.

-그럼?

-먹에도 향기와 흐름이란 게 있다. 내 기운을 잘 이용하면 뜯지 않아도 필체가 흘러간 길을 알 수 있어.

이젠 황당한 일에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거참! 사기꾼한테 딱 필요한 능력이네. 어쨌든 뭐라고 썼는데?

-날 거론한 게 있어.

무윤이 내용을 알려 주자 연사구는 무릎을 탁 쳤다.

-아! 그래서 건천이 오늘은 찍소리 못 한다고 한 거구나.

-앞으로는 봐야겠지.

-변할까? 저거 하나 가지고?

-지켜보면 알겠지.

연사구는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참! 선운 그자는 건허에게만 전하려던 건데, 서신 주기 전에 그 입장에서도 생각했을 거 아냐?

-너라면?

-하긴! 하늘 위에서 욕할 거 같지는 않네. 뜻이 그랬으니까.

-난 더 원할 거라 생각해서 한 거야.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나저나 이제 남은 건 건허하고 만나는 거네. 그자가 널 찾을까?

무윤은 가까이 다가오는 선청을 가리켰다.

-그런 거 같네.

-……!

잠시 후, 일행과 한참 떨어진 산속.

한참을 고민하던 건허였지만 결국 첫 화두는 두리뭉실하게 열렸다.

“물을 게 너무 많아서 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군.”

“제가 먼저 말씀드리죠.”

무윤은 그동안 형산과 엮인 일을 개략적으로 알렸다. 거기에 더해 질문과 답변이 수차례 오고 간 후.

건허는 속 깊은 한숨을 흘려 냈다.

“허! 그런 일이 있었다니 형산의 장로로서 뭐라 할 말이 없구먼.”

“그보다 다섯 제자의 의견은 어떻게 됐습니까?”

“자네가 준 서신의 파장은 생각보다 크네. 저쪽은 아예 입을 못 열고 있지. 아마 제자들 의견대로 갈 것이네.”

“산 위에서 하던 논쟁이 보기 좋았는데 의미가 있었군요.”

“형산의 미래를 여실히 보여 줬네. 감개무량할 정도였지.”

“다행입니다.”

이제 아까 전해 들은 화두를 물어야 할 때. 건허는 의아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한데 아픈 곳을 거론했더군. 우리 정통성 말일세.”

“궁금했습니다. 정말 모든 문제의 근원이 그것인지. 그게 있으면 형산이 확실히 달라지는지.”

“어찌 그게 다라고 할 수 있겠나. 삼백 년 가까이 이어 온 문파인데. 하나 고치고 나아가기 위해선 그보다 중요한 게 없지.”

“삼백 년이 쌓아 온 정통성도 있을 텐데.”

“쫓아 올라가기 벅찼네. 구대 문파란 벽은 그만큼 높았으니. 그 탓에 스스로를 챙기지 못했지.”

“그럼 앞으로 복안도 있으십니까?”

“솔직히 생각은 많으나 이렇다 할 게 없네. 그게 고민인 게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런 것이라? 뭘 말하는 겐가?”

“제가 가진 게 있습니다. 그게 형산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뭘 말하는 겐가?”

“그걸 말씀드리자면 먼저 보여야 할 게 있습니다.”

“어떤?”

“저를 보셔야 합니다. 그러시겠습니까?”

“가진 무(武)를 말함인가?”

“그 안에 담긴 걸 보셔야 대화가 될 겁니다.”

“……보여 주시게.”

무윤의 손이 가만히 하늘로 향했다.

사라락!

형산 명분파의 수장인 장로 건허.

그를 통해 형산과 연을 맺자면 몇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한다.

우선 무윤의 무공이 도백파를 이었다는 증거.

다음 압도적인 무력이어야 한다. 그건 곧 무윤이 아닌 건허와 제자들의 미래이니까. 물론 무윤의 위상과도 직결된다.

다음 건허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명분은 목소리를 높이긴 쉽다. 정의를 부르짖기 좋으니까.

하지만 실리 없는 명분은 허상이고 명분 없는 실리는 탐욕이다.

부처의 정법(正法) 말씀 중 이런 게 있다.

-국 맛을 아는 건 혀이지 숟가락이 아니다.

숟가락을 들어 먹어 보지 않고는 그 맛을 알 수 없다. 탁상공론만큼 세상의 해악이 없음을 말함이다.

‘만약 그런 자라면 재고해야지.’

지금 할 일은 도가 무공의 근원 속에서 강한 힘을 드러내는 것.

‘마음의 무공은 뭘 담는지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지.’

마음이 이는 순간 하단전 내력과 합치된 신기심의공 기운이 도가의 이치 담아 청량함을 풀어 냈다.

위이잉!

특정 무공이 아닌 도가의 기운만을 담는 건, 도가의 이치를 몸과 머리에 새긴 무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일이 성사된 후에는 도백파 무공을 살핀 다음 전해야 하지만.

무윤의 몸 주변에 작은 소용돌이 흐름 여러 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원을 그리는 태극의 묘용이 함께했기에 나오는 형상.

사라라!

지켜보던 건허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찌!’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세차게 떨려 왔다. 순식간에 온몸에 파고든 무리(武理)의 이치를 모를 수 없다.

‘이리 청정한 기운이라니!’

살갗을 촉촉이 매만지며 스며드는 기운은 산과 들녘의 풍취가 더해진 듯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온화하게 흐르는 잔잔한 선율에 취하듯 은은함이 머릿속을 아롱진다.

사라라!

분명 도가의 근원이 확실한 기운.

한데 그뿐이 아니다. 넘실거리던 기운이 전한 떨림은 혈관과 심장, 맥박을 달구고는 뇌리에 전율을 불러온다.

사아아!

‘청아하면서도 강해!’

숲속 가득 울려 퍼지는 무형의 진기파동과 엄청난 경파는 어둠이 닻을 내린 산야를 가득 메운 듯 무겁게 다가온다.

휘도는 소맷자락이 허공을 몇 번 흔들어 댔을 뿐인데, 들불처럼 일어난 경력은 보이지 않을 뿐 노도와 같은 광풍을 사방에 흩날렸다.

휘이익! 휘익!

건허는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어 버렸다. 믿기지 않은 현실에 눈자위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단지 촌각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따라 뭔가 느껴진다 싶은 순간, 어느새 풀잎 향기 진하게 밴 바람결이 몸을 감쌌다.

한데 그 청아함에 취하기도 전, 제 몸인 양 찾아온 여렸던 기운이 어느새 중첩되어 몰아닥치는 비바람처럼 전신을 두들겨 댔다.

우우웅! 우웅!

절로 마른침이 꿀꺽 삼켜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자각 때문이다.

‘이자, 날 뛰어넘었어!’

선운이 적은 글.

-그는 감췄을 뿐 아주 강한 무인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사부님이 도리어 그리될 수 있을 만큼.

거기에 제자 다섯이 했던 말도 있다. 그대로면 자신과 비슷한 초절정 상과 끝자락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직접 만난 자의 나이는 이립(而立, 서른)도 안 됐다.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 그 현실의 잣대에 엄청난 기연 하나 정도 더해 예상한 경지.

‘초절정 중반! 그 정도면 거짓이 아니다.’

하나 시작과 동시에 의심과 불신이 정한 기준선이 무너져 내렸다.

다시 선운의 글과 제자 다섯이 전한 말이 그대로 뇌리를 휘감았다. 더불어 이젠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이 돼 버린 두 글자가 떠올랐다.

‘강자!’

초절정 상을 넘어선 자신임에도, 순간순간 찌릿하게 몸을 울리는 기운은 뇌리에 전율까지 불렀다. 시린 등골이 전한 무인의 본능은 위기감이다. 강자를 알리는 신호.

그런 상대가 이제 서른도 안 된 젊은이라니.

그 충격은 이제 머릿속까지 멍하게 만든다.

암흑이 내리는 하늘로 뻗은 무윤의 두 손이 웅혼한 울림을 알렸다.

우우웅!

이제 기운이 아닌 실체를 보여 압도할 차례다.

건허의 호기심 더한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은은히 서린 기가 대기를 진득하게 울리는 파동.

‘강기!’

검기를 중첩해 강기로 전환할 때 나오는 그것.

지금 겹겹이 쌓인 농밀한 기파가 알려 주는 느낌은 그 자신이 펼치는 강기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리라.

‘어느 정도일까?’

거기에 확실치는 않아도 이젠 무윤의 의도가 어렴풋이 짐작된다.

‘저런 유의 도가 무공이 형산에 전해진다면!’

언제나 바라마지 않던 염원, 그 실체가 지금 눈앞에 펼쳐졌다. 한데 거기에 더해 이젠 더 먼 곳을 향할 꿈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형산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것.

‘절대지경의 도가 무공!’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다. 아니, 지금은 그러고 싶지도 않다. 소용돌이 휘말린 듯 떨리는 가슴이 바람 가득 안은 돛처럼 부풀어 올랐다.

사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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