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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78화 (78/161)

78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숲에서 나온 두 사람을 보고 놀란 당서하와 진서연이 뛰어왔다.

타다닥!

당서하의 커다래진 눈은 작아질 줄 몰랐다. 천 리나 떨어진 침주에 있어야 할 자들인데.

“뭐냐, 너희들?”

연사구가 앞으로 나섰다.

“악양에 가다가 일이 좀 생겼는데 지금은 묻지 마세요. 말 못 하니까.”

“형산하고 관계된 거야?”

“말 못 한다고 했죠? 저 단주님한테 혼나요.”

당서하는 말 못 한다면서 알려 준 게 더 황당했다.

“단주님하고 같이 있었어? 너희가? 왜?”

“그만하시죠. 정말 혼난다니까요.”

“……?”

연사구는 진서연에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아까부터 보자마자 궁금한 게 있었다.

“제가 아는 그분 맞나요? 어째 동생 같기도 하고.”

진서연은 질리도록 들은 말이라 옅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저 맞아요.”

“야!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士別三日, 刮目相對)니 뭐니 하는 말은 글쟁이한테만 쓸 게 아니네. 지금이 정말 딱 그때인 거 알죠?”

“오랜만이라 그럴 거예요.”

당서하가 바로 껴들었다.

“너도 그렇지? 매일 보는 나도 그런데 오죽하겠어.”

“뭐 천 년 된 산삼이나 하수오, 그런 건가요?”

“아무리 찔러도 안 알려 줘. 고작 대는 핑계가 뭔지 알아?”

“뭔데요?”

“열심히 수련해서 그런 거래. 나 참! 그게 말이야 방귀야!”

그 의문의 답이 무윤 입에서 나왔다.

“열심히 하셨네요.”

무윤은 서연을 향해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게 진정으로 노력한 이에 대한 답이니까.

진서연은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 절로 흘렀다.

“그 말 참 듣고 싶었는데……. 아무튼 고마워요.”

정말 열심히 수련해서 그렇게 됐는데 다들 성의 없는 답변이라고 콧방귀만 뀌어 댔다. 그렇게 쌓여 가길 한참, 이젠 얼마나 꾹꾹 눌러 댔는지 한같이 돼 버린 억울함을 알아줄 이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 사실만으로 굳게 응어리졌던 설움이 사르르 풀어져 내렸다.

무윤 또한 서연의 고생을 능히 짐작했다. 자기가 봐도 놀랄 정도니까. 이제부터 말은 전음으로 해야 한다.

-변명거리가…… 별로 없겠네요.

-그럼요. 저도 안 믿기는데 누굴 속이겠어요.

-어쨌든 다행입니다. 길을 잘 찾으신 거 같으니.

-……알고 계셨죠, 그럴 만한 심법이라는 거?

-스승님께서도 소중히 생각하셨죠.

진서연은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은혜를 갚을 방법은 하나뿐.

-혹 심법을 전하려던 분이 잘 모르시면 제가 언제든 도울게요. 꼭 알려 주세요.

-그럴 일이 있으면, 그러겠습니다.

진서연은 문득 적묘예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지레짐작에 여러 조합이 만들어졌다.

‘뇌양에 가면서 자수 옷을 만들었지. 근데 거긴 작은 문파밖에 없으니 무공을 잘 모르는 분일 거고.’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아냈다.

-그분 뇌양 근방에 계시죠? 어느 분인지 알려 주세요. 제가 틈을 내서 가 볼게요.

-……무슨 말씀이신지?

-……묘예가 알려 줬어요. 거기 가면서 자수 옷 만들었다고. 거기 계신 분이 아닌가요?

실소란 이럴 때 올라온다. 아주 가득히.

-오해하셨네요.

-예? 어떤?

-자수는 제 가족들 주려고 한 겁니다. 전 누굴 사귀어 본 적도 사귀고 싶은 사람도 아직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일엔 반문이 절로 나오는 법이다.

-……정말인가요?

-예.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물론 그럴 일이 생기면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리죠.

-……!

여인의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달아올랐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때 숲속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내기 막을 쳤기에 밖에선 그렇게 들릴 뿐, 안에서는 쩌렁쩌렁 울릴 고성이 확실하니까.

형산파가 모여 있는 숲속.

일대 제자들의 말에 놀란 건 장문인과 건천 등 실리파만이 아니다.

명분파의 수장, 장로 건허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너희가 직접 나서겠다고 했느냐?”

“예, 사숙. 다섯이 같은 의견이라 드린 말씀입니다.”

“마단에 대해서도 사실대로 알리겠다고? 어째서?”

“사문을 위해 가장 나은 해법을 고민했습니다. 그 답은 마단을 이용할 어떤 의도도 없었음을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이라 봅니다. 이를 위해선 우리가 이용당한 사실, 그걸 적시하는 게 최선이라 봤기 때문입니다.”

듣고 있던 장로 건천은 불같은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눈썹 양 끝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놈들! 내 말을 어찌 들은 것이냐? 마단인 건 먹기 전에 알았지만, 사문에 부작용을 없앨 약이 있어 배후를 찾기 위해 일부러 먹었다. 한데 의원 놈이 살해되는 바람에 그 배후는 찾지 못했다. 그리 말하라 했거늘!”

“…….”

“게다가 뭐라? 너희들끼리 나설 테니 우린 빠지라고? 사문의 존장을 업신여겨도 유분수지. 감히 어디서 그런 망발을 하는 게야!”

무릎 꿇은 그대로 선청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머지 넷 또한 사숙들을 바라보는 눈 가득 불꽃을 담았다.

선청은 사숙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본 후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진정으로 저희가 사문에 반기를 들고 항명한다고 여기십니까? 정말 그리 보시는 겁니까?”

장문인 건수가 나섰다.

차디차게 굳은 표정 속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선청은 그의 직계 제자다. 어릴 때부터 직접 보듬어 키웠던 아들 같은 아이인데.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 테니 부언하지 않겠다. 그 고심 끝에 내린 결단에 너흰 움직였고 불행하게도 일이 틀어져 버렸지.”

“송구합니다.”

“하면 차선책을 찾는 것이 당연지사. 한데 이 자리에서 차선도 아닌 차악(次惡)이라 여긴 것을 제자인 너희가 주장하다니. 도대체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혹 누가 너흴 압박하기라도 한 것이냐?”

“사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면 어찌 그러는 게야?”

“잠시 장문인이 아니라 사부님이라 해도 되겠습니까?”

“허하마.”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냐고 하셨지요? 불민한 제자가 사제들을 이끌고 가다 어리석은 판단을 했습니다.”

“그럴 만한 고수라 들었다.”

“그랬습니다. 잡힌 이후엔 무작정 공격한 죄인이라 사연을 묻기에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땐 사제들만이라도 살려야 했으니까요.”

“사형으로서 결단이라 본다.”

“그 후 저들이 우릴 살려 주기로 하고 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우리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뭐에 집착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말입니다.”

“무슨 얘기이기에 그랬단 말이냐?”

선청은 연사구와 나눴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어 담담히 풀어 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장로들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파벌과 상관없이 아픈 곳을 찔러 대는 말엔 눈 둘 곳을 몰라 시선을 돌리기 급급했다.

긴 이야기가 끝나자 선청은 말을 이었다. 장문인이 아닌 사부를 바라보는 눈망울이 글썽거렸다.

“머리는 외면하라고 하지만, 이 가슴은 그 말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감추고 덮으면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엔 그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다고 부르짖습니다. 그 악취가 저에게서 멈추지 않고 제 사형제, 나아가 제자들까지 내뿜어진다고 이 가슴은 길길이 날뛰는데, 사부님 이 제자는 어찌해야 합니까?”

“…….”

“그래서 사형제끼리 머리를 맞댔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도 파벌이 다릅니다. 하나 그런 거 다 떠나서 우리와 사부님, 그리고 제자들만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모두가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걸 사부님께 감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슴 싸함에 눈가가 촉촉해진 건수의 시선이 사질들을 향했다.

“모두 같은 생각이란 말이냐?”

넷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습니다.”

“……!”

한동안 말이 없던 장문인 건수의 시선이 제자 선청을 향했다.

“……더 할 말이 있느냐?”

모든 걸 털어 낸 이의 입가엔 은은한 미소만이 사르르 흘렀다.

“제 생각과 의견 다 꺼내서 보여 드렸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이젠 언제나 그랬듯이…… 사부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전 사부님 제자니까요.”

건수는 제자들의 달라진 눈빛이 마음 가득 들어왔다. 그 빛 속에 담긴 진정과 염원도. 외면할 수 없다.

‘결정은 모르겠다만, 그 의견을 공론화해 주마. 그게 사부 된 자의 도리겠지.’

“……알았다. 잠시 기다리려무나.”

그때 선청의 시선이 장로 건허를 향했다. 논쟁 내내 보여 준 사숙 건천의 태도는 서신에 대한 마음속 갈등을 끝내기에 충분했다.

“건허 사숙, 전해 드릴 게 있습니다.”

“내게 말이냐?”

선청은 품에서 꺼낸 서신을 들어 올렸다.

“선운 사제가 사숙께 전해 달라고 남긴 서신입니다.”

“……?”

순간 어안이 벙벙한 건허의 시선이 건천과 선청을 번갈았다.

‘선운이 왜 내게?’

몇 달 전 뇌양에서 사라진 선운은 건천의 제자다. 한데 사부도 아닌 자신에게 서신을 남기다니.

소스라치게 놀란 건천의 신형이 섬전처럼 내달렸다.

파팟!

“이리 주거라. 선운은 어디 있다더냐?”

“……사제는 죽었습니다.”

건천의 온몸이 벼락 친 것처럼 들썩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입이 파르르 떨려 왔다.

“……그럼 이 서신은?”

“죽기 전에 쓴 것을 전해 받았습니다.”

“어, 어서 주거라.”

“죄송하오나 사제는 꼭 건허 사숙께 전하라 했습니다. 부디 사제의 유언을 지킬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이냐, 내 새끼거늘! 어찌 그리 황망함에 쓴 글을 다른 이에게 준다는 게야! 어서 내놓지 못할까!”

그때 장문인 건수가 서신을 낚아챘다.

타악!

이건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뜻. 언제나 장문인의 권위를 찍어 누르는 두 사형을 견제할 거리일지 모른다.

명분 또한 확실하다. 죽은 제자의 유언을 장문인이 지켜 줘야 하는 건 도리이자 의무니까.

건천의 날 선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장문인, 이게 무슨 짓인가!”

“장문인으로 나섰습니다. 우선 제 뜻에 따르시고 그 후에 따지시지요.”

“……?”

건수는 확인차 다시 선청에게 물었다.

“분명 건허 사형에게 전하라 했단 말이지?”

“예.”

“까닭은?”

“모릅니다. 다만 서신을 보면 알 거라 했는데, 봉인된 상태고 감히 제가 먼저 볼 수도 없잖습니까?”

“내용을 보면 안단 말이지?”

“예.”

장문인 건수의 시선이 건허를 향했다.

“먼저 보시되 반드시 건천 사형에게 보여 주신다면 드리지요.”

“당연히 그래야지 않겠나.”

건수의 시선은 이번엔 건천을 향했다.

“사형이 보신 후 저 또한 볼 것입니다. 장문인으로서.”

건천의 고개가 마지못해 끄덕여졌다.

“……알겠네.”

장문인은 서신을 건허에게 건넸다. 모두의 시선에 궁금함이 점점 더해져 갈 즈음.

서신을 읽던 건허의 표정은 시시각각 놀라움과 허탈함, 분노, 애잔함이 공존해 갔다.

잠시 후 다 읽은 서신을 내려놓은 건허의 입가에 깊은 한숨이 흘렀다.

“허!”

아련함 가득 담은 허망한 시선이 절로 허공을 향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건천의 손이 결국 내밀어졌다.

“내놓으시게.”

건허의 애잔한 눈빛이 건천을 향했다. 빤히 보이는 결과이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죽은 사질 선운의 유언이니까.

“선운이는 보이지 말라 했네. 어쩌겠는가?”

“주시게.”

건허는 시선을 돌려 버리고는 말없이 서신을 내밀었다.

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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