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무윤의 생각이 깊어질 즈음, 의아한 연사구의 말문이 흘렀다.
“뭘 그렇게 생각해?”
고민하면 할수록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이제 꺼내도 될 정도로.
“정말 형산을 바꿔 버릴까?”
“웃자고 한 소리에 정색하면 어떡해! 농은 농으로 받아야지.”
“농이 아니면?”
“……너 그럴 때마다 무서운 거 알지?”
“형산파가 가장 아쉬운 게 뭐냐?”
“……그거야 정통성이 없다는 거지. 뿌리가 없으니까.”
“그걸 만들어 주면?”
“이 새끼가 정말! 야, 아무리 뿌리가 없어도 구대 문파 바로 밑인 형산이야! 게다가 삼백 년 가까이 이어져 왔고. 웬만한 거 가지고 씨알이나 먹히겠어?”
“그래도 인정할 만한 게 있겠지.”
“그만! 말 같은 소릴 해야 대꾸나 하지.”
“해 봐. 혹시 알아, 내가 그런 게 있을지?”
“이게 정말! 오냐, 말해 주마! 도가 문파니까 사라진 곤륜의 진경과 무공 정도면 다 인정하겠지. 너 그딴 거 있기나 해?”
“도백파는 어때?”
“도백? 거긴 곤륜 이전에 사라진 곳이잖아? 뭐, 그 정도도 인정해 주겠지.”
“그게 나한테 있다면?”
가벼운 코웃음 가득했던 연사구의 표정이 획 돌변했다. 몇 년의 경험이 알려 준 직감.
‘이놈 이럴 땐 장난 아닌데.’
흉중에 담은 의아함을 모두 시선에 담아냈다.
“농이면 여기서 끝내자.”
“가능성은 있겠지?”
연사구의 눈이 번득였다. 놈이 이럴 이유는 하나뿐.
“스승님이 남기신 게 있구나?”
“무공은 오 할 정도, 지금 세상에 없는 진경도 오십여 개 된다. 그 정도면?”
연사구는 경악에 앞서 실소가 먼저 올라왔다.
‘크크! 예전 같으면 놀라 자빠졌을 텐데, 이젠 만성이 됐나?’
이 정도면 강호가 들썩거릴 일인데 덤덤하기까지 한 자신이 더 황당할 정도다.
거기에 다른 걸 먼저 묻고 싶기도 했다.
‘더 있겠지. 뭘 가지고 있을까?’
나중에 때가 되면 알아서 풀 놈인 걸 알기에 꾹 참았다.
먼저 물을 게 있으니까.
‘자기 주변 빼고는 강호에 관심도 없던 놈이 갑자기 달라졌어. 왜지?’
먼저 그 이유를 알아야 다음을 풀어 간다.
“너 달라진 거 알지? 이유부터 좀 알자. 그래야 뭘 같이해도 할 거 아냐?”
무윤은 생각해 둔 핑계가 있다.
“내 스승님은 물려주신 게 많은 만큼, 강호에 엮인 것도 많은 분이시다.”
“남기신 말씀이 있구나?”
“모든 건 내 선택에 맡기셨다. 다만 마공에 대해선 신경 써 달라고 하셨지. 선을 넘지 않도록.”
“지금이 그 선을 넘을 거 같다?”
“내가 보기엔 그래. 근데 뭘 하려고 해도 기반이 없잖아. 그래서 형산을 생각해 본 거야.”
잠시 생각하던 연사구의 말문이 열렸다.
“지금 상황에선 가능성 있어 보여. 건허 장로와 뭔가 엮으면 쉽게 풀릴 수도 있고. 그렇다고 당장 답 내릴 건 아니지?”
“그럼. 아까 네 말에 처음 생각한 건데.”
“알았어, 고민 좀 해 보자.”
그때 일대 제자 선청이 다가왔다.
“다들 의견을 같이한 게 있어서 부탁할 게 있네만.”
“뭡니까?”
“멸마단주를 따로 볼 수 없겠나? 은밀히 말일세.”
듣자마자 연사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그러면 여길 빠져나가긴 좋겠지만 약 먹은 건 다 들통 날 텐데.”
“그걸 바라서 한 말이네.”
“……?”
얼마 후, 진정을 담은 선청의 설명이 끝나갈 무렵.
연사구의 전음이 무윤을 향했다. 먼저 의아한 것부터 물었다.
-뭐냐? 이자들 갑자기 딴사람이 된 거 같다. 저 얘기인즉 사숙들 결정에 반기를 든다는 건데.
-그러게. 이유는 모르지만 그새 다섯 모두 눈빛이 달라졌어.
-어쨌든 난 맘에 든다. 저 생각도, 이자들도.
-사람이 갑자기 바뀌는 법은 없어.
-물론 본바탕이 탄탄한 게 아니라면 우발적 충동이겠지. 근데 지켜볼 가치는 있을 거 같은데? 이걸 잘 이용하면 형산과 뭐든 엮을 수도 있고.
생각이 달라진 이상 접근도 달라져야 한다.
-그럴 수 있겠지. 알았다. 다녀오마.
-조심해라.
무윤의 신형이 산 아래로 향했다.
사라락!
* * *
얼마 후, 산 아래 협곡 부근.
주변을 살피던 멸마단 대주 정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갑자기 날아든 전음은 생각지도 않은 자다.
-자네가 여기 왜?
-일이 좀 있었습니다.
-……?
무윤이 상황 설명과 함께 형산파 제자들의 의견을 전하자, 대주 정원은 깊고 장중한 숨을 내쉬었다.
-휴! 단주께 전할 수밖에 없겠군. 그리하겠네.
-산 정상 쪽으로 오시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알겠네.
얼마 후, 전음을 나누던 두 승려의 걸음이 한적한 산길을 향했다.
정원의 설명이 더해질수록 멸마단주 각운의 눈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너무 황당한 얘기가 많아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몰랐다. 그중 가장 궁금한 것부터 꺼내 들었다.
“허! 그런 친구가 있었다니. 한데 왜 얘기를 안 한 것이냐?”
“죄송합니다, 사숙. 말씀드린 빚도 있고 해서 감춰 달란 청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허허! 한데 이런 일에 꼬였단 말이지. 역시 낭중지추(囊中之錐)란 건가!”
“눈여겨보셨으면 합니다. 멸마단에 꼭 들이고 싶은 친구라서요.”
“그런 친구라면 난들 탐이 안 날까. 가 보세나.”
일각이 지나 산 정상에 두 승려가 다다를 즈음.
숲에서 나온 무윤의 고개가 정중히 숙여졌다.
“오셨습니까? 무윤이라 합니다.”
“반갑네. 한데 괜한 일에 엮여서 어떡하누?”
“대사님께서 잘 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허허! 여기 사질이 자네 넉살 좋단 얘기는 빼놓았구먼.”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탁드립니다.”
“노력해 보세나.”
“이리로 오시지요.”
무윤은 은신해 있던 숲속으로 둘을 인도했다.
얼마 후, 단주 각운은 일대 제자 다섯과 문답을 주고받고는 속 깊은 숨을 내쉬었다.
“휴! 그리 결정했다는 말이지?”
“어려운 부탁드려 송구합니다, 단주님. 그게 사문과 모두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닐세. 쉬운 결정이 아닌데 자네들이 힘들었겠지. 뜻이 그러하다면 자릴 만들어 주겠네. 한데 사부들과 대면한 이후에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한정될 게야. 괜찮겠는가?”
“파문까지 각오한 결정입니다. 옳다고 믿은 이상 가 보겠습니다.”
단주 각운은 문득 의아함이 올라왔다.
“한데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혹 있는가?”
연사구를 바라보던 일대 제자 선청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기 하오문도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창피하더군요. 덕분에 잊고 있던 걸 다시 찾았지요.”
의아한 시선이 한 곳을 향하는 순간, 연사구의 당황한 손짓이 허공을 마구 휘저었다.
휘익!
“아니! 그게 저는 그냥, 갑자기 속이 욱해서 몇 마디 한 건데…….”
단주 각운의 커다란 웃음이 숲속에 흘렀다. 사정은 몰라도 상황은 짐작이 간다.
“허허! 그럴 거 없네. 진리의 법을 보이면 그 순간 부처이고 스승인 게지. 또 스승과 제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라 했네. 제자 된 마음으로 그리 받아들였으면 된 게지.”
“아! ……예. 그래도 혹 주제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선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갖췄다.
“도가 있는 곳이 곧 스승이라 했소이다. 아까 그대는 스승의 자격이 있었소. 다시 감사드리오.”
연사구의 고개도 황급히 숙여졌다.
“아! 예, 저도…….”
단주 각운의 시선이 대주 정원을 향했다.
“부단주에게 일러 다 철수하라 하게. 그러면 멀리 간 줄 알고 사파도 물러나겠지. 악양에 도착할 때쯤 형산에만 일러 약속 장소로 오라 하시게.”
“알겠습니다. 하면 단주께서는?”
“어려운 결정을 한 친구들인데 내가 챙겨야지.”
“예, 그럼!”
* * *
잠시 후, 산 능선 소로를 따라 악양으로 가는 길.
형산 제자 다섯과 무윤, 연사구에 단주 각운이 더해진 여덟이 일행이 됐다.
무윤의 장난기 담긴 입이 비틀어졌다.
-우리 하오문도께서 뭔 말씀을 하셨기에 이리됐을까?
-크흠! 대사님 말씀 못 들었어? 내 말이 진리의 법이라잖아!
-그럼 앞으로 나하고 불담(佛談) 좀 해도 되겠네.
-시답잖은 소린 됐고. 그나저나 형산파 만나는 자리는 어떡할래?
-어떻게 나올지 봐야지. 결정은 그때 가서.
형산 일을 구체화하려면 분란의 전면에 나서야 기회가 온다. 그 자리에 같이 가기로 한 건 그 때문이다.
연사구는 가장 걱정되는 게 있다.
-우리야 건허 장로하고 따로 얘기하는 게 최선인데 건천이 네 얼굴 알잖아?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널 탐탁지 않게 보던 자인데 좋게 나올까? 네 실력을 보인다고 좋아할 리도 없고.
-건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적어도 오늘은.
-응? 뭔 소리야? 어떻게?
-생각해 보니 나한테 그럴 만한 게 있더라고.
-뭔데?
몇 달 전 뇌양에서 건천의 제자 선운이 남긴 게 있다. 죽기 직전 건허에게 전해 달라고 했던 서신.
그것이면 건천은 전면에 나서기 어렵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한데 지금은 그걸 자세히 설명할 때가 아니다.
-좀 있다 보면 알아. 근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왜?
-각운이 날 알아본 거 같아. 아니, 확실해.
무윤의 경지를 아는 연사구라 바로 고개가 갸웃했다.
‘무공이 특이해 기준이 다르지만 화경급인 놈인데.’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럼 대사님이 벽을 넘었단 소리야?
-내 보기엔 그래. 그런 얘기 없었냐?
-없었어. 초절정 끝자락으로 알려지셨지. 근데 넘었다면 소림에서 가만있을 리가 없는데. 당장 본산으로 불러들였지.
모든 무인의 꿈이자 선망의 대상인 절대자, 세상은 화경 이상인 무인을 그리 부른다.
바로 직전 단계는 초절정 끝자락, 그 경지에 다다른 수십이 평생을 가도 간혹 하나 넘어서는 게 화경의 경지다.
당대에 알려진 절대자는 이십여 명, 숨은 자를 감안해도 배는 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근 사십이면 적지 않아 보이지만 정, 사와 지역을 구분하고 다시 문파로 나눠 보면 그 존재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강호엔 서른다섯의 대표적인 거대 문파가 존재한다. 정파 구파일방과 칠대세가, 사파십문과 팔대세가.
그런 세가 중에도 화경 무인을 보유한 곳은 십여 곳밖에 안 된다. 그렇기에 단 한 명만 있어도 당대의 세를 구가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그게 절대자다.
그런 존귀한 존재를 밖으로 내돌리는 문파는 없다. 무적의 가치는 보이지 않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법. 세상에 나섰다가 작은 생채기라도 나면 그 가치가 현격히 떨어진다.
절대자 간의 싸움이 거의 없는 이유도, 문파 간 대결에서 마지막에 나서는 이유 또한 그걸 두려워하는 문파의 속내가 있어서다.
구파 중 최고라 불리는 소림엔 이미 두 명의 절대자가 있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 해도 그 가치는 절대 낮아질 수 없다.
무윤은 전음에 거의 확신을 담았다.
-아니, 넘었을 거다. 느낌이 그래. 가늠이 안 되는 무인은 이번이 처음이거든.
-그래? 그럼 감춘 모양이네. 멸마단주는 전장에 나설 때도 많아서 알면 그냥 둘 리가 없어.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슬쩍 물어보지 뭐. 이렇게 된 바에야 감출 것도 없으니까.
-……괜찮겠어? 세상이 인정하는 훌륭한 분이긴 하지만.
-이번엔 내 촉을 믿어라.
-왜?
경험이 준 직감은 정확할 때가 많다.
-도인하고 불자는 내가 잘 알아보거든.
-……!
각운을 바라보는 무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과거 여휘를 비롯해 수없이 많이 봐 왔지만, 이 세상에선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절대자.
한데 지금의 떨림은 단지 절대자란 그 이유가 아니다.
입장이 달라져서다.
‘무인 대 무인!’
지금은 군사가 아닌 무인으로 같은 절대자를 대면하는 자리다.
가볍지 않은 흥분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