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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75화 (75/161)

7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얼마 후, 협곡 주변 산속.

의식을 찾은 선청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우선 바닥에 누운 채 미동도 없는 사제 넷이 눈 가득 들어왔다. 다행히 숨 쉬는 가슴 떨림이 느껴진다.

‘다행이구나.’

안도와 동시에 때늦은 후회의 장탄식이 입가를 흘러나왔다.

‘불안이 화를 자초했어.’

그때 거대한 압박감을 줬던 이의 차디찬 음성이 귓전을 때려 왔다.

“죽이진 않았다. 이젠 모르겠지만.”

“공격하라 명한 건 나일세. ……사제들은 살려 주면 안 되겠나?”

“말부터 듣지. 미리 경고하는데 말 꼬지 마. 참아 줄 기분 아니니까.”

“……알겠네.”

“왜 공격했지? 형산이 하오문도를 겁낼 게 뭐가 있다고.”

선청은 검식을 통해 신분은 알아챘으리라 여겼다.

“은밀히 가야 했네. 하오문도면 나중에 알려질까 봐 제압하려 했지. 믿을지 모르겠네만 죽일 의도는 없었네.”

“의도가 어쨌든 행동은 부정할 수 없지. 그보다 들키지 말아야 한다? 누구한테?”

“사문에 해가 될 일이 있네. 우리 다섯이 악양에 있으면 안 될 일이라.”

대략 짐작 가는 게 있다. 다섯 전부 약을 먹었으니. 그것도 오랫동안. 그래도 아직은 돌려서 물어야 한다.

“소문대로 마단이겠군. 여기 다섯이 그걸 먹었을 테고, 사실이니까 도망친 거고.”

이미 악양에는 소문이 돌았다. 가서 확인하면 금방 알 일. 감출 때가 아니다.

“그러네.”

무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산엔 사태 파악할 사람이 그렇게 없나?”

“……무슨?”

“몰래 당한 건데 막말로 창피만 당하면 그만이잖아. 사실대로 털고 가면 잠시 고통뿐이야. 설사 봉문한다 해도 잠깐이면 되고. 한데 이러다 걸리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텐데?”

“그건 문파 내부 사정이라…….”

“너도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내가 살려 줄지 말지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 후환이 없어야 해. 근데 자꾸 감추면 결정은 빤하지. 맘대로 해.”

“……!”

잠시 후, 선청은 속 깊은 한숨과 함께 양대 파벌의 얘기를 세세히 풀어 냈다.

몇 시진 전 벌어졌던 건천과 건허의 날 선 논쟁까지.

“사실대로 밝히자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이미 소문까지 다 났고 멸마단주 각운이 오고 있소. 뭘 더 감출 수 있단 말이오!”

“당장 본파로 돌려보내면 그만이지. 밖에는 멀리 파견 보냈다고 하면 되오. 어차피 시간만 지나면 사라질 증상인데.”

“허! 이미 여기 있는 걸 아는데 어찌!”

“어떻게든 둘러대면 될 일! 이 일은 내 알아서 하겠소!”

“빼돌리다 들키면? 잠시 봉문이면 될 것을 몇 년이 되는 걸 모르시오?”

“내가 책임진다지 않소!”

“허! 혼자 책임진다? 이게 그렇게 끝날 일이라 생각하시오?”

그때 장문인 건수가 나섰다. 이미 건천과 입을 맞췄다.

“두 분 진정하시지요. 의견은 충분히 들은 거 같습니다.”

“……?”

“소문이 났다 한들 눈앞에 없으면 그만입니다. 설사 들킨다 해도 다른 일로 보냈다 둘러대면 뭐라 하겠습니까. 그리하지요. 이건 장문인으로서 결정입니다.”

“……!”

잠시 후, 기가 찬 연사구의 실소가 절로 흘렀다.

“참내!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 한다지만 이건 정말…….”

“…….”

그때 산 아래를 향한 무윤의 눈빛에 날이 섰다.

“누가 왔다. 수십은 되는 거 같은데.”

“……누굴까?”

“우선 숨어야지. 산 위로 가자.”

“……!”

얼마 후, 산 정상 부근.

길이 없는 숲속 깊은 곳에 은신처를 잡자, 무윤의 시선은 산 아래를 향했다.

“가 보고 올게.”

“알았다. 이 정도면 작정하고 산을 훑지 않는 한 못 찾아. 걱정 말고.”

“빨리 오마.”

파파팟!

무윤이 사라지자 연사구는 작심했던 말을 내뱉었다. 일대 제자 다섯의 아혈은 풀어 놓았다.

“크흠! 내가 나이도 어리고 남의 집 일에 떠드는 것도 좀 그렇긴 한데, 이건 좀, 아니 많이 아닌 거 같네요.”

“변명이네만 사숙들도 다 문파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 아니겠는가.”

연사구는 다섯을 바라보는 눈 가득 불꽃을 담았다. 한 점 흔들림도 없는 형형함이 그 색을 더했다.

“그래서요?”

“……파벌 또한 문파를 존속하는 힘일세. 갈등 없는 문파가 어디 있겠나.”

“전 그 얘기가 아닌데요.”

“……그럼?”

“다섯이 다 있는 자리에서 사부들이 그 얘기를 했다고 했죠?”

“그러네만.”

“근데 제자 의견도 안 물어보나요? 이 일의 당사자가 댁들이고 문제가 생기면 가장 다칠 사람들인데?”

“……우리 사부님들일세.”

연사구는 안타까움 가득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댁들은 그분 제자들이죠.”

“그거야…….”

“저한테 사부 같지 않은 사부가 하나 있는데요. 매번 가르치기 전에 생각을 묻습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짜증 날 정도로 꼬치꼬치 물어요. 그럼 제가 이러죠. 나보나 훨씬 나은 거 아니까 그냥 가르쳐 달라고. 그때마다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

“자기는 조금 앞에서 잠시 동행할 뿐인데, 어디로 갈지 묻지 않고 길을 인도할 수 있냐고요. 묻지 않고 그저 자기 길을 알려 주면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요? 선택하지 않았는데 제 것이 되겠냐고 매번 질리게 말합니다.”

“……!”

“도가에도 있는 말이라고 했으니 다 아실 거예요. 물론 댁들 사부들도. 근데 왜 안 묻죠? 사부라면! 스승이라면! 그 중요한 결정에 제자들에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개 숙인 다섯은 연신 도호만 읊조렸다.

“무량수불!”

“근데 이 말씀을 드린 건 스승을 탓하고 원망하라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정말 이해 안 가는 건 댁들이에요.”

“……?”

“방금 말했듯이 제 사부 놈은 저한테 매번 그럽니다. 혹 이상한 게 있으면 언제든 질문하라고. 조금 앞서 걸을 뿐이라 자기도 잘못한다고. 그걸 물어 줘야 자기도 바로 간다고. 그래서 제자와 스승이 누구보다 오래 같은 길을 가는 거라고.”

다섯 모두 무겁게 가라앉은 탄식을 길게 흘려 냈다.

“허!”

“이번 일! 시작은 댁들 잘못이 아니죠. 하지만 이후엔 아닌 거 같네요. 설사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말은 했어야죠. 생각을 꺼냈어야죠. 꺼내지 않는데 누가 압니까?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지 않은 그것만은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을 겁니다.”

“……!”

이젠 나직한 도호 소리도 없어졌다. 그저 지저귀는 새소리만이 한동안 숲속의 정적을 알렸다.

한참 후, 무윤의 신형이 숲 안으로 날아들었다.

사라락!

굳은 표정 그대로 말문이 열렸다.

“일이 복잡하게 됐다.”

“왜? 누군데?”

“정, 사 모두 왔어. 형산은 물론이고 서문가를 포함해 멸마단까지. 거기에 봉천문하고 사파도. 이백 명은 족히 돼.”

“사파까지?”

선청은 떨리는 숨으로 말끝을 흐렸다.

“악양을 벗어날 때 우릴 본 자들이 있네. 그래서 빨리 가려고 한 건데…….”

“……!”

잠시 생각하던 무윤의 전음이 흘렀다.

-어떡할래? 둘 중 하나 같은데?

-죽이거나 그냥 풀어 주는 거?

-다른 방법이 없잖아. 네 생각은?

연사구는 티 나게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일이 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도, 살리는 게 맞을 거 같다.

-왜?

-내가 여기로 온 거 하오문에서 다 알거든. 아버지랑 너 얘기할 때 나갔다가 몇 놈한테 떠들었어.

-……몇 놈이냐?

-좀 돼. 오랜만에 왔잖아. 유빈이 보러 간다고 신이 나서 그만.

-선택이 아니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잘났다, 이 새끼야! 어쩐지 죽이지 말자고 하더라니.

-어쨌든 저자들도 우릴 죽일 생각은 없었잖아. 입만 다물게 하고 놔주는 게 속 편하지. 안 그래?

-입 다물게 할 자신은 있고?

-그럼! 나한테 맡겨. 도사들 휘어잡는 방법이야 빤하지.

-뭔데?

-보면 알 거 아냐?

-하여간 너 앞으로 하오문이라고 먼저 떠들어 대면 알지?

-알았다고!

잠시 후.

선청은 연사구가 건네준 종이를 보고서는 눈을 껌벅였다.

“이건 왜?”

“거기다 쓰세요.”

“어떤?”

“아까 있었던 일부터 상세히 적으시고, 댁들이 이걸 떠들면 스스로 파문할 것을 확약한다고 하면 됩니다. 그 후엔 우리가 뭘 요구하건 받아들이겠다는 것도.”

“……풀어 준다는 말인가?”

“싫으세요?”

“……!”

“근데 아래에 쫙 깔렸는데 어쩌시겠어요?”

무윤의 상황 설명을 듣던 선청의 눈이 깊어졌다.

불안과 허망함만 가득하던 눈빛엔 어느새 성찰이 담긴 의지가 제 색을 발하기 시작했다. 연사구 말에 자각이 됐다 하더라도 본바탕이 있기에 가능한 일.

‘남이 아닌 우리 잘못이다. 일대 제자인 나부터.’

하오문도의 말대로 속은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후 모든 대처엔 도가 문파로서의 청정함 대신 사리사욕에 물든 편협함만이 모든 결정을 좌지우지했다.

‘달라져야 한다. 우리도 사부님들도.’

굳은 결심 하나가 심중의 걱정과 불안을 억눌렀다. 열기 서린 눈빛에 진중한 목소리가 흘렀다.

“잠시 사제들과 의논해도 되겠나?”

“그러세요. 비켜 드리죠.”

다섯과 멀찍이 떨어지자 연사구는 떨떠름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자들 풀어 줘도 답답하겠어. 형산 쪽으로 가도 빠져나간다는 보장이 없으니.”

“신경 끄자. 우린 풀어 주면 그만이야.”

“그렇긴 하지. 하! 형산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참!”

“한심해서?”

“말해 뭐 하냐. 장로나 저치들 모두 얼마나 한심해. 맘 같아서는 그냥 확 싹 쓸어버리고 바꿔 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어. 너도 그렇지? 그래야 뇌양도 편안하잖아.”

순간 무윤의 뇌리에 전율이 일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발상이 뇌리를 휘감아서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연사구가 아쉬움에 그냥 던진 화두. 한데 흩어져 있던 여러 고민이 그 화두에 다 모여들었다.

‘만약 형산파를 배경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이제껏 형산에 대한 고민은 당연히 뇌양 가족에 한정됐다. 거기에 묘예의 친부라 예상되는 건허의 존재가 더해졌고.

그땐 막연히 형산 내에 우호 세력을 만들어 가족 안전을 도모하는 고민 정도.

한데 소문의 실체를 파헤치려면, 강호 전반에 깊숙이 개입할 기반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지금이야 개방 부단주를 직접 만나기도 어려운 상황. 이럴 때 형산 같은 배경이면 일은 한층 수월해진다.

무윤에겐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있다.

‘사라진 도백파(道白派) 도경과 무공.’

과거 사라산(謝羅山)이라 불리다 지금은 도가의 종주라 불리는 무당이 있는 무당산(武當山).

천 년 전 그곳엔 곤륜과 함께 도가의 뿌리로 불리던 도백파가 있었다. 그러다 천마교에 멸문당해 사라지게 됐고.

한데 여휘가 그곳의 무공과 도경을 상당수 남겨 놓았다.

‘그 정도면 도백파를 재건해도 인정받을 정도지.’

또한 여휘에게 도경을 필사해 주고 무륜과도 친했던 당시 전대 장문인 행우자의 문파기도 하다.

천마라 불린 야율겸에 의해 멸문당한지라 미안한 마음도 항시 있었던 곳.

‘이걸 전하고 전승자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자면 건허와 논의해야 하는데.’

명분파 수장인 그에게 도백파 유진은 가뭄의 단비와 같다. 이만큼 도가의 정통성을 갖춘 건 없으니까.

거기에 악양에서 철수해 실리파의 책임론을 거론할 때 유진을 내놓을 수 있다면 단번에 실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

또한 무윤이 원하는 건 형산파 소속이 아니면서도 그 힘을 때때로 이용할 전승자의 위치면 된다.

강호에 나설 기반과 명분, 거기에 뇌양 가족의 안전이 주목적이니까.

어쩌면 그런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 있다.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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