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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74화 (74/161)

74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천 년 전에 소려가 만든 것이면.

‘뭔가 남겼을 수도!’

소려도 갑자기 떠난 자신에게 못다 한 말이 절절히 있을 건 자명한 일.

우선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화부터 내뱉어야 했다. 물론 욕지기를 가득 담아서.

“야, 이 우라질 새끼야! 그걸 왜 지금 얘기해!”

“……뭘? 그때 다 얘기했잖아.”

“천 년 됐다며! 게다가 소려, 아니 조사가 만든 거라고 안 했잖아!”

연사구는 눈만 껌벅거렸다.

“……그게 화낼 일이야? 별 웃긴 놈 다 보겠네.”

더 화낼 거리가 없다.

“아는 거 다 풀어 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게 다야. 그나저나 왜 그러는 건데?”

“……벽화하고 석상이 있다고 했지?”

“그거? 어린 기녀가 커 가는 모습을 쭉 그려 놨지. 연인을 기다리는 조각하고. 그래서 기녀들은 거기 가서 꼭 소원을 빌고 그래. 그럼 떠나 버린 연인이 돌아온다나 뭐라나.”

“자세히 말해 봐, 어떤 그림인지?”

“그게 오래돼서 잘…….”

“생각나는 대로.”

“……?”

연사구의 어슴푸레한 설명이 더해질수록 무윤의 추측은 확신이 돼 갔다.

‘여휘 놈이 내 일을 안 알렸을 리 없지.’

벽화엔 기녀의 어린 모습뿐만 아니라 나이 든 모습까지 있다고 했다.

가슴이 울렁이고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만약 소려였다면 알려 주고 싶었을 거야.’

소려라면 무륜이 뭘 바라는지 잘 안다. 딴것은 필요 없다. 그저 그 이후에 잘 살았으면, 아프지 않은 삶이었으면, 그것만 바란다는 걸.

이제 남은 건 빨리 가는 일.

“지름길 알지?”

“응? 험한 길로 가자고?”

“이럴 때 경공 수련이나 해.”

“……?”

두 시진 후, 악양 남쪽의 산길.

숨이 턱까지 찬 연사구는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헉헉! 야, 이 미친 새끼야! 내가 넌 줄 알아?”

“욕할 힘은 남았네.”

“좀만 쉬자. 이제 다 왔어. 여기 협곡만 지나면 바로…….”

그때 무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왜?”

“네다섯인데 너 정도 되는 놈들 같은데.”

“나 정도? ……척마단인가?”

무윤의 시선이 주변을 휘휘 둘렀다. 수십 장 높이의 협곡이라 저들이 오기 전에 연사구가 숨기는 어려운 상황. 한시가 급한데 엮여서 좋을 게 없다.

“괜히 허튼소리 하지 마라. 그냥 지나가게 하자고.”

“내가 할 소리다. 어디든 하오문이라고 밝히는 게 최고야. 그럼 바로 무시하거든. 이럴 땐 참 좋단 말이지.”

“……!”

잠시 후.

타다닥! 파팟!

협곡 안으로 신형을 날리던 이들이 멈춰 섰다. 다섯 전부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복 차림.

선두에 선 이의 날 선 눈빛이 두 사람을 훑어 댔다.

“어디 사람들인가?”

연사구는 티 나게 헤픈 웃음을 지어 댔다.

“하하! 우린 장사 하오문도랍니다. 악양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죠.”

“하오문?”

“예, 제 아버님이 장사 지부장이십니다. 뭐, 저희 신분은 그만큼 확실하다는 뜻이죠.”

순간 앞선 이의 전음이 일행의 수장을 향했다.

-사형, 어찌할까요?

형산파 일대 제자 선청은 바로 입을 열려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부지불식간에 나오려고 했던 말.

‘죽이자고 할 뻔했어. 후! 역시 약 기운이 아직 남았구나.’

다급한 상황이긴 하나 행적만 감추면 될 일. 생면부지의 타인을 죽일 이유가 없다. 제압해서 잠시 숲속에 두는 것도 주저하는 게 마땅한데.

형언할 수 없는 후회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었다.

‘무인이 약에 기대려 했다니. 왜 그리 헛된 욕심에 사로잡혔을까!’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사문과 자신들의 위기 상황.

-하오문이면 행적이 알려질 수 있다. 제압해서 협곡 지나 숲에 두고 간다.

-알겠습니다.

-죽이거나 중상은 절대 안 된다. 우린…… 형산이다.

-……예.

한편 무윤의 전음에 연사구의 눈도 커다래졌다.

-약 기운이 난다고?

-형산파가 먹은 그 약 같다.

-근데 저 새끼들 분위기가 영 그렇지?

-준비하는 게 좋겠다.

-그런 거지?

-앞으론 하오문이라고 하지 마라. 그 말에 저러는 거 같은데.

-이해가 안 가네. 형산이 왜? 하여간 죽이진 마라. 그러다간 정말 일 커진다.

-당연하지. 협곡이라 누가 오면 넌 숨을 데도 없잖아.

-말 안 해도 잘 안다, 이 새끼야.

순간 동시에 다섯이 짓쳐 들었다.

파팟!

무수한 검영이 공간을 점하고 밀려드는 순간, 바람 탄 무윤의 주먹이 폭풍 같은 검세 중앙을 향했다.

슈우욱!

앞선 선청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흘렀다.

‘빨리 끝나겠어.’

서릿발 같은 검기가 집중된 곳으로 무작정 달려오는 건 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다.

반 장 안으로 몸이 들어온 이상 더 볼 것도 없다. 이대로 가다 틈을 봐 제압하면 끝이다.

나머지 넷 또한 검로를 유지한 채 내달렸다.

파팟! 파파팟!

한데 쇄도한 검파가 우직하게 날아온 주먹을 번개같이 가르는 순간, 선청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뭐지?’

찰나의 흐릿함이 시야에 안개를 뿌린 사이, 뱀처럼 기괴한 각도로 꺾인 무언가가 자신을 향한 건 느꼈다.

사라락!

그 의아함에 눈 초점에 내력을 더하던 그때, 검격 안으로 파고든 섬전 같은 흐름이 뇌리에 경종을 울렸다.

쇄애액!

격한 단발의 탄성이 절로 흘렀다.

“헉!”

놀라 눈을 부릅뜰 새도 없었다. 아찔한 시야에 살을 저미는 기운이 향한 곳이 보였다. 그저 떠오르는 의문은 하나뿐.

‘어떻게?’

세찬 바람 소리가 후려친 주먹이 옆구리에 틀어박힘을 알렸다.

퍼억!

“커억!”

격한 통증에 우그러진 등 위로 찍어 내린 팔꿈치가 쑤셔 박혔다.

빠각! 우둑!

“우욱!”

놀란 넷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형제 다섯의 연수 합격이 담긴 공간을 단번에 헤쳐 버린 자.

‘고수!’

쉽게 제압하고 가려던 상황이 돌변해 버렸다.

남은 넷 중 수장인 선중의 고함이 협곡을 울렸다. 이미 바닥을 구른 선청을 살피는 건 나중이다.

“전력을 다할 상대다!”

“예!”

방위를 정한 넷의 신형이 무윤을 에워쌌다. 동시에 땅을 박차고 오른 신형이 새삼 곱씹은 결의를 알렸다.

타악! 파팟!

요혈을 노린 네 개 검의 떨림이 갑자기 더해진 격정에 요동쳤다.

사사삭! 쇄애액!

무윤의 두 손이 휘날리듯 허공을 휘저었다. 부드러움 속에 쾌를 더한 손끝이 수십 개의 잔영과 함께 휘날렸다.

사라락!

지켜보던 연사구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섯의 기운이 알려 주는 사실.

‘살기가 없어.’

제압하려는 의도가 명백해 보인다. 그래도 공격한 건 변하지 않지만, 어쨌든 잡고 나서 물어보면 될 일.

무윤의 의도도 명확해 보인다. 지금 허공을 휘젓는 저 모습은 춤이다.

‘저 춤을 꺼냈다는 건 제압하겠다는 거지.’

오래전, 춤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처음 느꼈을 때 호기심에 물은 적이 있다.

-그것도 무공이지?

-그 길로 갈 수도 있지. 근데 달리 갈 거야.

-왜, 정말 대단해 보이는데? 내 촉으로 장담하는데 그길로 쭉 가면 대단한 무공 하나 꼭 나올 거야.

-전에 말했잖아. 춤을 시작한 건 예전 친구 놈 권유라고.

-들었지. 생을 즐기라고 그랬다는 거. 근데 그것도 하고 무공도 하면 일석이조 아냐?

-지금은 춤에다 남을 공격하는 걸 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무공으론 전혀 안 쓴다?

-아니, 나도 싸우다 보면 욱할 때 있을 거 아냐. 그러다 생각지 않게 죽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무공으론 생각 중이야.

-아! 심결에다 분노나 화 이런 걸 배제해서?

-배제는 회피 수단이지.

-그럼?

-여러 번 말했잖아. 오욕칠정은 피하고 억누르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한다고. 그 길을 춤으로 찾아가다 보면 된다는 거지.

-……!

연사구의 눈이 점점 더 초롱초롱해졌다.

‘이젠 그럴 자신이 생겼다는 거겠지.’

넷의 시선 또한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뭐지?’

물결 따라 흐르는 바람처럼 유려한 손짓, 발짓, 거기에 둔중한 울림은 있되 포용하듯 다가온다.

사라락! 스르륵!

유유히 대기를 타 넘어 살랑거리는 기운엔 옥죔이 없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신명 난 춤사위가 바람결에 흩뿌리는 기운만 허공을 가득 메운다.

그럼에도 요혈을 노려 찔러 대는 검 끝을 교묘히 흘려 낸다.

수십 초의 송곳 같은 공격에도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선중의 전음이 세 사제를 향했다. 무인의 직감이 주는 경고는 무시해선 안 된다.

-시간 끌수록 불리한 건 우리다. 전력으로 동시에 뛰어든다.

-예!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쾌속한 네 개의 검 가득 휘몰아치는 경파가 대기를 울려 댔다.

쇄애액! 슈우욱!

순간 제자리를 맴돌던 무윤의 회전이 용틀임 쳤다. 찔러 온 검 하나를 회오리에 담아내듯 끌어당겼다.

휘리릭!

선중의 격한 탄성이 다급함을 전했다.

“헉!”

초절정에 달한 내력이 실린 검이거늘, 검 따라 빨아들이는 기운에 저항 한 번 못하고 몸이 딸려 갔다. 지축을 강하게 디딘 발끝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제야 알았다, 유인한 것임을. 다급함이 부른 실책이다.

‘공간을 장악했어. 이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인데.’

유려함과 경쾌함이 섞인 몸짓 안에 흐르는 바람결, 그 속엔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녹아들었다. 매인 곳 없이 떠돌던 바람이 어느새 그물처럼 몸을 죄어 왔다.

허탈한 한숨이 아득한 마음을 알렸다.

‘부딪히는 게 있어야 반발하거늘.’

문득 오래전 무당의 장로가 보여 줬던 태극권이 떠올랐다. 부드러움 속에 만년 거악과 같은 장중함이 담긴 그 손길.

한없는 부드러움과 물 흐르듯 끊이지 않는 흐름. 그 태극의 원 안에 들어 있던 유능제강(柔能制剛)의 거대함이 연상되는 몸짓이다.

하지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느릿하게 다가온 듯했던 팔의 춤사위가 머리를 스치는 순간.

퍼억!

“커억!”

멀어지는 의식 속에도 사제들의 신형을 좇던 눈길이 순간 파르르 떨려 왔다. 마지막 희망을 담아 쳐다본 눈길인데.

‘전부!’

상체가 이미 회오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까의 자신처럼 딸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발버둥만 허공 가득 허우적거린다.

한 서린 체념의 탄식이 입가를 쓸어내렸다.

‘그냥 갔어야 했는데.’

선중의 머릴 스친 손끝이 은은한 바람 따라 다시 휘날렸다. 바람 기운에 저항하던 다른 이의 등덜미를 스치듯 지나갔다.

파파팟!

“크윽!”

툭!

다시 뗀 발디딤에 연이어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뒷덜미를 연달아 스친 손끝 탓이다.

“우욱!”

“커억!”

툭! 투둑!

그제야 허공을 휘돌던 몸짓이 서서히 회오리를 거둬들였다.

사라악! 휘이익!

다섯이 널브러진 사이로 연사구의 신형이 쇄도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이 있다.

파팟!

몸을 살피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렀다.

“휴! 다행이네. 다섯 다 살았어.”

“이자들 살기가 없었다.”

“그런 거 같더라니. 그래서 춤을 꺼낸 거고?”

“그래.”

“이제 무공으로도 춤은 완성인 거냐?”

“아니, 갈 길이 많이 남았더라. 무공하곤 또 달라.”

“……!”

연사구는 의문이 사라지자 다른 호기심이 튀어나왔다.

“근데 그 회오리바람 뭐냐? 내기 막 같은 거야?”

“막이라기보다 원 안에 내기 흐름 결을 겹겹이 쌓은 거지. 무당의 태극권하고 비슷한 거야. 그걸 좀 응용했지.”

“응? 무당 도사하고 겨룬 적이 있어?”

예전 여휘와 싸웠던 도가의 고수 굉곤에게서 받은 영감을 춤에 더했다.

“아니, 예전에 잠깐 봤어. 좀 오래됐다.”

“그나저나 우선 옮기고 봐야겠지?”

“얘기는 들어 봐야지.”

“그러자.”

다섯을 들쳐 메고는 산 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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