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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72화 (72/161)

7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무윤은 담담히 반론을 풀어 냈다.

천 년 전 척고련 시절에도 있던 논쟁이다. 그때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이니.

“필요악(必要惡)이 사라지면 더 나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말씀, 저도 동감합니다. 한데 천 년이란 세월 동안 조금씩이라도 개선할 노력이 있었나요? 지금도 그러고 있나요? 전 그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째서?”

“시대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런 노력이 없다면 필요악은 악습(惡習)이 되고, 필요악의 필요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때는 그저 악(惡)으로만 세상에 남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요.”

나유양의 표정이 어느새 굳어져 버렸다. 다음 질문의 답에 따라 이자를 적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흉중에 품은 의문을 그대로 흘렸다.

“자넨 지금의 천마교가 그렇다고 보는가?”

“전 마인을 본 적도, 천마교에 가 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듣기만 했죠. 그래서 여쭌 겁니다. 과연 지금의 천마교는 그런 노력이 있는 곳입니까? 그렇다면 전 절대악(絕對惡)으로 규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노력이라! 허, 답하기 쉽지 않구먼.”

“그럼 사안 하나로 물어보죠. 마공을 예로 들면 어떻습니까? 최소한 광기에 사로잡히는 마공은 제어하고 있나요?”

“……충분하다고 말하긴 어렵네. 하나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만 남았네요.”

“마지막이라? 뭔가?”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이 답변에 따라 앞으로 행동은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말씀과 같이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다수인가요, 아니면…….”

나유양은 나직한 한숨을 살며시 흘려 냈다.

“……이어져 왔고 이어져 갈 거라고 답할 수밖에 없군.”

“……!”

막 떠오른 달을 향한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

서로를 감춘 상태라 하지만 한 시진 가까이 수없이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 안에 저들의 생각, 이상, 고민이 엿보일 수밖에 없다.

한데 다를 게 없다. 연사구, 공야성과 술 한잔에 그날의 시름을 털어 내던 자리만큼이나.

하루하루 바람같이 흐르는 세월을 한탄하던 아쉬움까지도 똑같다.

물론 이 짧은 시간, 이 둘과의 만남만으로 천마교 전체를 형상화하는 건 심각한 오류에 직면할 수 있다. 좁은 바늘구멍 안으로 세상을 보는 꼴이니.

다만 한 가지 결심은 굳게 섰다.

‘신강에 가 본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그다음에…….’

적어도 이 둘이 전한 바늘구멍 안의 모습은 그럴 가치는 있어 보였다.

그리고 계획도 수정했다.

‘알리는 게 낫겠어.’

들은 얘기로 보아 목적은 여행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다 신분이 알려졌을 테고. 이런 자들이라면 인연을 이어 갈 가치가 있다.

나유양 또한 생각을 달리했다. 자신들이 마인임을 아는 자지만.

‘죽이기는 아까워. 어디다 떠들 자도 분명 아니고.’

누군지 묻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더 깊은 관계는 상대를 위험하게 한다. 천마교와 어떤 인연도 중원 사람에겐 독이니까. 이대로 조용히 헤어지는 게 최선이리라.

여기서 마무리해야 한다.

“밤이 깊은 거 같은데 돌아갈까?”

“그러시지요.”

“덕분에 오늘 즐거웠네. 고향 얘기도 원 없이 했고 말일세.”

“저도 옛 추억에 잠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행이구먼. 이제 가세.”

그렇게 숙영지로 발걸음을 옮기던 즈음, 무윤은 슬며시 운을 뗐다.

“참! 아까 오다가 누굴 만났는데 이상한 얘길 들었습니다.”

“어떤?”

“제가 나름 무공 좀 하는데 보자마자 살이 떨리는 걸 봐서는 초고수가 분명합니다. 한데 위험한 자가 이 근처에 있다고 큰길로 가라더군요. 그래서 잽싸게 여기로 온 겁니다.”

“위험한 자라?”

“초고수인 분이 그러더군요. 혼자는 추적만 할 뿐이라고. 그 말은 곧 누군지 안다는 거겠죠. 여럿이 찾고 있다는 뜻도 포함된 말이고. 정파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유양은 놀람과 의아함이 동시에 밀어닥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상대의 말 속엔 분명한 의도가 담겼다.

‘우릴 아는데 도와준다? 왜? 누구기에?’

이젠 날 선 감각을 부채질하는 것만으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그만큼 들은 말은 위중함을 알렸으니까. 또한 그런 사실을 알려 주는 의도와 누군지도.

새삼 결심을 곱씹은 입가엔 뜨겁게 달궈진 숨이 뿜어졌다.

“누군가, 자네?”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제 생각엔 사도련 척마단 같다는 말씀을 드린 건데.”

“누군지 물었네.”

“제가 겁이 많아서 마인에게 밝히긴 좀 그렇습니다. 아! 물론 낭인도 아니고 이름도 가짜긴 합니다. 이 얼굴 또한.”

“내가 손을 써야겠나?”

“안 그러실 거라 믿습니다.”

“어째서?”

“신분을 감춘 거야 서로 그랬으니 피장파장이고, 제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아실 테니까요.”

“……거짓보다 감춘 게 위험할 때도 많네.”

“다시 말씀드리죠. 지금까지 천마교와 어떤 인연도, 관심도 없었고 연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궁금해서 묻고자 한 의도밖에 없습니다.”

나유양의 눈이 깊어졌다. 오랜 인생 경험과 그간 정황이 알려 준 직감.

‘거짓은 아니야.’

우선 시급한 사안으로 화제를 돌렸다.

“사도련 척마단이라 했나?”

“전 그곳도 잘 모릅니다. 다만 마인을 쫓는다면 생각나는 건 두 곳인데 사파 분위기라서 드린 말씀입니다. 단, 들은 말은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때 야율혁이 나섰다. 이 질문은 직접 하고 싶었다.

“왜 찾아온 거지? 네 말대로 마인과 엮이면 어찌 되는지 잘 알 텐데.”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겠죠?”

“당연히.”

“말씀드린 그대로 궁금했습니다. 제가 들은 천마교와 마인들이 정말 그런지. 이전까진 관심도 인연도 없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알아보려는 참에 두 분을 만난 겁니다. 더도 덜도 없이 이게 사실입니다.”

“……궁금한 건 좀 풀렸나?”

무윤은 싱긋 미소 지었다. 그게 솔직히 답해 준 이에 대한 예의다.

“더 알아봐야죠. 그래도 떠도는 세상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더군요.”

“하하! 떠들어 댄 보람은 있군그래.”

그때 무윤의 눈가에 찰나의 섬광이 스쳐 갔다. 저 멀리 능선 쪽에서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진다.

‘빨라. 그것도 여럿이고.’

숲을 헤치는 속도로 봐선 초절정 무인 대여섯 정도.

하지만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척을 감지한 나유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척마단? 한데 어찌 알았을까?’

이번 일 년의 여정은 강호를 둘러보려는 이공자 야율혁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은 그의 보호 겸 안내를 맡았고.

그 행로는 스스로 정했고 천마교에도 알린 적이 없다. 내부의 적이 더 경계 대상이니까. 물론 행적은 철저히 감춰 왔고.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공자가 보낸 서신!’

야율혁이 강서에 있을 때 여동생 야율서린에게 안부차 보낸 게 있다.

그게 일공자 야율담의 시야에 걸렸으리라.

물론 그 어떤 지명이나 일정도 적지 않았지만 이제 교주가 허락한 시한은 한 달 남짓. 발신처를 감안해 돌아오는 길을 유추할 수 있다.

야율혁의 생각도 비슷했다.

-제가 실수한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말리지 못한 내 책임도 있네. 그보다 빨리 움직이세.

-알겠습니다. 근데 저 친구에겐 알렸으면 합니다만.

-……인연이라 여겨지는가?

-오늘이 마지막 같진 않습니다.

-……!

야율혁은 진중함을 담아 시선을 맞췄다.

“우린 바로 가 봐야겠네. 사정이 생겼어.”

“알겠습니다. 인연이 되면 또 뵙지요.”

“난 야율혁이라 하네. 이분은 귀랑도 나유양이란 분이고.”

무윤은 정중히 예를 갖췄다. 그래야 할 상황이다.

“죄송합니다. 전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제 주변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이해하네. 한데 자네 정말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군.”

“예?”

“하하! 듣고 안 놀란 건 자네가 처음이거든.”

“……꼭 알아보겠습니다.”

“인연이 되면 또 보세.”

순간 무윤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품에 있던 걸 급히 꺼내서 내밀었다. 파란 빛이 나는 작은 구슬 두 개.

“이걸 가지고 가시죠. 이름 대신 드리는 징표입니다.”

“이게 뭔가?”

“동생 혼인 선물로 청옥을 깎다가 부스러기 가지고 재미 삼아 만든 겁니다. 지금 드릴 만한 게 이거밖에 없네요.”

아주 작게 만든 것이라 천설청옥인지 알아볼 자는 세상에 거의 없다.

구슬을 건네받은 나유양은 눈을 껌벅였다. 무인이라서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 암기로 쓰이는 건가?”

무윤은 실소가 절로 흘렀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지만 그럴싸했다.

“그것도 괜찮네요. 보기보다 꽤 단단하니까요.”

“허허! 아닌 게로군.”

“혹 암기로 쓰시더라도 회수는 꼭 하세요. 그거 정말 비싼 겁니다. 꼭입니다.”

그때 야율혁이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남에게 선물로 줘도 되겠나? 내 동생이 이걸 보면 뺏을 게 빤해. 그 아이가 원하는 빛깔하고 너무 비슷해서 말이야.”

“하나 더 드리지요. 몇 개 더 있습니다.”

“고맙네. 잘 간직하지.”

“신강에 한번 들르겠습니다.”

“그러시게. 이만 가 보겠네.”

얼마 후, 두 사람이 점으로 작아져 보이지 않게 될 즈음.

저 멀리 숲에서 지켜보던 연사구가 전력을 다해 뛰어왔다. 그럴 이유가 있다.

파파팟!

“너! 쫓아갈 생각일랑 집어치워!”

“그럴까 하다 말았다.”

“……웬일이래?”

무윤은 척마단 일행을 가리켰다.

“아까 봤던 자가 표국으로 가잖아. 나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

잠시 후, 표국 숙영지.

척마단 단원들이 전 인원을 훑고 보고하자, 척마단 부단주 척조산은 눈에 머금었던 열기를 흘려 낼 수밖에 없었다.

“허, 이런 기회를 놓치다니.”

연사구는 티 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신지?”

“아닐세. 그보다 우릴 본 건 함구해야 하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 생각하게. 자네 아버지에게도.”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겠네.”

“……!”

한 시진 후, 장사(長沙) 외곽 산속.

나유양의 좁혀진 미간이 더 조밀해졌다.

“허! 그래도 악양에 가겠단 말인가? 저들이 당연히 그 경로를 예상할 텐데?”

“꼭 가 볼 데가 있습니다.”

“어디 말인가?”

“마후(魔后)께서 말년에 계셨던 곳이 있는데 가서 확인할 게 있습니다.”

“마후? 뭘 확인하려고?”

야율혁은 그동안 숨겨 왔던 일을 꺼내기로 했다. 나유양은 친숙부와도 같은 사이다.

“숙부님은 지금 소문을 어찌 보십니까?”

“소문? 여휘라는 자와 척고련을 말하는 겐가?”

“예.”

“지어낸 얘기겠지.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어찌 전해지지 않았겠나? 적어도 우린 지울 이유가 없는 역사이거늘.”

“전 아니라고 봅니다.”

“응? 어째서?”

“어릴 때 천마서고에서 놀곤 했는데, 우연히 지하에 있던 천 년 전 죽간을 찾았습니다. 척고련의 이대 군사, 해오라는 분이 남긴 회고록인데 다 알아볼 순 없지만, 내용은 대략 파악이 되더군요. 지금까진 저만 알고 있었습니다.”

“……혹시 거기에?”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찾아보니 비슷한 내용이 더 있었습니다. 굳이 떠들 이유가 없어 조용히 있었지요. 천마의 후손에다 오대 마가(魔家)의 수장 격인 우리 가문 입장에서야 분란밖에 더 되겠습니까.”

“허! 하면 그 내용과 소문이 비슷하다는 말인가?”

순간 야율혁의 눈이 번득였다.

“큰 흐름에선 그렇습니다. 다만 천마신공에 대해선 전혀 다르더군요.”

“어떻게?”

“무륜께서 해오 그분께 모든 걸 물려주시면서 이런 말을 하셨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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