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고민이 깊을 땐 가지치기도 한 방법이다. 확실히 뺄 건 빼야 생각이 쉬워진다.
‘혈교는 아니다.’
마공 연구를 위해 선우진이 만든 혈교는 아무 상관도, 인연도 없는 그저 남이다.
얼마 전 혈교 마인들을 죽일 때도 미련이나 동정심 따윈 껴들 곳이 없었다. 그저 마공을 만들어 세상에 뿌린 악인의 집단이라 여겼을 뿐.
한데 이름만 바뀌었을 뿐 면면부절 이어 온 천마교는 그 실체가 척고련을 이은 건 맞다.
가진 것 없고 천한 출신들이 그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힘을 모았던 척고련, 그 염원과 뜻은 사라졌지만 그건 변질이지 실체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세상의 악인들이 모여 힘만 추구하는 곳, 마공에 얽혀 세상의 해악이라 알려진 곳.
그런 곳이지만.
‘천마교의 뿌리가 나라고 자각한다면?’
그 전제하에서 오만 가지 상상이 뇌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답 없는 질문과 의문이 연이어 서로를 불러내길 한참.
무윤은 머리를 휘휘 내젓고 말았다.
‘아는 게 없는데 답을 낼 때가 아니지.’
의문 또한 단 하나만 뇌리에 올렸다.
‘천마교가 어떤 곳이지?’
천마교가 저지른 악행은 모두 남에게 듣고 기록에서 봤을 뿐, 내 눈으로 살핀 게 아니다.
지금도 그 기록만으로 천 년 전 사실이 왜곡되고 있는데, 자신이 악마가 돼 버렸는데.
무윤의 상념은 길지 않았다.
‘부딪쳐 본다.’
둘뿐이지만 저 정도면 높은 지위에 있을 터. 그런 자들을 통해 천마교를 약간이나마 투영할 기회다.
그러자면 먼저 연사구에게 전음으로 알려야 한다. 잠시 후 빤한 전음이 되돌아왔다.
-이 미친 새끼! 그냥 두면 조용히 떠날 텐데 뭐 하러 말을 걸어? 안 돼! 하여간 이럴 때 보면 네놈이 광마인 같다니까.
-그러다 조사하는 자들이 오면? 그땐 빼도 박도 못해. 네 장인 걱정된다며?
-오늘만 넘기면 되는데 그사이에 오겠어?
-그러다 오면?
-그땐 네가 먼저 움직이면 되잖아!
-말만 할 게 아니라 상황 봐서 쫓아 버릴 수도 있어. 그래서 꺼낸 얘기고. 그게 낫지 않을까?
-하! 이 새끼가 누구한테 구라를 쳐! 너 또 뭐가 궁금한 거지? 뭐야, 이번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쫓는 김에 이거 저거…….
지금은 최선과 최악이 뭔지 구분하기도 어려운 상황. 연사구는 답을 내렸다.
-……제압할 자신은 있는 거지?
-없다. 죽일 자신은 있지만.
-저 정도 마인이면 속도 시커먼 거 알지?
-잔소리는 그만!
-……!
얼마 후, 번져 가는 석양이 어슴푸레 어둠을 몰고 올 즈음.
표국 뒤편 상인들 사이, 젊은 자의 눈이 살짝 빛났다.
옆에 있는 중년인에게 전음을 흘렸다.
-하오문도라는 저자, 어찌 보십니까?
-초절정 같네. 하오문에 저런 자가 있을 줄은 몰랐군.
-역시 그랬군요. 기운이 남다르다 했더니.
강호에선 귀랑도라 불리는 천마교 운뢰전주 나유양은 노파심에 말을 더했다.
-그래 봤자 자네 상대는 아니야. 괜한 호승심 부리지 말게. 그럼 자네 여행은 끝일세.
-압니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그때 가까이 다가온 무윤이 싱긋 미소 지었다.
“제가 혼자라 말동무나 할까 해서 왔습니다만. 혹 폐가 되는 게 아닌지.”
“허허, 그런가? 우리도 여긴 초행이라 둘뿐이라네. 적적한 차에 잘됐구먼.”
“전 여기저기 떠도는 낭인 염사우라고 합니다.”
“난 도운기라 하고 이쪽은 내 조카 도혁일세. 둘이 여행 중일세.”
잠시 인사가 오고 간 후, 무윤은 슬며시 운을 뗐다.
“한데 멀리서 오신 모양입니다.”
“그러네. 한데 어찌 아는가?”
“조카분 말투가 귀에 익습니다. 신강 쪽 같네요.”
순간 나유양의 시선에 스산한 빛이 잠시 스쳐 갔다.
“허허! 자네가 거기 말을 어찌 안다고 그러는가?”
나유양은 호북 말투를 자연스럽게 쓰지만, 중원 여행이 처음인 이공자 야율혁은 티가 날 수밖에 없다.
무윤의 눈가가 아련해졌다. 진실 반 거짓 반을 섞었다.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몇 년 살았지요. 아버님이 타림목(塔里木) 주변에서 상행을 하셨거든요. 청해호(青海湖)도 자주 갔었습니다. 하! 그 넓은 수평선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천 년이 지났어도 산과 강이 크게 바뀌었을 리 없다. 땅에다 지도를 그린답시고 강줄기를 파헤치는 여휘 같은 놈이 또 있으면 모를까.
무윤은 기억에 있는 곳을 주저리주저리 읊어 냈다. 물론 바뀌었을지 모를 지명 탓에 풍경 묘사만 주로 했다.
그게 더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가 보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
그제야 나유양의 미소가 그윽해졌다. 설명이 정확한 건 물론이고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빛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모든 의심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허허, 그랬군. 한데 참 멀리도 옮겨 왔구먼.”
“먹고살자니 그리됐지요. 돈 따라 사람 따라 옮겨 다니다 보니 어느새 여기더군요.”
“낭인 생활은 좀 어떤가? 상인인 나야 잘은 모르지만, 눈빛이 형형한 게 칼 좀 쓴 거 같은데.”
무윤은 가슴을 쭉 내밀었다. 이미 나유양이 슬쩍 내기를 뿌려 살핀 걸 안다.
“하하, 역시 세상 연륜이 있으셔서 눈이 매서우시네요. 제가 운발은 좀 있어서 좋은 스승님을 만났죠. 크흠! 이래 봬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답니다. 대문파 제자들도 저보곤 놀라니까요.”
“허허, 그런가. 어쩐지 몸이 단단해 보이더군.”
“에고! 그래도 돈도 여자도 남은 게 없습니다. 뭐 떠돌이 생활이 다 그렇지만.”
나유양의 눈에 잠시 날 선 빛이 스쳐 갔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아! 그러지 말고 우리 조용한 데 가서 술 한잔할까? 나도 떠난 지 좀 돼서 그런지 고향 풍광이 눈에 아른거리는구먼.”
“오래되셨습니까?”
“한 일 년 됐네. 여기 조카 세상 구경시켜 주러 나왔지.”
“그러셨군요. 마침 저도 얻어 둔 술이 있습니다. 가시죠. 제가 또 스승님한테 주워들은 게 많아서 심심하진 않으실 겁니다.”
“허허! 그거 잘됐군. 어서 가세나.”
“예.”
* * *
얼마 후, 표국 일행과 떨어진 산 중턱.
진홍빛을 뿜어내던 노을도 짙은 어둠에 그 꼬리를 감출 즈음까지, 대화는 끊이지 않고 고즈넉한 산야에 흘렀다.
술이 거의 다 떨어질 무렵, 나유양의 의아한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분명 의도가 있어 접근한 건 맞는데.’
처음 술을 핑계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옮기자고 한 것도, 무윤이 더 멀리 가자고 했을 때도 그대로 따른 이유가 있다.
거친 강호를 떠도는 자라면 반드시 새겨야 할 말이 있다. 특히 천마교 마인이라면 더욱이.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이지.’
낯선 이는 좋은 뜻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굳이 세상의 지혜가 담긴 격언이 아니더라도 그간 경험으로도 충분히 절감한 일.
거기에 이자는 찾아온 의도가 있음을 말 속에 에둘러 담았다.
혀를 내두를 만한 학식과 세상의 혜안으로 자신이 평범한 낭인이 아님을 일부러 드러냈다.
그게 너무나 의아했다.
‘할 말이 있다는 뜻 같은데. 우릴 어찌 알고? 또 누군지 알았다면 저리 여유 부릴 수는 없는데. 허, 그것참!’
처음엔 절정 중상이라 자신감에 저러는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확신이 서면 죽일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대화가 흐르면 흐를수록 의구심만 뇌리를 가득 채운다.
‘오히려 대학자라 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처음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강호 얘기는 제외하고 나눈 수많은 대화. 그 어떤 분야에도 막힘이 없는 지식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럼에도 겸양과 상대를 배려하는 말 또한 빼놓지 않았다.
여행이 주는 묘미 중 하나가 이런 자와의 만남인데, 의도만 없었다면 원 없이 그걸 만끽했을 자리였다.
한편 야율혁 또한 무윤을 보는 눈빛은 예전에 달라졌다. 나유양과 비슷한 의문은 물론이고 다른 게 더해졌다. 아주 크게 다가오는 게 있다.
‘뭘까, 저 자신감의 근원은?’
직감이 알려 준 게 있다. 자신들이 누군지 안다는 것.
한데 그럼에도 표정과 몸짓 어디에도 두려움이 없다. 압도적인 강자라면 그럴 수 있지만, 실력은 빤히 보이는데.
답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라고밖에 생각이 안 든다.
마교 최고의 기재란 자신도 한때 저런 자신감이 충만했었다. 그러다 죽음 일보 직전의 암살 위기에 세상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낀 이후론 감추고 또 감추기를 잊지 않았는데.
잘난 맛에 도취해 저러는 자는 분명 아니다.
그 의문이 한층 더해지자 결국 민감한 화두를 꺼내기로 했다.
“참! 신강에 살아 봤으니 마인들도 봤겠군그래?”
“아뇨, 어릴 때라 그런지 단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게 많긴 합니다.”
“이 우형이 들은 건 좀 있네. 답해 줄 게 있을지 모르네.”
“그래요? 그럼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죠. 최근 세상에 떠도는 소문 아십니까? 여휘라는 자와 척고련 말입니다.”
“듣긴 했네만.”
“전 사실 관계와 상관없이 그 척고련이란 곳의 뜻이 참 마음에 듭니다. 못 가진 자들끼리 힘을 모아 서로를 돕고 가진 자들의 억압을 이겨 나가자는 거 말입니다.”
“나도 뜻은 좋다고 생각하네. 하나 현실이 어떤지 자네도 잘 알 텐데.”
“실현 가능성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꿈이자 이상이니까요. 전 지금의 천마교에 그게 있는지, 있다면 뭔지 궁금합니다.”
“꿈이라! 쉽고도 어려운 질문이로군.”
“그럼 질문을 달리해 볼까요? 마공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니겠죠. 하지만 분명 그런 것도 있다 들었습니다. 물론 필요악이란 어디나 있기 마련이죠. 다만 그걸 줄이려는 노력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다고 보는데.”
야율혁의 답은 바로 나왔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 중 하나가 이번 여행이기도 했으니까.
“그럼 내가 이렇게 묻지. 지금 천마교는 못 가진 자 외에도 온갖 수많은 인간 군상이 모여 있네. 개중엔 승려도 도인도 색마도 살인자도 있지. 그런 자들을 하나로 모을 꿈이나 이상이 뭘까?”
“힘이라 보는 거네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판결 조건이니까. 그것만으로 체계를 만들면 오히려 다른 부작용은 훨씬 줄어들 겁니다.”
“역시 답을 알고 있었군. 맞네. 그 가치로 천 년을 이어 왔지. 혈족이 아니고서 단일 세력으로 그만한 역사를 이룬 곳이 세상에 있던가? 난 적어도 그건 저들이 자부할 수 있다고 보네.”
“인정합니다. 한데 그걸 이루기 위해 남이 다친 건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 힘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을 때 수많은 생명이 그 체계를 지키는 데 소모품이 됐죠. 여기엔 뭐라 답하실 겁니까? 설마 세상 다른 곳도 비슷하다는 말이라면 빼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있어선 최악인 곳이 거기니까요. 아! 설마 혈교보다 낫다는 말도 빼 주시고요. 거론할 가치도 없는 곳이니까.”
순간 야율혁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걸 빼라?’
답이라 여겨 준비했던 말을 빼라고 먼저 거론해 버렸으니.
그때 나유양이 나섰다. 그 또한 수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다.
“허허! 저들이 아파하는 부분이 그것이지. 하나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도 있다고 보네.”
“어떻게 말입니까?”
“분노와 한이 다름이네. 천마교 구성원의 칠 할 이상은 대대로 외부에서 왔지. 그들은 이미 뼈에 사무친 한을 풀지 못해 천마교를 찾았어. 그걸 세상에 풀어낼 곳이 천마교만 한 곳이 있던가? 만약 그들이 중원에 남아 있었다면 어찌 됐겠나? 천마교 하나가 일으킨 그 몇 배의 혼란이 있을 것이네. 난 천마교가 천 년을 이어 온 이면의 근원은 세상에 그런 곳이 필요악으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 보네.”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무윤 또한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반론 또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