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선우가영은 물어볼 처지가 아니라 가만히 있었지만, 그 속은 의아함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거의 화경급이라 여겨지는 무인.
여인의 무공이라 하나, 강호 최고라 일컬어지는 소수마공을 거들떠도 안 보는 자.
그 나이를 알고는 또 얼마나 놀랐던지.
그런데 오늘은 또 기이한 의학 서적을 필사해 던져 주고 갔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만 보여 주는 자.
물론 지금은 그냥 궁금함이다. 생의 구함에 더해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준 은인. 그런 자를 알아 가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 그 자체다.
그 마음 더한 눈길이 다른 의원 둘을 향했다.
설레는 가슴이 느껴진다. 아까 질문에 답하는 내내 그랬다.
가슴이 뭉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동료로 인정해 줬어.’
지금은 그거면 족했다. 아니, 행복했다.
새로운 인생길이 너무 마음에 든다.
입가에 미소가 담뿍 담겼다.
“저, 제 생각에는…….”
“예, 말씀해 보세요.”
각자 일가를 이룬 세 의원의 머리가 맞대어졌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답은 나올 수 없다. 영원히.
만든 여휘는 의학적 목적이 없었으니까.
단지 무륜이 즐겁게 자주 보기만 하면 됐다. 신강과 청해의 약초를 보고 추억을 떠올리고, 그러다 지금 살고 있는 호남의 약초와 비교하면서 자주 들춰 보면 그만이니까.
물론 천 년 전 이걸 만든 의원들도 그 의문은 풀지 못했다. 그저 만 리나 떨어진 곳의 약초를 신선한 그대로 갖다주는 이가 신기했을 뿐.
아무리 명석한 의원 셋이 머릴 싸맨다 한들.
글 속에 담긴 마음까지 찾아낼 순 없다.
하지만 열기에 사로잡힌 의원 셋의 눈빛은 또 다른 걸 찾아낼지 모른다.
물론 의학적인 면에서.
* * *
같은 시각, 침주 외곽.
호남 장사(長沙)로 향하는 길.
“아버지 만나서 뭘 물어보려고?”
“이것저것 다.”
“그중에도 짚이는 게 있겠지. 그러니까 급하게 먼 길 가자고 했을 테고. 안 그래?”
연대광에게 묻기 위해 준비해 둔 말이 있다
“내 스승님이 남기신 게 좀 있다.”
“……조금이냐?”
“너 줄 건 별로 없는데.”
“……그럼 너도 별로 없지.”
“뭐가?”
“우리 아버지한테 들을 게. 물론 가는 동안 날 긁어 대는 만큼 더 줄어들 거고. 맘대로 해.”
완전히 꼬랑지 내려야 할 때다.
“찾아보면 뭐가 있을 거 같기도 하네. 이제 됐냐?”
“그러게 왜 가만있는 사람을 긁어? 하여간! 객소리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꺼내 봐.”
“거기 오래된 기록들이 몇 개 있다. 그중엔 천 년 전 것도.”
순간 연사구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로 떠오르는 것.
“천마 기록도?”
“아주 상세한 편이지. 근데 그걸로 유추해 보면 지금 소문이 너무 찜찜해.”
“뭐가?”
대략 설명이 끝나고 얼마 후, 연사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금제일인은 맞는데 무공만 천마신공으로 속였다?”
“그래.”
“근데 네 가정에 치명적 약점이 있는 거 알지?”
“내 자료의 신빙성?”
“그래, 그게 진실이란 전제가 돼야 의문도 성립하잖아. 스승께서 보관만 하신 건데 그걸 어떻게 믿어?”
이 의문엔 돌려서 답할 수밖에 없다.
“나도 감이라 근거는 못 대겠다. 대신 거꾸로 확인할 방법은 있어 보여.”
“거꾸로?”
“만약 이게 조작이라면 보통 놈들은 아니겠지. 그럼 원하는 게 뭘까?”
“……강호의 혼란! 그걸 틈타서 뭔가 이익을 노리겠지.”
“가장 좋은 방법은?”
“……천마신공이 어디 있다, 뭐 그런 거겠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겠지. 어쨌든 이 정도 퍼진 이상 자잘한 헛소문은 수없이 돌 거야. 근데 아주 구체적으로 무인들이 혹할 만한 뭔가가 나온다면?”
“그럼 의심해 봐야지. 참! 나도 가서 물어볼 게 있었는데.”
“뭔데?”
“아무리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도 이렇게 빠를 순 없어. 누군가 실어 나르지 않고서는.”
“하오문은 아니고.”
“우린 단일 단체가 아니라 강호 전체를 아우를 조직력이 없잖아. 그럼 남은 건?”
“개방(丐幇)?”
“그래. 이게 천마교와 혈교 새끼들 내부에서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생기라고 일부러 낸 소문 같긴 해. 근데 너무 나대면 후환도 크잖아. 또 다른 게 있는가 해서.”
“네 아버님께 듣는 수밖에 없네.”
“그래야지.”
무윤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천 년 전엔 궁가방이라 불렸던 그곳.
“요즘 개방은 좀 어때?”
연사구의 입이 삐죽 나왔다. 싫은 티를 숨기지 않았다.
“참 질문도 두리뭉실하게 던진다. 뭐가 궁금해? 세력? 구성? 아니면 뭐?”
“그냥 물어본 건데 왜 날 세우고 지랄이야?”
“짜증 나는 곳이잖아!”
“요즘도 하오문하고 안 좋은가 보네?”
“좋을 게 있겠냐. 근데 나랑 엮인 것도 좀 있어.”
“뭐?”
연사구의 미간이 뒤틀렸다.
“나 장사에서 쫓겨난 거, 그놈들이 소문내서 그런 거야. 그 바람에 일이 더 커졌지.”
“일부러?”
“티 나게 할 바보들은 아니지. 근데 아니면 내가 성을 간다.”
“……!”
무윤도 따로 알아봐서 대략 사정은 알고 있다.
다만 놈처럼 쉽게 껴드는 성격이 아니라, 먼저 꺼내기 전까지 모른 척할 뿐이지.
그때까진 묵묵히 지켜보고 들어 주면 된다.
물론 도울 게 있다면 나서야 할 것이고.
* * *
이레 후, 악양 북쪽으로 약 백 리 떨어진 산길.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남하 중이다.
멸마단 삼대 당서하의 의아한 전음이 부대주 팽중호에게 향했다.
-단주께서 너무 천천히 가시는 게 혹시?
-형산파엔 미리 전갈을 보냈어. 결정할 시간을 주시려는 거겠지.
-맹에서도 단주께서 나서지 않는 게 최선이라 보는 거죠?
-당연하지. 그럼 형산에서 감춘 게 되는데 일이 커지지.
주변을 둘러보던 당서하는 다른 의문을 꺼내 들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단주님 말고도 단 내 고수들이 너무 많이 가요. 우리가 악양 싸움에 낄 것도 아닐 텐데.
-그건 대주님도 모르시더라. 뭐가 있겠지.
-……?
한편 멸마단 부단주 임천웅은 단주 각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단주님, 형산 일은 그렇다 쳐도 천마교 일은 화급을 다투는 사안인데, 혹 이러시는 이유가 있으신지?
-저들 속셈은 차도지계(借刀之計) 아닌가. 우리 칼로 죽여 달라고 일부러 흘린 정보가 확실하거늘.
-그건 그렇습니다만, 교주의 둘째 아들, 야율혁입니다. 마교 사상 최고의 기재라고까지 불리는 자인데. 거기다 귀랑도와 둘뿐인데 이런 기회가 다시 오겠습니까?
-허허, 생각하기 나름일세. 지금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보다 그자로 인한 내부 싸움이 더 커지는 게 낫다고 보네.
-역시 그러셨군요.
-물론 야율혁 그자를 가벼이 여기는 건 아닐세. 한데 알아본 바로는 간웅(奸雄)이 될 자는 아니야. 난 오히려 그 형이 소교주가 되는 게 더 우려된다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한데 사도련 척마단이 움직인 것도 이 일 같습니다만.
-저들 생각이야 어찌 알겠나. 지켜보세.
-……!
멸마단 일행의 발걸음은 천천히 악양을 향했다.
* * *
같은 시각, 장사(長沙) 남쪽의 산 능선.
화라락!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를 보던 연사구의 입가에 침이 감돌았다.
“야, 그거참, 누가 요리했는지 죽이지 않냐?”
“맛을 봐야지.”
“내 솜씨가 어디 가겠어. 먹어 보나 마나……?”
순간 옆을 보던 연사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분명 목소리는 무윤인데 생면부지 면상이다.
놀란 손끝이 바로 낯선 얼굴로 향했다.
“그, 그 얼굴?”
“어떠냐? 이 정도면 몰라보겠지?”
“……하, 징그러운 새끼! 그새 역용술을 다 익혔어?”
하오문도야 역용술은 기본.
가는 동안 익히라고 알던 걸 건네준 지 이레밖에 안 됐다.
한데 방금 전까지 원래 얼굴이었는데 순식간에 얼굴이 바뀌다니.
“아니, 근육만 조정했어. 골격은 아니고.”
“응? 근데 이렇게 달라진다고?”
“나한테 맞게 바꿨다.”
“……그새 구결을 바꿨어?”
“복잡하지 않더라고.”
연사구의 눈가에 더할 수 없는 의문이 가득 서렸다. 정말 궁금했다.
‘이 새끼 머리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완전히 체득한 무공이야 그 진체와 흐름을 알기에, 조금 바꾸거나 개량할 수 있다. 한데 단 며칠 살펴보고 구결을 바꾸는 건 강호에선 금기시된다. 어디서 뭐가 꼬일지 모르니까.
한데 놈은 매번 이런 식이다.
문득 연사구의 입가에 침이 가득 고였다. 고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꾼 거 알려 줄 거지?”
“나한테 맞게 한 거라 넌 쓸모없어. 다른 사람도.”
몸과 일체가 되는 신기심의공이라 마음만 먹으면 근육과 피부를 조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용의 요체만 따오고 나머진 몸에 맞게 변형해 버렸다.
연사구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참에 다시 묻기로 했다.
무학 이론에 있어 가장 원론적인 논쟁이기도 한 것.
또한 이후 자신의 은월청요검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난 아직도 헷갈려.”
“뭐가?”
“네 방식이 정말 극에 가서도 맞을까? 시작부터 각자 몸에 무공을 맞추는 거 말이야.”
“머리 나쁜 거 티 내냐?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그 타령이야?”
“그래, 나 그런 놈이니까 또 묻자. 지금 거의 모든 무공은 내력 심법과 초식의 형과 투로, 그 완성된 무공을 우선 익히고, 적정한 시점에 각자의 길을 걷게 해. 안 그러면 너무 위험하니까. 근데 네놈은 거꾸로 한단 말이지.”
“빤한 소리는 됐고. 그래서?”
“내 은월청요검도 그래. 내력 흐름과 초식에 대한 이해가 덜 됐는데도 넌 나한테 맞게 변형했어. 물론 그게 지금까진 맞았다는 거 인정해.”
“지금 길이 지름길인 건 맞는데 그러다 목적지가 틀어질까 봐 그러는 거지?”
“미안하다.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연사구로선 충분히 가질 의문이다.
물론 무윤의 답은 명확하다.
‘내겐 남들이 없는 게 있으니까.’
여휘와 함께 세상에 없던 초인의 길을 만들어 가면서 얻은 그 수많은 경험. 또 그 산물로 만든 무공들.
거기에 타인의 몸을 내 몸처럼 관조할 수 있는 신기심의공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다.
그렇기에 직접 살필 수 있는 자에 한해서는, 그만의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고. 특히 은월청요검처럼 자신이 만든 무공은 두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답변은 다른 걸 찾아야 한다.
“아까 넌 은월청요검 목적지가 정해진 것처럼 말했지?”
“그거야 만든 분이 그렇게 정해 놨으니까.”
“만든 사람은 그게 끝이자 맞는 길이라고 확신했을까?”
“글쎄, 대단한 분이니까 그러지 않았을까?”
절로 실소를 부르는 말이다.
‘이놈아, 그 대단한 분이 네 앞에 있다!’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대도(大道), 즉 극의로 가는 길엔 문이 없어.”
“뭔 소리야? 문이 없으면 어떻게 들어가?”
“가는 길에 막힌 게 없는데 문이 왜 필요해? 문은 허공에 만든 개념의 틀일 뿐이야. 부처님이 이르시길 삼라만상 일체가 모두 법에 드는 길이라 하셨지.”
“아우! 야, 머리 아파! 간단히! 짧게!”
“만든 자가 정한 목적지가 끝도 아니고 유일한 대도도 아니라고. 더 나은 길을 찾는 지침이라고 보란 말이지.”
잠시 생각하던 연사구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가 됐든지 이 모든 가정의 전제가 돼야 할 게 있다.
“어쨌든 그 어려운 길을 넌 갈 수 있다 이거네.”
“그렇지.”
“너 잘났다는 소리고.”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솔직히 연사구도 인정할 건 한다. 그래도 이해 안 가는 게 남았다.
“그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또 뭐가?”
“소수마공! 그건 왜 관심이 없냐? 고금제일인이 만든 여인 최고의 무공인데.”
이미 둘러댈 말은 생각해 뒀다.
“극음지체만 익히는 무공인데 관심 가져서 뭐 해.”
“그래도 그 안에 온갖 묘리가 들어 있을 거 아냐? 괜히 고금제일인이겠어?”
“원형이 아니야. 구결이 뒤죽박죽 섞이고 변형됐어. 살필 가치가 없더라.”
그 말이 더 기가 찼다. 고금제일인이 만든 것인데.
“……구결만 듣고서 그게 파악이 돼?”
“된다고 하면 또 뭐라 씨불일 거지?”
“……!”
그때 산 아래에서 낯선 기척이 들려왔다.
사사삭!
중년의 무인 한 명인데 잘 벼린 칼 같은 기운이 풍긴다. 하지만 일부러 기척을 흘려 자신을 먼저 알린 자.
만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