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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68화 (68/161)

68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며칠 후, 강서(江西)의 길안(吉安).

사야홀(私夜笏) 총단.

“그자가 혈교 간자였다?”

“한 달 전 외부 경비 무사로 들어왔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홀주님.”

“문책은 나중에. 그보다 연구 자료는 제쳐 두고 배신자인 의각주만 살폈단 말이지?”

“예, 그쪽은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허허! 우리 연구가 저들 안중에 없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씁쓸하구먼.”

“그러실 것까지야. 저들도 우리 목적이 마공 개발이 아니라 일부 활용인 걸 알잖습니까.”

“하긴. 모른 것도 아니고 목적도 다른 데 잊어버리세. 그보다 가영, 그 아이는 죽었겠지?”

“불태운 시체 주변에서 의각주 옷 조각을 찾았습니다.”

“조작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자료에도 관심 없는 이들이 의각주를 데려가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리고 아마 그 전에 자결했을 겁니다. 끌려가면 어떤 꼴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그랬겠지. 남아 있는 자들이나 잘 다독이게. 감시는 물론이고.”

“예.”

그때 사야홀주 독고승의 눈이 번득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재검토할 게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약양 일은 달리 가야겠지?”

“혈교를 신경 쓸 이유 없으니 그래야지요.”

애초부터 혈교의 시선을 돌리는 게 주목적으로 터트린 일. 그 탓에 호남 악양의 정사 분쟁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다.

한데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복안이 있는가?”

“시간이 너무 지나 가용 방안이 많진 않습니다만, 그중 최선은 우리도 서문가처럼 증거를 내놓는 겁니다.”

“증거라?”

“장동백 의원 놈이 형산에 약을 전한 내역, 거기엔 명단과 일자, 횟수까지 상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그걸 봉천문에 줘서 무림맹에 들이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봉천문을 배후로 압박한 건 마단 복용자가 있어서인데, 형산에도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헛다리 짚은 게 되겠지. 그럼 어찌 되겠나?”

“서문가도 더 끌어 봤자 실익이 없으니 받아들일 겁니다. 그럼 악양 분쟁은 유야무야 끝날 것이고, 봉천문도 몰래 당한 입장이니 무사할 겁니다. 하지만 형산은 다르죠.”

“처음엔 몰랐다 해도 이후엔 자신들이 직접 퍼트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정파에게 그만한 치욕이 없죠. 특히 대문파라면.”

“공개적으로 조사를 요구한 이상 멸마단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형산 놈들 중에 중독에 가까운 자가 십여 명 된다 했지?”

“예, 환각제가 많은 뇌호단(腦護丹)이라 몇 달 전 끊었다 해도 그들은 증상이 있습니다. 악양에 그중 네다섯이 가 있습니다.”

“멸마단 단주 각운이 나서면 알아볼 텐데 형산은 어찌하겠나?”

“그 전에 무림맹에서 언질을 주겠죠. 명분파라면 사실대로 밝히고 짧게 봉문하는 쪽을 택할 겁니다. 한데 실리파는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겠죠. 아니면 다 물갈이될 테니까요.”

“……중독된 자들을 몰래 빼돌린다?”

“그럴 가능성도 큽니다.”

“허허! 그러다 걸리면 아주 볼만하겠어.”

“둘 다 대비하겠습니다.”

“뭐가 됐든 괜찮군. 형산 정도 되는 문파가 그리되면 정파 입지가 말이 아니게 될 게야.”

“호남 중부에선 우리 세가 확실히 커질 겁니다.”

“그러겠지. 알았네, 내 련주께 그리 전하지.”

“……!”

뇌양 외곽, 은광 주변 산속.

“이제 정신이 드시오?”

“……여, 여긴?”

“내 연구실인데 약초 연구하는 곳이라오.”

“제가 어떻게?”

“밖에 있는 친구들이 데리고 왔소. 그대가 만났던…….”

“아!”

“몸은 다행히 이상 없소이다. 의원이라 했으니 살펴보면 알 게요.”

“……!”

침상에 누운 채 몸을 살피던 선우가영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의원인 그녀이기에 바로 알았다.

‘혈맥이 다 정상이야. ……날 치료했어.’

분명 몇 가닥은 자신이 스스로 끊고 있었는데.

순간 아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두고 고성을 질러 대던 이가 줄줄이 쏟아 낸 말이 다시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러 댔다.

-이년 놓아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거 몰라? 세상에 해악만 끼칠 년인데 고민 따위가 왜 필요해!

-세상에 도움 될 게 하나 없는 여자다. 그뿐이냐? 너와 우리 사람들, 가족까지 다 위험해져.

세상의 해악, 거기에 가족까지 위험에 빠트릴 년.

그 말에도 더는 살아갈 힘을 잃었지만, 더한 말이 나오면 죽는 순간에도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릴 거 같아 결심한 일이다.

한데 내력은 봉인됐지만, 내상과 혈은 다 치료된 상태.

그때 갑자기 은은한 약 향이 코를 찔렀다.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가 하나둘 그 자신을 알렸다.

‘황기, 감초, 당귀, 백출, 항부자, 천궁, 숙지황…….’

그 모든 냄새를 일일이 다 확인하던 어느 순간, 가슴이 저려 왔다.

‘약방!’

순간 치밀어 오르는 격정은 그 때문이다.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소회는 자신이 여기에 있어서다.

또 그 약재들이 알려 준 다른 사실이 끝없이 가슴을 아프게 헤집어 댔다.

‘없어, 아무것도…….’

혈교과 사야홀의 연구실, 거기에 수북이 쌓여 있던 독초와 환각제, 사술과 마단에 쓰이는 그 어떤 것도 여기에 없다.

그저 의원이 머무는 곳이다.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어릴 적 수없이 떠올리다 어느 순간 지워 버릴 수밖에 없었던 꿈같은 공간.

죽음을 앞둔 시점에 이 공간의 약 향이 아픈 가시가 되어 속을 후비고 찔러 댄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크흐흑!”

누구를 탓할 생각도 없다.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이끌려 휘청거리며 걸어온 인생길인데.

입가가 격정에 이지러졌다. 주저앉은 등이 복받치는 감정에 세차게 흔들렸다.

볼 따라 떨어지는 물줄기를 가눌 길이 없다.

“크흐흐흑! 크흑!”

막 동굴로 들어오려던 이들의 걸음이 멈춰졌다.

애써 막을 생각도 없는 눈물이 마냥 흐르는 자, 숨죽인 울부짖음이 지울 수 없는 한을 토해 내는 자에게는 시간을 줘야 한다.

걸어온 나날의 죄업을 스스로 꾸짖는 자에겐 그래야 한다.

무윤과 공야성, 주손학, 곽호산 모두의 시선이 연사구를 향했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그에게 주기로 했다. 생사여탈권까지.

연사구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거부했다.

“저 그만 보시죠.”

“이제 결정했는가?”

“아우, 정말 너무들 하시네요! 이 새끼야 그렇다 쳐도 다들 저보다 어르신이잖아요! 근데 저한테 미루기만 하시면 어떡합니까!”

“살린 결정도 자네가 했으니 그럴 수밖에.”

“아니, 그때야 죽기로 작정하고 그러는데 어떻게 나서서 죽여요! 말이 됩니까!”

“크흠! 미안하네만 우린 자네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네.”

제 발이 저린 무윤이 먼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보고 입 닥치라고 한 거 너다. 이젠 절대 입 안 연다.”

“이 새끼가 사고는 다 쳐 놓고! 아우!”

“…….”

잦아들던 흐느낌이 완전히 멈추고도 한참이 지날 무렵.

작은 비수 하나를 티 나게 거머쥔 연사구의 발걸음이 동굴을 향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세요.”

“……!”

걸어가다 순간 뒤돌아선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너 엿듣다간 뒈질 줄 알아!”

“……!”

얼마 후, 초조한 이들의 시선에 궁금함이 한층 더해 갈 즈음.

혼자 들어갔던 연사구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들어가 보세요. 전 갑니다.”

“……?”

의아한 이들은 쌩하니 동굴 연구실로 들어갔다.

타다닥!

먼저 침상에 앉아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다.

모든 시선이 자신의 입만 바라볼 즈음, 선우가영의 떨리는 숨이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할 일이……?”

“크흠, 의원이 할 게 다른 게 있겠소. 약초 연구나 하고 약 만들면 그만이지. 여길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오.”

선우가영은 꼭 물어야 했다.

“……정말 그것만 하면 되나요?”

공야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가 하나 묻지요.”

“말씀하세요.”

“바깥세상에 하고 싶은 게 남았습니까?”

“……믿으실지 모르겠는데 다 버렸어요. 아니, 다 털어 냈더니 너무 편안해요. 다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여기서 지낼 수 있겠습니까? 그대 마음을 묻는 겁니다.”

“말씀하신 그 일만이면, 행복하게 할 거 같아요.”

“……!”

이후로 세세한 이야기가 오고 간 후.

무윤은 슬며시 운을 뗐다.

“저놈이 뭐라고 했나요? 뭐,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만.”

“드릴 말씀이 없네요. 들은 게 없으니까요.”

“예? 저놈이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선우가영은 품 안에 있던 비수를 가만히 꺼내 들었다. 처음으로 싱긋 짓는 미소와 함께.

“이것만 주고 가셨어요.”

무윤은 그녀의 웃음이 궁금했다. 비수를 건넨 뜻이 그리 웃을 만한 건 아닐 텐데.

“왜 웃으시는지?”

“처음엔 여기 피해를 줄 상황이면 스스로 자결하란 뜻인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닌가요?”

“그 뜻도 있겠지요. 한데 이 장도(粧刀)는 해동 것이에요.”

“해동(海東)요? 그걸 어떻게?”

선우가영은 칼집에 있는 문양을 가리켰다. 거기엔 학과 용이 새겨져 있었다.

“홍삼을 들여올 때마다 선물로 몇 번 받아 본 적이 있어요. 근데 여기 이 문양마다 그 뜻이 담겨 있답니다.”

“그건?”

“학과 용은 상서로움의 상징이잖아요. 이건 받는 이가 액을 물리치고 행복하라는 의미가 담긴 거예요.”

무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그놈 손에 들린 건 이게 아니라, 보통 비도였는데?”

선우가영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한참 고민하더군요. 손에 있는 걸 줄지, 품에서 꺼낸 걸 줄지. 이건 품에 있던 거예요. 아마 어느 분께 주려고 챙겨 놓은 거겠지요. 그걸 저에게 준 거랍니다. 아무 뜻도 말씀 안 하고서.”

순간 코끝이 찡해졌던 무윤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도를 누가 줬는지 짐작이 가서다.

“근데 광동엔 나도 같이 갔는데 진 단주가 왜 저놈만……? 아우, 이 새끼 정말!”

“자네 왜 그러나?”

“진 단주가 제 건 안 챙겼겠어요! 생각할 게 많아서 방에만 있었으니까 제 장도까지 저놈 줬겠죠.”

공야성은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아까 일이 생각나서다.

“큭큭, 그래서 아까 엿듣지 못하게 했구먼. 비수를 티 나게 보인 것도. 아무 말도 안 할 건데 자네가 의아해서 알아볼까 봐 선수를 쳤어.”

“하여간 이 새끼 잔머리는!”

“돌려받긴 글렀군. 이번 사고는 자네가 쳤으니.”

“……!”

친 사고에 비해 이 정도면 넘어가 준다. 기분 좋게.

며칠 후, 곽호산의 연구실.

“허! 어찌 이런 약초서가 있단 말인가?”

“저도 너무 놀라고 황당해서 말도 잘 안 나옵니다. 어떻게 수백 년 전에 이런 걸 만들었는지.”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네. 신강과 청해는 여기서 만 리 길이거늘, 거기와 여기 호남의 약초를 비교 분석한 자가 있다니.”

“숙부님, 이게 제대로 된 의학서일까요? 전 도무지…….”

“나도 미심쩍네. 굳이 신강과 비교 분석할 이유가 없지 않나?”

“호남 쪽 자료는 맞습니다. 한데 신강과 청해 쪽은 알 수가 없으니.”

약초란 그 지형과 풍토, 기온에 따라 성분과 효용도 다른 법.

비교 분석하고 활용하려면 가까운 곳이 훨씬 낫다.

그런데 만 리나 떨어진 곳과 비교한 걸 남겨 놓다니.

그때 공야성과 곽호산 옆으로 한 여인이 다가왔다.

끼어들 생각도, 그런 자격도 없다 여겼는데 도움 될 일이 생겼다.

“저, 신강과 청해 쪽 약초라면 제가 좀 아는데.”

“……!”

얼마 후, 서로를 쳐다보던 세 의원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곽호산, 공야성도 이젠 선우가영의 의술이 자신들 못지않음을 안다.

공야성의 황당한 시선이 선우가영을 향했다.

“그럼 내용은 확실한 거네요.”

“제가 청해를 떠날 때 가져온 게 있어서 최근에도 가끔 봤어요. 분명 그 약초 분석 내용과 일치해요.”

공야성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그럼 도대체 이런 연구를 왜 했을까요? 비교 분석이야 가까운 곳이 더 나은 데 굳이 그 먼 곳을 왜?”

“거기다 이것도 그래요. 여길 보면 두 지역의 약초를 눈으로 보고 분석한 것처럼 기술했어요. 그림도 그렇고. 이게 가능한 얘긴가요?”

공야성은 우선 답을 내렸다.

“이걸 준 놈은 아는 게 있겠지요.”

“……누구?”

“누구겠습니까, 청호방주 그 새끼죠. 아우, 뭘 줬으면 설명이라도 해 주고 갈 것이지!”

선우가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의학서를!’

이번엔 또 다른 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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