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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66화 (66/161)

66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선우가영의 입가에 허탈한 한숨이 흘렀다.

중원 서북쪽 끝, 청해는 여기 광동에서 칠천 리 길.

‘여기까지 올 줄은 미처 몰랐어.’

그것도 이십 년 전 탈출한 이후 내내 사야홀(私夜笏)에서 의각주로 은신해 있던 자신인데.

‘최근에 첩자가 생겼을 거야.’

혈교가 추측만으로 그 먼 길을 올 리 없다.

이십만 냥이나 되는 홍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온 길.

저들은 오는 길목을 정확히 지키고 있었다.

이미 호위대는 전멸한 상태. 은밀히 움직이려고 소수만 대동한 게 천추의 한이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 그리고 찾아든 심중의 결단.

‘끌려가느니 차라리…….’

문득 아련한 시선이 서북쪽 먼 곳을 향했다. 그리운 이가 살아 있다면 그곳이리라.

‘오라버니, 살아 계실 거라 믿어요. 부디 강녕하시길.’

한 서린 소회를 털어 낸 자의 입에서 깊고 장중한 숨이 뿜어졌다. 마음 정리는 그리했지만 남겨 둔 비수 하나는 있다.

저들도 모르는, 하지만 보면 뭔지 아는 그것. 물론 저들을 다 물리칠 정도는 아니지만.

‘다 돌아가진 못할 게야.’

상대를 향한 시선엔 칼날의 빛이 섬뜩함을 더했다.

“먼 길 왔는데 어쩌지? 난 갈 생각 없는데.”

“데리고 오되 생포하란 명은 없었소.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게요.”

“그래? 그럼 이것도 못 가져가겠네.”

“……?”

순간 여인의 섬섬옥수 여린 끝마디가 시리게 반짝였다.

샤아악!

바람에 출렁이는 푸른 바닷빛 청광(靑光)을 닮은 너울로 번뜩이는 빛. 손 가득 스며 있던 것처럼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샤아아!

순간 혈교 무리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강호에 그 수많은 수공(手功) 중, 벽옥처럼 푸르스름한 광채를 띤 희디흰 손이 뜻하는 것. 푸름에 더해 그 빛이 찬란해 눈이 부실 정도라 알려진 건 단 하나뿐이다.

“헉, 저건!”

“서, 설마! 소수마공(素手魔功)?”

“저, 저게 어떻게?”

혈교 잠사단 단주 방양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년이 어찌?’

놀람은 당연하다. 이젠 전설이나 마찬가지인 무공.

푸르게 시린 손에 강기는 물론 뿌려 대는 극한의 한기는 순식간에 살을 얼려 버린다.

하지만 극음지체인 여인이라야 완성할 수 있는 무공.

방양은 과거의 그녀를 대략 안다. 극음지체였다면 혈교 전체가 떠들썩했을 터. 그만큼 극음지체는 찾기 어려운 존재.

‘그 몸으론 극에 달하지 못해.’

단주 방양의 눈빛이 번득였다. 이번 임무와 비교도 안 되는 가치다.

‘반드시!’

천 년 이래 여인의 마공 중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무공. 천마교에만 전해져 온다던 그걸 가지고 가려면.

‘목숨은 붙여 놔야 한다.’

의지와 상관없이 불게 할 방법은 혈교에 널리고 널렸다.

우선 확인부터 하는 게 순서.

“그리 귀한 걸 감추고 계신 줄 몰랐구려.”

선우가영은 이참에 확인할 게 있다. 넌지시 운을 띄웠다.

“감췄다? 호호! 대대로 내려온 걸 오라버니가 찾아 줬는데 그리 말하면 안 되지.”

“선우단엽이 찾았다? 그는 어디 있소?”

선우가영의 환한 미소가 답을 찾았음을 알렸다.

“호호, 역시 오라버니를 못 찾았다는 거네. 고마워,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

“나도 고맙소. 그대와 같이 있나 궁금했는데.”

“이제 말은 그만. 시작하지.”

“그대가 극음지체라면 모를까, 설사 소수마공이라 해도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알지, 너희가 많이 못 돌아간다는 것도.”

“꼭 그래야 하겠소? 소수마공만 전해 준다면 교주께서도 더 죄를 묻지 않으실 텐데.”

“되었다. 이상(理想)이 달랐다 한들 배신은 생각도 안 했거늘. 그런 우릴 내친 교주야.”

“……!”

한편.

숲속에 있던 연사구의 놀란 전음이 무윤을 향했다.

-우와, 소수마공을 보게 되다니! 횡재했네.

무윤은 시퍼런 빛이 발하는 순간부터 단 한시도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빙옥섬수(氷玉纖手)가 어떻게?’

분명 월소려에게 전해 준 그것이다. 물론 온전한 그대로는 아니지만, 저 빛과 기운은 원형이 그것임을 명확히 알려 준다.

천설청옥이 깔린 집무실에서 놀던 소려의 작은 소원.

-방 안에 푸른빛을 보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져요.

-이 빛이 좋아?

-예, 평생 같이 있고 싶어요.

-……그렇게 해 주마.

위력은 물론 그 빛을 내기 위해 소려 몸에 철저히 맞춘 무공이라 사라진 줄 알았다. 혹시 이어졌더라도 그 원형을 잃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 눈앞의 저 빛은 몇 달 전 동생 무진에게 주기 위해 깎아 내던 그 청옥의 빛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기운 또한 그렇고.

절로 뛰는 심장의 고동과 맥박이 흥분과 설렘을 알린다. 조금 변형됐다 하더라도, 색이 좀 바랬다 하더라도.

‘이어져 왔어. 소려의 것이.’

코가 시큰하고 목이 메어 옴은 벅찬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전했다.

‘어찌 살았을까?’

여휘가 소려에 대해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을 땐, 분명 이유가 있다.

하지만 더 고민하지 않았다. 좋은 추억만을, 잘 살았으리란 기대만을 가지고 싶었으니까.

한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이야.

우선 확인할 게 있다. 소수마공은 이름만 들어 봤다.

심중의 불안과 걱정을 억눌렀다.

-소수마공이 뭐냐?

-그것도 몰라?

-이름만 안다.

-하여간 넌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 당최 아는 게 없어.

-거기까지. 대답부터 해.

-천마가 극음지체인 자기 여인에게 전해 줬다고 알려진 무공이야. 여인의 마공 중엔 최고라 불리지. 물론 빙공(氷功) 중에서도. 그 후에 간혹 세상에 나와. 최근이 한 이백 년 정도 됐을걸. 저게 그런 대단한 무공이야.

-……!

이리저리 껴 맞춘 말이지만, 그걸로 대략 유추되는 게 있다.

‘소려가 아니면 그 심법으론 극에 못 오르지. 이어져 오면서 대안을 빙공에서 찾았겠어.’

어쨌든 근원은 소려의 것. 이제 저 여인에게서 알아보면 된다. 그러자면 지켜만 보려던 계획을 바꿔야 한다.

-잘 숨어 있어라.

-……껴들게? 뭐 하러?

-궁금해서.

-이게 돌았나? 저 새끼들 혈교야. 여기서 없앤다고 끝날 게 아니라고. 저런 놈들하고 엮이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복면 있지?

무윤은 결심하면 번복이란 게 없는 놈이다.

-……개새끼! 내가 뭐라 해도 할 거지?

-미안하다.

-그러게 역용술 좀 익혀 놓으라니까.

-돌아가면 그러마.

무륜이 만들지 않은 게 역용술이다. 아니, 만들 이유가 없었다. 여휘한테는 그런 게 필요 없었으니까.

-그래도 나중에 나서. 한 놈도 놓치면 안 된다고. 알았어?

-그래.

혈교 무인은 열 중에 여섯이 남았다. 전부 초절정 이상. 단주란 자는 초절정 상급. 산중이라 각개로 흩어지면 장담할 수 없다.

마지막 상황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

얼마 후, 찬란한 푸름으로 여인의 손을 채색했던 빛이 여릿여릿 침침해졌다.

“하악! 하아!”

터진 입술에 흘러내린 피가 헐떡이는 숨과 같이 흘렀다. 찢겨 나간 옷 사이 맨살엔 핏물 머금은 칼자국이 격전을 알렸다.

푸른 파도를 헤치던 손끝도 적색에 물들어 갈 무렵.

방양의 거친 숨도 턱을 차고 올랐다. 이제 주저앉은 그녀가 자결하는 것만 막으면 된다.

“하아, 이제 끝난 거 같군.”

“쿨럭! 아직 한 놈 정도는, 크윽! 괜찮아.”

부하 셋이 떠난 상태.

방양은 서서히 한 걸음씩 다가갔다. 은밀히 일을 처리하는 잠사단주만의 비기가 있다. 석 장 가까이 다가설 무렵.

“정말 대단한 무공이오. 그건 인정하지.”

선우가영은 마지막 여는 입임을 직감했다. 이젠 스스로 심맥을 끊어야 할 때.

“아까워서 어쩌지? 그런 걸 못 가져…….”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 방양의 손끝 바람이 허공을 갈랐다.

슈욱! 팟! 파팟!

“허억!”

두 장을 격한 거리. 한데 순간 그 사이를 정확히 갈라 목 아혈을 점했다.

여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런 고절한 지법을 숨겼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문득 떠오르는 교주의 수법.

‘이자가 마라지공을!’

파파팟!

툭! 투둑! 툭!

도약과 동시에 공간을 접은 손끝이 혈도 여러 곳을 점했다.

“크크! 교주께서 마라지공을 전수해 주신 이유가 있지. 잠사단주는 은밀하게…….”

순간 또 다른 은밀함이 쥐어 짜내는 신음을 만들었다.

쇄애액!

“크윽!”

“커억!”

방양이 돌아볼 틈도 없이 두 개의 격한 단말마의 비명이 고막을 때렸다. 익숙한 부하의 음성이 불청객을 알렸다.

‘사야홀!’

신형을 돌리는 순간.

촤라락!

목을 가르는 자의 눈깔이 시퍼렇게 불을 뿜었다.

돌려 그은 칼날에 뎅강 떨어진 모가지엔 허망함 가득 담은 허연 눈자위만 끝을 알렸다.

투욱!

이어 흙을 차올린 발이 이미 무릎 꿇은 자의 등을 찍어 내렸다.

빠악! 두두둑!

“켁!”

부러진 등뼈가 살갗을 뚫고 양쪽으로 튀어 올랐다. 피가래 끓는 소리가 땅바닥에 무너지는 몸을 퍼덕이게 했다.

후드드!

철퍼덕 엎드린 몸의 들썩임이 금세 사라졌다.

피 묻은 검을 털어 낸 자가 방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눈엔 의아함이 가득 서렸다.

‘왜지?’

무윤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너무 쉽게 끝났다. 벌어진 거리가 있어 최소 한두 차례 반격은 예상했었다. 한데 다가선 상대의 몸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경직 그 자체였다.

그 덕에 바람 탄 몸 그대로 일격에 둘을 보내 버렸다.

눈을 부릅뜬 방양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왜?’

수하 둘의 죽음에 놀란 게 아니다. 그에 따른 위기감이 아니다.

온갖 사선을 넘나든 자신이건만, 죽음 또한 언제든 각오한 철혈의 심장이라 믿었건만.

뭔지 모를 두려움이 몰고 온 떨림이 온몸을 휘감았다. 절로 떠는 사시나무가 돼 버렸다.

뭔가에 홀린 눈빛은 해답을 찾아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순간 찌릿하게 몸을 울리는 기운 덕에 어슴푸레 답을 찾아갔다.

‘저놈이다!’

강자 앞에선 긴장과 위기감은 당연지사. 하나 그 큰 위압감을 준 교주 앞에서도 떨지 않았다. 두려움을 몸에 새길 뿐, 겁쟁이가 된 적은 없다. 파황수라공을 익힌 이후 언제나 그랬던 자신인데.

그 해답은 상대에게 찾을 수밖에 없다.

“사야홀인가?”

대답 대신 상대에게선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무윤도 감을 잡았다.

“마공이군.”

“……?”

“그게 마기(魔氣)겠지? 네 몸에 흐르는 거.”

“누구냐 물었다.”

무윤은 복면을 가리켰다.

“이거 안 보이나? 그나저나 궁금해서 안 되겠어. 조금만 해 보자고.”

“……?”

무윤은 홀로 걸음을 묵묵히 옮겼다. 몸과 일체가 된 신기심의공을 극으로 끌어올리고서.

터덕! 터덕!

위이잉!

방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번엔 두려움이 아닌 확신이다. 살갗이 아린 게 아닌 심장을 옥죄어 오는 그것.

‘확실해. 저놈 기운 때문이다.’

실체를 확인한 이상, 몰아내면 그뿐.

마음이 이는 순간, 극한의 파황수라공 내력이 흘러나와 혈도와 근육을 팽팽하게 부풀렸다.

우우웅!

그제야 방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대를 이길 자신이 아니다. 심장을 옥죄던 기운.

‘없어졌어.’

순간 대지를 박찼다. 충만한 마기가 흐른 이상 승부는 몸이 결정해 준다. 지면 그뿐이다.

파팟!

벼락처럼 대지를 박찬 신형이 날아가듯 허공을 뛰어넘었다.

휘리릭!

시퍼런 강기를 덧씌운 도격이 주변을 발기발기 찢어 버릴 듯 바람 소리를 더했다. 세찬 기의 파동이 도 주변에 넘실거렸다.

파지직! 파팍!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더 알아볼 건 없겠어.’

궁금한 건 해결했다.

우선 마인의 경직과 두려움은 역시 신기심의공에 반응해서다.

또 내력으로 쌓은 마기는 예상대로 마단(魔丹)의 기운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하나는 내력이고 하나는 약 기운이니까.’

게다가 삼 년 전 느낀 광마인의 광기와도 확연히 구분된다. 기운만 특이할 뿐 광기가 전혀 없다. 물론 마공도 각양각색이라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진정한 마기의 실체는 오늘 처음 접한 셈이다.

‘그래도 얻은 건 있네.’

내력의 마기 또한 신기심의공 기운에 반응한다.

물론 지금은 마인을 판별하거나, 아까처럼 순간의 경직 정도만 가능한 수준. 저처럼 초절정 상의 마인이면 잠깐의 반응 이후 능히 떨쳐 버릴 정도다.

이젠 끝을 낼 때. 시간 끌 이유도 없다.

궁금한 게 태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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