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두 달 후, 하남(河南) 중부에 위치한 허창(許昌).
근 만여 명이 상주하는 무림맹이 있는 곳이다.
당서하의 의아한 손길이 하얗다 못해 눈이 부신 서연의 볼을 연신 어루만졌다.
“서연아, 너 솔직히 말해. 뭘 먹었기에 이래? 보타문에서 너만 따로 뭘 줬을 리는 없고.”
“언니, 정말 그런 거 없다니까요.”
“야, 속일 걸 속여! 몇 달 사이에 어린애처럼 피부가 뽀얗게 됐는데 뭐가 있을 거 아냐?”
“그냥 수련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정말이에요.”
당서하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야! 세상에 어느 여자나 잡고 물어봐라, 피부가 거꾸로 나이 먹는 법도 있는지. 그냥 알려 주면 어때서 빼고 그래?”
눈을 흘기는 건 당서하뿐만이 아니다. 주변 멸마단 여인 모두의 눈초리가 새침해졌다.
“진 조장님, 너무하는 거 아녜요? 나눠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알려만 달라는 건데.”
“그러게요. 혼자 너무 그러면 우리 삐질 거예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진서연이다.
‘진짜 수련하다 이렇게 된 건데.’
물론 이유는 안다. 바라타나티암심법 효과라는 걸.
무공도 그렇지만 몸 전반에 도는 활력이 느껴진다. 피부에 생기가 도는 것도 그 일환이다.
최근 지금처럼 그 대단함을 절감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는 이들마다 하는 게 저 소리니.
달리 핑계라도 될 게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만한 것도, 화장에 대해 아는 지식도 없다.
그러니 매번 이렇게 시달릴 수밖에.
당서하는 뾰로통한 입을 쭉 내밀었다.
“야, 관둬라, 관둬! 치사해서 내가, 아우! 대신 너! 이제 내 밑으로 왔으니 죽었다고 복창해. 알았어?”
그때 삼대 부대주 팽중호가 다가왔다.
“정확히는 내 밑이지. 당 조장은 선임이고.”
“부대주님은 빠지시죠, 여자들 일인데.”
“뭘 또 화살을 나까지 돌려. 그냥 해 본 소리 가지고. 그나저나 대주님이 찾으신다. 인원 편성 논의하실 거니까 일각 후에 와라.”
“알았어요.”
둘만 남자 당서하는 슬며시 말문을 열었다. 알려 줄 게 있다.
“참! 청호방주 말인데, 오다가 일이 좀 있었어.”
“……?”
여러 얘기가 오고 간 후, 한참 멍했던 진서연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이게 도대체?’
얘기 초반엔 여러 면에서 웃을 일이었다. 무윤도 그렇고 소려의 앞길에도 정말 좋은 일이니.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같이한 시간이 무윤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게 해 줬으니까.
한데 뇌양에서의 일을 묻는 말에 유선과 소려의 일을 적당히 알리는 순간, 당서하가 전음으로 건넨 말.
-네가 소려라는 아이 이모라면 알고 있어야겠다.
-뭘요?
-다른 일도 좀 있었어.
처음엔 초절정 중반이란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황당함 그 자체니까. 몇 번을 되묻고 나서도 놀란 가슴은 진정되질 않았다.
한데 지금은 잠시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아련한 가슴이 한없이 먹먹해져 오니까.
그로 인해 유추하게 된 것. 그런 경지라면.
‘심법의 가치를 다 알고 준 거야.’
익히면 익힐수록 놀라움이 더해 가는 심법이다. 모르고 준 것이라 여겨 서신이라도 보내 알릴까 고민 중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물론 의도를 의심할 이유도 없다. 유선과 무윤이 보여 준 진정을 아니까.
그저 고마울 뿐이다. 마음을 활짝 열어 지금 이 심정을 내보이고 싶을 뿐이다.
부지불식간에 흘러내린 잔잔하고 따스한 미소엔 그 마음이 담뿍 담겼다. 소려 때문이 아니더라도 빨리 가야 할 일이 더해졌다.
‘고맙다는 말은 꼭 전해야지.’
* * *
멸마단 삼대 대주실.
대주 정원의 환한 미소가 진서연을 향했다.
“허허, 남궁 부대주 덕분에 인재 한 명이 굴러들어 왔구먼!”
오대의 부단주였던 남궁사현이 본가로 돌아가면서 인원 조정이 생겼다. 자릴 옮겨야 했던 진서연은 인연이 있는 삼대를 신청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 볼게요.”
“허허, 부탁하겠네!”
그때 같은 조장 반고헌이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대주님, 진 조장 때문에 제가 힘들어지게 생겼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친하지도 않은 놈들이 요즘 저한테 달라붙지 뭡니까. 뭔 일인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네요, 하! 고생문이 눈에 훤합니다.”
불승(佛僧) 정원에게서 어색한 미소가 흘렀다.
“허허, 어쩌겠나, 나야 도와줄 능력이 없는 것을. 힘들면 부대주에게 부탁하게.”
부대주 팽중호는 황급히 손사래 쳤다.
“왜 이러십니까? 전 가문 놈들만 해도 벅찬데. 무조건 사절입니다.”
대주 정원은 마지막 구원자를 불렀다.
“그럼 당 조장밖에 없구먼.”
“저도 빼 주세요. 별로 도와주고 싶지 않은 애랍니다.”
“허허, 둘이 친한 거 다 아네.”
“그건 어제까지. 거짓말하는 애랑은 이제 안 놉니다.”
“거짓말이라니?”
“직접 물어보세요.”
팽중호의 설명에 대주 정원은 실소가 절로 나왔다. 이럴 때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자, 그러지 말고 저녁이나 같이하세. 내가 해 줄 건 그거밖에 없구먼.”
“대주님 최고!”
얼마 후, 무림맹 주변 주점.
여러 얘기가 오가던 중 조장 반고헌이 화제를 올렸다.
“참! 대주님 그 얘기 아십니까? 천 년 전 죽간이 또 나왔다는 거.”
“아니, 못 들었네. 이번엔 무슨 내용인가?”
“요약하면 이겁니다. 그 여휘라는 자가 당시 마공을 전부 만들었는데, 천마신공에 모든 마공을 제압하는 힘이 있답니다.”
“허허, 그럴싸하군.”
“또 있습니다. 당시 천마신공을 전수할 만한 인물이 없어서 여휘가 그냥 가지고 사라졌답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진짜 천마신공을 남겨 뒀을 거라는 거죠.”
순간 흘려듣던 대주 정원의 표정이 우뚝 굳었다. 마지막 얘기는 가볍게 들을 게 아니다.
“혹시 그 말이 시중에 돌고 있는가?”
최근 정보를 듣은 팽종호가 말을 이었다.
“도는 정도가 아니라 신강에서는 난리랍니다.”
“난리라니?”
“천마가 남겼다는 말 아시죠? 첫 새벽을 만나러 가는 자, 나를 볼 것이다.”
“듣긴 했네만.”
“첫 새벽은 보통 여명(黎明)이나 단명(旦明)이라 쓰죠. 한데 거기엔 여단(黎旦)이라 했습니다. 한데 천마가 있던 곳이 신강이니 그쪽에 해를 보는 곳이나 여단이란 지명이 있는 곳에 마인들이 붐빈답니다. 혹시나 해서 가 보는 거죠.”
“허, 어째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구먼.”
“그냥 천 년 전 허풍이 적힌 죽간인데 너무 심려 마시지요.”
“그럼 다행이네만.”
하지만 발 없는 소문은 천 리, 아니 중원 동서 양 끝 일만 리가 넘는 광대한 곳에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물론 조금씩 살을 붙여 나갔다. 자그마한 눈덩이가 만 리 끝 청해와 신강에서는 설산이 될 만큼.
* * *
같은 시각.
청해 혈교. 스스로는 적신교(赤神敎)라 일컫는 곳.
“죽간이 무림맹에서 나왔다?”
“그렇습니다.”
“허허, 자기들 짓이라고 대놓고 우리에게 알렸어.”
“건드려 달라는 게지요. 그간 강호가 너무 조용했습니다. 정파라는 정원 안에도 잡초는 물론 큰 나무도 무성해졌으니까요.”
“이 사안이면 가지치기로 안 끝나지. 커지면 큰 나무 몇 개도 뿌리째 흔들릴 텐데.”
“그걸 원하는 게지요.”
“장단을 맞춰야 하겠나?”
“정원 갈이는 그쪽만 필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중원에 나서기 전에 집단속부터 해야지요.”
“천마교 아이들도 움직이겠지?”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 준 격 아닙니까.”
“……작은 일이 아닐세. 신중히 진행하시게나.”
“예.”
“참! 광동 일은 어찌 돼 가는가?”
“선우가영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가능한 잡아 오되 어려우면 죽이라 했습니다. 데리고 와 봤자 쓸모는 없으니까요.”
“단엽이는 거기 없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죽은 게 맞는 거 같습니다만.”
“그리 쉽게 떠날 아이가 아닐세. 잘 살펴보게나.”
“예.”
비슷한 논의가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 * *
한 달 후, 광동 북부 소주(韶州)의 외곽 산속.
‘이 새끼가 왜 이러지?’
궁금한 건 풀어야 하는 연사구다. 한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심각한 놈이 답을 안 준다. 이젠 웬만하면 속을 털어놓는 무윤인데 그냥 생각할 게 많다고만 하고 얼버무린다.
‘뇌양 가족이 걱정돼서 그러나?’
생각난 김에 다시 설명을 더했다.
“야! 악양 일은 걱정할 거 없어. 봉천문하고 사파 연합이 꼬랑지 내리고 있대. 무림맹하고 사도련도 슬슬 나설 모양이니까 한두 달이면 끝나. 뇌양까지 번질 일은 절대 없다. 이제 됐지?”
무윤은 엉뚱한 화두를 꺼냈다.
“장사(長沙)에 가자. 네 아버님 좀 봬야겠어.”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왜? 가서 나 혼 좀 내라 그러려고?”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것도 괜찮고.”
“뭐야? 진짜로 그러는 거야?”
“정보가 필요해. 뭔가 찜찜한데 여기선 알 길이 없어. 그래서 가 보자는 거야.”
“뭐가 찜찜한데?”
무윤은 말을 에두를 수밖에 없다.
“돌아가는 상황 전부. 다 흐릿한 게 판단이 안 서.”
“……?”
말은 덤덤하게 했지만, 속에서 들불처럼 타오르는 분노는 이제 무윤이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러다간 여휘와 내가 진짜 악마가 돼 버린다.’
과거의 죽간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은 슬슬 기록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다. 저잣거리 어디에서도 이런 대화를 쉽게 들을 정도로.
-여휘라는 자가 진짜 천마가 맞겠어. 천마신공도 따로 있고.
-당연하지. 나온 죽간이 어디 한두 곳인가? 강호 여기저기에서 나오는데.
-그 악랄한 마공도 다 그자가 만든 거라며?
-그렇다네. 아주 죽일 놈이지. 그게 말이나 되는가? 어린아이를 죄다 잡아다 피를 빼 먹고, 여인의 정혈을 갈취해서 말라 죽이다니.
-그건 사람이 아니지. 악마야, 악마.
-이를 말인가. 그런 놈이 천 년 전에 있었으니 지금 세상도 이 모양인 게지.
-허! 하늘은 왜 그딴 놈을 세상에 풀어놨는지, 에잉!
-그러게 말일세.
이제 죽간의 기록 여부를 떠나 풍문은 만마의 종주, 마공의 뿌리, 악의 근원, 그 모든 것을 여휘와 내게로 귀결시키고 있다.
이미 강호를 떠나 세상 사람 입에도 오르내린다.
그냥 있다간 모두를 치 떨리게 만드는 증오의 대상, 수많은 악행의 근원, 그런 진정한 악마가 돼 버린다.
‘이건 아니다. 참을 수도 없고 참아서도 안 될 일.’
단지 사라진 것이라면 잊고 살고자 했다. 세상에 내민 기치가 사라진 것도 씁쓸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 장구한 세월이 만든 아픔이니까.
혹 나중에 나쁜 놈 정도로 언급돼도 참으려 했다. 천하를 일통한 과거를 감추고 싶은 자들이 많을 테니까. 그 정도는 넘어가 주려 했다.
그런데 악마라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다. 가슴속 저 밑에서 복받친 고함이 절규할 수밖에 없다.
한데 이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해법, 아무리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머리를 싸매도 답이 쉽지 않다.
근원적인 해법은 물론 과거를 정확히 알리는 것.
하지만 천 년이나 흘러 서로 다른 기록이 난무하는 지금,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것인가.
그 어떤 진실을 내밀어도 그냥 소문일 뿐.
그 고민 속에 한 가지 의혹도 깊어진다.
‘이게 누군가의 음모라면!’
갑자기 나타난 천 년 전 죽간에다 광풍처럼 번지는 소문, 웬만한 혜안을 가진 강호인이면 한번은 의심할 만한 사안이다.
‘근데 난 더 그렇단 말이지.’
지금 사람 그 누구도 소문의 이면을 보기 어렵지만,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는 무윤은 다르다. 그중 거짓이 유독 집중되는 부분이 있다.
‘여휘가 천마신공을 남겼다는 거.’
물론 아직 의혹일 뿐.
어쨌든 이 거대한 흐름의 실체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대책도 나올 수 없는 상황.
그런 시기에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다. 이미 홍삼을 인계받은 자들이 상단으로 위장한 사도련 무인인 건 파악했다.
하지만 그 이상 특이한 게 없다.
물론 사도련이 있는 강서(江西) 길안(吉安)까지 가면 모르겠지만, 그리 중요하게 살필 일도 아니다. 알면 차후 도움 될 정도였으니까.
“돌아가자. 건질 것도 없겠어.”
“그래? 하긴 그럴 거 같네.”
“침주 일 정리하고 바로 장사로 가자.”
“뭐? 그렇게 빨리?”
“끌면 뭐 해.”
“……?”
한데 돌아가는 와중에 시간 끌 일이 생겨 버렸다.
* * *
얼마 후, 소주(韶州) 북쪽 산야.
중년 미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혈교로구나!”
“호! 이젠 그대도 혈교라 칭하오? 한때 적신교도(赤神敎徒)였던 당신이?”
“이십 년이다. 우릴 해하려던 곳을 아직도 그리 여길 거라 생각했는가?”
“반도(叛徒)에 가담한 그대 탓을 누구에게 하는가?”
“그리 몰아 놓고선 반도라! 하! 하긴 다 지나간 일이거늘 이제 와 따진들 무슨 소용일까.”
“이제 당신 혼자 남았소. 그만 포기하시지.”
“……!”
주변을 다시 둘러볼 필요도 없는 사실.
여인에게 남은 건 결심뿐이다.
거기에 더할 건 떠오른 소회를 잠시나마 정리하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