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잠시 생각하던 공야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가만! 봉천방이면 적운문주의 처가(妻家) 아닌가?”
“예, 그래서 대거 보낼 모양이에요. 문주까지 포함해서 삼분지 일 정도.”
“응? 문주에다 그렇게 많이? 아무리 처가라도 너무 과한데.”
“좀 이상하긴 해요. 설도승이 명분 빼고는 이득도 없는 일에 그런다는 게.”
그때 여곽 상단주 진유송이 무릎을 쳤다.
탁!
“아, 그럴 수도 있겠어!”
“뭐 아는 게 있으세요?”
“성우 전장에서 슬쩍 부탁한 게 있네. 여분의 돈이 있으면 빌려 달라고 말일세.”
침주 사파가 주로 거래하는 곳이 성우 전장이다. 하후 전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곳.
“돈은 왜요?”
“적운문이 자금 회전이 잠시 막혔어. 악양 봉천방이 뭘 인수한다고 오만 냥을 빌려 갔는데 받을 기일이 지났다고 하더군. 그 일 때문에 뭔가 꼬였겠지. 그래서 설도승까지 가서 해결할 모양일세.”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혹시 엮을 거리가 될지 모른다.
“적운문 담보는 뭡니까?”
“전답(田畓)인데 가치는 충분해. 한데 북쪽 상황에 문제가 생기면 돈이 묶이니까 다들 꺼리는 게지.”
“제 돈으로 빌려주죠. 그렇게 전해 주세요.”
“자네가? 이보게, 무려 오만 냥일세.”
“그 정도 여유는 있습니다. 대신 계약은 저와 직접 하는 걸로요.”
연사구가 바로 찔러 댔다.
“거봐요, 이 새끼 꿍쳐 놓은 거 많다니까요.”
공야성의 눈이 깊어졌다. 채권자가 무윤이 된다는 의미.
“널 노리게 하려고?”
“걸려들면 좋고.”
그때 진유송이 슬그머니 말을 더했다.
“이보게 방주, 혹시 여윳돈이 더 있는가?”
“왜 그러시죠?”
“이번에 광동에 다녀왔는데 거기 강문 상단에서도 급히 이십만 냥을 구하네. 금액이 워낙 커서 은밀히 알아봤더니 홍삼을 해동에서 밀수입하더군. 홍삼이야 밀매로 들여오면 이문이 많이 남지. 돈을 빌려주고 일부 할당받을까 해서 말이네.”
순간 무윤과 공야성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이번에 같이 온 의원 곽호산에게 들은 게 있다. 무윤이 약 성분 중 뭔지 모르는 게 있었다. 아주 대량으로 들어간 것인데.
-해동에서 들어온 홍삼이네. 심신 안정에 그만한 게 없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걸로 대체하면 부작용이 심해. 핵심 재료일세.
강문 상단은 광동 최고의 사파 상단. 냄새가 난다. 빌려주고 살필 만한 일이다. 다만 안전장치는 필수.
“오만 냥은 됩니다. 대신 여기 성우 전장을 통해서 전하시죠.”
“알았네. 추진해 보지.”
“거래 시에는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시게.”
이제 마공에 대해선 어떤 부담도 없다. 다만 널리 퍼질 게 확실한 지금, 가능한 많이 알아 둬야 한다.
‘이번이 기회일지도 모르지.’
만약 사도련이면 분명 주요 관련자가 온다. 큰 금액에 주요 재료니까.
공야성은 연사구에게 남은 화두를 꺼냈다.
“하후가는 어떤가?”
“거기야 생색낼 정도죠. 소가주하고 무사 몇 명만 보낸답니다.”
무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문가가 주도한 일이면 당연히 떠오르는 놈이 있다.
“하후태가 안 가고? 어차피 서문가 승리로 끝날 일에 안 나설 리 없는데?”
“가주가 그렇게 지시했어. 소가주보고 이참에 서문가와 연을 터 보라고 했대.”
“……하후천기를 공개적으로 밀어준 거네?”
“그렇게 봐야지.”
바로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하후태의 어머니.
“서문채령이 가만있을까?”
“하후가주도 치밀한 사람이잖아. 복안이 있겠지.”
“하긴.”
그렇게 논의가 마무리될 즈음.
연사구는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별 시답지도 않은 소문이라 말도 안 하려던 것인데 입이 심심했다.
“참! 내가 웃긴 얘기 하나 해 줄까? 무림맹에서 옛날 자료를 뒤지다가 황당한 게 나왔대.”
“뭔데?”
“크크, 나 참! 말하기 전에 벌써 웃기네. 아, 글쎄! 천마도 가짜, 천마신공도 가짜란 기록이 나왔어.”
“……뭔 소리야?”
“진짜 천마라 불릴 자와 천마신공이 따로 있다는 거지. 물론 전해지지 않았지만.”
무윤의 직감이 뒤통수를 짜르르하게 했다. 묻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게 누군데?”
“가만! 뭐라 그랬지? 하도 웃겨서 대충 들었더니……. 아, 여휘라고 했다!”
“……!”
여휘!
순간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떨리는 심장이 격정을 알렸다. 이 세상 처음, 남에게서 들었다. 내 벗의 이름을.
세월이 준 망각이라 들추지 않으려던 이름.
여휘 말대로 이 세상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마음속에만 고이 간직하기로 했던 추억인데.
하나 지금은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왜?’
그 천 년이란 세월의 봉인 속에 있던 이름이 왜?
그 의문부터 풀어야 한다.
“계속해 봐.”
연사구의 눈이 껌벅여졌다.
‘이 새끼 왜 이러지?’
웃자고 던진 소리에 정색은 물론, 살갗이 아리는 내기를 뿜어내다니. 바로 눈을 부라렸다.
“야! 너 뭐 하는 짓이야! 여기서 그러면 어떡해!”
“……!”
곽유양, 진유송, 공야성 모두의 몸이 절로 떠는 사시나무가 돼 버렸다.
부르르!
황망함을 담은 고개가 급히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딴생각하다가 그만…….”
“아, 아닐세. 잠깐 놀랐을 뿐이네.”
사태가 진정되자 무윤은 깊고 장중한 숨을 내쉬었다.
‘침착하자, 침착!’
“미안하다. 딴생각했어. 그 얘기 더 해 봐.”
“뭔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래.”
“무림맹 서고를 정리하다 천 년 전 죽간이 나왔대. 거기에 천마는 원래 여휘라는 자고 천마교 이전 이름이……. 아, 척고련이라고 했다!”
“……그래서?”
“근데 여휘라는 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대. 천마신공도 같이. 그래서 야율겸이 다른 무공을 천마신공이라고 속이고 이대 천마가 됐다는 거야. 그리고 더 웃기는 건 그 여휘라는 자가 중원에다 북해, 서역, 남만까지 다 무릎 꿇렸다는 거지. 한마디로 역사상 처음으로 강호를 일통했대.”
“그리고?”
“내가 들은 건 그게 다야. 아, 하나 더! 거기 마뇌라는 자도 나오는데 무륜(霧輪)이라고 했어. 너랑 이름이 비슷해서 생각났다.”
이제 다른 걸 물어야 한다.
“누가 찾았는지 알아?”
“그건 모르지. 옛날 서고 정리하다 찾았다는 것밖에.”
“근데 어떻게 소문이 났지? 내부 일인데.”
“허무맹랑하고 웃긴 얘기잖아. 그런 걸 누가 단속하겠어. 술자리 안주 삼아 여기저기 퍼진 거지.”
“……!”
얼마 후.
멍한 시선 하나가 회색 먹구름 덧칠한 하늘을 향했다.
오늘따라 온갖 상념이 더해진 마음을 어둠이 내리누른다.
‘이제 와 그게 알려지다니.’
마음속 추억으로 혼자 꺼내 볼 뿐, 현실에선 잊기로 마음먹은 과거. 그렇게 삼 년 넘게 살아왔는데.
더구나 가족과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이 시점에.
물론 그저 웃고 사라질 거라면 오늘의 상념으로 끝낼 수 있다.
한데 석연치 않다.
연사구가 말한 내용 중 잘못된 건 두 가지.
여휘가 천마라 불린 것과 무공이 천마신공(天魔神功)인 것.
물론 그리 불릴 여지는 있다.
‘야율겸이 천마가 되고 난 후 작성된 죽간이라면.’
천마는 대대로 내려온 천마교의 교주를 통칭하는 말.
이미 야율겸에게 천마라는 호칭을 썼으니 여휘도, 무공도 후대에선 그리 불렀을 수 있다.
어쨌든 지금으로선 더 추리할 게 없다. 생각을 달리할 것도.
하지만.
‘더 얘기가 나오면.’
그때는 지워 버렸던 세월 일부는 다시 떠올려야 할지도.
무윤은 상념을 떨치고는 발길을 돌렸다.
이전 생에 더해 지금까지의 인생 철칙.
‘매듭은 하나씩 푼다.’
눈앞에 닥친 매듭은 우선 적묘예다.
* * *
청호방 정원.
올망졸망 푸른색을 더해 가는 풀잎가에, 생글거리는 아이의 손이 봄바람 속을 허우적거린다.
휘익!
“고모, 저 잘했어요?”
“그럼, 어제보다 훨씬 좋아졌어.”
“휴, 힘들다.”
“이제 좀 쉬어.”
“예.”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아이에겐 함박웃음이,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감싸고 등을 토닥이는 여인에겐 은은한 미소가 흐른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깔깔대는 아이의 말에 그저 흐르는 미소가 푸름을 더했다.
그때 두 사람이 다가왔다.
“우리 소려 또 춤췄어?”
“예, 연 삼촌! 고모가 저 잘한다고 했어요.”
“그럼! 삼촌 눈엔 너희 아빠 춤보다 나아.”
아이의 입가에 발그레한 미소가 흘렀다.
“에이, 거짓말!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아빠 춤이 얼마나 멋진데.”
연사구는 시선을 낮춰 소려의 눈을 마주했다.
“뭐야! 우리 소려 벌써 이렇게 큰 거야? 삼촌 거짓말도 다 알고.”
“피! 저 이제 세 살이에요. 아기 아녜요.”
“아이고, 이 삼촌이 그걸 몰랐네. 미안! 다음부턴 안 그럴게. 약속!”
“약속!”
“참! 우리 소려 이제 밥 먹을 때네.”
“아, 그러네! 저 갈게요.”
유모 옥영이 소려를 데리고 가자 적묘예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가벼운 핀잔이 말 속에 담겼다. 온 지 며칠 만에 보는 자리다.
“바쁜 일은 끝났어?”
“대충.”
“기루 알아보는 건 잘 안됐어? 도통 말이 없네.”
“물색해 뒀다. 근데 다른 걸 알아보느라 좀 늦었다.”
“뭐?”
무윤이 형산 일대 제자 선운과의 일을 담담히 풀어내고 얼마 후.
적묘예의 허망함 가득 담은 한숨이 입가를 쓸었다.
“정말 모르는 거 같다 이거지?”
“선운 그자가 조사한 것도 그렇고, 연사구 이놈이 더 알아본 정황도 그래.”
장로 건허는 자경이 임신할 즈음 무림맹으로 삼 년 파견을 나갔었다. 돌아와서는 친우 적만우를 몇 번 찾다가 말았고.
한동안 말이 없던 적묘예는 가만히 읊조렸다. 옛 기억을 풀어 내려는 탓에 씁쓰레한 미소가 같이했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다가 몇 자 쓰다 만 서신을 봤어.”
서신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혹시 몰라 글을 남깁니다. 더는 절 찾지 말아 주세요. 그게 묘예와 모두를 위한…….]
“그 외에도 의아한 게 많았거든. 그래서 계부한테 캐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알려 준 거야. 그자는 모른다고 했고.”
“그럼 그게 맞는 거 아냐? 넌 왜 안다고 생각하는데?”
“우린 계속 옮겨 다녔어. 글에도 찾는다는 내용이 있고. 짐작했으니 그런 거 아니겠어?”
연사구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머리 아플 때 하는 습관이다. 언제나 그렇듯 간단히 답을 내렸다.
“야! 너 혼자 추측이잖아. 그냥 만나 보고 결정해. 괜히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고.”
“……!”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난 뒤.
무윤은 지금 눈빛 그대로 묘예와 시선을 맞췄다.
“묘예야, 소려 예쁘지?”
“갑자기 뭔 소리야. 당연한 걸 왜 물어?”
“난 소려 아빠가 된 게 너무 행복해. 똘망똘망한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세상 다 가진 거 같거든. 근데 가끔 불안해. 생부가 알고 찾아오면 어쩌나 하고.”
“그자는 모른다며?”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근데 말이다. 만약 생부가 소려의 존재를 알면 어떻게 될까? 물론 외면하고 피할 수는 있어. 한데 직접 얼굴을 보면? 그땐 싫어할까? 그 자리에서 쫓아낼까?”
“뭔 소리야! 세상에 소려 같은 애가 또 어디 있다고.”
무윤은 하고픈 말을 꺼내 들었다.
“너도 소려만큼 예뻐.”
“……?”
“세상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순간 연사구가 껴들었다. 이럴 때 다물고 있기엔 입이 너무 간질간질하다.
“이 새끼, 오랜만에 말 잘했네. 그래, 묘예야, 너 지금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괜한 자격지심 부리는 거야. 안 그래도 돼. 마음 가는 대로 부딪쳐 봐. 네 낭군에다 여기 든든한 친구들도 있잖아.”
“……!”
묘예도 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세상에 나 혼자라는 외로움.
그 두려움이 사실과 상관없이 형상화한 증오다. 그래야 이 두려움이 정당화되니까. 자신이 초라해지지 않으니까.
가슴 싸함에 눈가가 아려 왔다.
돌려서 뜻을 전한 무윤, 대놓고 찔러 대는 연사구의 투박한 주절거림 모두 가슴 가득 따스한 선물이다. 그 울렁임이 옥죄였던 가슴을 잠시나마 말갛게 씻어 내렸다.
한결 홀가분해진 시선이 저무는 해를 향했다.
‘그래, 부딪치면 되는 걸 이럴 필요 없지.’
연사구가 맨날 떠드는 대로 다음 일은 그때 고민하면 된다.
이젠 선물에 화답해야 할 때. 말엔 투정이 섞여도 싱그러운 미소는 가득 담았다.
“그래? 낭군이란 놈은 맨날 속이나 썩이는데, 친구는 믿어 볼까?”
“응? 중탁이 이 새끼 또 애먼 짓 했냐?”
“또? 그거 뭔 얘기야?”
“아니, 그게…….”
“빨리 안 불어!”
연사구는 있는 대로 핏대를 올렸다. 말 돌릴 땐 이게 최고다.
“이것들이 정말! 야, 내가 나이 많은 거 몰라! 이 새끼나 저 새끼나 다 맘먹고 지랄이야. 에이! 나 일이 있어서 간다!”
“야! 거기 안 서!”
“네 낭군한테 따져!”
“……!”
매듭 풀 준비는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