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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63화 (63/161)

63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며칠 후 저녁, 천가장 연무장.

투욱!

“휴우!”

무진은 바닥에 철퍼덕 앉고는 기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근 며칠간 땅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는지 모른다. 갈아입은 무복만 벌써 십여 벌째에 몸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다.

그렇게 만든 원흉이 다가오자 입이 절로 삐죽 나왔다.

무윤은 내일 일찍 침주로 돌아간다.

“마지막인데 좀 심한 거 아냐?”

“미안. 내일 간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네. 이게 스승의 마음인가 보다.”

“어릴 때 쌓인 거 복수한 건 아니고?”

“그런 거 같아?”

“해 본 소리야. 그렇게 얻어터졌는데 좋은 말부터 나오겠어?”

“너는 약과야. 연사구는 악을 바락바락 쓴다. 성질 다 풀릴 때까지 그래. 물론 그러고 싹 잊어버리지만.”

“연 형님은 그런 거 같더라. 하는 거 보면 정말 세상 속 편하게 살아.”

“부럽지?”

“그렇긴 한데 그거 다 성격이잖아. 난 그럴 자신 없어.”

이럴 땐 형이 아닌 경험자로서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나도 그랬다. 근데 그놈이랑 같이한 게 한 삼 년 됐는데, 옆에서 보기만 해도 조금은 닮아 가더라. 솔직히 그럴 땐 스승 같은 놈이야.”

“그래서 가까이하는 거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같이 있으면 좋으니까 자연스레 그렇게 된 거지. 너도 주변에 저런 놈 있나 잘 찾아봐.”

한동안 그런저런 얘기가 오고 갔다.

칠 년 만에 가진 짧은 만남, 둘 다 그 소회를 정리할 말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이 여릿여릿 날갯짓하며 스며들 즈음, 형의 입이 먼저 열렸다.

“무진아, 노력하겠다만 자주 오긴 쉽지 않을 거야.”

“뭐야? 그래서? 나보고 가족들 책임지라고?”

“아니, 나 없을 때 했던 것처럼 잘해 달라고. 나야 당분간은 일 년에 몇 번 왔다 갔다 할 정도니까.”

무진은 연사구에게 침주 일을 상세히 들었다. 위험한 것까지.

빤한 답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물었다.

“거기 정리하고 오긴 힘들겠지?”

“내 꿈 때문에 일을 벌였어. 누가 시킨 것도, 어쩔 수 없이도 아니고. 그 일 때문에 수천 명이 나만 보고 있지. 너 같으면?”

“알아. 그것도 알고 형 실력도 아는데, 그래도 위험할까 봐 그러지.”

연사구도 홍이암의 일은 떠들지 않았다.

“정말 내 실력 다 안다고 생각해?”

“뭐야? 아직도 감춘 게 있어?”

“강호에 유명한 말 알지? 삼 할은 감추라고. 언제든 도망칠 정도는 남겨 뒀으니까 걱정 말라고.”

돌아온 형이 빈말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조심해. 실력만 갖고 사는 세상이 아니잖아.”

“알았다. 이제 가 볼까.”

무윤이 먼저 일어나려는 찰나, 무진의 입이 나직이 열렸다.

그 어떤 말보다 이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고마워.”

“뭐가?”

“돌아와 줘서.”

“……!”

무윤의 손이 동생 어깨에 올라갔다.

탁!

“고맙다.”

“뭐가?”

“내 동생이라서.”

“……!”

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걸어가던 즈음, 무윤은 노파심에 말을 꺼냈다.

“너 은진이한테 잘 얘기했지?”

“뭐?”

“천설청옥! 그건 줄 알면 큰일 나.”

“그냥 비싼 청옥이라고 했어. 걱정 마. 그리고 워낙 귀해서 알아볼 사람도 없다며?”

“물론 못 알아봐. 근데 천설청옥이란 말이 돌면 확인하러 올 새끼들은 꼭 생겨. 그래서 하는 소리지.”

“에이, 세상에 몇 개 없는 건데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

무윤은 눈을 부라렸다.

“야, 인마! 반대로 생각해야지!”

“반대?”

“사기 치거나 으스대고 싶으면 믿을 만하게 속이지, 누가 아무도 안 믿는 사기를 쳐? 그게 값이 얼만데 너 같으면 보기만 하고 사겠어? 진짜라고 하면 그냥 믿겠어?”

순간 무진은 꼭 묻고 싶은 게 생겼다.

“그럼 형 친구는? 이거 살 때 확인 안 했어?”

무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묻는 이유가 짐작이 된다.

“너, 이거 가짜라고 생각했지?”

“그거야…….”

“은진이한테 얘기했지?”

“……그게.”

무윤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처음으로 동생한테 화가 엄청 났다.

“당장 은진이 데려와! 이것들이 정말! 야, 내가 이걸 얼마나 정성 들여 깎았는데 뭐! 가짜! 아우!”

“저, 정말 진짜야?”

“당장 데리고 와! 감정하는 법 알려 줄 테니까! 아니다. 위험하니까 압수!”

“아니, 줬다 뺏는 건 좀…….”

“하여간 불러와!”

“…….”

그렇게 한밤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다음 날, 침주로 가는 길.

연사구는 눈을 껌벅였다.

“이게 뭐냐?”

“보면 몰라, 종이 묶음이지. 아버지가 너 준다고 며칠 밤새워 만드신 거다.”

“……너 줄 거 조금 떼 주셨겠지.”

“그게 그거지. 어쨌든 아버진 가문에서도 최고의 장인이셔. 거기 글을 적으면 천 년은 보장하신단다.”

“진짜?”

“잘 보관만 하면.”

“그래? 근데 이걸 왜?”

“천 년을 담을 그릇이니까 거기 어울릴 만한 걸 담아 보라신다. 꿈이건, 잡다한 생활이건, 뭐든 너 스스로 그럴 만한 가치라고 여기는 걸.”

“야, 그렇게 말하니까 이게 무슨 보물 같다. 천 년을 갈 보물.”

“쓰는 사람에 달렸지. 보물이 될지 휴지 조각이 될지.”

“넌 뭘 담을 건데?”

“생각 중이다. 아버지는 마음을 담아 보라고 권하시던데.”

“마음?”

“그래, 천 년 후에 누가 보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걸로.”

“풋! 천 년 후에 어느 미친놈이 네 기록을 보겠냐?”

“우린 남길 뿐이야. 판단은 그 시대의 몫이고.”

“뭐, 그 말은 맞네.”

“넌 행복한 줄이나 알아.”

“뭐가?”

“천 년을 남길 종이, 이런 거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냐.”

“참내! 그럴 사람이 많기도 하겠다.”

“있긴 하겠지. ……옛날엔 더 그랬을 거고.”

“……?”

같은 시각, 중원 서북쪽 끝 청해(青海).

“……살아 계셨군요.”

“오랜만이다. ……아들아.”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왜 돌아가셨다고……?”

“들어가자. 바람이 차구나.”

잠시 후.

남궁사현은 뜨거웠던 차가 다 식을 즈음에야 떨리는 입을 열었다.

“왜?”

이십 년이 넘게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 남궁천우. 물을 게 너무 많지만, 첫말은 그렇게 나왔다.

남궁천우의 묵직한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어 내린 사막, 그 위로 달이 어스름 머리를 쳐들었다.

그 또한 소회가 적을 수 없다.

치켜든 고개를 서서히 돌려 아들의 눈을 마주했다.

“용케 찾아왔구나.”

“……오래 걸렸습니다.”

“물을 게 많을 게다. 뭐부터 말할까?”

“상관없습니다. 말씀만 다 해 주시면 됩니다. 하나도 빼놓지 마시고!”

“그러마. 네게 감출 건 없지. 하나, 듣고 잊어버려야 할 것도 있느니라. 그러겠느냐?”

“돌아가지 못할 각오로 왔습니다.”

“알았다.”

얼마 후 긴 설명이 끝날 무렵, 넋 나간 듯 듣던 아들은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게 다 사실입니까?”

“거짓으로 들리느냐?”

“그게 아니라 믿기지 않아서 그럽니다.”

“내 설명이 부족했나 보구나. 물어라, 세세히 설명해 주마.”

남궁사현은 후끈 달아오른 숨을 입가에 담았다.

“공야의숙 일부터 묻겠습니다. 그럼 아버님도 가주, 아니 무열 숙부님의 계략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는 겁니까?”

“난 그 직책을 거부할 수 있었지만, 무열 형님이 제안한 싸움을 받아들였을 뿐이야. 그 일로 승부를 볼 수 있다고 여겼지. 한데 형님이 더 치밀했기에 당했을 뿐이다.”

“검성 할아버님이 전모를 다 알고 계시면서 그러셨다는 것도?”

“천하제일 남궁의 가주를 정하는 일이다. 할아버님은 그런 음모와 계략을 능히 헤쳐 나갈 자를 선정하신 게다. 그 판정을 하셨기에 날 멸마단으로 추방하신 것이고.”

“……이젠 다 잊어버리셨습니까? 원한 같은 건?”

“어찌 없다 하겠느냐. 하나 말했듯이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지금은 거기에 매진할 뿐이다.”

“그다음엔?”

“먼 훗날 일이다. 확언은 못 하겠구나.”

“……!”

남궁사현은 과거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런 걸 잊으실 분이 아니지.’

하지만 말을 자른 이상 더 물어도 나올 답은 없다.

남궁사현은 다음 질문을 던졌다.

“혈교의 의가(醫家)인 선우가 사람과 연을 맺었다는 건?”

“이십 년 전 혈교에 내분이 있었는데 선우가도 관련됐지. 그때 탈출하던 이들을 사도련과 내가 쫓았다. 대부분 사도련이 데리고 갔고 소가주만 내가 잡았지.”

“한데 왜 같이하게 되셨는지?”

“그 얘길 하자면 여휘라는 자부터 알아야 한다.”

“여휘? 그게 누굽니까?”

“천 년 전 인물인데 천마교의 뿌리라 보면 된다.”

“예? 저는 금시초문인데?”

“사라진 강호의 역사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히 고금제일인이라 불릴 자인데 사람과 세월이 사라지게 만들었지.”

여휘와 척고련의 설명이 끝나고 여러 질문이 오고 간 후.

“그럼 그동안 두 분이서 고금 제일의 무공을 연구하셨단 말입니까?”

“그 친구는 마의(魔醫) 선우진의 후손이다. 우연히 마의가 남긴 글을 보고는 그런 꿈을 꾸고 있더구나.”

“아버님은 어떻게?”

“나도 세가 서고에서 천 년 전 죽간을 보고 여휘라는 자를 알고 있었다. 그땐 지어낸 이야기라 생각했지. 하나 그런 무인이 되고 싶다는 목표는 세우게 됐다. 한데 근 한 달 혈교의 추적을 피해 다니면서 둘이 같은 꿈을 가진 걸 알고 의기투합하게 된 게다.”

“두 분 의지는 알겠습니다. 그래도 무공이 전해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순간 남궁천우의 눈이 깊어졌다.

“사현아, 넌 이 아비를 무인으로서 어찌 보느냐?”

“제가 본 누구보다 뛰어난 분입니다.”

천하제일 남궁에서도 천년 기재라 불리던 남궁천우였다. 물론 그 때문에 이리된 것이기도 하지만.

“선우 그 친구 또한 무학 이론과 의학에 있어선 나도 인정할 만한 천재다. 그런 둘이 세운 꿈이 고작 천 년 전 무인의 길을 따라가려는 거 같으냐?”

“하면?”

“우린 그자가 이룬 업적을 좇고 참고할 뿐 넘어서려는 게다. 지난 이십 년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왔고.”

“성과가 있단 말씀입니까?”

“아직은 부족하지. 하나 길은 증명했다. 여휘라는 자의 무공은 중단전을 근간으로 한 초인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달리 걸을 방법을 찾아서 매진 중이니라.”

이후 세세한 이야기가 오고 간 후, 남궁사현은 화두를 돌렸다.

“그럼 세상엔 어떻게 나서실 겁니까? 여휘라는 자처럼 강호를 평정하실 생각입니까?”

“지금 단언할 말은 아니구나. 우선 누구보다 강해져야 꿈꿔 볼 일 아니더냐. 아직 갈 길이 남았다.”

“하면 그동안은 숨죽이고 계실 겁니까?”

“강한 무인의 가치는 강호의 혼란 속에 더 빛을 발하지. 몸은 여기 있되 다른 친구들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 곧 세상이 시끄러워질 게야.”

“어떤?”

“여휘와 척고련의 존재부터 세상에 알리는 게 시작이지.”

“그건 누가?”

“구대 문파 위에 서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지. 몇 년 전에 슬쩍 던져 놓았더니 이제 움직일 모양이더구나. 누군지는 나중에 알려 주마.”

남궁사현은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아까 친구들이라 하셨는데?”

“내가 왜 청해에 있겠느냐?”

“……천마교와 혈교 말씀입니까?”

“물론 그들도 있지. 하나 세상이 모르는 곳 또한 있느니라. 이 또한 때가 되면 알려 주마.”

“……?”

길었던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남궁천우의 그윽한 시선은 아들을 향했다.

“난 이십 년간 다른 이로 살았다. 앞으로는 물론, 평생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제 길에 걸림돌은 안 될 거란 말씀입니까?”

“넌 남궁의 자손으로 살아가고 싶을 터. 그 길을 아비가 막진 않을 것이다. 걱정 말거라.”

남궁사현은 의문이 떠올랐다. 와서 알았지만, 정보를 흘린 건 아버지다.

“한데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전해 주고 싶었으니까. 이 아비가 이룬 걸 말이다.”

“가문의 그릇이 부족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그 그릇 위에 더한 것이기에 불렀느니라. 결정은 네 몫이다.”

“……!”

얼마 후, 남궁사현은 머무르기로 했다.

두 아버지는 각기 다른 그릇을 전했다.

어떤 이는 마음을, 다른 이는 힘을 담을 그릇을.

며칠 후, 침주 여곽 상단 회의실.

“허! 방주께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정말 잘됐구려. 마인 누명도 벗고 가족들도 다시 만났으니.”

무윤의 설명에 다들 반색할 즈음.

타다닥!

“일이 터졌습니다!”

다급히 들어온 연사구의 말이 이어졌다.

“서문세가가 악양 봉천방을 이번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어요.”

“……?”

상황 설명이 대략 끝나자 공야성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우선 연사구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아버님께선 어찌 보시던가? 호남 하오문 지부장이시니 상황을 잘 아실 텐데.”

“전면전은 확실히 아니라고 보세요. 서문가야 다른 걸 덮으려고 화살을 돌린 거고, 사파야 세가 불리한데 맞불 놨다가는 골로 갈 수도 있으니까. 키워 봤자 둘 다 손해라는 거죠. 그래서 정, 사 대표 무가 몇 곳만 나서는 거고.”

“그럼?”

“악양에서 한동안 힘겨루기를 하다가 때가 되면 무림맹과 사도련이 중재에 나설 겁니다. 이미 다른 지역은 절대 나서지 못하게 해 놨고요.”

“휴, 그나마 다행이구먼.”

무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같은 호남이지만 북쪽 끝인 악양(岳陽)은 여기서 천 리 길.

거기다 대표 정, 사 무가에 속하지 않은 이상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래도 따져 봐야지.’

작건 크건 미칠 여파는 분명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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