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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62화 (62/161)

6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내원 정원.

나뭇가지 사이 타고 내려온 저녁 햇살이 봄바람에 따스함을 더했다.

정원에 홀로 선 여인의 곱게 쪽 진 머릿결이 바람에 흩날렸다.

사라락!

봄바람에 살짝 불그스름해진 볼이 파르르 떨렸다. 뽀얀 얼굴엔 활짝 핀 웃음이 머금어진다.

그저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

‘너무 좋아!’

낯선 춤이 전한 잔잔한 감흥에, 솟아오르는 숨은 그대로 천아현의 입에 실렸다.

“하아!”

작은 탄성을 내지른 여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몽롱함을 더해 한 사내를 향했다.

수줍게 다가와 어울리지 않는 자수 비단을 건네던 이.

그 비단결 사이사이엔 형형색색 다채로운 금(琴) 모양이 담겨 있었다.

실 따라 색 따라 풀어 헤쳐진 금의 현들은 봄 향기 가득 담은 풀잎처럼 비단 위에 하늘거렸다.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손끝 하나 비단결을 쓰다듬지 않아도, 그 자수 놀림에 담긴 마음이 귓불까지 빨갛게 달구었다.

언제나 차갑고 무심하기만 하던 오라버니. 천한 이를 바라보듯 냉대와 멸시만 담아 한기를 뿌려 대던 눈빛, 시퍼런 칼날 같던 꽉 다문 입술,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어디에도 정(情)이란 존재하지 않던 이다.

그런 이가 칠 년 만에 돌아와 온 정성 다해 한올지게 그려 낸 마음이다.

처음엔 머뭇거렸다. 내민 손에 담긴 자수 비단을 선뜻 받아 내지 못했다. 바뀌었음을 이제는 짐작하지만, 그 오랜 과거의 경험이 몸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 반짝이는 비단결 사이를 한참 보고 나서야 손이 움직였다.

그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속마음이 다 드러난 창피함에 눈 둘 곳을 몰랐다.

그게 너무 미안했다.

굳은 자신의 모습에 뭔가 말을 하려던 오라버니는 은은한 웃음만 흘렸다.

벽을 느꼈을 테니까. 가만히 건네주기만 하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연사구라는 오빠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저놈 성격에 너한테 미안해서 말도 못 꺼내고 돌아갈지 몰라. 어제 저 산 위에서도 이 비단 보면서 한숨만 한참 쉬었거든.

그 기억에 무심코 입이 열렸다. 아련한 가슴이 그리 만들었다. 이대로 보내면 후회할 거 같은 절박감이 오래된 벽에 금을 그어 냈다.

“저 오라버니.”

“응?”

“……정말 예뻐요. 잘 입을게요.”

“고맙구나. 그러면 된다.”

천아현은 다음 말을 고민하다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이 자수에 가장 화답할 말이.

“저, 잘은 못 하는데 제 금 소리 들어 보실래요? 오라버니한테는 한 번도 못 들려줬는데.”

“……!”

아직 어둠이 덜 깃든 밤하늘.

사라락! 휘익!

그 하늘 위로 손끝 하나 여린 놀림이 나는 바람이 되어 허공을 헤쳤다. 유려한 발 디딤이 사뿐사뿐 꽃잎 떨어진 대지를 쓸었다.

사사삭!

방금 들려줬던 서툰 금 소리의 답례에 춤추는 자가 아현의 눈 가득 들어왔다. 뭉클거리는 가슴은 오직 한마디만 입가를 맴돌게 했다.

‘오라버니!’

단아하고 정갈함 속에 신명이 더해진 손짓이 너울처럼 허공에 넘실거렸다.

휘이익! 휘릭!

멋진 춤이다. 정갈하고 아름답다. 부드럽고 경쾌한 동작 그 어디에도 어설픔이 없다. 오랜 노력이 담뿍 담겼음이 확연하다.

그 멋진 춤을 대한 아현의 두 줄기 볼에 눈물이 아롱졌다. 춤이 전한 울림이 마음을 속살거려서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하늘을 향한 날갯짓에 가득 담긴 그 마음은 바람 따라 살랑살랑 불어와 맺혔던 아픔을 쓸어내린다.

어색하고 모났던 시선도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멍울 따라 흘러내렸다.

세상 다 가진 듯 싱그러운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쓰린 가슴 털어 내는 그 향기를 가득 받아먹었기에.

바람 가득 안은 돛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이젠 옛일을 잊을 수 있어서다. 새것으로 다시 마음을 채울 수 있어서다. 정겹게 다가와 준 이가 그렇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잔잔히 불어온 실바람이 마지막 남은 찌꺼기까지 가지고 아현의 눈가를 스쳐 갔다.

휘리릭! 휘릭!

휘도는 춤사위가 허공을 가르길 한참, 흥겨움 가득한 몸짓 내내 무윤의 입가엔 그윽한 미소가 가득 담겼다.

그 미소의 시작은 자수만 전해 주고 뒤돌아서던 찰나, 아현이 수줍게 꺼낸 말 덕분이다.

그 간절한 눈망울이 뭘 말하는지 모를 수 없다. 그래서 기쁜 마음에 연주를 듣던 도중 떠오른 생각.

‘소려도 금을 좋아했었지.’

현을 쓸어내리는 아현이와 천 년 전 월소려가 겹쳐지자 곧 아련함이 한가득 밀려왔다.

한창 커 가던 소려가 가장 좋아한 게 음(音)이었다. 금은 물론 비파(琵琶), 적자(笛子, 피리), 퉁소(洞簫)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기를 다루고 싶어 했던 그녀.

집무실 한쪽에서 매번 악기 연주를 하면서 했던 말이 있다.

-숙부, 제가 나중에 노래도 만들어서 들려드릴게요.

-정말?

-아직 서툴러서 그런데 좀만 기다리세요.

-난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지금 들려주면 안 될까?

-죄송한데 제 맘에 드는 걸로 들려드리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기다리지 뭐.

소려가 만든 곡은 결국 듣지 못했다. 얼마 안 있어 떠나 버렸으니까.

그런 월소려와 유선 덕분에 나름 음에 대한 조예는 누구 못지않은 무윤이다.

아직 아현의 연주는 서툰 데다 곡의 짜임새 또한 부족한 게 여실히 드러났다. 현을 쓰다듬는 손도 부자연스럽게 떨렸다.

한데 그 어리숙함이 무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걱정하는 거야.’

달라진 모습으로 찾아와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전한 오라버니. 무섭고 냉하기만 하던 이가 그간의 미안함을 직접 한 자수에 가득 담았다.

그럼에도 선뜻 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책망. 그 미안함과 함께 자신도 마음을 열어 보겠다고 알리는 연주다.

혹시나 연주의 부족함에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온몸과 소리에 가득 담겼다.

가슴이 아릴 수밖에 없다. 가슴 저 깊은 곳까지 여린 동생의 마음이 전한 떨림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

가족이되 가족이 아닌 사이. 아니, 서로를 무시할 땐 가족보다도 못한 사이다. 그 갈등 속에 언제나 약자는 아현이었다.

강자는 무시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툭 던지고 가 버리면 끝이다.

한데 약자의 상처는 남이 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쓰라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스스로 더 큰 상처를 만든다.

자기 비하, 그 절망과 고통의 나락에 빠지게 만든다.

그걸 벗어날 가장 쉬운 방법은 회피와 외면이다. 무윤이 내민 손길을 아현이 주저했듯이.

하지만 가슴의 멍울은 계속 쌓여만 간다.

그래서 금 연주를 제안한 아현이 너무 반가웠다.

그 속엔 용서와 화해만이 담긴 게 아니다.

마주 보고 직시함으로 스스로 상처 내지 않겠다는 결연함, 그 나락을 딛고 설 방법을 스스로 찾아감을 알리는 신호가 가득했다.

그 뜻이 담긴 연주를 듣는 내내 떠오르는 입가의 미소는 당연했다.

어긋난 장단은 통통 튀는 빗방울처럼 활기차게 느껴졌다.

매끄럽지 못한 선율은 떨리는 가슴의 온기를 전했다.

한껏 떨리지만 멈추지 않는 손끝은 두려움을 떨치고 있음을 알렸다.

무윤에겐 그 마음을 북돋아 줄 방법이 있었다.

연주 도중 살며시 일어나 소맷자락을 하늘로 뿌렸다. 그 안에 신기심의공 기쁨과 즐거움의 기운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것으로 아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려고.

그렇게 아현의 연주에 보답하던 어느 순간 깨달았다. 절로 흥얼거렸던 콧노래가 몸을 울리는 걸, 어깨춤을 절로 부르는 걸.

어느새 몸에 스며든 흥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제대로 추고 싶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듯 그저 온몸을 허공에 날리고 싶었다. 그 드높게 뿌려진 춤사위에 고마움 담뿍 담아 전하고 싶었다.

그 마음 탓에 벌어진 춤사위다.

얼마 후.

연사구의 환한 웃음이 주변을 둘렀다.

“거보세요, 제 말이 맞죠?”

류선화의 멍해진 시선은 아들의 몸짓을 떠나지 못했다.

‘어쩜!’

온몸 휘날림이 예사롭지 않음은 접하자마자 알았다. 한데 눈앞에서 출렁인 춤사위가 파도처럼 넘실거릴 즈음,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 기운이 주위를 감쌌다.

사라라! 스르륵!

잔잔하고 따스한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마음을 일렁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콩닥거린 가슴이 몸을 간지럽혔다. 어느새 아들의 손짓 따라 어깨가 들썩였다.

춤을 춰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시나브로 늘어난 흥이 따라 하고픈 욕구를 일깨웠다.

‘흥겨워!’

몸을 살랑거리는 건 그녀만이 아니다. 모두의 흥 담긴 흐느적거림이 어깨춤 덩실대는 춤꾼의 장단에 맞춰졌다.

사라락! 사락!

“이거 보기만 해도 흥이 돋네.”

“그러게요. 나도 따라 추고 싶어지네.”

“정말 춤이 멋져요!”

그렇게 대지를 번갈아 가며 발이 연이은 장단을 불러올 즈음, 류선화의 발갛게 상기된 뺨이 가볍지 않은 흥분을 알렸다.

‘너무 편안해. 정말 다 떨쳐 버렸어.’

아들의 춤사위와 표정이 전해 준 안도감이다.

저 여린 미소 그 어디에도 분노와 울분, 불안, 초조함은 보이지 않았다.

칠 년 세월의 아픔이 혹 남았을까 하는 염려는 이제 훨훨 날려 보내도 될 듯했다.

비슷한 표정이 가족 사이에 쌓여 갈 무렵, 한 줄기 전음이 모두의 뇌리를 때렸다.

-다들 조용! 절대 움직이거나 떠들면 안 됩니다.

-……?

연사구는 다급함에 평소 말투가 그대로 나왔다.

-저 새끼 눈감았잖아요. 망아에 들지 몰라요. 아우! 하여간 재수 없는 놈이라니까 정말!

-……!

바람결에 흩날린 몸짓 그대로 무윤의 눈은 사르르 감겼다.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던 춤사위는 어느덧 제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휘리릭! 휘릭!

무윤은 넋 없이 휘도는 자신을 서서히 잊어버렸다. 입가엔 사르르 미소가 감돌았다.

지금 찾아든 건 무(武)가 아닌 무(舞), 춤의 심연이 부른 상념이다.

여휘가 무심(無心)으로 남긴 천라무(天羅舞), 그 토대에 자신은 유심(有心)을 올렸다.

그렇게 만든 춤이자 무공인 천라칠상무(天羅七想舞), 그 진체가 완성된 순간이다.

여동생 아현이 가져다준 기연이나 다름없다.

천라칠상무는 인간의 칠정(七情) 모두를 섞어 풀어내야 그 극에 다가갈 수 있다.

무윤은 그간 여러 사람을 떠올려 칠정을 끌어냈다. 한 사람과 모든 감정을 지극한 수준까지 교감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 탓에 진체에 다가가기 어려웠다.

비슷한 감정은 몰라도 기쁨과 분노, 즐거움과 슬픔, 사랑과 미움 등 극히 상반되는 감정을 한 사람이 다 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한데 아현은 이전 무윤과는 분노, 슬픔, 미움 그리고 지금 무윤과는 기쁨과 즐거움을 나눴다. 거기에 소려와 겹쳐진 아현의 애잔함까지.

과거 무윤과 지금 무윤이 가졌던 복합적인 감정 덕분에 찾아온 행운인 셈이다.

오늘 깨달음은 내면의 길을 찾은 것이라 상념은 길지 않았다.

감은 눈을 살포시 뜨는 순간.

“뭐야, 이번엔 작은 거야? 금방 깨나네.”

“아니.”

“그럼?”

“어떤 의미론 더 크다고 할 수 있지.”

“……?”

친구 여휘가 바랐던 건 단 하나다.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라는 것.

그 방법 중 하나가 춤이었다. 가장 어렵게 생각했던 과제 중 하나.

그걸 이뤄 냈는데 가치가 작을 수 없다.

아버지 천중서가 다가왔다. 눈빛엔 초조함과 흥분이 동시에 담겼다.

“몸은 괜찮은 게냐?”

“더할 수 없이 좋습니다.”

“휴, 다행이구나! 이틀 만에 또 깨달음이 와서 놀랐지 뭐냐.”

“다른 분야이되 서로 연관돼서 그런 겁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한데 춤 때문에 그런 것이냐?”

무윤의 따스한 시선은 아현을 향했다.

“금 연주에 영감이 왔다. 아현이 네 덕분이야.”

뜨악한 아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 연주요?”

“그래.”

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떨려서 잘하지도 못했는데…….”

“아니야, 정말 듣기 좋았어.”

“……?”

진실은 속으로만 읊조렸다.

‘떠는 네 마음 덕분에 얻은 거란다.’

처음 뇌양에 올 때 마음가짐은 묵혀 놨던 과제를 해결하려는 의무감이 컸다.

그렇게 찾아온 길인데.

이제야 알았다. 인연의 끈이 어떻게 연결됐건.

동생 무진의 끝이 휘어진 눈썹, 누나 소은의 올라간 콧잔등, 아현이의 보조개, 그 모든 것이 내게도 있다.

저 얼굴에 내가 있고, 내 얼굴에 저들이 투영된다.

저들은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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