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61화 (61/161)

61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백건아, 나머지 사대세가가 우릴 어찌 본다고 여기느냐?”

가주 서문헌은 근원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그래야 이 모든 일이 설명이 된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른 소가주들이 널 어찌 대하더냐? 느낀 대로 말해 보거라.”

서문백건은 흉중에 있던 불만을 털어놓았다.

“다른 이와 있을 땐 그 격을 맞춰 주지만 따로 있을 땐 그러지 않습니다.”

“아랫사람으로 여기더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속이 아팠겠구나.”

“……참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주 서문헌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이제부터 할 말엔 많은 소회가 담길 수밖에 없다.

“그래, 이 아비도 그랬다. 아니, 가주가 된 지금은 더 참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구나.”

“갑자기 그 말씀은 왜?”

“그 네 곳은 천 년 넘게 오대세가에서 빠진 적이 없지. 하나 나머지 한 곳은 수시로 바뀌어 왔다. 그 이유가 뭔지 아느냐?”

“……오랜 세월을 버틸 저력이 없었던 게 아닐지.”

“그게 핵심이지. 하나 그 이면엔 나머지 네 곳의 견제와 속내가 있다. 그 또한 알겠지?”

“어찌 모르겠습니까? 자신들 위로는 그 누구도 용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커 오는 가문이 있으면 우리처럼 말석에 앉혀 놓고 지켜보다, 더 커질 거 같으면 합심해 찍어 누르는 게 저들이죠.”

“맞다. 놈들에게 우리는 자신들을 위한 소모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서문백건은 이참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아버님은 저들 위에 서고자 하십니까?”

가주 서문헌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이다. 내 대는 물론이고 너 때도 그럴 수 없다. 천 년 넘게 이어 온 저들이야. 결코 적이 되어선 안 돼.”

“그럼?”

“떨어낼 존재가 아니게 돼야지. 그게 이 아비 목표다.”

“어떻게 말입니까?”

“세상이 인정하는 강한 세가가 다섯이 아닌 여섯이 되면? 또는 일곱이 되면?”

“우리 대신 남들을 떨어내게 말입니까?”

“그래, 이 아비가 오대 연합을 칠대 연합으로 바꾸려는 이유가 그것이다. 또한 그러면서 네 곳과 더 밀착하려는 것도.”

“그래서 혼사를 추진하거나 상거래도 늘리고 있잖습니까?”

“그 정도로는 안 된다. 떼어 내면 자기 살이 도려내듯 아파야 한 몸이라 할 수 있지.”

서문백건의 눈이 번득였다. 아버지 말에 담긴 뜻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번 일이 그런 거란 말씀입니까?”

“그래. 삼십 년 전 마공의 공동 연구는 그걸 위해 이 아비가 만든 작품이다.”

“아버님께서요? ……어떻게?”

“당시 가문마다 간혹 마공을 익힌 자가 나와 골치였지. 그때 소가주 모임에서 슬쩍 흘렸다. 공야의숙과 치료제 개발을 몰래 추진한다고.”

“관심을 가진 모양이군요.”

“가지게 만들었지. 마인 치료와 연구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더니 다들 동참했다. 그 후로 가문마다 비밀리에 책임자를 지정해서 나와 일을 해 왔던 거고. 떼려야 뗄 수 없는 끈을 만들려고 한 게지.”

서문백건은 그제야 이해되는 게 있었다.

“아! 그래서 저들이 계속 공야의숙 연구진을 없애라고 해도 차일피일 미루셨군요?”

“그래, 남궁과 팽가가 수십 년 전 공야장주 사고 때 이미 손을 뗐고, 당문과 제갈만 이어 오다 그들도 몇 년 전부터 따로 연구하잖느냐. 하나 그 존재가 있는 한 저들은 우리와 한배일 수밖에 없지.”

“하면 이번 일은?”

“없애라는 요구를 더는 미룰 수 없어 고민하던 차에 사야홀(私夜笏)이 접근해 온 게다. 더 지속하지 못할 바에야 세상에 퍼트려 근거를 남겨 두는 게 차선책이었지.”

잠시 생각하던 서문백건은 말을 이었다.

“이제 뜻을 알겠습니다. 그럼 소문이야 적당히 퍼지게 뒀다가 주워 담으면 되겠죠. 한데 형산파 문제는 간단치가 않은데 어찌하실 건지?”

그때 군사 서문신유가 나섰다.

“그 또한 이미 복안을 세우고 한 게야. 사야홀은 마단을 실리파에만 뿌릴 거라 예상했는데 역시 그랬다.”

“그게 왜?”

“형산파는 내부 갈등이 첨예하지 않느냐. 장문인과 장로 건천 등 실리파는 마단을 먹은 이상, 안에서 명분파를 막을 해법이 없지. 그때 밖으로 눈 돌릴 수밖에 없는 패를 던지면 어떻게 될까?”

“그런 패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형산파에 약을 뿌린 배후로 악양 사파 봉천문을 지목할 생각이다. 네겐 얘기 안 했다만 이미 마단을 뿌려서 증거까지 만들어 놓았다. 거길 같이 공격하자고 하면?”

“아! 실리파는 덥석 물 수밖에 없겠군요. 명분파 또한 배후가 드러났으니 내부 논란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고.”

“거기에 호남 정파 무가 몇 곳도 동참하게 하면 명분에다 모양새까지 나오지. 어차피 전면전은 우리나 그쪽이나 부담이라 세만 과시하다 적당히 끝낼 수 있다.”

“그러면 되겠군요. 혹 문제가 생겨도 악양이니 우리야 언제든 발 빼면 그만이고.”

“그래, 넌 이제부터 참여할 정파 무가를 모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참! 남쪽의 하후가도 넣어야겠지요?”

“그래야지. 채령이가 있으니 문제없을 게다.”

“……!”

하후태의 어머니, 서문채령은 가주 서문헌의 여동생이다.

얼마 후.

혼자 남은 가주 서문헌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복잡한 심사를 알리듯 깊어진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무열이, 자네 속은 다 보인다네.’

남궁무열.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 세가, 남궁의 가주.

세상엔 친한 벗으로 알려졌지만, 서로의 속엔 물론 다른 게 있다.

‘공야의숙 연구진이 사라진다고 자네 경쟁자였던 남궁천우를 쳐 낸 사실이 없어질 거 같은가. 이미 증거는 내 손에 있다네.’

서문헌이 마공 연구를 계속하려던 또 하나의 이유다.

아직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

공야의숙의 마단 연구 중단을 뒤에서 주도하는 건 남궁무열이다.

삼십 년 전, 오대세가 소가주들만 알고 비밀리에 진행하던 공야의숙 일이 가주들에게 알려진 건, 공야지명이 피살된 일 때문이다.

오대세가 가주들이 노발대발한 건 당연한 일.

남궁과 팽가는 당장 손을 뗐고, 제갈과 당문은 더욱 은밀하게 연구하는 조건으로 지속했었다.

당연히 책임자 문책도 따랐다.

그때 남궁의 책임자였던 남궁천우는 천하의 기재로 알려진 이.

이 일을 반대하던 그를 책임자로 앉힌 것도, 서류를 조작해 마공 연구에 개입한 흔적을 남긴 것도 다 남궁무열이 한 짓이다.

공야지명에게 슬쩍 마공 연구를 알려 그 사달을 만든 것 또한.

그 모든 것이 천하제일 가문의 가주 경쟁자를 없애기 위한 술수였다.

이제 세상에 그 일을 알고 증거를 가진 건 서문헌 뿐이다.

물론 증거가 있어도 세상에 내놓는다 한들 남궁이 덮어 버리면 그만이다.

‘하나 자네 아버지는 다르지.’

검성 남궁진. 당시 가주이던 그는 남궁천우가 나서서 그 일을 주도한 걸로 알기에, 멸마단으로 보내 가문으로 돌아오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 후 남궁천우는 멸마단에서 마인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한데 그런 일을 벌인 남궁무열이 조금씩 가문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느껴진다.

서문헌의 염원은 가문이 영원히 오대세가에 머무르는 것.

‘우릴 내치려 하지 말게. 나도 이 패를 정말 쓰고 싶지 않다네.’

그럴 일이 없는 게 최선이다.

이 패를 가주 남궁무열에게 알려 압박해도, 검성에게 몰래 전해 설사 가주가 바뀐다 해도 서문가를 좋게 볼 리가 없다.

쓸 수 있되 쓰지 않는 게 가장 좋은 패다.

지금은 그저 가주 남궁무열이 더 멀리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다음 날 오후, 천가장.

“무윤이는 어디 갔나요? 아침부터 안 보이네요.”

“아 예, 일이 있어서 나갔는데 저녁까진 온답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연사구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냥 뭐 좀 알아보러 갔어요.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무윤은 다친 상처를 치료하러 곽호산에게 갔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나는 피가 옷에 드러나서는 안 되니까.

어머니 류선화의 눈이 반짝였다.

‘잘됐네. 무윤이한테 직접 묻기 그랬는데.’

슬며시 속내를 꺼내 들었다.

“저기, 무윤이가 키우겠다는 아이…….”

“아, 소려요! 어머님도 보시면 좋아하실 거예요. 귀엽고 정말 예쁘거든요.”

“그 아이 엄마가 유선이라는 기녀라고 했죠?”

“예, 뭐 궁금한 거라도 있으세요?”

“저기, 혹시 무윤이가 좋아했는지 해서…….”

연사구는 바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뭘 걱정하는지 바로 감이 왔다.

“하하! 난 또 무슨 말씀이라고. 무윤이가 혼인할 생각이 없을까 봐 그러시는 거죠? 유선 누나를 못 잊어서.”

“사실 걱정이 돼요. 그냥 돌봐 줘도 되는데 굳이 딸로 키우겠다고 하니까 혹시 마음에 담아 뒀나 해서.”

“아닙니다, 어머님. 절대 그런 사이가 아녜요. 유선 누나한테 춤을 배우면서 소려하고 정이 많이 들어서 그래요.”

“……춤이요?”

“예, 무윤이가 춤추는 걸 좋아해요. 근데 유선 누나가 침주 최고 예기(藝妓)라서 인연이 된 거예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긴 한데. 무윤이가 춤을 춘다고요?”

“예! 한번 보여 달라고 하세요.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하하!”

“……?”

그때 무진과 함은진이 찾아왔다.

“형은 어디 갔나요?”

“응, 저녁때 올 거야.”

“그래요? 그럼 기다려야겠네.”

연사구의 시선이 함은진을 향했다. 야릇한 미소도 함께했다. 어제 일을 들어서다.

“전 무윤이 친구 연사구라고 하는데, 축하드립니다. 좋은 일이죠, 하하!”

함은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예, 그렇게 됐네요.”

“야, 두 분 보니 정말 부럽네요! 에고, 나는 언제나 내 님 만나러 가려나.”

“연인께서 멀리 계시나 보죠?”

“휴! 장사(長沙)에 있어요.”

“그럼 며칠이면 될 텐데 다녀오시지 그러세요.”

“침주에 끝내야 할 일이 있어요. 무윤이도 그래서 바로 가 봐야 하고.”

그때 무진의 시선이 연사구를 향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아직 형한테 궁금한 것도 많은데.”

“그럴까. 뭐든 물어봐. 그 새끼 속도 감춘 거 빼고는 다 아니까.”

“그런 거 압니다. 말씀 많이 해 주셨잖아요.”

“그래도 남은 거 많아. 가자 다 알려 줄 테니까.”

“……!”

잠시 후, 내원 별실에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하후진이라고 동갑내기가 있는데 이 새, 아니 무윤이가 얼마나 패 대는지 맨날 울고 간다니까요.”

무진은 피식 웃었다.

“에이! 설마, 그런다고 울기야 하겠어요.”

“무진아, 넌 남의 일 아닌데.”

“배우다 보면 터질 때도 있죠. 그게 겁나면 뭘 배우겠어요.”

연사구의 눈빛이 야릇해졌다.

“그래, 내일 보자. 네가 제발 그만하자고 하나 안 하나.”

“그러시죠. 전 자신 있으니까요.”

류화선은 아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참! 무윤이가 정말 춤을 잘 추나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보여 달라고 하세요.”

그때 둘째어머니 구채령이 황급히 뛰어왔다. 떨림 가득한 눈엔 뭔지 모를 당혹감이 잔뜩 서렸다.

“아! 다들 여기 계셨네요.”

류화선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어서 와. 무윤이는 어디 가서 이분께 얘기 듣고 있었어.”

“예? 무윤이는 아현이하고 같이 있는데.”

“응? 거기 있다고?”

“예, 제가 아현이가 금(琴) 타는 걸 좋아한다고 알려 줬더니 그걸로 자수해서 가지고 왔어요.”

“아! 그래? 아현이는 좋아하고?”

“그럼요. 참! 그것 때문에 온 건데, 아무래도 같이 가 보시는 게 좋겠어요.”

“왜? 무슨 일 있어?”

“아현이가 선물 고맙다고 금 연주를 해 줬어요. 근데 무윤이가 듣다가 갑자기 춤을 추고 있는데, 그게 좀 이상해서…….”

“뭐가 말인가?”

구채령의 눈빛엔 초조함과 흥분이 동시에 담겼다.

“뭐라고 말씀 못 드리겠어요. 보고 있자니 가슴이 막 쿵쾅거리는데, 좋기도 하고 뭔가 오묘하기도 한 게…….”

그때 연사구가 벌떡 일어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그렇구나!”

“형님, 왜 그러십니까?”

“어서 가자. 한 단계 더 올라갔으니 춤도 그렇겠어.”

“올라가다니요? 뭐가?”

“그런 게 있다. 오늘 대단한 춤을 보게 될지도 몰라. 빨리 가자.”

“……?”

가족 모두가 한달음에 내달렸다.

타다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