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주변 숲속.
‘시팔! 내가 숨어 있어야 한단 말이지!’
연사구는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싸우는 소리에 은밀히 다가와 살필 때, 무윤이 보낸 전음이 있다.
-나 혼자 나선다.
-왜?
-강자다. 절대 껴들 생각 마라. 그게 돕는 거야.
-……그 정도냐?
-부딪쳐 봐야 알겠어.
-……!
처음 봤다. 무윤이 긴장하는 모습을. 그것도 오늘 한 단계 경지를 올린 놈인데.
그런 자에게 무윤이 다가가는 게 보였다.
연사구는 숨죽인 채 나직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우선 할 일이 있다.
‘혼자 왔는지 살펴야지.’
그걸 파악해 무윤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야 전력으로 싸울지, 싸움을 물리고 천가장으로 갈지 판단할 수 있다. 그만큼 위험한 상대라고 했으니까.
거기에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불리하면 튀어 나가야지 뭐.’
무윤은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연사구가 얼추 확인할 때까진 시간을 끌어야 한다.
“남의 말을 잘 믿나?”
“……?”
“이상해서. 그렇게 새까맣게 둘러쓴 놈들은 의심이 많던데.”
홍이암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그런 편이지. 여기도 그래서 온 거니까.”
무윤은 상대의 웃음을 그대로 돌려줬다.
“아무리 그래도 정신이 회까닥한 놈 말은 믿는 게 아닌데.”
“제정신이었네. 죽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럼 멍청이지. 죽을 때도 몰랐으면.”
“왜지?”
“제 성질에 화냈으니까. 진언엔 짜증만 내다가 자길 두들겨 팼던 멸마단 여자를 보더니 획 돌아 버렸어.”
“어떻게 단정하지?”
“생각해 봐. 아랫도리 까 내리고 막 할 때 흠씬 두들겨 맞았어. 근데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팬 여자가 눈앞에 떡하니 있으면?”
“……짐작은 가는군. 한데 그것뿐이다?”
무윤의 눈가에 찰나의 섬광이 스쳐 갔다. 연사구에게서 답이 왔다.
-혼자 왔어.
이젠 궁금한 걸 물어도 된다.
“이 정도 답했으니 나도 하나 묻지.”
“넌 답변만 하면 된다. 싫으면 저자처럼 만들어 주지.”
무윤은 가볍게 손사래 쳤다.
“그럼 듣기만 해. 혹시 알아, 답해 줄 마음이 생길지?”
“……?”
“너 같은 자도 먹나?”
“……무슨 소리지?”
“딱 봐도 벽 하나만 남겨 둔 거 같은데, 당신 같은 자도 그 약이 필요한지 묻는 거야.”
홍이암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놈이 어떻게?’
살핀 놈의 기운은 분명 절정 중반 내외다. 한데 초절정 끝자락인 자신의 경지를 가늠하다니.
궁금함에 흉중에 품은 의문을 그대로 흘렸다.
“그 기운으로 짐작한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홍이암은 문득 실소가 절로 흘렀다.
“크크! 참 재밌는 놈일세. 날 알아보는 것도 그렇고 그 실력으로 그 배짱인 것도. 정말 오길 잘한 거 같군.”
“대답 안 해 줄 건가?”
“강호에선 실력이 답이지. 넌 들을 자격이…….”
말을 끊어 낸 일 보의 진각이 대지를 긁었다. 엄청난 경파와 함께 폭발한 힘이 거센 바람을 불렀다.
휘이익!
땅을 박찬 무윤의 주변으로 원형의 기파가 퍼져 나갔다.
파팟!
온몸을 자극하는 예기에 홍이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흑도방주치고는 괜찮은……?’
순간 두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저건!’
하지만 놀람은 찰나였다. 바로 불꽃같은 열기와 함께 성난 맹수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누구냐 넌?’
눈앞에 있는 놈은 흑도방주 무윤이 아니다.
그런 놈이 휘두르는 검격에 시퍼런 강기가 회오리칠 수는 없다.
더 고민할 이유가 없다. 직접 확인하면 그뿐.
진각을 밟는 홍이암의 칼날에도 시퍼런 기운이 솟구쳤다.
부르르 떠는 주변의 기파가 알렸다. 같은 강기가 맺힌 도임을.
위이잉!
무윤의 검강이 세상을 갈라놓듯이 쏘아졌다.
쇄애액!
시퍼런 빛이 올라온 홍이암의 도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창천을 닮은 짙푸른 도강이 쏟아지는 검격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슈우욱!
미증유의 두 힘이 부딪치는 순간, 대기를 찢어발긴 폭풍은 거대한 파공음과 함께 시퍼런 빛을 사방에 토해 냈다.
쾅! 콰쾅! 카아앙!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거대한 풍압은 선운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휘리릭!
선운의 눈이 멍해졌다. 생각이란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순식간에 뒤엉킨 신형이 쏟아 내는 수십 줄기 빛의 파편.
그 빛이 선운의 시야에 선연히 아롱거렸다. 모를 수가 없다.
‘가, 강기!’
다친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도 몰랐다. 두 눈이 부릅떠지고 입이 쩍 벌어진 것도.
승부는 뒷전이다. 넋 나간 듯 망연자실한 시선은 한 사람을 떠나지 못했다.
‘어찌?’
귀찮은 일 하나 처리하고 더는 볼 생각도, 떠올릴 이유도 없던 자다. 게다가 오늘은 처음 볼 때부터 왠지 달갑지 않았고.
그래도 죽는 마당에 찾아온지라 아린 마음만 있었는데.
푸르러진 빛을 담아 허공을 가르는 저 검 끝엔 일생의 염원이었던 강기가 일렁인다. 그 짙은 청색 광채가 두 눈을 스칠 때마다 오만 가지 격동에 가슴이 요동쳤다.
‘저런 자였다니!’
무윤의 말마따나 흑의인은 초절정 극에 달한 고수. 초절정 초반인 자신을 단 두 수 만에 이 꼴로 만든 자니까.
한데 그런 자를 상대하는 싸움에 거리낌이 없다. 물러섬이 없다. 허공을 행도하는 검엔 주저함이 없다. 불꽃 서린 안광엔 두려움도 없다.
그런 무사였다.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가지 못했던 그 길을 걸어가는 자.
순간 잊고 있었던 뭔가가 심장의 떨림을 가져왔다. 눈가도 파르르 떨려 왔다.
‘이건!’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느낌.
그건 열망과 격동이다. 무인의 꿈을 키워 나가던 어린 그 시절, 스승의 검을 보며 간직하고 키워 갔던 그 떨림.
언제부터인지 긴 어둠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잊어버렸던 그것인데, 죽음이 닥친 이 순간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다니.
짧은 소회 하나가 눈가에 촉촉함을 불러왔다.
‘그리 살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찾아온 내면의 아림은 어둠의 장막 안에 하나둘 불을 밝혔다. 어느새 깊은 잠에서 깨어 마주한 환한 빛처럼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제 선운에게 격렬한 눈앞의 광경은 그저 흐릿함이 됐다. 그 안개 위로 떠오른 건 과거의 주마등이다.
다행히 끝없이 밀려오는 건 후회와 한만이 아니다. 그 사이사이 아끼는 이들이 전한 따스함이 아린 가슴을 쓰다듬는다.
선운의 멍한 시선이 능선 너머 저 멀리 아스라진 노을을 향했다.
어느새 심상에 남은 건 그리운 이의 손짓만이다. 영혼의 떨림처럼 심장을 어루만진 그 손길은 훌훌 털어 버린 자에게 은은한 미소를 안겼다.
욕망에 부둥켜안았던 것을 놓음에 찾아든 안식이다.
한편 검과 도가 만들어 낸 무수한 그림자가 빛 사이를 오가고, 뇌성과 함께 허공을 터트리는 폭음이 한동안 이어질 즈음.
무윤을 노려보던 홍이암의 신형이 급히 퇴보를 밟았다.
파파팟!
수세에 몰려서가 아니다. 궁금함이 도를 잠시 내리게 했다.
“누구냐 넌?”
“그 전에 답부터 줘야지. 아까 그랬지, 강호에선 실력이 답이라고? 이 정도면 들을 자격은 될 거 같은데.”
“……뭘 물었지?”
“너 같은 자도 약이 필요하냐고.”
“……약이자 독이지. 선택일 뿐이다.”
“빤한 답인데 또한 정답처럼 들리네.”
“이제 네 차례다. 누구냐?”
“왜 묻는지 알겠는데, 난 무윤이 맞다.”
“무윤은 서른이 안 됐다고 했지. 좀 그럴싸한 거짓말이 낫지 않겠나?”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죽는다. 그게 날지도 모르고. 그런 소중한 시간에 거짓말은 별로야.”
“정말 그 나이에 그 경지라고?”
“배운 게 좀 특이해. 약 기운도 그래서 느끼는 거고. 근데 너한텐 약 기운이 안 느껴졌거든. 안 먹었거나 먹은 지 오래됐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 기운 사실이군.”
“전혀 안 먹었나?”
“먹지 않았다. 내 길을 믿으니까.”
이제 말을 끝낼 때가 됐다. 더 묻는다고 답해 줄 이가 아니다.
“이거 미안한데. 그 길 더는 못 갈지도 몰라.”
홍이암은 정말 궁금해 물었다.
“넌 정말 대단한 놈이다. 인정하지. 한데 내겐 아직 부족해. 그걸 모르겠나?”
“아까 말했지, 특이한 걸 익혔다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홍이암은 아쉬운 마음에 진정을 실었다.
“흑도방주도 했다 들었어. 우리와 같이할 생각 없나? 진심으로 묻는 말일세.”
“난 사파나 사도련에 원한 같은 건 없어. 정파를 좋아하지도 않고. 근데 이딴 짓 하는 곳에 낄 생각도 없지.”
“어쩔 수 없군. 무인으로 보내 주지.”
“마찬가지. 그나마 너 같은 자라 다행이야. 처음으로 내 걸 다 보여 줄 상대가.”
“고맙게 보겠네. 나 또한 그러지.”
“아! 이건 예의상 말해야겠네. 이젠 검을 안 쓸 거야.”
“무슨 소리지?”
무윤은 씩 웃음과 동시에 주먹을 들어 보였다.
“난 권사거든. 검은 아직 서툴러.”
“……?”
서서히 잔불꽃이 일렁거리는 무형의 기파가 주먹에 둘러졌다. 신기심의공 초극의 힘이 더해진 권격이 더욱 푸르러진 빛과 함께 허공을 갈랐다.
슈우욱!
홍이암은 깊고 장중한 숨을 내쉬었다. 몸이 아린 찌릿한 기운이 알려 줬다. 무윤이 그냥 한 말이 아님을.
‘내 상대로 인정하마.’
온몸을 휘감은 무인의 투기가 결단을 내렸다. 힘줄이 툭툭 튀어나오고 온몸이 터질 듯 붉어졌다.
전력으로 끌어올린 환사염라도의 살의가 뿜어져 나오는 현상.
그 넘실대는 붉은 기운을 도격에 실었다. 도와 일체가 된 모습 그대로 무윤이 일으킨 바람을 맞았다.
‘오너라!’
하늘로 치켜든 붉은 도신이 햇빛을 갈라 명멸케 했다. 바람을 타 넘은 도가 다가서는 몸뚱이를 탐했다.
휘이익!
돌풍처럼 회전한 도격의 소용돌이가 강력한 힘과 함께 내리꽂히던 순간, 농밀함을 더한 권강의 용틀임이 손 밖으로 올라왔다.
위이잉!
너울 치는 파도처럼 권강의 이지러짐이 극한에 다다랐을 때, 손에서 뿜어진 채 울음을 지어 내던 강대한 기운이 몸부림쳤다.
화라락! 파라락!
성난 불꽃처럼 타오른 강기의 파동이 도격의 소용돌이를 휩쓸었다.
쇄애액!
뇌전 같은 짜릿함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순간, 홍이암의 놀란 눈이 급격히 커졌다. 들불처럼 거세게 밀어닥친 또 다른 폭풍이 눈자위를 움찔거리게 했다.
‘이건?’
짓쳐 드는 무윤의 온몸에서 전율처럼 다가오는 무형의 진기파동.
‘호신막!’
중단전의 초절정은 피부 주변에 기의 와류를 형성해 준다. 호신강기보단 못하지만, 온몸에 방어막 하나를 두른 셈. 무윤이 홍이암의 도격 안으로 몸을 들이밀 수 있는 이유다.
홍이암의 눈썹이 매섭게 꿈틀거렸다.
‘부수면 그만이다.’
극한으로 끌어올린 내력이 사지백해를 제 길인 양 거침없이 내달렸다.
발도와 동시에 모든 걸 날려 버릴 힘이 담긴 도격에 불꽃이 번쩍였다.
파팍! 휘익!
일도양단 도격의 소용돌이는 권강의 안을 꿰뚫고자 날을 들이밀었다.
슈우욱!
두 강기의 충돌이 대기를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광풍을 불렀다.
쾅! 쿠쿵! 콰쾅!
홍이암은 강력한 충격이 무더기로 내리꽂히자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일 보 전진을 위해 반보 물러나야 할 상황.
휘리릭!
순간 무윤은 폭풍이 밀어 낸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초감각이 더해진 초극의 권은 칼날의 주변을 연달아 후려쳤다.
카앙! 카캉!
홍이암은 변칙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우직한 힘과 빠름, 예상의 영역을 뛰어넘은 몸놀림으로 부서트려야 할 상대다. 그것도 근접한 상태에서 광풍처럼 휘몰아치는 권강을 더해서.
그래야만 승부를 볼 수 있는 자다.
처음이다. 모든 힘을 꺼내도 장담할 수 없는 생사의 결투.
그 살 떨리는 긴장감이 무윤의 온몸을 전율시켰다.
이때 마음에 전할 건 하나다.
무인으로서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 마음이 전해진 신기심의공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짓쳐 들어야 한다.
파파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