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얼마 후, 함가장.
함은진의 의아한 시선은 목걸이를 향했다.
“천설청옥(天雪靑玉)?”
“너 천마교가 있다는 신강이라고 들어 봤지?”
“……갑자기 그 얘긴 왜 해?”
“거기 서쪽에 만년 설산이 있는데, 그 빙하 속에 수백만 년 잠들어 있던 청옥이래.”
십오 년 넘게 간직했던 연정이 이제야 결실을 맺게 된 지금.
한동안 눈물방울을 주책없이 흘려 내던 여인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그 후 세상 다 가진 듯 환했던 미소도.
지금 초롱초롱하게 다시없이 빛나는 눈은 전혀 다른 이유다.
‘너무 예뻐! 어떻게 이런 빛이, 거기다 이 향기까지.’
가볍지 않은 흥분이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그럼 아주 귀한 거겠네?”
“형 말로는 호남에서 그거 알아볼 상인도 거의 없대.”
“……이거 얼마쯤 한대?”
“부르는 게 값이라 정해진 게 없대. 워낙 귀해서.”
“그래도 대략?”
연인을 바라보는 무진의 눈이 의미심장해졌다. 이제부터 할 말엔 그래야 했다.
“오다가 세은 전장 어르신한테 들렀어. 형이 절대 어디다 보이면 안 된다고 해서 묻고만 왔지.”
“근데?”
“못해도 천 냥은 할 거래.”
세은 전장 장주는 뇌양에서 보석을 다루는 전문가다.
함은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렇게 작은 게 쌀 오천 석 가치라니.
“너무 비싼 거 아냐? 빛깔이 곱긴 해도 은자 천 냥은 과한데.”
“아니, 은자 말고.”
“……그럼?”
“금자로.”
금자 천 냥은 은자로 만 냥이 훨씬 넘는다. 대략 열두세 배 정도.
함은진은 눈을 살짝 치켜떴다. 천가장 자금 사정을 잘 아는 편이다.
“혼인 예물이라고 가지고 와서는 장난해, 지금?”
“장주 어르신 말씀이 신강에서 전설처럼 불리는 보석이래. 세상에 몇 번 나온 적도 없다고. 누가 그딴 거 있다고 하면 무조건 사기꾼이라 보면 된대.”
여인의 눈에 머금던 빛이 흐려졌다.
“……가짜구나.”
“형은 진짜로 알고 있어. 그래서 위험하다고 너한테는 그냥 귀한 청옥으로 알리라고 했고.”
함은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뭐! 그럼 사기당했단 거잖아! 뭐 해? 당장 가서 얘기해야지. 엄청 비싸게 줬을 텐데.”
“산 게 아니고 친구가 줬대. 물론 그쪽도 진짜로 알고 줬겠지. 둘도 없는 친구라고 했으니까.”
함은진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눈빛만 봐도 연인이 뭘 걱정하는지 느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는데 그래도 알려 주는 게…….”
“은진아, 내 말대로 해 줘. 말했잖아. 형이 이거 만들면서 정말 행복했다고. 실망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잠시 후 함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땅이 꺼져라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었다.
“휴! 그러자. 어쨌든 정말 예뻐. 그럼 됐지 뭐.”
“고맙다.”
“알았어. 근데 나도 무윤 오라버니를 봬야 하지 않을까?”
“하오문 친구가 아주 급한 일이라고 데리고 갔어. 내일 같이 보자.”
“그래.”
진짜가 가짜가 됐다. 하지만 마음은 진짜로 남았다.
* * *
뇌양 외곽으로 가는 길.
“그게 정말이야?”
“너도 안 믿기지? 나도 이게 뭔 일인가 싶더라니까.”
연사구가 화들짝 놀라 달려온 이유.
호남 북쪽 장사(長沙)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발단은 의원 장동백이란 자가 보낸 투서다.
장사의 정, 사 유력 문파와 무림맹 지부, 하오문에 똑같은 내용이 동시에 뿌려졌다.
“투서 내용은?”
“여기.”
무윤은 급히 내용을 살폈다.
[난 공야의숙의 의원 장동백이라 하오. ……중략…… 이처럼 오대세가는 공야의숙에서 그간 마공을 연구해 왔소. ……중략…… 서문가에서 시킨 대로, 형산파에 마단(魔丹)인 뇌호단(腦護丹)을 선단(仙丹)이라 속여 뿌릴 수밖에 없었소. ……중략…… 내 이 죄를 어찌 갚을까 하다 이것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하오.]
핵심은 두 가지다.
오대세가가 공야의숙에서 몰래 마공을 연구했고, 서문가가 형산파에 마단을 몰래 뿌려 봉문시키려 했다는 내용이다.
알고 있던 사실과 얼추 맞아 들어가는 이야기들.
무윤은 잠시 멍한 정신을 추슬렀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질 줄은 몰랐으니.
하나씩 세세히 짚어야 할 일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소문은 덮을 수 없겠네.”
“그럼. 사파 무가에도 뿌렸잖아. 이미 호남 밖까지 다 퍼지고 있어.”
“반응은?”
“서문가는 거짓이라고 바로 반박했어. 장동백 그놈이 음약을 팔고 여인을 겁간한 놈이래. 그게 들통나서 도망갔는데 감추려고 헛소리했다 이거지.”
“그자는?”
“얼마 전에 형주에서 피살됐어. 물론 범인은 오리무중이고.”
“그자가 형산에 약을 뿌렸겠네.”
“거의 확실해. 대여섯 달 형주에 있었고 형산파에 약을 판 건 이미 소문이 났거든.”
“배후에 대해서는?”
“오대세가는 당연히 천마교와 혈교를 거론하지. 어쨌든 그쪽으로 몰아야 부인하기 좋으니까.”
“사도련 얘기는 없고?”
“아직은 없대.”
현 상황을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할 사람은 장사 하오문 지부장이다. 연사구가 따로 알린 게 없어 그쪽 정황만으로 추론한 게 궁금했다.
“아버님은 뭐라고 하셔?”
“길게 쓰셨는데, 뭐 결론은 낄 일이 아니니 신경 끄라는 거지.”
“너한테 한 소리 말고.”
“말하려고 하잖아! 이게 쓸데없이 긁고 지랄이야.”
“……해 봐.”
“아버지 생각은 바로 잠잠해진다는 쪽이야. 증거도 없고 설사 있어도 충분히 덮을 자들이니까. 다만 형산파 일은 아버지도 그렇고 다들 흑막이 있다고 본대. 정황증거가 적지 않으니까.”
“서문가와 형산파에 이목이 집중되겠네.”
“그렇겠지.”
한동안 연사구의 설명이 이어진 후, 무윤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간의 정황들이 하나둘 맞춰진다.
“사도련밖에 안 떠오르네.”
“약 성분이 그렇게 비슷한데 거기밖에 없잖아.”
“예전부터 공야의숙 일을 알았고, 연구 내용도 빼돌리면서 때를 보다가 이번에 터트렸다고 봐야겠네.”
“그런 거겠지. 하여간 신난 건 우리 아버지밖에 없어. 지금쯤 이불 뒤집어쓰고 괴성을 지르고 계실 거다.”
정보를 다루는 곳에서야 이만한 횡재가 없다.
“대박이지.”
“일 년 장사 이걸로 끝이지 뭐. 근데 우린 어떡하지? 여기 뇌양도 그렇고 공야성 형님 일도 있잖아.”
지금 할 말은 빤하다.
“상황이 복잡하잖아. 먼저 움직일 것도 없고. 돌아가는 걸 지켜봐야지.”
그때 연사구는 아직 알리지 않은 얘기가 떠올랐다.
“참! 풍세백 그놈 죽었다.”
“뭐? ……관아에 넘겼다면서?”
“뇌옥에서 피살됐어. 조사 중인데 흔적도 거의 없어서 잡긴 어려울 거래.”
무윤은 한동안 고개만 갸웃거렸다.
“의심 가는 건 사도련인데 좀 이상하네. 마인 혐의가 풀렸는데 굳이 죽일 필요 있나?”
연사구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잊어버려. 상관도 없는 놈인데. 우리 일이나 하자고.”
그 말에 무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가만! 여기 있는 형산파도 바로 알겠지?”
“이 멍청아! 내가 그래서 달려왔잖아. 떠나기 전에 묘예 일 알아봐야지.”
“그 일 알아보는 게 누구야?”
“일대 제자 선운.”
“……!”
오늘 가문에 왔던 그자다.
* * *
한 시진 후.
“헉헉! 쿨럭! 그, 그대는 누군가? ……왜?”
“묻는 말이나 대답하지. 편하게 가고 싶으면.”
검은 죽은피가 꾸역꾸역 입으로 올라온다. 흘러내린 피는 이미 앞섶을 검붉게 물들였다.
온몸을 난도질한 칼은 내장까지 잘라 낸 상태. 이미 죽음은 기정사실이다.
선운의 시선은 절로 상대를 향했다. 깊은 회한이 담긴 씁쓸한 미소엔 마지막 남은 무인의 자존심이 더해졌다.
“쿨럭! 하아! 이 꼴이 됐는데 편하게라, 크크!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고문 기술을 좀 알지. 그 상태에서도 하루는 안 죽이고 괴롭힐 수 있다. 그걸 바라나?”
선운은 상대의 신분 외에도 정말 궁금한 게 있다.
“헉헉! 당최 모르겠군. 그 하찮은 걸 알자고 날 이리했단 말인가? 아는 이도 여럿이거늘.”
“넌 혼자 있었지. 운이 없었다 생각해라.”
“……알아보려는 게 정말 그자의 신분인가?”
“내가 그 외에 물은 게 있나?”
“……그자는 왜 찾는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검은색으로 둘러쓴 자. 예리한 칼날이 담긴 두 눈이 복면 사이로 반짝였다.
“물어볼 게 있다. 더 딴소리하면 아까 말대로 해 주지.”
“……뇌양 천가장의 큰아들, 천무윤이네.”
“뭐 하는 놈이지?”
“칠 년 전 마인으로 몰렸다가 이번에 아닌 걸 밝혔지. 숨어 지낼 땐 흑도방주라 들었다.”
복면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런 놈이 기운을 알아냈다고?”
순간 선운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말에 바로 떠오른 일.
“풍세백! 그자 때문에 온 겐가?”
“진언으로 알아낸 게 맞나?”
그때 대답은 다른 곳에서 흘렀다.
“참, 황당한 놈이네. 죽는 마당에 거짓말이라니.”
흑의인의 시선이 서서히 돌아갔다. 숲속에서 걸어 나올 때부터 기척을 알고 있었다.
“……누구지?”
놀란 선운의 입이 먼저 답했다.
“무윤! 자네가 어찌?”
흑의인의 입꼬리가 바로 올라갔다.
“고맙군, 수고를 덜어 줘서.”
무윤의 아련한 눈은 올곧이 선운을 향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너무 늦었네요.”
흑의인을 살피던 선운의 입이 황급히 열렸다.
“도, 도망가게, 어서! 자네 상대가 아니야!”
“그럼 도망도 못 가겠죠.”
“……!”
무윤이 서서히 돌아섰다. 흑의인을 향한 눈에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우선 느껴지는 것.
‘약 기운은 없어.’
약을 안 먹었거나 약 기운이 사라졌거나 둘 중 하나다.
한편 사야홀(私夜笏)의 밀단주 홍이암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도 무윤을 떠날 줄 몰랐다.
‘정말일까?’
뇌옥에 있던 풍세백을 조사하고 죽이기 직전, 놈이 발버둥 치다 한 말이 마음에 걸려서 온 자리다.
-저, 저를 왜?
-들킨 게 죄다. 그리 알고 가라.
-아닙니다. 약을 먹은 건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이상한 놈도 낌새만 눈치챘을 뿐입니다. 아니면 저들이 왜 풀어 줬겠습니까?
-이상한 놈이 낌새를 눈치챘다고? 무슨 소리지?
-…….
홍이암은 며칠 전 장로 황염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엔 풍세백이 풀려난 걸 몰랐다.
“무조건 풍세백을 죽이게.”
“장로님, 지금쯤이면 약효는 사라졌을 텐데 무림맹이 알 수 있겠습니까? 괜히 관심만 가지게 하는 건 아닐지.”
“나도 모른다고 보네. 하나 중요한 건 무림맹이 아니야.”
“그럼?”
“혈교 때문일세. 일을 방치하면 연구진을 빼돌린 걸 저들이 알게 될지 모르네.”
이십여 년 전, 사야홀은 혈교에서 도망치던 마단 연구진 일부를 은밀히 끌어들였다. 그 후 연구는 급진전됐고 몇 년 전 성과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 일이 아직 혈교에 알려지면 안 된다.
홍이암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혈교가 어떻게?”
“풍세백이 광동에서 벌인 일은 이미 소문이 났어. 그것만으로도 위험하지. 게다가 무림맹이 조사하려면 외부 의원에게 자문할 수밖에 없네. 세작들을 통해 혈교가 그 내용을 접하면 누굴 의심하겠나? 지금 그런 약을 만들 수 있는 자들이야 빤하거늘.”
“……혈교 연구진을 빼돌린 게 우리라고 생각하겠군요.”
“의심이 아니라 확신할 걸세. 그럼 혈교와 싸우는 건 물론이고 향후 연구도 힘들어지네.”
홍이암은 다시 궁금한 게 생겼다.
“한데 놈을 죽인다 해도 광동 소문은 퍼질 거 아닙니까?”
“그렇지. 해서 이참에 공야의숙 건도 터트리세. 저들의 눈을 확실히 돌리려면 그만한 게 없지 않나.”
사야홀은 의원 장동백을 이용해 공야의숙에서 뇌호단(腦護丹)을 몰래 빼낸 다음 형산에 뿌렸다.
이제 오대세가 짓으로 꾸미는 일만 남은 상태. 물론 목적은 정파 간의 자중지란(自中之亂).
좀 더 약이 퍼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혈교의 시선을 돌리는 게 더 급하다.
홍이암은 문득 걱정되는 게 떠올랐다.
독자적으로 연구하던 공야의숙엔 상단전 약이 두 가지 있다.
실패한 뇌호단과 부작용을 거의 없앤 상령단(上靈丹).
“형산파엔 실패한 뇌호단만 뿌렸습니다. 혈교야 그 정도 약은 예전부터 있던 걸 아는데, 연구진이 오대세가로 갔다고 의심하겠습니까?”
장로 황염의 미소가 짙어졌다.
“상령단의 존재를 알리면 되지 않겠나.”
“흘릴 소문에다 그 내용까지 넣자는 말씀이군요?”
“약효까지 흘리면 더 확실할 게야. 그리하면 형산파도 더 열이 받겠지. 마공을 뿌린 것도 그런데 실패한 걸 줬으니 말일세.”
“하하! 일석이조군요. 알겠습니다. 다녀오지요.”
자신들이 만든 심령환(心靈丸)은 혈교에서 온 이들의 연구에 오대세가의 상령단 정보가 더해진 결과물이다. 상령단보다 더 안전하고 약효 또한 은밀한 건 당연지사.
자신의 주군인 사야홀주와 약을 담당한 장로 황염도 몸을 확인해야만 약 기운을 감지할 정도인데 그걸 알아본 놈.
풍세백의 말이 찜찜해 확인해 보니 그 일을 본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나선 걸음.
이제 그 진위를 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