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천가장 회의실.
“그럼 그게 우연이란 말이냐?”
“진언은 다른 범음(梵音)처럼 마인들이 조금 꺼려 할 뿐이고, 풍세백이란 자는 당 조장 때문에 화가 나서 제풀에 그런 겁니다. 멸마단 대주께도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
얼마 후, 꼬치꼬치 캐묻던 장로 건천은 남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안 해도 되겠어.’
그가 복귀를 미루고 천가장에 온 이유는 하나다.
일을 꾸민 자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의도는 능히 짐작이 된다.
일을 공론화해서 사문을 곤경에 빠트리거나, 모종의 협박을 하려는 것일 터.
그 위기를 극복할 핵심은, 약을 먹은 걸 외부에서 검증할 수 없으면 된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설사 무림맹이 나서도 조사를 거부하면 그만이다. 구대 문파에 적만 못 올렸을 뿐, 그에 버금가는 사문이니까.
치료한 의원 곽호산이 설사 입을 연다 해도 정황증거뿐이라 반박하면 된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잡으려는 것뿐.
한데 자신이 세밀히 살펴도 몰랐던 마기를 찾아낸 이놈이 또 그럴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염려에 직접 확인하러 온 것인데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장로 건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사문에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겠네.”
천가장주 천중서는 황급히 고개 숙였다.
“이 누추한 곳을 찾아 주셨는데 바로 가시다니요. 속히 저녁을 준비하라 이를 테니…….”
“미안하구먼. 대신 제자들은 며칠 머무를 것이네. 같이 자리하시게.”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장로 건천이 떠나자, 일대 제자 선운은 짐짓 표정을 굳혔다. 이제부터 할 말엔 그래야 했다.
무윤을 향해 눈을 매섭게 떴다.
“내 다른 가문은 우선 입단속을 시켜 놨네. 이유를 짐작하는가?”
“다 푼 매듭인데 흠까지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요.”
“알아들으니 말이 쉽겠군. 아! 혹시 칠 년 전 상황을 명확히 기억하는가?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만 진실을 원하는 물음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그럼 알려 주지. 당시 우린 칼부림한 자네를 징치(懲治)했을 뿐이네. 광기는 추후 판정하려 했는데 자네가 도망친 것이고. 그리된 것일세.”
속내가 빤히 보이는 말에 실소가 절로 흘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물론 반대할 이유는 없다. 자신은 물론 가문에도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한데 일을 풀어 가는 방법에 배려란 일절 없고 강압과 독선뿐이다. 지금의 형산파가 어떤 곳인지 여실히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또 하나.
‘이자도 약을 먹었어. 그것도 오랫동안.’
벽을 넘어선 신기심의공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해진 건 당연지사. 한데 완전히 궤를 달리한 것도 있다.
이젠 상단전 기운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당긴다.
‘하나가 된 정기(精氣)의 조화가 다음 단계인 정신의 세계, 신(神)을 추구해서 그런 거지.’
중단전의 완성은 곧 몸을 이루는 정(精)과 마음을 근간으로 한 기(氣)의 일체다. 당연히 그다음 단계인 상단전 신을 향하는 건 순리. 그 덕에 두려움 대신 당김으로 상단전 기운을 파악하게 됐다.
몸과 마음과 뜻은 분리할 수 없으면서도, 단계적으로 굳건한 반석을 다져 가야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런 토대를 다지지 않고 과욕을 부렸을 때 나오는 부작용이 눈앞에 있는 것이고.
지금은 우선 일을 마무리할 때.
“그렇게 알겠습니다.”
“좋네. 그럼 어제 일은 없던 일로 하고 누명은 우리가 벗긴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일대 제자 선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부 건천이 지시한 급한 일이 있다.
“그럼 그리 알고 가겠네.”
그때 형산의 이대 제자 양진백이 나섰다.
“사부님, 전 물어볼 게 있어서 더 있다 가겠습니다.”
일대 제자 선운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의 일이 뭔지 대략 짐작이 갔다.
“늦지는 말거라.”
“알겠습니다.”
* * *
잠시 후, 천가장 연무장.
양진백과 무윤 형제만 자리했다.
“따로 보자고 한 이유를 알겠나?”
“모릅니다.”
양진백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살짝 비튼 입술이 끝까지 말려 올라갔다. 둘 다 싸잡아 놀릴 좋은 말이 생각나서다.
“형제가 참 가관이야. 한 여자를 두고 싸우기나 하고 말이지.”
무윤은 싱긋 미소 지었다. 첫말에 상황 판단은 끝났다.
“그럴 만한 여인인데 못 보신 모양이네요. 아! 아까 다른 가문에 들렀다고 했으니 보셨겠네. 어떻습니까? 그럴 만하지 않나요?”
형산파 무인들이 무윤에 대해 아는 건 어제 본 모습뿐이다.
양진백은 배를 부여잡고는 폭소를 터트렸다. 오늘은 적당히 겁만 주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나와 주면 고마운 일.
“큭큭큭! 칠 년을 흑도로 지냈다더니 제대로 물이 들었네. 말본새가 아주 걸쭉해. 그거 혼자서 빼기 어려운데, 내가 도와줄까? 그런 데에는 경험이 많거든.”
“이거 어쩌죠. 전 돌아가서 흑도방주로 살 거라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마음만 고맙게 받죠.”
“크크! 다시 간다고? 이젠 물든 게 아니라 아예 뼛속까지 스며든 모양이네.”
“체질에 맞나 봅니다.”
“그래? 그럼 이제 완전히 흑도로 행세하겠단 소리네?”
“침주에선 그런데 여기선 아닌 척해야죠. 부모님도 계시고 보는 눈들이 많잖습니까. 오늘처럼.”
성큼 앞으로 나선 양진백의 입가에 비릿함이 짙어졌다.
이렇게 나오면 힘들게 명분을 만들 필요도 없다. 정리할 말 정도만 하면 된다.
“참! 어젠 잘 봤어. 그런 촌극은 평생 다시 보기 어려울 거야.”
“배울 것도 있을 겁니다. 그만큼 나쁜 본보기도 없죠. 지금 생각해도 너무 한심했으니까.”
“호! 그렇게 느꼈으면 달라지지 그랬어. 전혀 아닌 거 같은데.”
“그럴 리가요. 이젠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습니다. 싫다는 남의 여자한테 칭얼대는 건 등신 머저리나 할 짓이라는 걸.”
순간 양진백의 두 눈이 멍해졌다. 뭘 잘못 들었나 해서다.
‘이 새끼가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감히 상상도 못 했다. 형산파 제자인 자신을 앞에 두고 날 선 비수를 던지다니.
놀란 무진의 눈도 부릅떠졌다.
“혀, 형님!”
분명 오기 전에 형 무윤에게 알렸다.
-저놈 건드리지 마세요. 제 몫이니까.
-자신은 있고?
-저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좀 걸릴 텐데?
-묵혔다 더 패면 돼요.
-……!
그런데 갑자기 이럴 줄이야.
다급한 마음에 무진이 나서려는 찰나.
양진백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성난 콧김이 연달아 뿜어졌다. 모욕은 자신이 주는 것이지 받을 게 아니다.
그것도 감히 마음에 품은 그녀에게 수작질이나 했던 놈이.
그래도 말로 받은 모욕은 똑같이 돌려줘야 한다. 패는 건 그다음이다.
“동생이 왜 나댔는지 이제 알겠어. 형이란 놈이 분수도 모르고 까불어 대니 따라 한 거지. 역시 형제는 닮는 법이야, 크크!”
“아! 그 말대로면 여기 없는 누구 형도 등신 머저리가 돼 버리는데.”
양진백은 욕지기가 절로 튀어나왔다. 눈도 확 까뒤집혔다.
“이 개새끼!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분노 가득 찬 눈에 불을 품고 덮쳐 가려던 순간.
무윤의 신형이 방향을 휙 틀었다. 연무장 입구 쪽으로.
“대주님, 오셨습니까?”
“이런! 손님이 있었군.”
“끝났습니다. 할 말은 다 했으니까요.”
“……!”
순간 양진백은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어 버렸다. 하필 이럴 때 들이닥치다니.
‘멸마단.’
대주 정원의 의미심장한 미소가 양진백을 향했다.
“다행일세. 내가 딱 맞춰 왔구먼, 허허!”
“……!”
막 온 게 아니다. 듣고 있다가 때를 봐서 나선 것이지.
그 덕에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게 됐다. 동생 때문에 참으려고 했지만, 순간 욱했으니까.
무윤은 그때 알았다.
‘내가 형이구나.’
동생에게 사과할 일만 남았다.
* * *
얼마 후, 대략 상황을 알리자 대주 정원은 지그시 미소 지었다.
“그럴 만했군. 한데 너무 긁어 댄 거 아닌가? 자네가 침주로 돌아가면 동생이 저 화를 다 받을 텐데.”
“이젠 동생도 그러지 않을 거라 나선 겁니다.”
“허허! 그리 마음먹었다면 굽힐 필요 없겠지. 그래도 혹 모르니 자네가 잘 살피시게.”
“그럴 생각입니다.”
대주 정원은 아쉬운 마음을 담아 말문을 이었다.
“맹으로 돌아가면 호남에 다시 오긴 어려울 게야. 아마도 호북이나 하남 쪽으로 갈 거 같네.”
“그러시군요. 그럼 호남 조사는 다른 곳에서 합니까?”
“그리 요청했네만 서북쪽 때문에 여력이 없다더군. 호남에 확실한 정황이 있다면 모를까 우선순위가 아니란 게지.”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그 이유인가? 아니면?’
약을 퍼트린 배후가 오대세가 중 하나라면, 조사를 못 하게 압력을 넣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추측일 뿐, 아는 게 너무 없다.
대주에게 넌지시 알리는 것도 문제다.
‘상대가 오대세가면 이들만 위험해지지.’
무윤은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이대로 헤어지는 게 최선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일도 쉽게 해결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 참! 그래서 말인데 자네 멸마단에서 일해 볼 생각 없는가? 물론 당장은 아니네.”
무윤은 눈만 껌벅였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제가요?”
대주 정원은 진중함을 담아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 제안하는 이유가 있다네.”
“왜?”
“풍세백 그자의 증상은 엄중히 봐야 할 사안일세. 내 십여 년 멸마단에 있었지만, 그 정도로 은밀하고 부작용이 드러나지 않는 건 처음 본다네. 분명 마공을 깊이 연구한 자의 작품이겠지.”
부대주 팽중호가 말을 이었다.
“더 심각한 건 그 이유가 약처럼 보여서네. 광기가 나타났다가 저렇게 갑자기 사라지는 건 심법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지. 이제 우리가 뭘 우려하는지 알겠나?”
이들이라면 약 정도는 짐작하리라 여겼다.
“세상에 퍼트리기 쉽겠죠. 게다가 심법이야 눈에 보이지만, 이건 속이고 전하면 당할 수밖에 없고.”
“그러네. 그만큼 위중한 사안일세. 물론 이번에 가면 단주께 알리고 대비책을 강구하겠지만, 마공이나 약을 모르고서는 사실 대책이라고 나올 게 별로 없네.”
부대주 팽중호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자네 진언이 효과가 있길 바라는 걸세. 더 노력해서 성과가 있다면 꼭 찾아와 줬으면 하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굳이 면전에서 자를 건 없다. 거기다 먼 훗날의 얘긴데.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주시게. 하면 우린 가 보겠네.”
당서하는 몇 달 전에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그 능력 썩히기 정말 아까워서 그래.”
“고민하겠습니다.”
무윤은 뒤돌아서는 당서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다.
-동생 일, 고맙습니다.
-무슨! 목숨 빚에 비하면 약과지. 어쨌든 동생도 많이 풀린 거 같아서 다행이야. 잘 마무리해.
-그러겠습니다.
당서하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참! 연사구 그놈 자질은 어때?
-……그건 왜?
-나 그놈한테 깨지기 싫어. 잘난 놈이면 나도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하시죠.
-……!
연사구의 자질이 좋건 아니건, 열심히 하란 답은 변할 게 없다.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하다면 이럴 때니까.
그런데 거짓말은 안 했다.
* * *
멸마단이 떠나자 형제 둘만 연무장에 남았다.
무진은 예전에도 둘이 있을 땐 말을 놨었다.
“하지 말라니까 왜 그랬어?”
“미안. 그냥 툭 튀어나왔다.”
“……잘했어.”
“……진짜?”
“아니면 내가 그럴 뻔했거든. 떠날 사람이 하는 게 낫지.”
“……!”
무진도 순간 욱했다. 형을 욕했으니까.
이제 정말 묻고 싶은 화두를 꺼낼 때다.
“아까 그 말…… 진심이야?”
“뭐? 은진이 얘기?”
“그래.”
무윤은 혹시 몰라 준비해 온 걸 꺼내 들었다.
“이거 네 거다.”
무진은 눈을 껌벅였다.
“이게 뭔데?”
“보면 모르냐? 목걸이지.”
형이 보인 건 청옥 목걸이 두 개다. 언뜻 봐도 광채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이런 거라면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이들이 있다.
“난 됐어. 두 개니까 어머니하고 누나 주면 되겠네.”
“그거 내가 직접 깎아 만든 거야. 너하고 은진이 혼인 예물로 주려고. 아! 보면 알겠지만, 솜씨는 괜찮을 거야. 세공은 예전에 많이 해 봤거든.”
“……!”
이전에 월소려에게 주려고 보석 세공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무윤의 시선은 아직 어둠이 덜 깃든 밤하늘을 향했다. 흉중에 담은 소회를 담담히 흘려 내려면 분위기도 필요하다.
“그거 보기보다 단단해서 깎는 데 석 달 걸렸다. 몸은 힘들었지. 근데 이걸 둘한테 줄 생각하니까 기분은 좋더라.”
“…….”
“무진아, 난 돌아올 때 결심한 게 있다.”
“……?”
이 말은 눈을 마주하고 해야 한다.
“더는 회피하지 않는다. 힘들면 짜증 내고, 열 받으면 화낼 거야. 뭐가 됐든 더는 감추고 싶지 않으니까. 물론 좋아하는 여인이 있으면 좋다고 할 거야. 그게 누구건 말이다.”
“……!”
“근데 지금은 이걸 만들 때처럼 기분이 좋아. 너한테 이 말을 할 수 있게 돼서.”
“……?”
무윤은 동생의 손에 청옥 목걸이 두 개를 슬며시 건넸다.
“더 끌지 마. 이젠 그럴 이유 없잖아. 당장 오늘이라도 가.”
“……!”
솔가지 흔드는 소슬바람이 살짝 젖었던 눈가를 말릴 무렵,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갔다 올게.”
“그래. 아! 말 안 해 준 게 있다.”
“뭐?”
“그거 천설청옥(天雪靑玉)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