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카앙! 카아아앙!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검풍과 검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 와중에도 두 개의 입술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하! 떠들 만하네.”
“제가 할 소립니다!”
“대충 몸은 푼 거 같고, 이젠 안 봐준다.”
“아우! 왜 내가 할 말을 자꾸 먼저 하고 그래요!”
한데 지켜보는 무진의 쩍 벌어진 입은 또 다른 이유로 다물어질 줄 몰랐다.
‘저럴 수가!’
몸이 덜덜 떨리다 이젠 얼굴에 식은땀까지 흘렀다. 그저 자리에서 보고만 있음에도 연신 거친 숨이 흘려진다. 무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저 모습엔 그럴 수밖에 없다.
한편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건 검을 꽉 쥔 당서하도 마찬가지다.
‘이 새끼 진짜네.’
불길한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초절정에 오른 게 확실한 놈.
‘남궁사현 얘기도 장난이 아니고.’
자신은 가물가물한 초절정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상태.
전력을 다해도 완패할지 모른다. 순간 눈썹 양 끝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단호히 고개를 휘저었다. 어린놈에게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의 경험이 자각을 일깨웠다.
‘이대로는 안 돼.’
분명 경지에서는 떨어진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들던 수많은 실전 경험, 그건 확고한 우위다.
그렇다면 답은 빤하다. 결심을 굳히고 침음을 삼켰다.
‘변칙 수법. 그러자면 먼저 움직인다!’
결정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파팟!
연사구의 바로 앞까지 쇄도하자 극한의 기세를 끌어올렸다. 평생을 같이한 당문의 호연십팔검(浩然十八劍)이 현란한 궤적을 뿜어냈다.
편법(鞭法)에서 시작해 검으로 발전한 호연십팔검.
그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검로가 허공을 헤집었다.
휘릭! 휘리릭!
연사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상대 검의 특성은 이미 파악했다.
‘변칙엔 정공법이 최고지. 어디!’
힘과 내력에서는 자신이 우위다. 거기에 빠름을 더하면 된다.
무윤이 은월청요검(隱月靑雲劍)을 전하며 한 말이 있다.
-이 검은 방어에 있어선 가히 천하제일이라 해도 된다.
월소려의 호위에 중점을 둬서 만든 검법이라 그랬다.
-그럼 공격은?
-상대의 틈을 찾았을 땐 쾌의 극! 승부는 그걸로 해.
두 개의 검이 다시 허공에서 부딪쳤다.
콰앙!
사방으로 불꽃이 사납게 튀었다. 연달아 공기가 터지면서 대기에 구멍이 났다.
파앙! 콰쾅!
한 치의 양보나 물러섬이 없는 공방은 점점 더 빠르고 격렬해졌다. 살벌한 바람 소리는 무진의 귓전까지 울렸다.
쉬익! 쇄애액!
무진의 굳은 얼굴과 달리 가슴은 벼락 치듯 들썩였다. 불끈 쥔 두 주먹은 어느새 땀에 흥건해졌다.
당장의 의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저기 있고 싶어!’
절정의 벽을 넘지 못한 자신이다. 그런 자신의 꿈이 눈앞에 선연히 펼쳐지는데 격정이 가슴을 휘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현듯 떠오른 생각.
‘정말 형이?’
허무맹랑함에서 불신으로, 그러다 의구심에서 이젠 설마 하게 되는 그 사실. 무진은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만나서 묻고 보면 된다.’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저 둘의 모습을 눈 가득 담고 싶은 것밖에는.
검풍에 잘린 두 사람의 옷자락이 나풀거렸다. 가슴 앞섶과 허벅지, 그리고 허리의 무복까지.
그저 비무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 주는 모습.
하지만 광풍 속의 숱한 변화를 감내하는 두 사람의 표정엔 어떤 두려움도 없다. 그저 상대를 향한 무인의 투기뿐.
보는 내내 절로 뛰는 심장의 고동과 맥박은 무진의 눈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놀랐던 가슴은 이젠 흥분만으로 쿵쾅거렸다.
그 뛰는 가슴이 설렘에 이어 잊어버리려던 무인의 꿈을 다시 일깨웠다.
비무가 끝날 때까지 파도에 너울거리듯 가슴으로 전해진 격동은 점차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바닥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던 당서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 이런 새끼하고 무승부라니. 참 내!”
“이거 왜 이래요! 열 받는 건 나지! 난 초절정이라고요!”
“이런 무식한 새끼! 넌 강호의 상식도 없냐?”
“……뭐요?”
“경지는 그냥 하나의 잣대일 뿐! 생사를 건 승부는 다른 요인으로 판가름 나는 게 훨씬 많은 거 몰라?”
“참 내! 그걸 누가 몰라요?”
“그중에 실전 경험만큼 중요한 게 없지.”
연사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 속에 담긴 뼈가 욱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지금 봐주는 바람에 비겼다 이거죠? 생사투가 아니라서.”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땐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거지.”
“참 내, 나도 많이 봐줬거든요.”
“뭘? 너 전장엔 안 나가 봤다며?”
“그렇긴 한데 실전처럼 싸워 본 건 나도 많다고요! 그동안 얻어터진 게 몇 번인데.”
“자랑이다.”
“…….”
연사구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이 비무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야, 동생! 이제 형님 말 믿겠어?”
무진의 고개가 서서히 끄덕여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한 건 인정하겠습니다.”
“야! 그냥 대단한 게 아니라 남궁사현 그 새끼하고 비슷하다니까! 보고서도 몰라?”
“저 이제 일류 상인데 가늠이 되겠습니까?”
“……너, 형 따라가려면 참 힘들겠다.”
무진은 바로 물을 게 있다.
“근데 정말입니까? 형이 초절정 중반이라는 게.”
“그 새끼가 나 팰 때 보인 게 그 정도야. 근데 너도 알 거 아냐? 속에 능구렁이 몇 마리는 있는 놈인 거.”
무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그건 잘……. 예전엔 뭘 감추고 하는 성격은 아녔는데.”
“칠 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 벌어진 일도 그렇고.”
“……!”
그때 무윤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린 건 알릴 필요 없다.
“남의 집에서 뭔 소란이냐?”
“지켜본 놈이 할 소린 아니지.”
“……어떻게 알았냐?”
“이 난리를 쳤는데 아무도 안 왔잖아. 누가 돌려보낸 거지.”
무윤은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무안했으니까.
“생각보다 별로 안 터졌네.”
답은 삐죽거리는 당서하의 입에서 나왔다.
“애 기죽일 일 있냐?”
“기 좀 죽여도 되는데. 아직도 이놈을 모르십니까?”
당서하는 솔직히 털어놨다. 이젠 인정해 줄 때다.
“아니까 이 정도 했지. 안 그러면 둘 중 하나는 골로 갔어.”
연사구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찢어진 무복을 가리켰다.
“역시 실전은 달라. 여기 봐라. 한 치만 더 깊었으면 어제 먹은 거 다 꺼낼 뻔했다.”
“……!”
연사구의 손이 무진의 어깨에 턱 올라갔다.
“근데 무진이 이놈 많이 가르쳐야겠어. 스물다섯에다 네 동생인데 일류 상이 뭐냐? 창피하게.”
무윤은 시선을 저 먼 곳으로 향했다.
“이놈은 거상이 꿈이야. 그런 놈이 이 정도면 훌륭하지.”
“응? 눈빛은 아니던데? 나랑 할 때는 독기가 풀풀 날렸어. 칠 년 전하고 달라졌나 보지.”
연사구는 비무 전에 무진의 검을 잠시 살폈었다.
“아니야, 아버지한테 들어 보니까 독기 품은 이유는 따로 있더라.”
“왜?”
천무진은 급히 말을 잘랐다.
“저기, 그런 얘기는…….”
연사구는 무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야! 넌 조용히 있어. 어디 형님들 얘기하는 데 확!”
“……!”
“계속해 봐.”
두 사람이 깔아 준 판 위에 하나씩 풀어낼 때다. 단도직입적으로 핵심을 꺼내 들었다.
“함은진이라고 알지?”
“알지. 너희 둘이 사랑싸움한 애잖아. 얘는 절절히 좋아한 거고 너야 못 먹는 감 찔러본 거고.”
“크크! 씨불이는 게 영 걸쩍지근한데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내가 입이 험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안 하잖아. 어쨌든! 그래서?”
“나 떠난 후에 은진이는 저놈 기다리고, 저놈은 밀어내고 하여간 그런 모양이야.”
연사구는 무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 멍청한 놈! 야! 그게 가장 병신 짓이야. 이 새끼, 아까 왕창 패 줄 걸 잘못했네.”
“다 듣고 그러던가.”
참다못한 무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일은 장난삼아 떠들 일이 아니다.
“아니, 정말!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연사구는 무진에게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눈도 치켜떴다.
“뭐긴 마! 다 이렇게 풀고 그러는 거야. 너도 할 말 있으면 해. 누가 못 하게 하던?”
“……!”
어느새 다가온 당서하의 손도 무진의 어깨를 향했다.
턱!
“이 누나가 세상 돌아보면서 듣고 배운 게 있는데, 일을 어렵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어. 앞이 꽉 막혔을 땐 같이 생각해 보는 것도 방법이야. 지금이 딱 그럴 때 같은데.”
“……!”
무진이 가만히 자리에 앉자, 무윤의 말이 이어졌다.
“형주에 승화 상단이라고 있어.”
“어! 거긴 알지. 형주에서 두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인데.”
“거기 장주 둘째 아들이 양진백이라는 놈인데, 형산파 이대 제자 중엔 잘나가는 모양이야. 서른셋에 절정 중반에 들었으니까.”
“뭐 그 정도면. 근데?”
“그놈이 은진이 보고 꽂혀서 한 일 년 구애했단다. 물론 다 거절당했고.”
자연스레 연사구의 시선은 무진을 향했다.
“무진이 이놈 때문인 거 알았을 거고.”
“얼마 전에 형산파에서 무슨 연회가 있었는데, 은진이 있는 데서 이놈을 아주 박살을 냈대. 일부러 개쪽을 준 거지.”
무진의 볼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되살아난 악몽에 참고 있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그래요. 저 개쪽 당했습니다! 나이도 여덟이나 많고 그 경지인 놈인데 무슨 수로 당합니까!”
연사구가 버럭 했다.
“야, 인마! 센 놈한테 터지는 게 뭐가 창피해! 그 후에 당당했느냐가 중요한 거지. ……너 혹시 고개 푹 숙이고 무작정 도망쳤냐?”
“…….”
“하! 이거 한심한 놈이네.”
“본인 일 아니라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미친 새끼! 야! 내가 네 형한테 맞은 게 몇 대인 줄이나 알아! 못해도 천 대는 무조건 넘는다. 그래도 난 이 새끼한테 고개 안 숙여.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무진도 항변할 말이 있다.
“형산파 연회였어요. 창피해서 그런 게 아니라 대드는 모습 보이면 찍히잖아요. 게다가 그놈은 건천 장로 직계인데. 아니면 저도 그렇게 물러나진 않았어요.”
“……!”
당서하는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방금 양진백이라고 했지?”
“예.”
“그놈 여기 있어. 어제 형산파하고 인사하다 보니까 자기 사부와 같이 왔던데.”
“……!”
그때 연무장 안으로 들어온 이가 있었다.
“사구야, 여기 있었구나.”
“어! 형님, 어쩐 일이세요?”
뇌양 하오문 지부장 연지광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알려 줄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왔다.”
“뭔데요?”
“형산파에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데 좀 이상해.”
“뭐가요?”
“한쪽은 오래전에 사라진 기녀를 찾고, 또 한쪽은 의원을 찾아. 동시에 그러니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네.”
의원이야 곽호산을 찾는 일이니 더 물을 게 없다. 그를 숨겨 둔 곳은 어릴 때 혼자만 알던 산속 동굴이라 당분간 들킬 염려는 없다.
“기녀는 뭐예요?”
“이십여 년 전에 여기 있다 떠난 기녀가 있는데, 행적을 꼬치꼬치 캐묻고 다녀. 이유는 모르겠고.”
“누군데요?”
“자경이라고 그때 딸을 낳자마자 떠났다는데, 우리도 아는 게 없다. 아! 딸 이름이 묘예라고 한 거 같은데.”
“……?”
순간 연사구의 의아한 눈이 무윤을 향했다.
적묘예는 기루를 하고 싶다는 것 외에는 알려 준 게 없다. 어릴 때 자란 곳도 여기가 아닌 형주 부근이고.
묘예란 이름은 희귀하지도, 흔하지도 않다.
-이름이 같은 게 어째 영 찜찜하다.
-그 묘예 맞다.
-응? 어떻게 알아? 너한테 알려 준 게 있어?
-아니.
-그럼?
-작년에 위패(位牌)를 써 준 적이 있어. 절에 어머니 모신다고 했을 때.
-……그 이름이 자경?
-그래.
더 알아볼 게 생겼다.
그때 천가장주 천중서가 급히 뛰어왔다.
“무윤아, 형산파에서 널 찾는구나.”
“누가 왔습니까?”
“여럿이 왔는데 건천 장로님도 오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