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한 시진 후, 천가장 장주실.
“이보게 중서, 정말 미안하네. 내가 할 말이 없으이.”
“…….”
한동안 고요한 정적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집으로 옮겨 와 가족 간의 해후가 다 끝날 즈음 찾아온 이들.
뇌양 백가장의 백조영과 함가장의 함대원.
천가장과 함께 뇌양의 삼대 가문이라 불리는 곳의 장주들이다.
눈치를 살피던 함가의 장주 함대원은 같이 자리한 무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윤아,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걱정해 주신 덕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가주와 오랜 친구인 함대원 입장에서 굳이 편들 곳은 없다. 다만 이 일의 근원엔 딸 은진이 있음을 안다.
그 딸과 본가, 또 수십 년 끈끈히 이어 온 두 가문을 위해서도 원만히 푸는 게 최선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네 생각부터 듣고 싶구나. 어찌하길 바라느냐?”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털고 갈 건 스스로 책임져야겠죠.”
“원하는 게 있느냐?”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어떤 조건도 걸지 않겠다는 거냐?”
“그 후에 판단할 뿐입니다. 제 입장은 그렇습니다.”
함대원의 시선은 천가장주 천중서를 향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 또한 같은 생각일세.”
백가장주 백조영은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렀다.
‘이리 나오면 다행인 게지.’
이번 사안은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 처결이 천양지차다.
나라의 법으로 보면 음해 죄로 가벼운 태형(笞刑) 정도. 하지만 강호의 잣대로는 단전을 폐하거나 생사 비무를 강요할 수도 있다.
생각하고 있던 안을 꺼내 들었다.
“당시야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라지만, 그 이후 행동은 나로서도 용서가 안 되네. 소장주 지위를 영구 박탈하고 형주 외가로 보내서 십 년은 못 오게 할까 하네만.”
천중서의 시선이 아들을 향했다.
“네 생각을 말씀드려라.”
무윤은 백조영을 향해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처결은 뜻대로 하시지요.”
“고맙구나. 바로 그리하마.”
“그리고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뭐든.”
무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장주에게 정중히 고개 숙였다.
이젠 이전 무윤이 저지른 일을 하나씩 풀어낼 때다.
“저 또한 잘못이 큽니다. 두 분께 먼저 사죄드립니다.”
이전 무윤은 술과 앵속에 취해 칼을 휘둘렀다. 그 죄 또한 크지만 더 큰 처벌을 받았기에 지금 넘어갈 뿐이다.
백조영은 착잡한 미소가 절로 흘렀다. 칠 년 전 친구 천중서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이젠 능히 짐작이 간다.
가볍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 너도 잊어버려라. 지금 널 보니 충분히 반성하고 이겨 낸 거 같으니 대견할 뿐이야.”
“그리 생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근데 드릴 말씀은 딴게 아니라 사업 이야기입니다.”
“사업?”
“제가 그동안 침주에서 몇 가지 일을 벌였는데 운이 좋아 자릴 잡았습니다. 그중에 뇌양과 거래할 만한 게 있어서 말씀드릴까 하는데.”
“……?”
잠시 후, 함가 장주 함대원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그게 괜찮겠어. 은(銀)과 상수(湘繡, 호남 전통 비단 자수)야 여긴 부족하니까 가져만 온다면 형주에 팔 수 있지. 난 찬성일세.”
백조영의 얼굴도 한결 밝아졌다.
“약초 사업도 그리 크다면 교환할 게 많지. 서로 도움이 될 게야.”
무윤은 거래 외에 뇌양에 접목할 일도 슬쩍 꺼내 들었다.
“참! 침주에선 고리대를 좀 다르게 운영하고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래? 뭐가 다르다는 게지?”
그 후로도 한동안 대화와 토론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데 아버지 천중서의 표정은 그 속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시시각각 변했다.
‘이게 도대체!’
처음 사업 이야기를 할 땐 잔잔한 웃음이 흘렀다. 대견했으니까.
사이가 멀어질 뻔했던 세 가문을 다독이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그런데 하나둘씩 구체적인 내용이 오갈 때쯤엔 서서히 놀라던 표정이 경악으로 바뀌어 버렸다.
연사구라는 친구가 한 얘기는 아직도 반신반의한 상태.
하지만 사업에 있어선 들었던 그 이상이다.
그중에서도 자신을 가장 경악하게 하는 것.
‘사업에 자기 철학(哲學)을 담았어. 그것도 세상을 헤아리는 지혜까지 더해서.’
아들에게 가장 바랐던 것이다. 종이 사업에만 매진하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알아주길 얼마나 원했던가.
한데 아들은 그 바람을 온전히 담은 뒤에 자신의 색까지 더했다. 그것도 아주 짙은 색으로.
토론 내내 아들을 향한 눈에 그윽함이 더해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가만! 그럼 그 친구가 말했던 게 전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것들이 다 사실일지 모른다.
가문의 비류단혼검까지.
* * *
얼마 후, 손님들이 떠나고 두 부자만 남았다.
“결정을 못 했다니 이유가 뭐냐?”
“가문에 도움이 될지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천중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 난 이해할 수 없구나. 네가 개량한 비류단혼검이 타당하다면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뭐가 문제란 말이냐?”
무윤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하지?’
원래 비류단혼검은 극에 이르면 간신히 초절정 수준의 검법.
개량한 건 절대지경까지 길을 열어 놨다.
그 수준의 검법이 천가장에 필요한지 그게 판단이 안 섰다.
‘화만 불러올 수 있어.’
천가장은 무가보다는 상가에 가깝다. 종이 사업을 위한 소규모 상단에 무인들이 껴 있는 형국.
게다가 아버지 또한 무인의 길엔 관심이 없다. 가전 무공이라 익혔을 뿐 지금 수준도 절정을 갓 넘은 정도.
그런 가문에 절대지경의 검법은 독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잠시 고민하던 무윤은 결정을 내렸다. 처음 마음먹은 게 있다.
‘가족에겐 가능한 사실대로 알린다.’
그래야 또 다른 벽이 안 생긴다. 그러자면 먼저 믿게 하는 게 순서. 이미 연사구가 판을 벌인 뒤라 한결 수월해졌다.
“고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 무엇 때문이냐?”
“우선 보시죠. 아버님, 검 좀 빌리겠습니다.”
“……?”
검을 매만지던 손이 어느 순간 하늘을 향했다.
가만히 치켜든 검에서 무형의 진기파동이 일렁였다.
우우웅!
순식간에 섬전처럼 서린 푸른 빛이 검 면을 타고 흘렀다. 연이어 굵기를 늘리던 빛이 어느새 올올이 검 끝에 맺히기 시작했다.
지이잉!
천중서의 놀란 눈이 커다래졌다.
‘검기가 저리 빨리! 그것도 세 치나!’
초절정이라 듣긴 했다. 하지만 막상 눈으로 본 감흥은 온몸을 떨리게 하고도 남았다.
‘허허! 내 아들이 초절정이라니!’
그렇게 들뜬 희열을 만끽하려던 순간, 또 다른 변화가 눈앞에 일었다.
치솟아 오르던 빛이 줄어들더니 색이 변해 갔다. 한데 그 진해진 색의 둔중한 파동은 천중서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부릅뜬 두 눈이 절로 탄성을 불렀다.
“헉!”
검극에서 뻗어 나온 섬뜩한 예기, 저절로 주변 대기를 격동시키는 떨림, 거기에 더해진 폭풍 같은 기세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 검강!’
천중서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찢어질 듯 커진 두 눈은 시퍼런 빛을 떠나지 못했다.
본 적이 없어도 몸이 느낀다. 무인의 격동이 알려 준다. 저 빛이 뭔지.
모든 무인이 저 빛을 내길 얼마나 원하던가. 자신은 아직 남에게서조차 보지 못했던 것인데.
‘어, 어찌.’
그 순간 허공을 가득 채웠던 빛이 언제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췄다.
사라락!
얼마 후, 담담한 목소리가 천중서의 멍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보셨습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의 눈이 세차게 떨렸다. 손이 저절로 방금 빛이 있던 곳을 향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는 격정을 알렸다.
“그, 그게 맞느냐?”
“검강 말씀입니까?”
“……맞구나?”
“다시 보여 드릴까요?”
“……하, 한 번만 부탁하마! 물론 널 못 믿어서가 아니다. 그 빛! 다시 보고 싶구나.”
“……!”
얼마 후, 천중서는 터질 것 같은 숨을 그대로 몰아쉬었다. 이 벅찬 흥분과 환희는 나중에 천천히 혼자 즐겨도 된다.
지금은 궁금함에 쿵쾅거리는 가슴부터 해결해야 한다.
아들이 그걸 보인 이유가 그것인지.
“그 검강, 비류단혼심법으로 한 게냐?”
“극까지 깨치면 절대지경까지 갈 겁니다.”
“……!”
이젠 무인으로서 아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한다.
‘검강에다 발경과 회수 시간까지 감안하면.’
절정 수준이긴 하나 그 또한 수십 년 검을 갈고닦은 무인.
검기나 검강 모두 뿌리는 것만큼 거두는 것도 쉽지 않다. 한데 몇 치나 되는 검강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자연스럽게 거뒀다. 더 보지 않아도 보이지 않은 그 경지를 짐작게 한다.
‘검강을 저리할 정도면 최소 초절정 상이라 했거늘.’
이젠 그 어떤 의심도 머릿속에 없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들이 왜 고민하는지.
절로 속 깊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휴! 저걸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더구나 아버님도 무진이도 무인의 길을 갈 것도 아닌데.”
순간 천중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은 아니지만 둘째 무진이 생각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말해야 하나?’
이제 큰아들에게 감출 건 없다. 다만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게 있다. 그 때문에 지금 꺼내야 할 말인지 고민일 뿐이다.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아버지의 잘게 떨리는 눈은 뭔가 있음을 알린다. 회피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바로 말문을 열었다.
“꺼내기 어려운 얘기가 있으신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무윤은 진실 반에 진정 반을 섞었다. 바라보는 눈에 진중함을 가득 실었다.
“아버지, 저 예전의 무윤이 아닙니다. 물론 이 집 장손인 건 변함이 없고요.”
순간 천중서의 얼굴이 벌게졌다. 자책 어린 한숨이 슬며시 새어 나왔다.
‘허! 이러지 않기로 해 놓고서는…….’
아들을 떠나보낸 후 통렬히 후회한 게 있다. 그 다정했던 부자 사이가 멀어진 계기는 별게 아니다.
‘어설픈 배려. 그게 문제였지.’
커 가는 아들의 자존심을 지켜 준다고 말을 아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한데 대화가 적어지다 보니 어느새 소통의 문제가 생겼다.
그때는 다 터놓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게 쌓이고 쌓여 의심이 되고, 의심은 결국 불신이 돼 버렸다.
돌아온 아들에게는 다신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과거의 습관이 어느새 슬며시 고개를 디밀었다.
천중서는 잠시 멍했던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지금의 의지 그대로 담아 아들을 마주했다.
“미안하구나. 다 얘기해 주마.”
“말씀해 주시지요.”
“그 전에 물을 게 있다. ……아직도 은진이가 마음에 있느냐?”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이 질문이 왜 안 나오나 했다. 이 모든 갈등의 고리를 끊으려면 무엇보다 명확히 할 일이다.
“이 방을 나가면 무진이에게 갈 겁니다. 그때도 이 말 그대로 할 겁니다.”
“어떤?”
“허상이었습니다. 그저 주변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더군요. 떠나고 나서는 떠올려 본 적도 없습니다.”
“……!”
한 시진 넘게 무진이 일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후.
방은 나온 무윤의 걸음은 동생을 향했다.
가장 꼬여 있는 일을 이제 맞닥뜨려야 한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오지랖 떠는 이들이 있다.
이번엔 둘이다.
무윤도 안다. 둘이 뭔 짓을 할지. 그래도 막지 않았다.
세상엔 남에게 듣는 게 나은 것도 있다.
적어도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물론 속내는 직접 풀어야 한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