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그렇게 불경을 멋들어지게 읊어 대니까 보타문주께서 놀라셔 가지고∼∼.”
침주에서의 일 년 설명이 다 끝날 즈음.
놀란 천중서의 반문이 바로 터져 나왔다.
“그만한 은광의 사 할이 무윤이 거란 말이오?”
“근데 저 새끼, 아니 무윤이가 원래 능구렁이라 감춘 게 훨씬 더 있어요. 정말이라니까요. 아버님이 물어보시면 다 불 겁니다. 그럼 저도 좀 알려 주시고. 크흠!”
“……?”
이번엔 침주 시내 사업이 화두가 됐다.
“처음 고리대 얘길 꺼낼 땐 공야성 형님이 성을 벌컥 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이런 사업이지 뭐예요. 참! 근데 그 형님이 열 살이나 많은데 이 새, 아니 무윤이가 반말을 턱 하는 건 좀. 사실 저도 다섯 살이 많은데. 크흠!”
잠시 후, 이번엔 어머니 류화선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공짜로 자수를 가르친다고요? 침주가 얼마나 큰 곳인데 거기 여인네들 다라니?”
순간 연사구의 입꼬리가 쫙 올라갔다.
‘그거라면! 크크!’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게 있다. 무윤이 직접 전하는 게 맞긴 한 선물. 하지만 놈은 그 내면의 것을 떠들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오지랖이긴 해도 놈을 생각하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하고 보는 거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올게요.”
“……?”
냅다 방에 다녀온 연사구의 손에 형형색색 비단이 들렸다.
요리조리 살피고는 류화선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요건 국화니까 어머님 거네요.”
“……이걸 왜?”
“저놈이 낯을 좀 가리잖아요. 말로 하기 뭐하니까 가족들 모두 자수 하나씩 해 드린다고 며칠 동안 밤을 새웠어요. 뭐 솜씨야 빤하지만 정성을 봐서 입는 척은 하세요.”
“……!”
건네받은 비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순간 화들짝 놀란 손이 금세 물기를 닦아 냈다.
스슥!
칠 년 만에 찾아온 아들이 손수 만든 건데, 단 한 톨의 흠도 어머니는 용납이 안 된다.
연사구의 눈과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 연꽃 문양은 우리 누님 거고, 가만있어 보자, 이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구채령에게 쓱 비단을 내밀었다.
“작은어머님, 맞으시죠?”
“예? 예…….”
“하늘 보는 걸 좋아하신다고 여긴 구름을 넣었더라고요.”
자수를 확인한 구채령은 어안이 벙벙했다. 눈동자는 뭔가에 홀린 듯 제 갈 길을 못 찾았다.
‘나까지?’
무윤이 열다섯을 넘고 나서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떠나는 그 전날까지도 마주치는 것조차 불쾌해하던 아인데.
믿기지 않은 현실에 떨려 온 가슴은 이젠 머릿속까지 멍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연사구의 시선은 꽃처럼 피어나는 한 소녀를 향했다.
“네가 아현이구나?”
“예? ……예.”
“하하! 이거 무윤이 이 새끼 정말! 나오면 몇 대 패 버려야겠네.”
“……?”
연사구는 허리를 숙여 천아현과 시선을 맞췄다.
“하도 애처럼 얘길 해서 아현이 만나면 머릴 쓰다듬어 줄까 했지. 근데 이렇게 다 큰 처자인데 그럼 안 되지. 큰일 날 뻔했네.”
천아현은 믿기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오, 오빠가 제 얘길 했다고요? 그럴 리가?”
장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살만 찌푸리던 큰오빠다. 아예 뭐라고 야단이라도 치면 낫다. 그냥 달갑지 않은 표정만 보이고는 휙 돌아서 버리던 무서운 오빠.
사실 돌아오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어쩔 수 없이 끌려왔다. 지금도 그 얼굴을 마주칠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연사구는 이번엔 비단 두 개를 가만히 천아현 앞에 보이기만 했다. 얼굴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따스한 미소를 가득 담았다.
“아현아, 이 비단엔 자수가 없지. 다른 사람은 다 있는데 왜 네 거만 없는 줄 알아?”
“저는 잘…….”
“나도 궁금해서 저 새, 아니 큰오빠한테 물었어. 근데 한숨만 푹푹 내쉬더라.”
“……?”
“다른 가족 거 다해서 열흘 걸렸는데, 네 거는 닷새를 고민해도 못 그리겠대.”
“……왜요?”
“아현이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게 없대. 그래서 고민하다가 못 넣은 거야. 와서 너한테 물어보고 한다고.”
순간 천아현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어지지 않았다.
‘……오빠가?’
연사구는 아현을 바라보는 눈에 진심을 가득 담았다. 지금 할 말은 꼭 그래야 했다.
“사실 이 말 한 거 알면 큰오빠가 날 엄청 팰 거야. 근데 난 해야 할 거 같네. 왜인 줄 알아?”
“……?”
“저놈 성격에 너한테 미안해서 말도 못 꺼내고 돌아갈까 봐. 어제 저 산 위에서도 이 비단 보면서 한숨만 한참 쉬었거든.”
“……?”
천아현은 물론, 옆에서 듣고 있던 구채령도 파르르 흔들리던 눈망울을 떨구었다. 촉촉해져 가던 눈가의 물기가 한순간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윤이가 그랬다고!’
자신도 이 자리에 오기 싫었다. 안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런 마음을 먹은 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가슴이 싸하게 저려 오고 목까지 메어 온다.
스스로도 안다. 자신 또한 무윤을 당기려 하지 않았던 것을.
어른이 그러면 안 되는데 딸 아현을 무시하는 무윤에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쌓인 울분에 미움도 당연하게 여겼었는데. 형언할 수 없는 후회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주변을 둘러보던 연사구는 침음을 삼켰다. 모두의 촉촉해진 눈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뇌리를 때린 불길함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너무 나댄 거 아냐?’
처음부터 제대로 오지랖 떨기로 마음먹긴 했다. 특히 막내 아현이 일은 어제부터 작심한 일이기도 하고.
그래도 후환이 두려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번에 왕창 올라갔을 텐데.’
안 그래도 상대가 안 되는데 놈인데 한숨만 깊어진다.
하지만 이내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이미 저질렀는데 무슨!’
연사구도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면 고민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생각을 달리하는 게 최고다.
‘에라, 모르겠다. 저지른 김에 확 해 버리지 뭐. 몇 대 더 늘어나는 건 봐준다.’
연사구의 지금 판단 기준은 하나다. 좀 있다 나올 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된다. 친구로서 당당하면 된다.
또 친구라면 그래야 한다고 느껴서 하는 행동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 감정이 복잡한데 어제 일로 더하겠지. 근데 놈이라면 대놓고 속을 다 못 꺼낸다. 그러다 보면 또 꼬여. 그럴 바엔!’
그 확신이 있는 한, 더 나대도 된다.
동생 천무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진아, 너 내 말 명심해야 한다.”
“예? 무슨?”
“이 형이 신룡하고도 맞먹는 실력이거든.”
“신룡이라면…… 그 신룡을 말씀하시는 건지?”
“물론 안 믿기겠지. 근데 나중에 보면 알아. 근데 내가 이 말 왜 하는 줄 알아?”
“……?”
“날 이렇게 만든 놈이 네 형이거든. 그러니까 무조건 달라고 해. 알았지?”
“……뭘?”
“비류단혼검!”
“예? 그건 우리 가전 무공인데요?”
“그거 저 새끼가 엄청 바꿔 놨어. 오면서 보니까 초절정도 몇 수 만에 싹 해 버릴 정도야. 근데 줄지 말지 고민하더라고. 괜히 줘서 네가 나대다 다칠까 봐 그 걱정인 거지.”
천무진은 눈만 껌벅였다.
“저기,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네 형이 엄청 고수란 소리야. 아주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서 완전히 용 됐거든. 그런 놈이 운 좋게 얻은 거 가지고 나한테 얼마나 유세 떠는지 참!”
“……형님이 말입니까?”
“침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말이지.”
“……?”
얼마 후, 무공에 대한 설명이 끝나 갈 무렵, 가주 천중서의 쩍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믿고 자시고를 떠나 그저 황당하기만 할 뿐이다.
‘설마!’
확인차 묻는 입가가 세차게 떨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게 다 사실인가?”
“안 믿기시는 거 다 압니다. 근데 좀 있다 무림맹 멸마단이 올 거예요. 그때 확인하시면 압니다. 저 거짓말이나 하는 그런 놈 아녜요. 근데 저놈은 사람 살살 약 올리려고 그럴 때가 있거든요. 그땐 아버님께서 단단히 혼도 내시고 그러셔야. 크흠!”
“……?”
그때 당서하가 다른 대원에 앞서 달려왔다.
타다닥!
오자마자 연사구에게 눈을 부라렸다.
“야! 여기 있으면 진즉에 말해 줬어야지!”
“그렇게 됐어요.”
“방주는 어디 있어?”
“저 안에요.”
당서하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눈을 껌벅였다.
“가족분들 아닌가?”
“맞아요.”
“근데 안에 있다고? 이 상황에?”
연사구는 입을 삐죽였다.
“깨달음이 왔답니다. 그것도 아주 큰 거요.”
당서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정말이야?”
“이 판국에 제가 거짓말하겠어요?”
“……그럼 어디까지 간 거야?”
연사구는 당서하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보다 말씀 좀 해 주세요, 저분들한테.”
“뭘?”
“뭐겠어요. 저 표정 보면 모르겠어요? 제 말을 도통 안 믿으신다니까요.”
“……!”
엉겁결에 시작한 당서하의 설명이 거의 끝나 갈 무렵.
타악!
문이 열렸다. 이미 누가 와 있는지 아는 상황.
무윤은 머뭇거림도 없이 묵묵히 한 걸음씩 앞으로 향했다.
터덕! 터덕!
눈가는 파르르 떨렸지만,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사르르 흘렀다.
지금은 그래야 한다.
오랜만에 짓는 미소가 아님을 보여야 하니까.
칠 년 세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누군가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지었던 미소처럼 보이려면 그래야 했다.
그게 지금 해야 할 최선이다.
한과 후회로 점철돼 절망했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지워야 한다. 칠 년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
그것이 감정의 격랑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저들에게 줄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맨발 그대로 땅을 밟고는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잠시 후.
투욱!
고개 숙인 채 아버지 천중서를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
순간 한 여인의 옷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타다닥!
“무윤아!”
한걸음에 달려간 손이 어느새 아들의 몸을 쓰다듬었다.
스륵! 사르륵!
손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얼마나 만져 보고 느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길 한참, 잔주름 가득해진 손이 아들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스륵!
나이만 들었을 뿐 떠날 때 모습이 그대로 투영됐다. 순간 칠 년의 불안함이 녹아내렸고, 안도감이 속을 일렁였다.
“크흑! 건강했구나. ……다행이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인의 고개가 힘차게 도리질 쳐졌다.
휘익! 벌린 두 팔 그대로 아들을 폭 감쌌다.
사라락!
“아니! ……오면 됐다. 그러면 된 게야. 이리 안아 볼 수 있으면 됐어.”
류선화의 두 눈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입가의 흥건함이 속 깊은 회한을 알렸다.
왔다는 소식에, 그것도 마인이 아닌 게 밝혀졌다는 말에 이미 두 눈이 퉁퉁 불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그래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불안함에 떨리는 가슴을 어찌할 수 없었는데.
두 손이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사삭!
남몰래 베갯잇을 적시며 뜬눈으로 지새우던 밤이 몇 날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나보낸 후 홀로 흘린 눈물에 젖은 옷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루만지는 손길 한 번마다 응어리 가득 찼던 가슴이 말갛게 씻기어 갔다.
긴 세월 가슴에 자리 잡은 멍울은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눈물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울렁이던 가슴이 그제야 한을 토했다.
“크흐흑! 이리 몸 성하니 이 어미는 더 바랄 게 없다, 아들아!”
어느새 떠오른 태양이 초록으로 빛나는 대지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