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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53화 (53/161)

53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무윤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끝내자.’

이 자리에 더 있고 싶지가 않다. 그러자면 정리해야 한다.

몇 가지 확인만 하면 된다. 거의 확신이지만.

“내가 죽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

“나만 알겠어? 뇌양 사람은 다 알지.”

“그럼 내가 떠난 후에도 넌 사실을 알릴 수 있었잖아?”

억누르기 어려운 가슴 떨림이 백호민의 입가에 올라왔다. 이제야 한 맺힌 설움을 온전히 풀어낼 때다.

“큭큭!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겁나서 마공서 하나 넘긴 거 때문에?”

“……은진이 때문이냐?”

백호민은 가슴 저 밑에서 복받치는 한 서린 울분을 주저리주저리 씹어뱉었다.

“그래, 이 개새끼야! 난 어릴 때부터 은진이를 좋아했어. 창피하고 거절당할까 봐 말은 못 했지만, 네가 날 진짜 친구로 생각했다면 알아도 벌써 알았겠지. 내가 얼마나 티를 냈는데.”

“그랬던 거 같다.”

“근데 넌! 날 친구로 생각한 게 아니야. 그냥 데리고 다닐 적당한 놈으로 본 거지. 그러니까 내 앞에서 은진이 얘길 그렇게 해 댄 거지. 내 말 틀려?”

“……맞다.”

“그걸 알아본 놈은 오직 조운탁 그 새끼뿐이었어. 웃기지 않냐? 친구랍시고 붙어 다니던 너나 함가 그 새끼도 못 알아봤는데, 흑도라는 그놈만 날 알아주고 걱정해 주더라고.”

무윤은 원래의 신색을 회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한 건 다 풀었다. 이젠 한때나마 친구였던 자로서 말해 줘야 했다. 핑계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로.

“은진이 일은 미안했다. 사과하지.”

“큭큭! 참 오래도 걸린 사과네.”

“근데 친구로 안 여긴 건,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진 않아.”

백호민의 입이 바로 비틀어졌다.

“개새끼! 그럴 생각도 없던 놈이 이제 와 무슨!”

무윤은 씁쓰레한 미소가 절로 올라왔다.

“넌 변한 게 없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칠 년이란 세월이 더해졌는데도.”

“……뭔 개소리야?”

“운탁이도 말 안 해 준 모양이네?”

“……뭘?”

“남 탓하는 거. 어릴 때부터 난 그게 정말 듣기 싫었거든. 근데 넌 입만 벌리면 그 소리였어. 자기 얘긴 쏙 빼놓고 매번 그랬지. 지금처럼!”

“……?”

무윤은 등을 돌려 버렸다. 더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니까.

그래도 마지막 말은 해야 했다.

“이번엔 그러지 마라. 스스로 책임져. 그럼 잊어버릴 테니까.”

“뭔 개소리…….”

그때 신형을 날린 연사구의 한숨 섞인 질책이 터져 나왔다.

“야! 그렇다고 봐주긴 뭘 봐줘! 그게 비교나 될 일이냐? 다리몽둥이 정도는 분질러 버려야지!”

놀란 백호민의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 절로 부릅뜬 눈이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이, 이게……!”

숲을 헤치고 나오는 수많은 무인의 굳은 표정이 눈 가득 들어왔다. 특히 형산파 도복 자락을 휘날리는 이들은 더욱이.

장로 건천의 눈썹이 매섭게 휘날렸다. 성난 눈 그대로 백호민을 마주했다.

“백가장 소장주라 했는가?”

“……!”

무윤은 말없이 성큼성큼 자리를 떠나갔다.

아련해진 조장 당서화의 시선이 대주 정원을 향했다.

“대주님?”

“놔두자고. 혼자 있고 싶겠지.”

“……!”

회색 먹구름 풀린 하늘 위로 서서히 어둠이 덧칠해 갔다.

잠시 후, 하오문 안가.

연사구는 무윤을 끌고 바로 이곳으로 왔다.

골치 아플 땐 다른 일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곽호산의 겁에 질린 시선이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눈이 가려진 상태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사구의 날 선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사실을 알자면 지금은 그래야 할 때.

“형주 의원, 곽호산.”

“누, 누구요, 그대들은?”

“질문은 우리, 그쪽은 대답. 안 지키면 대화는 더 없다.”

“…….”

“형주에서 왜 도망쳤지?”

“……이, 일이 있어서.”

무윤의 손이 곽호산의 등으로 향했다. 신기심의공 분노의 기운을 몸 가득 흘려 냈다.

우우웅!

“……허억!”

곽호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모, 몸이!’

손만 갖다 댔는데 가슴이 벼락 치듯 들썩였다. 부들부들 떨리고 진저리 쳐지는 몸엔 폭풍 같은 격랑이 담겼다. 의지로 주체할 수 있는 요동이 아니다.

이미 암흑인 눈을 질끈 감게 만드는 충격.

무인 치료를 수도 없이 했던 그다. 손댄 것만으로 이런 충격이면 그 경지가 짐작이 안 되는 자.

첫 질문에 들었던 예감은 확신이 됐다.

‘형산이 아니다. ……약을 뿌린 자들!’

형산파라면 첫 질문이 그것일 리 없다.

한데 무윤의 눈도 점점 커다래졌다. 손으로 전해진 떨림 때문이다.

‘달라졌어!’

서서히 올리려던 기운이 갑자기 늘어났다. 완벽한 조절하에 있던 것인데. 몸이 바로 이유를 알려 줬다.

‘의념이 일치됐어.’

이전 무윤의 마음과 완벽한 동화. 기억이 다 살아나면서 벌어진 일이 확실했다.

심장이 전한 뜻과 육체가 일치되는 것이, 그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신기심의공. 그 일체를 방해하던 마지막 장애물이 아까 완전히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체기발경(體氣發勁) 이후 지난 이 년여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하지만 기쁨의 환희도 잠시, 어느새 올라온 씁쓸한 미소엔 복잡한 심사가 가득 담겼다.

‘이보다 좋을 수 없긴 한데.’

심신(心身)의 완벽한 일체는 중단전의 초절정 경지를 뜻한다.

하단전 무공으로 보면 화경과 거의 유사한 단계.

또한 하단전 내력과도 완벽한 조화와 융합이 이루어진다.

차이라면 단번에 경지가 상승하는 게 아니라, 몸에 체득되는 기간이 걸린다. 대략 몇 달에서 길면 일 년 정도.

하지만 아픈 기억이 전한 깨달음엔 그 대가가 따른다.

마음을 직시하지 않으면 그 진도가 느려지는 신기심의공이다.

‘피할 수는 없어.’

더 복잡해진 가족의 문제, 그걸 외면하고 잊어버리려 하면 안 된다. 어떻게든 그 안으로 들어가 풀어헤쳐야 한다.

문제의 해결은 중요한 게 아니다. 사람인 이상 번뇌는 풀고 생기기를 반복하는 것이니. 감추지 않고 마주하기만 하면 된다.

다만 지금의 무윤은 그 경험이 부족하다. 그로 인해 저들이 다칠까 그 걱정일 뿐.

한편 연사구는 이상한 느낌에 바로 전음을 보냈다.

-왜 그래?

감출 일이 아니다. 바로 심상에 들어야 갈무리 시간이 단축된다.

-빨리 끝내자. 급한 일이 생겼다.

-뭔데?

-깨달음이 온 거 같다.

-……큰 거냐?

-아주.

-……하여간 짜증 나는 놈이라니까!

-미안하다.

-갈무리부터 하자. 심문이야 천천히 해도 되지.

-그 정도 시간은 괜찮아. 금방 사라질 길이 아니야.

-……!

다시 심문이 시작됐다.

“경고는 이게 끝이다. 다음엔 손목부터 시작하지. 아! 발목부터 할까? 그래도 의원인데 그게 낫겠지?”

“……대답하리다.”

“왜 도망쳤지?”

“형산파에 이상한 약이 돌기에 알렸소. 한데 오히려 날 입막음할 거 같기에 그랬소.”

“무슨 약이지?”

“과다 복용하면 정신을 망가트리는 약이오. 처음엔 무공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나중엔 분명 그렇소.”

“얼마나 퍼졌지?”

“내가 아는 건 열 명쯤 되는데 전부 일대 제자였소. 복용한 인원은 당연히 그 이상일 것이고.”

그때 무윤이 나섰다.

“장로는 없었나?”

“있을 게요. 처음 시작은 장로였다고 했으니.”

“건천인가?”

순간 곽호산의 몸이 흠칫했다. 건천은 장문인 건수보다 더 실세로 불린다. 곧이곧대로 알릴 필요는 없다.

“그건 모르겠소만 그자도 동의한 것으로 아오.”

그 후로 이어진 질문에 형산파 상황은 대략 파악이 됐다.

이제 다른 걸 알아볼 때.

무윤은 돌리지 않고 바로 묻기로 했다.

“누가 그랬을까?”

“난 일개 의원인데 어찌 알겠소?”

“짐작 가는 데라도 꺼내 봐.”

“정말 모르오이다.”

“모른다? 근데 상단전을 여는 약 중에서도 하품인 걸 어떻게 알았을까? 먹어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

“발목부터 시작할까?”

“……그런 약을 만들 수 있는 곳을 하나 아오.”

“어디지?”

곽호산은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어차피 죽을 목숨. 다 알리고 궁금함이라도 풀고 싶었다.

“원한다면 말하겠소. 한데 거길 알면 그대들도 무사치 못할 게요. 거긴 그럴 만한 곳이오.”

무윤은 바로 짐작이 갔다. 정파 의원이 알 만한 곳은 빤하니까. 그럼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넌 공야의숙인 걸 어떻게 알지?”

곽호산의 몸이 벼락 친 듯 들썩였다. 반문이 절로 터져 나왔다.

“당신들은 누구요?”

“대답만!”

거길 아는 자들은 곧 그만한 상대란 뜻. 자신을 살려 둘 리가 없다. 지금 바랄 건 하나뿐이다.

“다 말하리다. 대신…… 편히 부탁하오.”

“말부터 듣지.”

허공을 향한 입에서 후회의 장탄식부터 흘렀다.

“허허! 내 의원을 안 그만두면 언젠가는 이리될 줄 알았는데. 왜 손을 놓지 못했는지 그 후회만 드는구려!”

“……!”

“이십여 년 전 난 거기 의원이었소. 당시 장주께선 오대세가의 부탁으로 비밀리에 마공 치료 약을 연구하셨지. 난 참여는 안 했지만, 옆에서 보고 들은 건 있소. 나중엔 그 연구 일부가 마공 수련을 돕는 용도로 변질된 것도 그때 알았고.”

“이 약이 그때도 있었나?”

“없었소. 당시 연구와 비슷한 현상이 있어서 알아봤을 뿐이라오.”

“당시 관련자들은 전부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허허! 그게 사라진 거겠소? 다 죽은 게지. 그 후론 더 비밀스럽게 연구를 했으니 소리 소문 없이 저런 약이 나왔을 테고.”

“근데 당신은 어떻게 살았지?”

“장주께서 아무 이유 없이 날 쫓아내셨소. 그 석 달 후에 피살되셨고. 휴! 일부러 그러신 게지.”

“당신을 아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곽호산은 또다시 의문이 치솟아 올랐다.

‘왜 나에 대해 묻지?’

약에 대해선 이미 다 알렸다. 한데 근 삼십 년이 다 돼 가는 일을 캐묻는 저의가 궁금했다.

“이해할 수 없구려. 그건 사적인 일인데 왜 궁금한 게요?”

“답변부터.”

“……장주와 의형제를 맺은 이들이 몇 있는데 내가 막내였소. 아마도 그래서일 거요. 다 구하긴 힘든 상황이었을 테니.”

순간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바로 떠오르는 게 있다.

‘비도!’

공야성이 주손학을 처음 만날 때 확인차 건넨 비도가 있다. 그 비도를 주손학에게 선물한 자가 의형제 중 막내라 했다.

그걸 안다면 이자의 말은 사실이다.

‘그럼 침주로 데리고 가야겠지.’

가족도 없고 이미 도망자가 된 상태라 그게 최선이다.

“의형제라. 혹시 그중에 비도를 선물한 사람이 있나?”

순간 곽호산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왔다. 바로 반문이 터져 나왔다.

“당신들 도대체 누구요? 어떻게 그걸 알지? 죽은 형제들밖에 모르는 일이거늘!”

“누구한테 줬지?”

“……주손학 형님이오.”

“……!”

얼마 후, 무윤의 설명이 끝나 갈 무렵.

곽호산은 멈추지 않는 울음을 끝없이 토해 냈다. 한순간 휘몰아 닥친 기쁨과 격정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윤은 조용히 거처를 옮겼다.

다음 날, 하오문 안가.

아직 떠나지 않은 초승달이 새벽안개에 흐릿하게 보일 즈음.

“저, 정말 저 안에 있단 말이죠?”

“예, 어머님. 분명 저 안에 있습니다.”

“언제쯤 나올까요?”

연사구는 했던 말을 또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 어머님, 몇 번째 드리는 말씀인지 모르겠는데, 오래 걸리는 게 더 좋다니까요. 그만큼 얻는 게 많은 거예요.”

“죄송해요.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는 거 같아서…….”

가주 천중서는 아내 류화선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았다.

“여보, 잘 알지 않소? 무인에게 저런 건 흔한 기회가 아니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립시다.”

“흑흑! 알죠. 아는데…….”

무윤이 몰아에 빠진 지도 벌써 두 시진.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천가장 가족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른 지는 한 시진.

부모는 물론 누나, 남동생, 그리고 작은엄마라는 분과 이복 여동생까지 다 몰려왔다.

그럴 만한 일이니까.

주변을 둘러보던 연사구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마냥 똑같은 말을 내뱉는 것도 이젠 질려 버렸다.

‘놈, 얘기나 해 주지. 뭐, 저 새끼 입으로 떠들기 좀 그런 것도 있으니까’

물론 거기에 슬쩍 껴 넣을 것도 있다. 놈을 골탕 먹일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잠시 생각하다 첫 화두를 골랐다.

“지금 저놈 이름은 담사운이에요. 왜 그런지 짐작하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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