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부대주 팽중호는 반 시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무윤과 만났던 그때.
-시간만 맞춰 오시면 됩니다.
-그때 맞춰서 올 수 있겠나?
-그 길로만 오시면 조절할 수 있을 겁니다.
-……자넬 믿어도 되겠지?
-전 저를 꺼내 보였습니다. 판단은 그쪽 몫입니다.
-……알았네.
팽중호는 무윤이 떠난 후 또 한 번 놀랐다. 무윤이 내외공을 합쳐 초절정이란 말에.
-정말 광동 하조문과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오면서 확인했어요, 침주 사람 수천 명이 본 게 맞아요.
당서하는 자신을 구할 때 보인 경지는 감췄다. 그건 무윤과 둘의 약속이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팽중호는 결정을 내렸다.
-알았다. 한데 대주께 알려야 할 텐데. 말씀 중이시니.
-지금은 그렇고, 좀 있다 상황 봐서 말씀드리죠.
-그러자.
당서하는 티 한 점 없는 환한 웃음을 흘렸다. 연인인 남자의 걱정을 덜어 주고 싶어서다.
-방주 말고 제 눈을 믿으시면 돼요.
-……뭘 봤는데?
-친구!
-무슨 소리지?
-오는 내내 방주 친구 놈이랑 열나게 떠들었거든요.
-근데?
-그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봐라. 그런 말 모르세요?
-……!
* * *
반 시진 후, 침주 저잣거리 외곽.
덥수룩한 수염에 다 해진 무복 차림의 남자가 무작정 검을 휘둘러 댔다. 나름 세게 구른 진각 탓에 흙먼지가 위로 치솟았다.
휘익! 파팟!
순간 백호민은 술이 확 깼다. 싸늘한 냉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적이다!’
생각과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렸다. 우선 간격을 벌리는 게 급선무.
타다닥!
이제 막 일류 상에 오른 신법은 다행히 공간을 벌려 줬다.
급히 빼 든 검과 함께 상대의 시선을 마주했다.
‘누구?’
갈지자로 비틀거리는 몸에 허공을 마구 갈라 대는 검이다.
쉬익! 휘익!
바람을 가른 검풍이 놈의 실력을 알렸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술 냄새!’
잘해 봤자 갓 일류 정도에 술 냄새가 확 풍겨 온다. 적지 않게 마신 자신인데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거기에 얼굴은 거무죽죽한 게 병색이 완연한 자.
또다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이번엔 자신 때문이다.
‘적당히 놀길 잘했지.’
오랜만에 생각난 놈 때문에 기분을 잡친 탓이다. 그런데 그 덕분에 봉변을 면하게 생겼다.
다시 그 얼굴이 눈가를 스쳤다.
‘이럴 땐 고맙네.’
이제 놈이 누군지 알아볼 차례다. 호흡도 달리고 동작도 끊어지는 자의 검은 신경 쓸 것도 없다. 실력을 감춘 놈이 아니다. 그랬으면 아까 자신을 죽였을 테니까.
발길을 흔들어 가볍게 피하고는 주변을 돌았다.
휘익! 타닥!
공방이라 할 것도 없었다. 핏빛 가득한 눈으로 무작정 달려들기만 할 뿐, 허우적거리는 검의 궤적은 애들 장난이나 마찬가지.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한칼에 끝날 놈이다.
‘아, 시팔! 별것도 아닌 새끼가!’
그 분노로 한 걸음을 디뎠다. 이젠 거칠 게 없다. 폭풍 같은 기세와 함께 대지를 박찼다.
파팟!
놀라 경직된 상대의 몸에 칼날을 돌려 그었다.
쉬이익! 찌익!
“크윽!”
절로 터진 신음과 함께 걸레 같은 무복에 핏물이 배어들었다.
기겁한 몸이 오므라들자 낮게 움직여 발을 차올렸다.
퍼억!
“컥!”
발로 후린 관자놀이에 이어 주먹이 등짝을 두들겨 댔다.
퍽! 퍼퍽! 팍!
“크윽! 커억!”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놈의 신형이 뒤돌아설 찰나, 백호민의 두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낯이 익어!’
수염 위로 보이는 얼굴 골격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의아한 눈이 조금씩 가늘어지던 어느 순간.
절로 터진 경악성이 입가를 헤쳤다.
“헉!”
백호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입은 저절로 질문을 던졌다. 방금 떠올렸던 그놈 얼굴이다.
“너…… 너는?”
거친 울혈을 토한 사내는 산 쪽으로 내달렸다.
타다닥!
“쿨럭!”
하지만 발이 땅에 박힌 듯 백호민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대신 입이 한껏 비틀어졌다. 쫙 찢어진 입가에 커다란 웃음이 절로 흘렀다.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큭큭큭! 하아! 저 꼴로 나타나다니! 크하하하!”
남몰래 칠 년을 노심초사했었다. 누구보다 무윤이라는 놈을 잘 아니까.
자신처럼 여리고 내성적이지만 한번 독심을 품으면 끝까지 가는 놈이다. 물론 그 대상이 동생이 되는 바람에 개차반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일을 당하고 살아남았다면, 원한을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새겼으리라 여겼다. 여린 놈일수록 그럴 땐 더한 법이니까.
한데 이런 추레한 꼴로 나타나다니. 그간 마음 졸인 자신이 너무 창피할 정도다.
‘저런 병신이 돼 버리다니.’
칠 년을 속 끓였던 걱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백호민은 곧바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면 그래야 했다. 지금은 굳게 결심을 다질 때니까.
‘병색이 완연했어. ……오늘은 질긴 인연을 끝낸다. 꼭!’
그 어느 때보다 힘찬 신형이 대지를 박찼다.
파팟!
벌어진 거리는 십여 장밖에 안 된다.
얼마 후, 산길 어귀.
백호민은 솔직한 심정을 담았다. 가볍지 않은 흥분이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이 꼴인데도 오고 싶었냐?”
한동안 첫말이 생각나지 않다가 겨우 떠오른 말이다.
상대 또한 거친 숨만 한참을 내뱉었다.
“하아! 하아!”
내력을 끌어 올린 백호민이지만 여리게 떨리는 입술은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가슴을 휘저은 격정은 가라앉히기 어려웠다.
“그 말이 맞나 보네. 죽을 때가 되면 집 생각이 난다더니. 그럼 집으로 가지, 왜 날 찾아왔어?”
그제야 상대의 격앙된 목소리가 흘렀다.
“쿨럭! 몰라서 하는 소리냐?”
“그래서 묻잖아.”
“큭큭큭! 이 몸으로 집을 가라고? 원수나 갚으면 몰라도.”
“원수? 내가?”
숨을 헉헉거리던 무윤의 입이 노성을 토했다. 하늘을 향해 악을 바락 썼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끓는 격정을 알렸다.
“그래, 이 개새끼야! 네놈이 한 짓이잖아! 왜 그랬냐? 왜 날 마인으로 만들었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도대체 왜!”
가볍지 않은 흥분이 백호민의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크크! 칠 년이면 긴 시간인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난 널 친구로 여겼다! 그래서 속도 다 털어놨고! 근데 왜 그랬는데, 왜!”
백호민의 입가엔 온 세상 다 가진 듯 흥겨움이 담겼다. 바로 휘저은 목의 우둑 소리가 시원함을 알렸다.
투둑!
쉽게 답을 줄 이유가 없다. 이 기쁨을 더 즐기려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내가 뭘 했는데?”
순간 무윤의 눈에 찰나의 섬광이 스쳐 갔다.
‘왔어!’
기다리던 이들이 왔으니 광대놀음을 제대로 할 때다. 신기심의공 분노의 기운도 가득 끌어올려 놈에게 전했다.
우우웅!
“이 새끼 모를 줄 아냐? 앵속! 그걸 태운 게 너잖아!”
“앵속? 그래, 태웠어.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 몰래 갖고 나왔지. 숙부가 그걸로 재밌게 노는 걸 봤거든. 얼마나 해 보고 싶던지 눈치 보다가 그날 간신히 빼냈지.”
“근데 아니라고 발뺌할 셈이냐? 마공서도 네놈이 그런 거잖아!”
“아, 그거! 그래, 내가 네놈 품에 넣었지. 근데 그게 뭐?”
악에 받쳐 이를 가는 목소리가 허공 가득 울렸다.
“으득, 개새끼! 다 시인해 놓고서 왜란 말이 나와?”
백호민도 가슴속에 있는 용광로가 확 하고 끓어넘쳤다. 이제부터 악을 써야 할 사람은 자신이다.
윽박지르듯 버럭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하! 이 새끼 진짜 웃긴 놈이네! 너 그때 쪽팔려서 일부러 기억 안 난다고 그런 거 아녔어?”
“……?”
순간 백호민의 눈이 점점 커져 갔다. 대답 없는 무윤의 표정이 알려 줬다.
“뭐야? 그럼 그때도 진짜 기억이 안 난 거고, 지금도 그렇다고?”
무윤의 눈이 처음으로 깊어졌다. 뭔지 모를 시릿한 소름 한 줄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무슨 소리지?”
한동안 멍했던 백호민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쫙 찢어진 입가에 커다란 웃음이 절로 흘렀다.
“큭큭큭! 그럴 수도 있겠어, 네놈이라면. 크크크!”
“……말해라.”
“큭큭! 그래, 해 줄게. 죽어 가는 놈한테 그걸 못 알려 줄까.”
“……?”
백호민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짙어졌다. 이 얘기를 듣고 놀랄 놈의 얼굴이 선했다.
“나도 처음이라 몰래 앵속을 태웠지. 물론 우리 셋 다 해롱해롱했고. 그러다 네놈이 뛰쳐나갔잖아. 은진이 만나겠다고.”
이전 무윤의 기억에 없는 일이다. 그 정신에 함은진을 만나러 가다니. 지금은 더 들을 때다.
“……얘기 더 해 봐.”
“잘 생각해 봐. 기억날 거야. 넌 그러다 들어와서는 술을 막 퍼 댔지. 물어보니 은진이 만나러 갔다가 네 동생하고 포옹하는 걸 봤다고 눈깔이 뒤집혔었는데.”
순간 무윤은 우뚝 굳어 버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흐릿함 속에 비슷한 영상이 있어서다.
백호민의 입이 주절대기 시작했다.
“아마 있는 술 전부 네가 다 먹었을걸. 그러다 앵속에, 술까지 취해서 넌 쓰러졌고. 그때 형산파 무인들이 온다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렸지. 난 호기심에 구했던 마공서가 겁나서 고민하다 너한테 슬쩍 넘긴 거고. 물론 그건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해. 근데 알잖아, 나 겁 많은 거.”
무윤은 그 말과 동시에 잊었던, 아니 이전 무윤이 잊고자 노력했던 그 기억들이 하나둘 눈가를 스쳐 갔다.
속 깊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사실이야.’
그날 전체의 기억은 흐릿했었다. 물론 떠올려 볼까 했지만 앵속 때문에 지워진 기억이라 여겨 가볍게 흘렸던 것인데.
과거의 무윤이 망각하길 원했던 걸 몰랐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그날의 아픈 기억을.
백호민의 말은 계속됐다.
“그래도 앵속 때문에 겁나서 널 흔들어 깨웠지. 빨리 자릴 뜨자고. 근데 넌 눈뜨자마자 동생하고 은진이 가만 안 둔다고 칼 들고 뛰쳐나갔잖아. 그러다 형산파 무인들 만나서 그 일이 터진 거고.”
“……!”
한동안 정적이 온 산야에 흘렀다.
멀찍이 있던 무림맹 멸마단과 형산파 또한 그랬다.
물론 각기 다른 이유 때문이지만.
얼마 후, 무윤은 묵직한 숨을 흘려 냈다.
‘더 골치 아파졌어.’
마인이 아닌 건 밝혔지만 가족과 얽힌 게 더 많아졌다. 지금 무윤에겐 훨씬 더 풀기 어려운 문제가.
백호민은 알아챘다. 무윤의 기억이 돌아왔음을. 그래도 확인차 물었다.
“기억…… 돌아왔냐?”
“……그래.”
“그럼 그때 기억 안 난다고 한 것도 사실이겠네?”
무윤은 이제야 알게 된 기억을 사실대로 털어놨다. 백호민에 대해 떠오른 다른 기억이 더해졌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땐 어렴풋이 기억이 있었다.”
“그럼?”
무윤은 한때 친구였던 자를 향한 시선에 솔직한 마음을 더했다.
“네 말대로 동생하고 은진이 얼굴 볼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마인이건 뭐건 도망치고 싶었겠지.”
“그래서 네 아버지한테도 일부러 횡설수설한 거고?”
“……그래.”
더불어 유추되는 것도 있다.
‘천가장주, 아니 아버지도 아셨을지 몰라.’
아버지 천중서의 표정이 지금은 또렷이 기억났다.
갈등하던 그 표정이. 그리고 알았다면 왜 그랬을지도.
말리면 못난 아들이 스스로 최악의 짓을 할까 봐 겁이 났으리라.
한편, 연이어 한숨을 흘리던 당서하는 구름 낀 저 먼 하늘로 시선을 보냈다.
‘착잡하겠어.’
그간의 우려를 씻어 내린 시원함, 곧바로 더해진 아련함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다.
옆에 있던 팽중호의 손이 그녀에 어깨에 올라왔다.
스륵!
팽중호는 아무 말 없이 그윽한 미소만 입가에 담았다.
지금은 어떤 말보다 그게 나을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