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기루 안 별실.
풍천방 소방주 조운탁은 백호민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근 이십여 일 만에 보는 친구.
“잘 다녀왔냐?”
“한두 번 다니는 데도 아닌데 무슨.”
“이번엔 평소보다 오래 걸렸잖아. 뭔 일이 있나 했지.”
“거래처 하나가 사라져서 새로 구하느라고 늦었다.”
“……사라져?”
“꽤 거래하던 의원인데 도망쳤거든.”
조운탁의 눈이 커다래졌다.
“응? 너희 돈 떼먹고 날랐어?”
“아니, 돈이야 선금으로 다 받았지. 그게 아니고 형산파하고 문제가 생겨서 도망갔어.”
“그럼 다행이고. 근데 의원이 형산파하고 그럴 게 뭐가 있지?”
“너 이거 어디 가서 떠들면 안 된다.”
“뭔데 그래?”
주변을 한참이나 두리번거린 백호민은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형주 주변에 마인들이 나왔다는 얘기 들었지?”
“듣긴 했지. 나왔다가도 금방 사라지는 바람에 한 놈도 못 잡았다며?”
“나야 형주 가면 의원들 만나는 게 일이잖아. 근데 의원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 있어.”
“뭔데?”
백호민의 눈이 번득였다. 나직이 목소리를 흘렸다.
“그중에 형산파 무인이 있다는 소문.”
화들짝 놀란 조운탁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뭐? 정말?”
“쉿! 죽고 싶어? 목소리 낮춰!”
“……!”
형산파의 영향력하에 있는 뇌양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 후, 백호민의 옆자리로 간 조운탁은 귀엣말을 건넸다.
“그게 정말이야?”
“근데 그 의원이 형산파 무인을 치료했단 소문이 있어.”
“……그럼 도망간 게?”
“형산파가 입막음할까 봐 그런 거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사실일까?”
“그거야 모르지.”
“근데 도망간 놈은 누군데?”
순간 백호민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조운탁과 형주에 몇 번 갔었다. 기루에 가느라고.
“아! 너도 봤었다. 곽호산이라고 알지? 형주에서 유명한 의원이라고 내가 그랬잖아.”
순간 조운탁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헉! 아까 그자!”
“……뭔 소리야?”
“여기 있어. 아까 들어오다가 지나가는 그놈을 봤다고 내가!”
“……확실해?”
“맞아. 내 눈썰미 알잖아. 그자가 확실해.”
조운탁의 용모 설명이 끝나자 백호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만약 잡거나 알리면?’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형산파라는 곳을 잘 알기에 결정은 바로 나왔다. 뇌양의 유일한 속가인 자신들이라 해도.
‘사실이면, 우리까지 입막음할지 모른다.’
백호민은 손사래를 쳤다.
“신경 끄자. 모른 척하는 게 상책이야.”
“……그렇겠지?”
“빤한 거 아니냐. 너도 쓸데없는 생각 따윈 집어치워. 그런 일에 엮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조운탁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맴돌았다. 옛 생각이 떠올라서다.
“크크! 왜 모르겠냐? 우리 눈으로 봤는데.”
백호민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야! 술맛 떨어지게 그 얘긴 왜 꺼내!”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말조심해. 그놈 아직도 살아 있을지 몰라.”
천가장 가주 천중서는 무윤이 갑자기 광기가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했다. 그리고 불태웠다고.
물론 그 말을 믿는 이는 침주에 아무도 없다.
거기에 천중서가 형산파에 은밀히 돈을 건넨 것도 몇 사람이 안다. 물론 이 둘 또한.
“에이, 벌써 칠 년째야. 올 놈이면 벌써 왔지. 그리고 또 오면 어때? 우린지 알 방법도 없는데.”
“의심은 할 거야. 하여간 말조심해!”
“그거야 당연하지.”
백호민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머리 아픈 얘기는 그만하고 애들이나 불러. 오랜만인데 제대로 놀아 보자고.”
조운탁의 눈이 번득였다.
“가지고 왔지?”
“당연하지.”
“크크, 그게 없으면 영 기분이 안 난단 말이지.”
백호민은 매번 하던 말을 또 입에 담았다.
“어디 가서 떠들지 마.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알지?”
“그럼! 내가 미쳤냐, 이 좋은 걸 못하게 되는데.”
한편, 옆방에서 듣고 있던 연사구는 입을 삐죽였다.
“더 알아볼 것도 없네. 지들 입으로 떠들어 주니.”
“고맙지.”
역시 말은 조심해야 한다.
반 시진 후, 백호민이 피운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울 즈음.
“저게 앵속이냐?”
“냄새가 매캐하지? 그냥 액을 태우면 저렇게 돼.”
“저 새끼들 표정 가관인데. 기녀들도 그렇고.”
“흥분 작용을 하니까.”
연사구는 짜증이 확 올라왔다. 이럴 시간도 아까운 놈들이다.
“그냥 잡아다 족치지. 금방 불 놈들인데.”
잠시 생각하던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멸마단 삼대가 시내로 올 시간이다.
‘잘하면 한 번에 끝낼 수 있겠어.’
뇌양에 오래 있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전음을 나누던 두 사람이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무윤은 멸마단으로 향했다.
연사구는 하오문 지부를 찾았다. 두 놈이 떠들어 댄 의원을 찾아야 한다.
형산파의 의문을 풀어 줄지도 모르는 자니까.
* * *
한 시진 후, 뇌양 외곽.
멸마단 삼대가 산을 거의 내려올 즈음.
형산파 일행이 다가왔다.
“이보시게 대주, 같이 가세나.”
“아! 장로님도 내려가십니까?”
“일이 끝났으니 가 봐야지. 자넨 어디로 가는가?”
“뇌양에서 하루 묵었다가 올라가야지요.”
“하면 복귀하는 겐가?”
“그래야 합니다. 호남을 더 살펴볼까 했는데 급히 오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장로 건천은 티 나게 아쉬운 빛을 흘렸다.
“허! 그런가. 이거 안 되겠구먼. 같이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나 할까 했는데.”
“일이 그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그럼 저녁이나 같이하세. 이리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순 없지.”
“그러시죠.”
장로 건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형주 주변을 살피면 어쩌나 했는데.’
하지만 저 멀리 석양을 바라보는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최근에야 알게 된 진저리 쳐지는 사실. 거기에 오늘 풍세백을 보고 알게 된 것까지.
‘확실히 광기의 씨앗이야, 허!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이리는 안 됐을 것을.’
이미 문파에서 그 약을 쓴 이는 수십이다. 그것도 장로인 자신을 비롯해 일대 제자들.
얼마 전부터 그 약을 먹은 이들이 하나둘 광기를 발했다. 원인을 알아채고 전한 의원, 장동백을 찾았을 땐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된 후였다.
통렬한 후회 하나가 장로 건천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허! 곽호산 의원, 그자 말을 믿었어야 했거늘.’
증상 초기에 문파 내 약당에서 원인을 못 찾자 제자 몇이 그를 찾아갔었다. 진찰 후 곽호산은 바로 안면이 있는 자신을 찾아왔었다.
“장로님, 약 복용을 중단시키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왜 그러는가? 선기(仙氣)가 가득 느껴지는 약이거늘.”
“선기는 겉을 둘러쌌을 뿐, 안에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저 증상은 쉽게 볼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장로 건천은 눈썹을 매섭게 휘날렸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다.
“허, 이 사람! 약당의 건준 사제가 이미 확인하고 전한 약일세. 사제가 그 정도도 모를 거 같나?”
곽호산은 말을 아꼈다.
“……한 번 더 확인이라도 하시지요.”
“허! 일없네. 우리 문파 일은 알아서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게.”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하던 곽호산은 그 순간 입을 닫았다.
“…….”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다음 날 곽호산은 바로 종적을 감춰 버렸다. 제자를 통해 전한 서신 하나만 남기고.
[치료 약은 없습니다. 복용을 중단하고 오랜 시일을 견디는 방법밖에는. 약을 먹은 자 전부 그래야 합니다. ……모두.]
안타까운 한숨이 연이었다.
‘분명 뭔가 알고 그런 거였어. 새겨들었어야 했거늘, 허!’
그렇다고 만시지탄(晩時之歎)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어쨌든 당장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우선 소문부터 잠재운다.’
치료와 사주한 자를 찾는 것도 급하지만 우선순위는 그것이다.
문파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지금 장문인과 건천에게 가장 중요한 것.
‘반대파를 누르는 게 더 급해.’
명분론을 강조하는 반대파는 처음부터 약을 반대했다. 그런 그들의 입김이 어느 때보다 강해진 지금이다.
어느 문파나 그렇듯 형산파 또한 뿌리 깊은 양대 파벌이 있다.
소위 말하는 명분파와 실리파.
세인들은 형산파를 단 한마디로 이렇게 평한다.
-정통성 없는 문파. 그래서 구대 문파에 껴선 안 될 곳.
그간 형산파의 과거가 그리 만들었다.
불교와 도교를 갈팡질팡 왔다 갔다 하고, 다양한 무공과 인물 들을 받아들여 세력과 무공을 모았기에, 오랜 전통의 문파와 명문 세가들은 형산파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형산파에선 그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방향이 갈린다.
장문인과 건천이 이끄는 실리파.
이들은 강함과 세력을 원한다. 그것으로 구대 문파와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한다.
장로 건허를 필두로 한 명분파.
이들은 도가의 무인으로 존경받기를 원한다. 무당과 화산처럼 지역에서 추앙받는 문파가 되는 것이 염원이다. 따라서 도가로서 그 가치를 실현하는 문파로 만들고자 한다.
그 싸움은 삼백 년째 그대로 이어져 왔다.
순간 건천의 꿈틀거리는 눈동자가 분노를 흘려 냈다.
‘건허, 이놈!’
명분파의 수장이자 자신과는 어릴 때부터 앙숙이었던 자.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절대 지고 싶지 않은 자.
그 오랜 세월의 경쟁이 그리 만들었다. 원수 아닌 원수로.
지금까지 그 싸움에서의 승자는 자신이었다.
더욱이 같은 실리파인 사제 건수를 장문인으로 올린 후엔 모든 경쟁은 끝났다고 여겼다.
한데 이번 일로 평생을 쌓아 온 게 송두리째 흔들릴지 모른다.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이번에도 그리될 것이야, 꼭!’
순간 그 결연한 각오에 어디서 새어 나왔는지 모를 미미한 열기가 눈가를 스쳤다.
조금만 더 커졌다면 섬뜩한 광망처럼 보였을 빛. 흘려 낸 그조차 몰랐다. 아직 발화하지 않은 귀화의 불씨가 살짝 혀를 날름거린 걸.
그때 마인 외에 이곳에 온 다른 목적이 생각났다.
시급한 문파 일을 제쳐 두고 직접 움직인 건, 증상이 유사한 풍세백을 확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두 가지 중 먼저 떠오른 것.
‘곽호산, 분명 남쪽으로 향한 거 같은데.’
누구보다 속사정을 잘 아는 그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약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어떻게든 입도 막아야지.’
그리고 두 번째 목적. 오랫동안 경쟁자였던 건허의 약점을 찾다 최근 의혹이 커진 게 있다.
‘만약 딸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워낙 잡다한 인물들이 섞인 형산파라 혼인을 막진 않는다. 하지만 도가의 정통성을 부르짖는 건허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실로 밝혀지면 건허 스스로 장로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떠들어 댄 게 다 말장난이란 소리니까.
그러자면 딸로 의심되는 여인이 태어난 뇌양 기루부터 조사에 들어가야 한다.
건천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신이야 바로 떠나야 하지만 맡길 이들을 데리고 왔다.
‘반드시 알아내고야 만다.’
어느새 과오를 뉘우치고 후회하던 자는 사라졌다. 귀화의 싹이 커진 눈에는 차디찬 한기만 가득 담겼을 뿐.
한편 부대주 팽중호의 전음이 당서하에게 향했다.
형산파가 같이하는 바람에 애매한 상황이 됐다.
-어찌하는 게 좋겠느냐? 이대로 방주가 얘기한 곳으로 가도 될지 모르겠구나.
-그러게요. 방주 계획대로면 형산파가 있어도 상관은 없는데.
팽중호는 다시 한번 에둘러 물었다. 이 모든 결정의 핵심을.
-방주를 믿어야겠지?
당서하는 단호히 답했다. 모든 정황과 확신에 더해진 믿음이 그리 만들었다.
-계획이 실패하면 바로 우리에게 조사받겠다고 했잖아요. 근데 전 그 말보다 방주가 침주에서 한 일을 더 믿어요. 그리고 진경을 읊던 그 모습도. 그런 사람이 마인일 수 있을까요?
-……!
반 시진 전, 두 사람은 불쑥 찾아온 무윤을 따로 만났다.
그리고 충격적인 얘기까지 들었다.
그 사실을 확인할 계획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