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50화 (50/161)

50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왜? 내려가자니 심사가 복잡해?”

한동안 무윤이 꿈쩍하지 않자, 연사구는 그대로 찔러 댔다.

무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편하겠냐?”

“여기서 해결된 건 없어.”

“……알지.”

“내려가자. 그래야 풀린다.”

그래도 한동안 무윤의 신형은 움직일 줄 몰랐다.

연사구의 눈이 아련해졌다. 칠 년이란 시간을 넘어 가족을 만나러 가는 발길.

‘쉽게 안 떨어지겠지.’

다른 때라면 바로 쏘아붙였지만 지금은 기다려 줄 때다.

얼마 후, 연사구는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답답할 텐데 속이나 풀어 줄까?’

친구랍시고 따라온 길인데 그냥 있자니 뭐했다. 게다가 아직 궁금한 것도 많고.

그래도 이번엔 처음부터 찔러 대면 안 된다. 오랫동안 곪은 상처다.

‘농부터 한 다음, 가벼운 것부터.’

연사구는 슬며시 운을 뗐다. 이럴 땐 속없어 보이는 웃음도 환히 내비쳐야 한다.

“야! 내가 생각해도 정말 대단해! 크크!”

“……뭐가?”

“나 이번에 정말 열심히 했거든. 우리 아버지가 알면 놀라 자빠지실 거야.”

“그러니까 뭐?”

“뇌양 조사한 거. 이젠 내가 너보다 많이 알걸?”

“웬일이래?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연사구는 속을 감추지 않았다.

“크크! 그냥 일이면 안 그랬지.”

“그럼?”

“뭐긴! 내가 널 조질 방법이 뭐가 있냐? 침주 일로도 안 되고 무공은 당연하고. 약점 잡을 땐 뇌양밖에 없지.”

무윤은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연사구다운 말이다.

“그래서? 뭐 좀 찾았어?”

농지거리는 끝났다. 그다음은 가벼운 질문.

“근데 네 부친께서는 왜 종이 사업만 하시지? 다른 덴 이것저것 다 하던데.”

뇌양엔 곡류 외에 세 개의 큰 사업이 있다.

상차(湘茶, 호남 특산 차), 약초, 그리고 종이.

또한 소도시에 있을 법한 정도의 유력 가문 세 개. 전부 상단과 무가가 적절히 섞였다. 그 세 군데가 사이좋게 사업 하나씩 맡고, 다른 일도 조금씩 한다.

단 무윤의 가문 천가장은 오직 종이만 만든다. 농지도 전부 소작을 줬다.

무윤은 아버지 천중서를 떠올리자 바로 가슴이 저며 왔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담히 말을 풀어냈다.

“종이를 누가 만든 줄 알아?”

연사구는 핏대를 올렸다.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채륜(蔡倫)이잖아! 고향이 여기 뇌양이고. 얼마나 조사했는데 그걸 모를까 봐?”

“여기 닥나무가 아주 많은 것도?”

“당연히 알지. 그래서 질 좋은 종이가 많이 나오잖아. 너희 천가장이 가장 크고.”

이제 물음에 답변할 때다.

“아버지는 채륜 그분을 존경하셔. 세상에 종이만큼 가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시니까. 그래서 다른 덴 눈도 안 돌리셨지.”

“아! 어쩐지. 천직이라 생각하시는 거네.”

“그래. 나한테도 매번 채륜 공 얘기를 하셨지. 그런 사람이 되라고.”

연사구는 감이 왔다. 무윤의 씁쓸한 표정이 말해 줬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때다.

“어릴 땐 그런 말이 거슬리지. 듣기 싫어서 딴소리했구나?”

“역시 눈치 하나는!”

“뭐라 그랬는데?”

“채륜 공은 환관인데 당시 동태후라고 최고 권력자하고 손잡고 잘나갔지.”

“그래? 그건 몰랐네. 근데?”

“막판엔 실각해서 사약 먹고 죽었어.”

연사구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무윤이 아버지와 매번 싸우고 대립했던 걸 잘 안다.

“미친놈! 자식 잘되라고 한 소린데 아버지 면전에서 사약 먹은 얘길 해?”

“무인이 되고 싶은데 듣기 싫은 소릴 계속하니까. 욱했을 때는 그만한 항변이 없더라고.”

“한심한 놈! 그럼 아버지하고 담판을 졌어야지.”

“했지.”

“근데?”

“내 동생 무진이도 조사했지?”

“그럼. 너 동생 하난 잘 뒀더라. 소문이 자자해. 일도 잘하고 무공도 여기선 꽤 알아줘. 하여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그런 잘난 동생을 둔 형이 어쨌겠냐?”

“잘난 동생? ……그래 봤자 너하고 비교할 정도는 아니던데?”

“그땐 아니지. 스승님 만나기 전이니까.”

“아! 그럼…… 시기와 질투?”

“그래. 근데 어릴 때부터 무공만큼은 내가 잘했어.”

연사구는 대략 말뜻을 알아챘다.

“가업은 동생에게 주고 무인이 되려고 했다?”

“그랬지.”

“그럼 아버지를 잘 설득했어야지.”

“요지부동이시더라. 절대 안 된다고.”

“……왜?”

무윤의 눈가에 잠시 아련한 빛이 스쳐 갔다.

“아버진 어릴 때부터 아셨어. 동생이 무공도 낫다는 걸.”

연사구의 눈이 커다래졌다.

“……동생이 감춘 거야? 너 때문에?”

“난 열일곱에 알았다. 그때부터 기루에 처박혀 살았지. 동생 얼굴 보기 정말 싫었거든.”

“……!”

연사구도 이번만큼은 바로 찔러 대지 못했다. 그래 봤자 잠깐이지만.

“못난 형이 할 짓으론 딱이네.”

“그만 한 게 없었지.”

“그렇게 삐뚤어져서 개차반 짓을 삼 년 한 거고?”

“응.”

“네 동생하고 사귀는 여자, 좋아한다고 난리 친 것도 일부러 그랬냐?”

바로 떠오르는 여인이 있다. 세 가문 중 하나인 함가 가주의 딸.

‘함은진.’

무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전 무윤의 감정 때문이다.

“그건 잘 모르겠네. 그땐 진짜 좋아한 줄 알았는데 떠나고 나서는 별로 생각도 안 났어. 지금도 그렇고.”

연사구는 바로 코웃음이 쳐졌다. 지금 무윤을 보면 답이 딱 나온다.

“진서연 같은 미인도 돌처럼 보는 놈이 무슨! 동생이 좋아하니까 홧김에 그런 거겠지.”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지금은 생각도 안 나.”

이제 가장 궁금한 것들이 남았다.

“넌 두 놈 짓이라 확신하는 거지?”

앵속을 태울 때 같이 있던 둘.

삼대 가문 중 하나인 백가장의 소장주 백호민.

유일한 흑도, 풍천방의 소방주 조운탁.

“틀림없어. 품 안에 마공서를 넣을 기회도 그 기루 안밖에 없었으니까.”

“두 놈 아버지들이 사주했을 수도 있잖아?”

“이제 알아봐야지. 근데 가능성은 거의 없어. 세 가주 분도 그렇고 풍천방주도 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야. 사업도 경쟁보다는 서로 돕고 그랬으니까.”

“그래? 그래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날 간 기루도 그렇고 모든 일정은 내가 결정했거든. 미리 계획했어도 절대 아귀가 맞을 상황이 아니야.”

연사구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말이 알려 주는 사실.

“뭐야! 그럼 두 놈도 우발적으로 그랬다는 거잖아?”

“거의 확실해. 그럼 궁금한 건 하나 남지. 마공서를 왜 갖고 있었는지.”

무윤과 연사구가 가장 많이 조사한 게 그 마공서다. 한데 그건 마공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잡했다. 조금만 맘먹으면 구할 수 있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정도.

“백가장도, 풍천방도 마공하고는 상관없는 거 같고.”

“그럴 거야.”

연사구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근데 두 놈은 왜 그런 거야?”

무윤은 확실하진 않아도 짐작 가는 게 있다.

“뇌양에서 형산파 속가는 백가장뿐이야. 근데 그때 형산파에서 동생을 적전제자(嫡傳弟子)로 들이고 싶어 했거든.”

“……널 마인으로 만들어서 없던 일로 만든다?”

“형산파는 이만한 소도시에 속가는 하나만 두지. 호민이 그놈이 그때 불안해했어. 동생이 나중에 지위가 올라가면 그걸 뺏길까 봐.”

그래도 연사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사하는 내내 가장 의아했던 게 있다.

“근데 난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뭐가?”

“마인으로 조작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이냐? 들통나면 죽을 수도 있어. 그뿐이냐. 가문도 타격이 엄청 크겠지. 백가장 속가 지위 떨어지는 정도에서 끝날 일이 아니잖아?”

“그러겠지.”

“근데 아무리 살펴봐도 두 놈은 그럴 깜냥이 안 돼. 백호민이란 놈은 소심해서 앵속 피우는 거 아버지한테 걸릴까 봐 벌벌 떠는 놈이고, 흑도 소방주란 놈도 겁쟁이라 살인 한 번 못 한 놈이던데.”

무윤은 그 답 또한 이미 내렸다.

“그런 놈들이지. 근데 그날 태운 앵속은 같이 마셨어. 나만 광분했을 리 없지.”

“……그런가?”

연사구는 떨떠름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직도 뭔가 찜찜해서다.

‘난 좀 이상한데.’

그렇다고 더 물을 것도 없다. 이제 알아보면 되는 일이고.

그래도 얘기 들은 소감은 뱉어 냈다.

“어쨌든 과거 네놈은 한 대, 아니 수십 대 패 주고 싶은 놈이었네.”

“변명은 못 하겠다.”

연사구는 결론도 내렸다.

“그런 놈이 용 됐네. 스승님 잘 만나 가지고.”

“운 빨이지.”

“……그게 다 운이다?”

무윤도 이건 둘러댈 수밖에 없다. 지금 실력은 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알잖아. 내외공을 합한 무공이 나랑 상생이 맞는 거. 천운이지.”

“에고! 그런 운이 왜 나한텐 안 오냐고.”

“너도 왔잖아.”

“……은월청요검?”

아직 연사구의 실력이 안 돼 덜 가르친 게 있다.

“맘에 안 들면 나머진 필요 없겠네.”

“이 새끼가! 그냥 장단 맞춘 걸 가지고 왜 시비야! 자꾸 치사하게 나올래?”

대답 대신 무윤의 시선은 다시 뇌양 시내를 향했다. 아까와는 달라진 표정이 확연했다.

‘내려가야지.’

이 세상에 온 지 일 년쯤 됐을 때 깨달았다.

삼 년이란 시간은 이전 무윤의 기억을 단지 기록만으로 두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일치시켜야 하는 신기심의공 때문만이 아니다.

‘그럴 수 없었지.’

현재와 미래는 곧 과거의 연장선.

순간순간 떠오른 기록의 편린(片鱗)은 하나둘 심상 어딘가에 자리 잡더니 시나브로 기억이 됐다.

한두 번씩 더 떠올리자 추억이 됐다.

더 횟수를 추가하자 기쁨과 슬픔을 불렀다.

생의 사연에 얽힌 그 상대를 떠올린 탓이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떠오르는 얼굴.

이제 그들을 만나야 할지 모른다.

주저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나로 인해 저들의 마음이 다칠까 그 걱정이지.

하지만 이젠 맞닥뜨릴 각오를 해야 한다.

무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연사구 덕분에 쏟아 내고 나니 한결 속이 시원해졌다.

친구를 향한 시선에 그윽함이 가득 담길 수밖에 없다. 일부러 말을 꺼내 준 걸 아니까.

‘고맙네.’

그 마음 담긴 결정을 전했다.

“이제 가자.”

“두 놈부터 찾아야겠지?”

“그래야지.”

“형님이 알아 놨을 거야. 물어보나 마나 기루에 갔겠지만.”

뇌양 하오문 지부엔 연사구의 사촌 형님이 있다.

“달라진 게 없네.”

“……!”

잠시 후, 내려가는 길.

연사구는 궁금한 게 또 생겼다.

“참! 채륜이란 분, 사약 먹고 죽은 걸 보니 사람은 별로였나 보네?”

무윤은 눈을 확 부라렸다. 그래야 할 일이다.

“미친놈! 내가 뭐라 그랬냐?”

“뭐?”

“그분 환관 출신이라고 했지?”

“……아! 황궁 세력 싸움에 밀렸다?”

“훌륭한 분이다. 그 복마전 안에서 어쩔 수 없었을 뿐이지.”

“……!”

이래서 말은 조심해야 한다.

뇌양 시내, 기루 천중루 앞.

막 들어가려던 풍천방 소방주 조운탁의 시선이 돌려졌다. 옆을 스쳐 지나간 인물에게로.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어디서 봤는데?’

한참을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금은 형주에 다녀온 백호민을 만나는 게 급하다.

물론 할 일은 빤하고.

‘크크! 간만에 화끈하게 놀아 볼까나.’

물론 놈이 없다고 안 논 게 아니다. 하지만 백가장의 소장주인 백호민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게 있다.

약초 사업을 하는 곳의 소장주이기에 그만이 가지고 오는 것.

그게 있어야 제대로 논다.

칠 년 전 처음 불장난했던 그때처럼.

사람만 한 명 줄어들었을 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