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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47화 (47/161)

4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소려가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휴! 나도 그래. 발길이 잘 안 떨어져.”

두 여인의 손길이 어린 조카의 머릿결을 연신 쓰다듬었다.

소려는 울다 지쳐 한참 전에 잠이 들었다.

“언니 떠나고 너한테 많이 기댔는데…….”

“그래도 네가 있어서 마음 놓인다. 올 때까지 잘 부탁해.”

적묘예는 눈가에 가득 아쉬움을 담았다.

“가면 오래 걸리겠지?”

“일이 년에 한 번은 어떻게든 해 볼게.”

“그래. 자주 들러. 아! 그때쯤엔 내가 뇌양(耒陽)에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연락 줄 테니까 오다가 꼭 들러.”

진서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거긴 왜? ……그럼 소려는?”

“걱정 마. 소려도 같이 갈 거니까. 물론 가게 되면.”

“그래? 다행이네. 근데 거긴 왜 가는데?”

이젠 네 의남매 모두 무윤의 사정을 안다.

이번에 뇌양에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적묘예 일도 있다.

삼 년 전 무윤이 약속한 침주 최고의 기루, 그걸 알아보는 것도.

물론 아직 진서연에게 알릴 때는 아니다.

적묘예는 새삼 결심을 곱씹었다. 눈가에 더할 수 없는 열기가 서렸다.

“못난 인간한테 보여 주려고. 내가 당당하게 살고 있는 걸. 그래야 엄마 인생도 의미가 있다는 걸 증명하니까.”

“……못난 인간?”

“지금 얘기하긴 그래. 나중에 알려 줄 수 있으면 말할게.”

“……?”

호남의 이 대 도시 형주(衡州).

그곳엔 중원의 이름난 명산 오악(五嶽) 중 하나인 남악형산(南嶽衡山)이 있다.

정파로는 서문세가에 이어 그다음인 형산파(衡山派) 또한.

못난 인간을 떠올린 적묘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생각이 날 때마다 매번 그럴 수밖에 없다.

‘위선자! 내가 꼭 그 탈을 벗겨 줄 거야.’

지금은 형산파의 장로인 건허, 또한 그녀의 생부(生父)이기도 한 자. 이제 만날 날이 조금씩 다가온다.

진서연은 더 물을 상황이 아님을 알았다. 문득 미안했던 일로 화제를 돌렸다. 염중탁과 둘 사이를 안다.

“참! 염 조장은 좀 괜찮아? 내가 사과라도 하는 게…….”

“괜찮아. 신룡한테 깨진 건데 쪽팔릴 것도 없지 뭐. 방주한테야 입이 삐죽 나왔지만.”

“응? 그건 왜?”

“방주가 잽싸게 안 나섰다고 떠날 때까지 지랄거렸거든.”

“……나서다니?”

적묘예의 입가에 남모를 미소가 사르르 흘렀다.

장원에만 있던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걸 안다. 무윤이 지금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뜻도 대략은.

‘유선이 언니 걸 전한 거 같은데, 알게 되면 이상한 의심만 하겠지.’

적묘예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적당히 둘러댔다.

“신경 쓰지 마. 창피하니까 되도 않는 소리 지껄인 거니까.”

진서연은 불안함에 물을 게 남았다.

“참! 방주는 오래 걸려? 소려가 불안해할까 걱정이네.”

“글쎄. 빠르면 며칠, 아니면 좀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래? 빨리 오면 좋겠는데.”

순간 적묘예는 생각지도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상수(湘繡, 호남 전통 자수)까지 가지고 간 걸 보면 좀 걸릴지도 몰라.”

“상수?”

실수한 걸 알아챈 적묘예는 대충 둘러댔다.

“며칠 고생해서 만들었지. 누굴 주려는 모양이야.”

“……!”

진서연은 지레짐작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누구에게 줄 것인지 감이 와서다.

‘심법을 전하면서 같이 줄 모양인데. 자수까지 할 정도면 진짜 좋아하는 거네.’

남자들이 자수를 하는 건 어디다 떠들 일이 아니다.

진서연은 이제 떠날 때임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소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아련한 눈길을 흘렸다.

‘자주 올게, 소려야. 건강해야 해.’

진서연의 시선이 다시 한번 정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슬픔과 위안을 가득 안겨다 준 곳.

질긴 끈 하나가 발목에 엮인 듯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문득 이 방에 같이 있다가 몸과 마음을 흔들고 간 이가 떠올랐다.

‘언니, 다시 올게요.’

스쳐 만났지만 이젠 놓을 수 없는 인연이 됐다.

세상 다 가진 듯 밝았던 유선의 마지막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자신의 입가에도 걸렸다.

‘잘 간직할게요. 그리고 꼭 전할 테니 염려 마세요.’

오늘의 이별은 다음의 반김을 위한 기약이다.

그녀의 발걸음은 서서히 떼어졌다.

평생 잊지 못할 인연을 마음에 담아 준 곳에서.

같은 시각, 침주 외곽의 산길.

연사구의 의아한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궁금한 건 바로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응? 그건 그냥 비단이네? 자수도 안 한 걸 왜 가지고 가?”

무윤은 씁쓸한 미소가 절로 흘렀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시간이 없어서?”

“아니. 뭘 넣어야 할지 몰라서.”

연사구는 직접 자수한 상수를 왜 가지고 가는지 안다.

만나진 않더라도 이걸 전해 살아 있음을 알리려는 걸.

아버지 천중서는 계속 도처에 사람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간절함에 더는 감출 수 없어서이리라.

한데 다른 비단엔 다 자수가 있는데 저것만 없다.

연사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무윤의 착잡한 표정이 빤히 보여도 바로 물었다. 아픈 건 꺼내고 봐야 한다는 게 자신 생각이니까.

“누구 건데 그래?”

“막내. ……이복 여동생.”

“왜 못 넣었는데?”

무윤은 핏대를 올렸다. 대놓고 긁어 대는 놈인 줄 알지만 욱하고 올라올 땐 어쩔 수 없다.

“이 새끼가 정말. 모른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뭐?”

“……좋아하는 게 뭔지 아는 게 없어. 단 하나도! 됐냐?”

“……아무리 배가 달라도 여동생인데 좀 심했다.”

“그래! 나 그렇게 한심하게 살았다. 그 말 듣고 싶어서 남의 염장을 질러 대!”

물러설 연사구가 아니다. 눈을 빤히 치켜뜨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럴 때 때리는 건 봐준다.

“거봐! 사람은 그렇게 반성하는 거야. 안 하는 게 문제지, 하면 된 거라고.”

“이 새끼가 정말! 누군 몰라서 못……!”

순간 번득인 무윤의 시선이 숲속을 향했다.

“……?”

“왜 그래?”

“싸우는 거 같은데.”

바로 신형을 돌린 연사구의 입꼬리가 쫙 올라갔다.

“가자!”

“……어째 신나 보인다?”

“크크! 혹시 아냐. 신룡에 버금가는 내 이름을 알리게 될지.”

“미친놈!”

“빨리 앞장이나 서.”

“……뇌양 가서 그러면 뒈진다.”

“이백 리 남았지.”

“……!”

산 고개 너머.

한기가 도는 음성이 나직이 열렸다.

“어느 길로 갔지?”

“헉헉! 이런 시팔! 몇 번을 물어! 형주 무림맹 지부로 갔다니까. 지름길 몰라? 알려 줘?”

“……마지막으로 묻지.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너 하나 농락하고 갈 정도는 충분해. 명색이 멸마단인데 그 꼴로 죽긴 그렇잖아?”

당서하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큭큭! 마인 새끼나 키우는 것들이 그래도 눈은 안 삐었네. 하긴 소주(韶州) 기방을 다 뒤져도 나만 한 인물 찾기 힘들 거야. 어디 자신 있으면 해 보든가.”

옆에 있던 풍대유가 나섰다.

“형님! 그냥 죽이고 가시죠. 입을 열 계집이 아닙니다.”

광동 소주의 월검문, 문주의 동생 풍진홍의 눈이 번득였다.

“아니. 저 정도면 조장급이다. 인질로는 제격이지.”

“알겠소. 그리합시다.”

두 사람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날아들었다.

파팟! 팟!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도격이 허공을 가를 즈음.

숲속에서 두 인영이 날아들었다.

쉬이익! 슈욱!

당서하 쪽으로 신형을 날리던 이가 탄식부터 쏟아 냈다.

힐끗 곁눈질로 봤음에도 둘의 범상치 않은 기세가 확연하다.

“휴! 큰일 날 뻔했네!”

“……?”

연사구의 연이은 한숨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멀리서 셋이 보일 때쯤 나눈 대화가 있다.

-어! 딱 보니 색마 놈들이네. 야! 두 놈 다 내가 맡을게. 넌 여자 쪽!

-바꾸기 없기다.

-물론!

-바꾸면?

-그럼 내가 네 동……?

순간 연사구는 뒤통수가 찌릿해졌다. 무윤의 말버릇이야 이젠 탁하면 척이다.

-……센 놈들이냐?

-동생이라고 했지?

-아니! ……동료! 우리 친구잖아.

무윤은 아쉬움을 달랬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연사구는 의아함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야! 이 거리에서 어떻게 알았어?

아직 남은 거리는 삼십여 장. 여기선 화경의 절대자도 상대의 기운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답은 바로 나왔다.

-아는 여자야. 멸마단 조장. 저번에 보니까 절정 끝자락쯤.

-……개새끼!

-가자.

연사구는 물어야 할 게 남았다.

-그런 자들이면 감춘 걸 꺼내야 하는데, 저 여자가 알아도 괜찮겠어?

-믿을 만한 여자다. 어차피 적운문하고 싸울 때 드러날 텐데 몇 달만 숨겨 달라고 하면 돼.

-……!

한편 월검문 두 형제는 앞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슈우욱!

섬전같이 달려든 자의 무수한 검영이 공간을 점하며 밀려들었다. 웅혼한 힘과 무서운 속도가 전율을 불렀다.

“저놈부터!”

“예!”

춤추듯 너울거리던 무윤의 검에 비틀린 회전이 더해졌다.

쉬익!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가문의 비류단혼검(飛柳斷魂劍).

오의야 다 파악하고 개량된 검법도 만들었지만 실전엔 써 보지 않았다. 지금이 딱 좋은 기회다.

둘을 향했던 검이 빠름과 함께 매서워졌다. 버들가지처럼 화려했던 검이 한순간 벼락처럼 요혈을 파고들었다.

비류단혼검의 정수다. 현란한 변식 속에 감춘 쾌검.

슈우욱!

“위험해!”

“헉!”

동시에 단발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감각적인 수비 검식이 바로 쌍을 이뤘다. 형제이기에 수십 년을 함께한 합격진이 바로 발동됐다.

슈욱! 샤악!

둘 사이 허리로 회전한 검이 동생 풍대유의 옆구리를 쓸어 갔다.

사사삭!

풍대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빠르다!’

일반적인 검격은 반드시 사전 동작이 있다. 그 힘을 근간으로 내력을 더해 쏟아 낸다. 한데 그런 동작 없이 온몸이 동시에 움직인 듯 보였다.

풍진유의 직감이 알렸다.

‘착시!’

워낙 빠른 몸놀림이 만든 흐림이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이 허리를 비틀었다. 가슴까지 당긴 검도 그대로 뻗어 냈다.

사락! 슈욱!

순간 불덩이가 스친 듯 격통이 허리를 휩쓸었다. 피륙을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휘익! 파앗!

“크윽!”

옆구리 무복이 피 걸레가 됐다.

허리를 잡고 뒹굴 수밖에 없는 찰나, 목울대를 스쳐 간 시릿함이 뇌리를 전율케 했다.

샤아악! 서걱!

“컥!”

거친 기침과 함께 토해져야 할 울혈이 멈췄다. 생각도 사라졌다.

몸뚱이를 읽은 머리가 먼저 땅을 굴렀다.

특!

위가 허전해진 몸도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

무윤의 신형이 퇴보를 밟았다. 달려들던 풍진홍과 멀찍이 간격을 벌렸다.

파팟!

이제 상황을 파악해야 할 때.

연사구의 입이 먼저 비틀어졌다.

“한 놈은 왜? 물어보려고?”

대답 대신 무윤의 시선은 당서하를 향했다. 멍해진 그녀부터 다독여야 한다.

“괜찮습니까?”

이미 뇌리에 각인된 얼굴이지만 당서하의 입은 저절로 물었다.

“……방주?”

“오랜만입니다.”

“……!”

한편, 풍진홍의 얼어붙은 입은 부르르 떨리기만 했다. 무자비한 전율이 뇌리를 휘감았다.

‘두 수!’

초절정에 막 들어선 동생. 거기에 초절정 중반인 자신의 합격까지. 한데 그 틈을 익숙한 길 가듯 헤쳐 낸 검로를 보지도 못했다.

문득 가주인 형님의 지시가 떠올랐다. 이젠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를 그 엄중했던 말이.

-진홍아.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 개 대가 쫓아갔으니 구해 올 겁니다. 저희도 곧 출발하겠습니다.

-네가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어떤?

-만약 구출하기 어려우면……. 세백이를 죽여야 한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카를 어찌 저보고?

-그래야 한다.

-형님! 세백이가 여인을 겁간하긴 했어도 죽이진 않았습니다. 무림맹 놈들이 끌고 갔다 해도 협상만 잘하면…….

-끌고 간 건 멸마단이다.

-예? 왜 그자들이? ……설마?

-휴! 내 실수다. 세백이 놈에게 그리 과용하지 말라 했거늘.

-무슨 말씀이신지?

-더는 묻지 마라. 단 이것만 명심해라. 사실이 알려지면 우린 멸문당할 수도 있다.

-……무림맹이 그럴 일이란 말입니까?

-거긴 알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실수를 용서하지 않을 곳이 있다.

-……혹시?

-삼 개 대는 멸마단을 쫓지 못해. 너희가 구해야 한다. ……아니면 죽여라. 그래야 가문이 산다.

-……!

무인의 직감이 알렸다.

문주 말대로 멸마단이면 삼대가 추격하기 어렵다. 자신과 동생이 가지 않는 한 결론은 빤해 보였다.

한데 동생을 죽인 놈이 몇 마디 말을 나누자마자 바로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 알아볼 게 없다는 표정.

눈앞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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