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두 남자의 놀란 입이 동시에 열렸다.
“이자가 하오문도라고?”
“이 새끼가 신룡이라고?”
진서연의 입가에 또 한숨이 흘렀다.
“언제까지 서로 욕할 거예요? 이제 사과할 때 아닌가요?”
연사구가 먼저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아니 그쪽 같으면 이해됩니까? 정파의 신성이니 뭐니 하는 놈이 저렇게 앞뒤 꽉 막힌 놈일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강호 호사가들이 즐겨 떠드는 대상이 있다.
그중 정파의 신룡 열 명. 사파의 흑룡 여덟.
젊은 무인 중 가장 뛰어난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정파의 열 명 중 누구나 최상위권에 꼽길 주저하지 않는 자.
진서연이 속한 멸마단 오대의 부대주이기도 한 자. 그가 남궁사현이다.
그의 아버지 남궁천우 또한 이십여 년 전 멸마단에서 마인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를 이은 아들도 젊은 나이에 눈부신 전과를 올려, 강호 누구나 인정하는 신성으로 통한다.
씩씩거리는 연사구와 달리, 남궁사현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오문에 이런 자가 있다니!’
감춘 걸 다 꺼내지 않는 한, 장담할 수 없는 승부였다. 자신이 감춘 만큼 상대 또한 그리 보였다.
신룡이라 불리는 이 중 비등한 서넛은 있어도 두려운 자는 없다. 그런 자신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자가 하오문도라니.
가볍지 않은 흥분이 입가를 떨게 만들었다. 지금만큼은 순수한 무인의 투기다.
“연사구라는 이름. 기억하지.”
“왜? 나중에 또 하자고?”
“너는 아닌가?”
연사구의 입이 쫙 찢어졌다.
“아니! 당연히 좋지. 언제 할까?”
“난 서연이와 얘기 끝나면 바로 가야 한다.”
겁나서 뺄 놈은 아니다. 또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이라 연사구는 일어났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언제 기회가 있겠지.”
“그땐 제대로 해보자고.”
“그러지.”
방을 나온 연사구는 히죽 웃음을 흘렸다.
‘크크! 그동안 터진 보람이 있네. 저런 놈과 막상막하라니.’
무윤에게 얻어터지며 쌓였던 짜증이 단번에 훅 날아가 버렸다.
강호 신진 중 최고수라 불리는 이. 그런 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얼마 전 초절정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겨뤄 본 후의 희열은 또 달랐다.
그간의 결실을 확인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순간 떠오른 자 때문에 환했던 웃음이 갑자기 비릿해졌다.
‘흐흐! 서문진성 이 새끼! 좀만 더 기다려라. 가서 제대로 조져 줄 테니까.’
자신을 침주로 오게 만든 원흉, 서문가주 둘째 아들놈.
이젠 볼 날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그 생각에 발걸음이 날아갈 듯했다.
사사삭!
한편, 둘만 남자 남궁사현의 질문이 시작됐다. 상황을 몰라 두리뭉실하게 물었다.
“꼬인 일이 있다고 들었다만.”
“……절강에서 오신 거예요?”
“위경이가 여기 갔다는 것만 알려 줬다. 어떻게, 해결은?”
아련한 빛이 잠시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자세히 말할 이유도, 아픈 상처를 또 건드리고 싶지도 않다.
“잘 해결됐어요. 그보다 여긴 왜?”
“난 어딜 가 봐야 한다.”
“어디?”
이미 그녀에겐 어느 정도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버님 일이다.”
“예? 어르신이야 돌아가신 지 한참 되셨잖아요?”
“흑막이 있는 거 같다. 돌아가신 것도, 그 전의 일도.”
“……그게 무슨?”
“이십여 년 전 아버님은 소가주 경쟁에서 가장 유력하셨는데 어떤 일 때문에 밀려나셨어.”
“예? ……어떤?”
남궁사현은 에둘러 답했다. 모든 걸 알릴 수는 없다.
“그 당시 오대세가가 어떤 일을 함께 벌였어. 원래 아버님은 그 일과 상관도 없었고 반대했었는데 강제로 떠맡게 됐지. 그러다 어떤 사고가 생겨서 그 책임을 지시게 된 거야.”
“그럼 멸마단에 오신 게?”
“할아버님이 그러신 거야. 그 후 멸마단 부단주로 계실 때 혈교의 마인과 싸우다 불길에 휩싸여 돌아가셨다고 했지.”
“그렇게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알았지. 근데 최근에 뭘 조사한 게 있는데, 알아보려면 직접 가 봐야 해.”
“어디로?”
“그건 말하기 곤란하구나.”
“……?”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세상 그 누구에게라도.
마인의 거점으로 의심되는 곳, 그곳에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 아니 이젠 거의 확신이 선다.
거기다 붙잡혀 있는 게 아니란 것까지.
그래서 반드시 확인하러 가야만 한다.
이제 여기에 온 이유를 꺼낼 차례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음에도 남궁사현의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그래도 말해야지.’
고백이 처음이 아닌 탓이다. 이미 수차례 거절의 답을 받았고 그 이유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마지막일지 모르는 지금,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그녀를 향한 눈에 심중의 불안함을 떨구어 냈다. 지금은 올곧이 그녀를 향한 마음만 담아도 부족할 때다.
“나와…… 함께할 수는 없겠니?”
진서연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단호히 고개 저었다. 그게 자신에게 진정을 보인 이에게 할 최선이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있었던 일로 제 길은 더 명확해졌어요. 더는 그런 말씀 안 해 주셨으면 해요.”
남궁사현은 결국 마지막 말을 꺼내 들었다. 이 갈등 때문에 여길 온 것이다.
“난 그곳에 가면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예? 그게 무슨?”
“만약 네가 생각을 바꿔 준다면 난 안 갈 생각이다. 그래서 온 거야.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겠니?”
진서연의 눈이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기에 저럴까?’
언제나 진중한 데다 말도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는 이다. 그런 이가 저럴 정도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리라. 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다.
안타까운 눈빛이 한동안 그녀의 눈가를 스쳤다.
이럴 땐 조금이라도 여지를 남기면 안 된다. 이런 고백을 해 온 남자는 그만이 아니다. 상대를 아프게 할까 봐 말을 돌리면 안 된다. 나중에 더 큰 상처만 남길 뿐이다.
얼마 후 진서연은 깊은 한숨과 함께 답을 냈다.
“제 생각은 변하지 않아요. 누구보다 부대주님이 잘 아실 거예요.”
“……!”
* * *
청호방 회의실.
“그래서 나보고 패 달라고?”
“야! 그럼 방주란 새끼가 선임 조장이 이 꼴이 났는데 가만 있을 거야?”
“연사구가 나섰다며?”
“둘은 무승부야!”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연사구 실력이야 누구보다 잘 아는데.
‘젊은 놈이라고 했는데 무승부?’
그때 막 들어오던 이가 목청을 높였다.
“그럴 만한 놈이야.”
“누군데?”
“남궁사현! 들어 봤지? 신룡 중에도 최고라지 아마. 크크!”
순간 무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남궁 놈이 왜 여기에?’
오대세가 중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곳. 더 중요한 건 천 년 전에도, 지금도 그 위상이 변함없다는 거다.
그런 가문에서도 신성이라 불리는 자가 진서연을 찾아왔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가 봐야겠는데.’
내일 가문 천가장이 있는 뇌양으로 가기로 했다.
소식이 없는 멸마단 삼대를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내린 결정.
혹시 문제가 될 만한 건 그 전에 정리해야 한다.
“그놈 어디 있어?”
“왜?”
“내일 떠나는데 신경 쓰이잖아. 왜 왔는지 알아봐야지.”
연사구는 야릇한 미소를 그대로 흘렸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왜?”
“그 새끼 눈에 답이 딱 있더라고.”
“뭔 소리야?”
“뭐긴. 꽃을 찾아온 나비란 소리지.”
“……정말 그거뿐이야?”
연사구는 갑자기 장난기가 돌았다.
“정 못 믿겠으면 가 보든가. 물론 네 눈깔론 안 보이겠지만. 크크!”
누워 있던 염중탁도 거들었다.
“그래. 넌 그냥 가서 패 주기만 해.”
무윤의 눈에 차디찬 한기가 맴돌았다.
“어째 기분이 영 그렇다.”
연사구가 쐐기를 박았다.
“기분 안 좋을 땐 패는 게 최고지.”
“……너?”
“이 새끼가 진짜! 나 내일 안 가 버린다!”
“……!”
이번엔 꼬랑지를 내려야 한다. 도움받을 게 태산이니까.
* * *
잠시 후, 청호방 건너편 장원.
“벌써 갔습니까?”
“예. 급한 일이 있다고 했어요. 왜 그러시는지?”
“아니 그냥…….”
진서연은 가볍게 고개 숙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염 조장께는 제가 사과할게요.”
“아닙니다. 자기 눈이 삔 걸 탓해야죠. 잊어버리세요.”
진서연은 마침 무윤을 만나려고 했었다. 내일 어딜 간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자신도 떠나야 한다.
그 전에 알려야 할 게 있다.
“저 근데 심법은 다 살펴봤는데…….”
“그래요?”
“이거 보면 볼수록 정말 놀라워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왜 그러십니까?”
“처음엔 황당했어요. 보셨겠지만 운기할 혈도 경로를 정하지 않았잖아요.”
“스스로 몸에 맞는 걸 찾아가게 했죠.”
“그래요. 너무 위험한 발상이라 바로 그만둘까 했는데, 언니가 거기까지 간 게 이해가 안 가서 해 봤어요. 근데 몸이 알더라고요. 제 몸에 맞는 길을.”
“유선이도 그렇게 길을 찾았습니다.”
“직접 해 보고 알았어요. 춤에 맞춰 운용하다 보면 자연스레 내력이 쌓인다는 걸.”
“좌공과 동공이 합쳐진 심법이라 그럴 겁니다.”
“맞아요. 근데 더 놀란 건 그다음이에요.”
“어떤?”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뺨이 가볍지 않은 흥분을 알렸다.
“제 몸에 맞는 길을 찾았기에 운용하다 보니까 하나씩 흐름이 더 있어요. 그걸 찾아가면 더 높은 경지로 가게 만든 거죠.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겠는데 제 위로 몇 단계는 더 있어 보여요. 이 정도면 절세의 심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 후로도 그녀의 흥분은 연이어 설명을 쏟아 냈다.
시간이 갈수록 무윤의 잔잔한 웃음이 짙어져 갔다. 이걸 봤으면 환하게 웃을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유선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진서연 또한 일부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바라타나티암의 원색적인 동작, 그 중요한 의미를 깨달았다.
‘여인의 몸, 특히 하음혈(下陰穴, 자궁 부근) 주변을 보호하기 위한 동작인데. 이걸 어떻게 말하지?’
무윤의 실력을 모르는 그녀다. 침주의 소문을 전혀 접하지 못했으니.
‘분명 아끼는 여인에게 전할 텐데.’
자신이 안 걸 알려 줘야 하는데 직접 거론하자니 창피했다. 그 탓에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 보니 길어질 수밖에 없다.
무윤의 은은한 미소도 점점 색을 더했다. 자신이 알아낸 걸 어떻게든 전하려는 그녀의 진심이 전해진다.
‘소려 이모 자격이 있어.’
게다가 이 정도면 혼자서도 충분히 풀어 갈 정도다. 중단전 무공을 제외하고는.
진서연은 마음이 급했다.
“또 있어요. 위중혈(委中穴) 주변 혈도로 내기를 흘리면…….”
“……!”
그 후로도 한동안 열변은 계속됐다.
* * *
같은 시각, 침주 외곽의 숲속.
“당 조장!”
“예. 대주.”
“아무래도 하후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겠어. 자네가 가게.”
당서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놈들 숫자가 만만치 않은데 저까지 빠지면…….”
대주 정원은 예의 은은한 미소를 흘렸다.
“싸울 게 아니잖나. 저들뿐이면 우릴 쫓지 못하네. 지원군이 문제지. 하후가에 후방을 차단해 달라고 하는 게 지금은 최선일세.”
당서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다들 조심하세요.”
부대주 팽중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향했다. 부하이자 자신의 연인인 그녀를 안심시켜야 한다. 그리고 당부 또한.
“한 놈 잡아가는데 뭐가 걱정인가. 그보다 놈들이 그쪽 길을 차단했을 수 있어. 여차하면 다시 돌아오고.”
당서하는 평소대로 혀를 날름 내밀고는 실룩거렸다.
“부대주님. 아직도 제가 애로 보이세요?”
이럴 땐 평소 짓던 미소가 답이다.
“그래. 사고뭉치 큰애지. 그래도 믿는다.”
“……!”
당서하의 신형이 침주를 향했다.
파팟!